Site Overlay

4개의 키워드로 본 이태원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6. 8

오늘날 우리사회는 전문 인력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국제결혼, 유학 등과 더불어 국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이 190만 명을 상회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에 따른 이주민, 다문화 선교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들어온(come) 선교’ 시대를 맞이했다고 하는 한국에서 실제로 이태원 같은 일정한 공간 내의 다(多)종족, 다(多)문화 배경을 가진 이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라고 본다.

이런 이유에서 과거 ‘외래문화’라는 이질적인 공간에서 현재 ‘다문화’라는 세계화의 공간으로 변화된 이태원을 다음의 4가지 key word를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하고 이를 어떻게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1) 외(外): 한국과 외국 이방인들의 공간
이태원(利泰院)은 큰 어려움 없이 한성(漢城)에서 한강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이태원을 오가는 길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운수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각종 물품이 교역되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태원 지역은 고려 말 귀화한 거란족과 여진족이 정착하여 살아왔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에 항복하고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하여 이타인(異他人)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왜군들과의 혼혈들이 거주한 곳이라 하여 다를 ‘이(異)’와 아이 밸 ‘태(胎)’를 사용한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이는 이태원이 이미 고려 말부터 전통적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해 온 점에서 여러 문화의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담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전쟁 전후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이른바 ‘해방촌’을 건설하고, 남산 남측기슭의 기존 공동묘지 지대와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복숭아 밭 언덕이었던 군 주둔지 북쪽에는 새로 정주하는 인구가 급증해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태원은 외국의 이방인들뿐 아니라 한국내의 이방인들이 정착하면서 토착인이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방인들의 공간을 이루어 갔다.

(2) 군(軍): 군 주둔지의 지배적 공간(원나라, 일본, 미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통의 요지였던 이태원은 한양의 관문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외국군대의 주둔지로서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고려시대 원(元) 간섭기에는 용산에 몽고군의 병참기지가 있었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군의 보급기지가 설치되었다.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용산에 군사기지를 설치한 후 유흥과 윤락 업소들이 용산 일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미군이 용산기지에 주둔하자 이전에 일본 군 기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던 한국 여성들이 다시 모여들었으며, 이는 이태원이 ‘기지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오랫동안 가지게 만들었다.

또한 미군과 연결되어 있는 중개상을 통해 많은 PX(군부대 내 상점)물건이 이태원을 통해 흘러나왔고 이를 구입하기 위한 국내·외국인이 쇼핑을 위해 몰려들게 만들었다. 이처럼 군부대의 주둔은 지금의 이태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이태원이 미군기지와 외국인 집단거주지를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게 되는 문화의 유입지가 되었고 오늘날 다양한 외국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셈이다.

(3) 약(弱):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이태(異胎)원, 해방촌, 기지촌, 게이바 등)
이태원은 역사적으로 군 주둔지라는 강한 영향력 아래에의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침략 시 사찰의 여승들을 겁탈하고 떠난 후,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자 조정에서 여승들이 출산한 아이와 각 지역에서 왜군들에게 욕을 당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 이곳에 보육원을 짓고 기르게 하였다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해방 이후 월남민들이 거처가 마땅치 않은 상황 속에서 무허가 주거 집합소인 ‘해방촌’을 형성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주둔한 미군의 영향력이 커지자 그들의 유흥과 편의를 제공하는 기지촌과 상권이 형성되었고 윤락을 제공하는 양공주, 미국식 클럽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불황으로 상권의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대신 다양한 외국인 소수자 집단들이 그 자리를 채워갔고,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장벽이 낮은 이태원에 게이 바(bar)들이 들어섰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유입된 피부가 짙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의 외국인들과는 다른 ‘낮은’ 대우를 받는 새로운 사회적 약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태원 일대는 한국 안에 있으면서도 외국인이 자신을 일방적인 약자로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로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특별한 공간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4) 교(敎): 이태원 지역의 랜드마크(Landmark) 이슬람거리
이처럼 다양성이 인정되는 이태원에 일어난 특이한 점은 특정 종교를 특화하여 형성된 ‘이슬람 거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태원 소방서 ~ 보광초등학교 ~ 이슬람 중앙성원에 이르는 길목에 이슬람관련 상가 70여 곳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중심’의 외국 문화가 강하게 자리하던 이태원에 1976년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면서 진정한 ‘다문화’의 유입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변화는 전국에서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사원을 방문함과 동시에 이슬람 문화권의 관광객들이 들러 가는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태원의 이슬람 상권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무슬림 관광객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을 찾은 무슬림 관광객 수는 2014년 75만 명으로, 전체 방문객의 5.3%를 차지했으며, 최근 5년간 평균 19%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이슬람교는 이태원 지역의 랜드마크(Landmark)로서 ‘이슬람거리’를 형성할 만큼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태원지역은 마을신앙으로서 부군당이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곳이다. 현재 이태원 부군당은 의례가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되고 있지만, 부군당의 영향력은 이태원 지역 점집 무속인을 통해서 명맥이 계속 유지되고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광동 일부를 포함한 이태원지역에는 50여 곳의 점집이 밀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그림 이태원지도 참고).

