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사람들
D·I·G·I·T·A·L JOURNAL 22호 2020. 6
서남아시아 무슬림권역 리서치 여행은 2014년 2월 12일부터 3월 12일까지 한 달 간의 일정으로, 북인도(델리, 러크나우, 바라나시, 스리나가르, 암리차르, 콜카타)를 시작으로 파키스탄(라호르, 이슬라마바드, 카라치), 방글라데시(다카)의 주요 관문도시들을 방문하여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실시하였다. |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책을 한 권 쓰고, 일곱 달을 머문 사람은 글을 한 편 쓰지만 인도에 7년 동안 거주한 사람은 아무 것도 쓰지 못 한다”는 어느 한 저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무언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하면서도 다양함을 지닌 곳이라는 말일게다. 왜 수많은 이들이 인도를 다양하고, 울퉁불퉁하며, 신비하고, 다르다고 표현했는지는 그곳을 다녀와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짧은 한 달의 시간 동안 서남아무슬림권역(인도를 포함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의미, 이하 인방파로 표기하기로 한다)의 십여 개의 도시를 둘러본 내가 이 지역에 대해 감히 겁 없이 적어나가기로 한 이유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방파 세 나라를 둘러보면서 그들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비교해보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때는 하나의 나라였던 각기 다른 세 나라가 어떻게 나누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도시가 옮겨질 때마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내가 본 만큼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나약한 필력이지만 닮은 듯 서로 다른 인방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치다
인방파를 향한 리서치 여행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위험하고, 더럽고, 가난한 나라에 가느냐’고 만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인도 ‘버스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 되었던 인도마저 위험한 나라로 인식된 탓이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의 위험으로, 방글라데시는 대통령 선거로 인한 정치적 불안요인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꼭 그곳에 가야만 하는가’를 두고 우리들은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이들이 홀로 배낭 하나 메고도 이 땅을 여행하고 오는데 이곳이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위험하기만 한 곳일까. 이 ‘두려움’의 베일에 싸인 땅에 우리가 가야할 이유가 점점 분명해진다.
위험과 어려움의 이유로 세계 무슬림 중 최대의 규모로 남겨진 ‘인방파’ 지역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고,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이미 선교지 선택에서는 뒤로 밀려나 있는 상태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이번 여행의 중요성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is India”
첫 번째 목적지인 델리에 도착했다. 공항의 출국장을 나서는 순간 후끈한 인도의 날씨를 기대했던 나는 뜻밖의 선선한 날씨에 놀랐다. 인도에도 겨울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시즌에는 노숙하는 사람들중 극심한 온도 차이로 얼어 죽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니 내가 아는 인도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지 선교사님과 공항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호텔이나 택시를 소개하는 호객꾼들이었다. 그들의 집요함과 끈질김이란 상상을 뛰어 넘는다. 선교사님이 택시를 잡고 돈을 지불하는 동안 친절하게 택시에 짐을실어주던 사람이-우리 모두는 그가 운전기사인줄 알았다-
짐을 실어줬으니 돈을 요구하며 달려드는 통에 거의 강제적으로 팁을 지불했지만, 왠지 웃으면서 강도 맞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눈 뜨고도 코 베간다’는 옛 속담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리는 택시가 차선과 상관없이 곡예를 하듯 내달리며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이내 운전기사가 뒤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This is India.” 라며 한마디 내 뱉는다.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곳이 인도라더니….
우리는 이 운전기사의 말을 인도에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정신없이 우리의 혼을 쏙 빼놓았던 인도의 첫 인상은 믿지 못할 불안한 손님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리 일행은 인도를 여행하는 배낭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뉴델리역 근처의 빠하르간지(Paharganj)에 숙소를 잡았다. 뉴델리역은 철도의 중심지답게 인도를 오가는 관광객들과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다양한 인종 집합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침을 빠하르간지 거리에서 벵골 출신이라던 아저씨가 만들어준 우리 나라의 토스트같은 간단한 식사와 인도의 대표 음료 짜이 한잔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역 근처에는 대도시에서의 삶을 시작하려는 전국에서 모여든 인도인들로 빼곡하다.
간간이 머리에 ‘토삐’(무슬림 남성들이 쓰는 둥근 모자)를 쓴 무슬림들도 보인다. 아예 기차역에 거처를 마련한 듯 이불을 편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비가 와서인지 그들의 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인도를 힌두국가로 생각하고 있고, 우리에게 알려진 인도의 특징적인 모습들(종교, 사상, 카스트, 사회 풍습 등)의 상당 부분이 힌두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실제로 많은 무슬림이 존재하느냐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에서 무슬림은 사회를 구성하는 소수자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그 숫자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이다(1). 인도의 무슬림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들의 복잡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만 가능할 듯하다.
아리아인(Aryans)과 드라비다인(Dravidian)
인도는 기원 전 2500년부터 1500년 사이에 인더스(Indus)강변의 하라파(Harappa), 모헨조다로(Mohenjodaro)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인더스문명의 발생지이다(현재 이 지역은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다)(2).
그 후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던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아인들이 철기로 무장하고 서북 인도로 침입하여 선주민인 드라비다인을 복속시키거나 남부로 몰아내고 인도 북부를 장악하였다.
이 아리아인은 선주민인 드라비다인들을 노예화하거나 남부 인도로 몰아내고 아리아인들 사이에서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갠지스(Ganges)강 유역에 도달하였고 그곳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아리아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도시국가들이 성립하게 되었다.
현재 북부 인도의 아리아인과 남부 인도의 드라비다인의 갈등의 기원을 여기서부터 찾을 수 있다. 아리아인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뿌리로 하고 있으며 서양인과 외모도 비슷한 반면, 드라비다인은 피부가 더 까맣고 상대적으로 키가 작으며 코가 뭉뚱그려진 모양으로 서로 다른 외모로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이슬람이 인도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기원 후 7세기 서인도 지역에서부터였다. 그 이후 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여러 종류의 접촉이 있었고, 1206년 아이바크(Qutb-ud-din Aibak)가 델리에 무슬림 왕조를 건설하였다.
그 후 350년에 걸쳐 5개의 무슬림 왕조가 델리에서 흥망을거듭했고 1526년에는 대제국인 무굴(Mughal)왕조(3)가 건설되었다. 특히 현재 북부 인도의 대부분의 유적들은 힌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혼합되어 생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델리 – 무굴제국 시대의 빛바랜 영화를 간직한 도시
실제로 델리는 정치 및 비즈니스의 중심이자 이 나라의 수도로 현대와 고대가 혼합되어 어우러지는 2천 5백만 인구(4)의 아주 복잡한 대도시이다.
뉴델리는 영국 통치시절 약 100년간의 인도 수도로 건설되어 널찍하게 계획된 도시인 반면, 올드델리는 17~19세기 300여 년간 이슬람 왕조 통치하의 수도이었음을 증명하듯 모스크, 기념물, 고성 등 풍부한 유산이 있는 곳이다.
1947년 당시 델리 인구의 약 40% 정도가 무슬림이었고 그때까지 델리에서는 우르두어가 흔히 사용되었으나,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단과 함께 델리에 거주하던 수십만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떠나가면서 현재 델리에는 약 10% 만이 남아 있다(5). 이후 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와 시크교도들이 대거 델리로 이주해 오면서 힌두의 비율이 80%를 상회했다.
이후 다수의 힌두 그룹과 소수의 무슬림 그룹간의 갈등은 계속 되어 오고 있다. 당시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지 않은 무슬림은 현재 절반 이상이 극빈층으로 고용과 교육에서 차별을 받고 있으며, 폭동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힌두들에게 무슬림은 ‘특권만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인식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태도 이면에는 인도 국가 내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언젠가 무슬림이 인도를 다시 지배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숨기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의 적대감을 상승시키는데 크게 작용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보았던 영화를 떠올려본다. 인도 영화에서 무슬림들은 인도 내의 아주 위험한 존재 혹은 테러리스트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래서 인도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슬럼가를 형성하게 되어 자연스레 사회적 소수자로 몰락하는 고립된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수자인 무슬림이 겪는 불이익은 힌두보다 훨씬 커서 인도 무슬림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이전의 영화가 무색하게 인도 내에서 가장 도시화되어 있는 종교 집단이 되고 만 것이다.