이태원에서 만난 사람들 / 서울중앙성원(모스크) / 부군당 / 베다문화센터(힌두사원) / 이태원 상가거리

이태원은 역사적으로 서울 안에서도 특별히 외국인이 많이 거주해온 구역이다. ‘군(軍)’ 주둔지로써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태원을 이방인들의 공간, 사회적 약자들의 공간, 무슬림들의 구역으로 다양하게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왔다.

서울에서 ‘다문화’ 하면 떠오르는 지역을 꼽으라면 자연스레 ‘이태원’을 떠올릴 만큼 이태원은 다문화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소위 본격적인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태원과 같은 지역은,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소통하고 공존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복음의 접촉점 마련을 고민할 수 있는 중요한 장(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선교훈련의 실습장으로 ‘양화진’으로 향했다면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이태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이태원의 종교적 특징

이태원에서 만난 사람들
지난 2015년 업마(UPMA) 이태 원 리서치팀은 1년 여 동안 이태 원지역(이태원1,2동, 보광동, 한 남동 일부)을 리서치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1. 게이힐에서 만난 그녀(?)
이태원의 밤거리는 낮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밤이 되면 이슬람 사원 뒷골목은 성소수자들의 유흥업소들의 세계가 된다. 길을 지나다 눈을 마주치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며 말을 건넨다. “오빠! 여기 왜 왔어? 뭐 궁금한 거 있어?” “아, 아니요. 그냥 여기 둘러보려고요.” “오빠!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내가 이 동네 네이버야~. 딱 내가 서 있는 곳 까지가 호모들이 있고 넘어가면 사창가야. 알지? 괜히 민폐 끼치지 말고 여기 들어와서 놀자.”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건들건들 거리면서 불쾌한 눈빛과 제스처로 말한다.
“여기올 깡도 없으면서, 쯧쯧.”

2. 힌두 문화센터에서 만난 여인
한국에 영어교사로 왔다던 한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을 묻자 의외로 음식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은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는 너무 힘든 나라예요. 한국에 와서 교회에도 가봤지만 예배 끝나고 밥 먹을 때 항상 고기를 먹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절에도 가봤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채식을 하는 힌두인들은 한국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음식문화라고 한다. 종교적 신념으로 이들은 채식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곳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힌두권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진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이 아주머니는 조금은 더 복음에 한발자국 가까이 서있게 되지 않았을까.

3. 이슬람 여행사에서 만난 무슬림
이태원은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이슬람 관련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한 여행사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깨에 맨 카메라를 보더니 한 직원이 대뜸 하지(hajj,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것)를 가자고 제안을 한다.

“포토그래퍼 신가요? 우리가 하지(hajj)를 갈 때 포토그래퍼가 필요한데 꼭 같이 가요!”

무슬림들은 메카로 순례를 가는데 사진 찍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꼭 같이 가자고 한다. 약 4주 동안 가는데 한국에서 메카를 갈수 있는 사람은 한번에 20명 정도로 제한이 되어있다며 가격은 540만원 이란다. 너무 비싸다고 하니 이슬람 성원에서 지원을 해줘서 다녀온 한국인도 있다며 계속 설득한다. “무슬림이 아니어도 보내주나요?” 물으니 꼭 무슬림이 되어야만 한단다. 메카 방문이라는 매력있는 상품으로 무슬림으로 개종을 요구하는 이들, 정신을 바짝 차리자.

4. ○○사(점집)에서 만난 무속인
이태원의 보광로를 따라 장문로에 이르는 길까지 깃발이 세워진 점집이 밀집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의 한 무속인에게서 이곳에 점집이 많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식민시절 일본이 한국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이곳이 무덤이 많은 곳이예요. 그래서 슬픈 영혼이 여기 근처에 많이 떠도는 곳이지. 그리고 유흥가의 젊은 여자들이 많이 죽었어. 한이 많은 곳이지.”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앞집에 교회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간판(점집) 떼라고 매일 뭐라고 하면서 이상한 것을 보내더라고. 예수 믿는 사람들 화해를 몰라. 기독교하고는 융합이 안 되는 거지.”

우리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이 깊다 글 | 채형림(SIReNer)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디지털 저널
C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