델리에서 사역 중인 한 선교사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힌두와 분리되어 살아가는 인도 무슬림의 거주지를 구분할 수 있다고 전하였다(6).
강성 무슬림이 밀집된 자마 마스지드 주변지역인 올드델리(Old Delhi), 수피 무슬림의 중심지 니자무딘(Nizam-ud-din), 이슬람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미아밀리아(Jamia milia), 무슬림 빈민층들이 많은 오클라(Okla), 꾸틉 미나르 유적지 근처의 메라우리(Meharauli), ‘리틀 파키스탄’이라 불리는 동 델리(East Delhi) 등 크게 6개 지역이다.
우리는 이 중 수피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니자무딘 지역을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 매주 목요일은 니자무딘 사원(Nizam-ud-din Shrine)에서 예배의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관찰하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자무딘의 묘(Nizam-ud-din Shrine)에서 발견된 인도의 수피즘
인도의 무슬림을 이해하려면 수피즘에 대한 선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인도에서 이슬람의 전파와 확산에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수피주의자들이며, 수피즘은 인도의 전 지역에서 인도의 종교사상인 범신론과 어울려 큰 저항 없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인도 곳곳에는 수피성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슬람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신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수피즘의 평등주의 사상은 카스트제도로 천대받던 하층민들이나 불가촉천민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게 되었음은 물론 무슬림들과 힌두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협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인도 대중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수피들의 금욕적인 생활은 세상사의 공허함에 지친 관료, 지주, 학자, 부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지주와 세리의 횡포를 막아달라고 간청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피성자의 이름만 듣고도 이슬람으로 개종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만하다.
수피의 추종자들은 그가 바라카(Barakah), 즉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고 알라의 은총인 축복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수피가 죽은 후 그의 무덤은 바라카가 깃든 장소가 되어 사람들은 그의 묘를 방문하여 성소를 만지고 입을 맞추고 선물과 제물을 바치는 장소가 되었다(7). 실제로 북인도에는 수피성자들의 무덤가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니자무딘은 92세까지 장수한 수피즘의 성자로, 그의 무덤은 델리 제일의 이슬람 성지기도 하다. 나자무딘은 자기 욕망을 비롯한 모든 세속적 추구로부터의 포기를 강조했으며 특히 종교적 차이로 벌어지는 학살이나 귀족화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일관된 비판을 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하던 선교사님이 니자무딘 지역으로 들어서기 전 여성들에게 스카프를 눈만 보이게 싸매라고 주의를 시키신다. 무슬림들이 밀집된 지역으로 들어가니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는 뜻이었다. 니자무딘의 묘 앞에 성자를 기리는 모습들에 이곳이 힌두사원인지 무슬림사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성자를 기리기 전에 문설주에 입을 맞춘 손을 갖다 대며 경의를 표하는 모습과 무덤 주변에 뿌려진 꽃잎들과 장식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간절한 염원을 올려드리는 모습이 흡사 인도의 어느 힌두사원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니자무디의 수피 무덤 주위에는 아픈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이는 수피 성자의 무덤에 능력이 있고, 수피 성자가 이들의 기도한 것을 받아서 알라에게 가져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목요일 저녁에 수피의식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다. 시장과 마주하고 있는 탓인지 시끌벅적 장터와도 같다. 한편 사원 광장에서는 한바탕 음악과 노래가 울려 퍼진다. 모여든 사람들은 신자 같이 보이기도 하고 우리처럼 그들을 관찰하러 온 관광객 같아 보이기도 했다.
카왈리(찬양대), 타블라(작은북 모양을 한 타악기), 시타르(비파와 같이 생긴 현악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연주하며 음악을 통해 신과의 만남을 유도한다. 노래와 함께 돈을 걷는 이가 보이고, 돈을 건낸 자는 시야가 확보되는 앞자리로 옮겨지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는 와중에 내 등 뒤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짐승의 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내며 괴로운 듯 재주를 넘는다. 그 모양이 원숭이가 재주를 넘는 듯하다. 어두운 건물 틈 사이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무리가 이상한 눈빛을 하며 노랫소리에 맞추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낸다.
그 안에는 희귀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듯 했지만,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약간의 두려움과 연민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우리가 기대했던 수피 의식은 무언가 석연치 않게 끝이 났고, 이해가 되지 않는 어둠의 실체들만이 보인 밤이었다. 이들에게 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져 온전한 치유를 받아 어두움에서 해방되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곳을 돌아선다.
여성을 배려하는 델리의 대중교통
니자무딘에서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델리에는 어딜 가나 많은 사람을 접할 수밖에 없지만 인도의 버스는 우리나라 80, 90년대 만원버스와 흡사하다.
문을 닫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원에 문을 열고 내달린다. 문 앞에 선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스릴을 만끽하게 된다. 버스표를 끊어주는 이도 있어 옛날 버스 안내양을 연상시킨다.
그가 거스름돈을 주지도 않고 표도 끊어주지 않아 우리게 바가지를 씌울까봐 노심초사 하지만 그는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거스름돈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인도 버스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다. 버스에 여성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발 디딜 틈도 없는 만원 버스 안에서 여성좌석에 앉아있는 남성을 일으켜 세우며 서있는 나에게 앉으라 하는 통에 그들의 배려에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버스 뿐 아니라 여성을 위한 배려는 지하철에도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의 맨 앞 칸이나 꼬리 칸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만 탑승이 가능하다. 이곳에선 외국인 여성이 받을 수 있는 끈적한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다. 여성들과 눈을 마주치며 간단한 대화도 나누고 그들의 삶 속에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 든다.
또한 지하철 내에는 매 칸마다 여성우대 좌석이 있다. 한번은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탑승을 하더니 여성좌석에 앉아있는 남성을 호통을 치며 쫓아내고는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남성들은 신분과 상관없이 여성이기에 좌석을 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었다고 있다는 인도에 이러한 여성을 위한 배려의 좌석이 있다니! 그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여성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인도 사회가 참 놀랍게 느껴졌다. 이 때 다시 한 번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택시 운전기사가 했던, “이게 바로 인도야”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인도에서 적응해야 할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수많은 오토릭샤(Auto rickshaw)가 수없이 쏟아내는 경음기 소음이었다. 오토릭샤는 시끄럽고 요란한 삼륜택시다. 이 소음은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 소리는 모든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문이 없어서 바람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발자동차는 매연을 뿜어내어 도시의 오염치를 올린다. 이 때문에 뭄바이의 중심가에는 ‘오토릭샤 출입금지 구역’으로 선포된 곳도 있다고 한다.
기동성이 뛰어나기는 하나 오토릭샤에 오르기 전에 운전기사와 요금을 흥정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이는 우리에게 굉장히 귀찮고 때론 마음을 어렵게 하는 일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오토릭샤의 소음은 견디기 어려운 존재이다. 오토릭샤를 탈일 있다면 소음방지 귀마개를 준비하길 권하고 싶다.
기차여행의 묘미
일행은 두 번째 목적지인 러크나우(Lucknow)로 출발하기 위해 올드 델리역에 모였다. 인도의 기차가 자주 연착된다는 정보를 너무 많이 듣고와서인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 기차에 적잖이 놀랐다.
인도의 기차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기차에서 한 두 밤을 보내야 하는 필수적인 교통수단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도망을 가지고 있다는 인도의 철도망은 복잡해 보인다. 철도의 총길이가 63,000㎞에 달하고 매일 11,000대의 기차가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 실어 나른다는 인도의 철도망은 실로 인도인의 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행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야 열차를 타고 움직이기로 했다. 창문을 중심으로 좌우 각각 3층 침상이 놓인 침대칸이다. 총 6인이 사용하므로 승객 중 한 사람이 잠을 자면 다같이 취침해야 한다.
각각의 침상에는 시트와 담요가 준비되어 나름 하룻밤 정도는 지낼 만하다. 참고로 인도 열차는 각 동일 등급의 객실끼리는 연결이 가능하지만, 다른 등급이 시작되는 연결점은 막혀있기 때문에 다른 등급의 객실에 잘못 올라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후에는 차장이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본인 여부를 확인한다. 안내방송이 없으니 불안한 마음으로 기차가 멈출 때마다 창밖으로 역을 확인하느라 깊은 잠은 힘들다.
“짜이!”를 외치며 홍차와 커피를 팔러 다니는 장사꾼 덕에 잠에 깬다. 음식과 차, 물이 공급되는 초특급 열차가 아니어도 기차 안에서 마시는 짜이는 꿀맛 같다. 짙은 안개 때문인지 이미 도착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목적지의 절반 정도밖엔 이르지 못했다. 요즈음은 짙은 안개로 기차가 연착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역에 설 때 마다 사람들은 역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를 이용해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사는 등 진풍경이 펼쳐진다. 플랫폼에 즐비한 잡화점과 과일을 파는 모습이 마치 시장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하다. 우리도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과일과 간식을 사들고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기차에 오른다. 기차가 연착해도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왠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짙은 안개 덕분에 간이역에서 분주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처럼 덩달아 나도 분주히 설렌다.
나와브(Nawabs)의 도시 러크나우(Lucknow)
드디어 16시간의 기차여행이 끝나고 러크나우(Lucknow)역에 도착한다. 역시 기차역에서 낯선 이방인들을 반기는 이는 짐을 나르는 빨간 유니폼의 쿨리(coolie)들이다. 낯설고 짐이 많은 우리들에겐 그들이 역의 안내자이자 조력자들인 셈이다. 또다시 가격을 흥정하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역사 밖에서 보이는 러크나우의 차르바그(Charbarg)역은 이 도시의 역사가 말해주듯 무굴제국과 영국식민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차역에는 영어, 힌디어, 우르두어로 된 안내판이 보인다. 그만큼 우르두어 사용자가 많다는 뜻일게다.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이하 UP)주의 국민의 약 18%가 무슬림이고 이중 최소 2천만 명 이상이 우르두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공교육에서는 배재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우르두어를 쓰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일부 인도인들에게 침략자들의 후손, 분단의 주범, 적대적 외부 세력과 결탁된 사람들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르두어를 모어(mother tongue)로 사용하는 북인도의 무슬림들이 경제적, 공간적 차별뿐만 아니라 언어를 비롯한 문화적 차별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이 이룬 아름다운 유산들로 관광수익을 올리는 북인도의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러크나우는 UP주의 주도(州都)로 북인도 무슬림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델리에 비하면 눈에 띄게 무슬림들이 눈에 많이 보였고 도시 전체가 무슬림 색채가 강하게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또한 무굴제국 시기에 소왕국인 아와드(Awadh)라는 왕국의 수도로 시아파 무슬림 군주 나와브(Nawabs)가 통치했던 지역이기에 ‘나와브의 도시’, ‘동쪽의 황금도시’, ‘인도의 콘스탄티노플’ 이라는 명성을 가지기도 했다.
그때의 영광은 바라 이맘바라(Bara Imambara), 초따 이맘바라(Chota Imambar)등의 유적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바라 이맘바라는 시아파 이슬람 성인의 무덤으로, 1784년 아사프 웃 돌라(Asaf-ud-Daula)가 기아구제책으로 만든 것으로 수많은 건설노동자들을 고용해 실업자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높이 15미터의 큰 돔 천장이 있는 이곳은 마치 이스탄불의 건축물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라 이맘바라는 거뭇거뭇 때가 묻은 듯 보존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지만 그 이름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소수 집단 안에서 더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 시아 무슬림
인도에서는 힌두-무슬림 종교 갈등으로 대규모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무슬림의 비율이 높은 러크나우에서는 별다른 충돌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이는 아와드 왕국때 나와브들이 힌두 포용정책과 세속주의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힌두-무슬림 간에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달리 시아 무슬림의 비율이 높아 수니(Sunni)와 시아(Shia) 무슬림간의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 도시이다.
이미 러크나우에서는 역사적으로 수니-시아간의 대형 무력충돌이 수차례 발생하였다(8). 수니-시아 간의 갈등은 인도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러크나우의 무슬림 인구 중 최대 30%에 해당하는 시아 무슬림에 대한 이해는 이 지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키(Key)가 될 것이다. 이에 관하여 시아 무슬림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한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러크나우에서 무슬림 공동체는 아마도 도시의 35-40%정도를 차지한다. 그 중에 수니는 25%, 시아는 15%정도가 될 것이다. 대부분 북인도 지역에서는 5%의 시아 무슬림이 있지만 이곳은 그 비율이 높은 편이다. 러크나우에는 부유한 시아 무슬림, 즉 ‘사이드(Sayyid)’라고 부르는 예언자 모하메드의 후손 집단과 아주 가난한 시아 무슬림도 아주 많다. 이곳에서의 현상들을 보면 이란과 비슷해 보인다. 아울러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이란과 연결되어 있다…(중략)…
시아 무슬림은 그들이 이 지역의 지배자인 나와브(Nawabs)였기 때문에 자존심도 세고 그들의 유산과 역사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이 아주 가난하고, 아주 적은 수만 여전히 부유하고 궁전을 소유하고 잘 살고 있다. 예전엔 그들이 지배자였지만 지금은 out-cast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역사는 아주 슬프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인 힌두에 밀려 인도 무슬림들은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시아 무슬림들은 극소수의 그룹으로 더 고립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아 무슬림들은 접촉도 어렵고 만남의 기회도 가지기 어렵다.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수니 무슬림을 대상으로 사역한다.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가지기 어렵다.”
러크나우는 곰티(Gomti)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데, 무슬림들은 주로 곰티강 서편 지역 올드 시티에 두루 퍼져 거주한다. 이들은 힌두와 별 어려움 없이 섞여 살고 있어 이들의 삶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시장 한 골목엔 힌두사원과 이슬람 사원이 한데 섞여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무슬림이 인구의 다수인 지역에 들어가 보면 길 하나를 놓고 수니와 시아 이 두 집단이 거의 교류를 단절한 채 긴장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곰티강(Gomti River)의 사람들
우리 숙소에서 러크나우 시내를 돌아보려고 하면 곰티강을 몇 번이나 건너야 했다. 유독 곰티강 유역에서 사는 빈민촌이 눈에 들어온다. 집으로 향하던 오토릭샤를 강가에 세우고 슬럼가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유레카! 뜻 밖에 뱃사공을 발견했다. 강줄기를 따라 운행하는 배가 그곳에 있을 줄이야. 그곳에 거주하던 선교사님 조차 이런 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덕분에 곰티 강줄기를 타고 어렵지 않게 강가의 슬럼가 가까이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강 건너 아이들은 우리가 외국인임을 알아채곤 소리를 지르고 카메라를 들이대던 우리에게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역시 아이들이다. 빈민촌이 가까워 오니 여기저기 널린 빨래들이 즐비하다. 그 옆에서 묵묵히 빨래하는 아저씨 둘이 보인다. 아, 그들은 빨래하는 직업을 가진 도비(Dobi) 종족이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던 한 아저씨가 자신의 딸이라며 십대 여자 아이를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이 딸을 시보내려면 아버지는 평생 얼마나 더 많은 빨래를 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배위에 있는 우리에게 멋진 포즈를 취해주던 아이들이 달려와 카메라 앞에 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줄지어 서로 사진에 찍히려 한다.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까지 나에게 선보인다. 카메라만 있으면 이 동네 사람 모두와 친해질 수 있을 것 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동네에 낯선 사람들의 등장이 신기하고 즐거웠는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수줍지만 반가운 미소를 띠우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그들의 미소에 피곤하고 긴장된 몸과 맘이 따뜻한 짜이 한잔처럼 녹아내린다. 말도 통하지 않고 갑작스런 만남에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릭샤 왈라(Cycle-rickshaw wala)
요금에 관한 시비가 가장 심한 것이 릭샤(Rickshaw)일 것이다. 아무래도 외국인은 약간의 바가지를 각오해야 한다. 러크나우에서는 델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사이클 릭샤를 자주 이용했다. 러크나우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콜카타에는 사람이 끄는 진짜 인력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큰 바퀴를 가진 릭샤의 무게가 자그마치 90킬로그램이나 되어서 보통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 두 사람만 타도 200킬로그램에 육박해 도저히 사람이 끌 수 없을 것 같지만 콜카타의 릭샤왈라(릭샤를 끄는 사람)들은 이 일을 해낸다.
콜카타에서는 한 때 2만 5천명이 넘는 릭샤왈라가 있었는데 콜카타 시내의 교통난이 심해지자 릭샤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주정부는 “릭샤를 끄는 일은 인간 이하의 노동”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릭샤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스가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을 이용할 때는 릭샤가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깡마른 릭샤왈라가 끄는 자리는 앉아서 편히 갈 수가 없다. 오르막길이라도 올라갈 때는 그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몸을 앞뒤로 움직여 반동을 일으켜주는 이상한 행동까지 하게 된다. 한 번은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릭샤왈라가 안쓰러워 거스름돈이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거리가 머니까 요금을 오히려 더 줘야 한다며 눈을 부릅뜬다.
순간 어디선가 앙칼진 목소리로 “마야(9)!”를 부른다. 참다못해 옆에 있던 선교사가 한바탕 호통을 친다. 대충 들어보니 어디서 바가지를 씌우려 하느냐 하는 것 같다. 평소 여리게만 보이던 여자 선교사님이셨는데, 그렇게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을 들어보니 앙칼진 목소리가 무섭기까지 하다. 후에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농담거리가 되긴 했지만 홀로 5년여 동안을 싱글 선교사로 낯선 곳에서 지내다보니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에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선교사의 삶이란 것이 녹록치 않음을 보게 된다. 한 없이 퍼주고 한 없이 다 받아주는 삶일 수 없어서 갈등하고, 또 그 안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삶을 살아가는 선교사들이 참으로 고맙다.
러크나우의 ‘여인 3총사’
러크나우가 북인도의 무슬림을 중심으로 하기에 굉장히 중요한 도시이긴 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선교사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 때는 이곳에 모 선교단체가 일찍부터 자리 잡고 러크나우와 그 일대에서 활발하게 사역을 전개해왔는데 그들의 활동이 알려지고 위험에 처하자 팀 활동이 약해지고 숨어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힌두와 무슬림 모두의 세력이 강하고 정치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기독교가 뿌리 내리기가 아주 어려워 지금도 교회의 힘은 아주 약하고 그 규모도 아주 작다고 한다. 그러한 러크나우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한국 선교사들은 세 분의 여성 싱글 선교사들이었다. 러크나우는 한국인 뿐 아니라 심지어 세계 어디에나 있다는 중국인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먹는 찰진 쌀을 구하기가 어려워 귀한 음식이나 물건은 델리에서만 구할 수 있다고 한다. 한 번은 귀한 손님이 왔다며 델리에서 공수해 온 중국쌀로 우리에게 밥을 지어 주시면서, 이 밥은 ‘델리에서 온’ 쌀로 지은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거리도 멀고 러크나우까지 손님이 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그분들에겐 ‘델리에서 온’ 귀한 물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귀한 것을 지나가는 객인 우리에게 베푸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러크나우는 치칸(Chickan)이라는 손으로 수놓은 천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 천은 이곳 러크나우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라고 한다. 러크나우에서 어린이 사역을 하시는 한 선교사님은 처음 만난 우리 일행에게 치칸을 선물하시겠다며 시장으로 인도한다. 며칠 전 돈이 생겼는데 이게 우리를 위해 써야 되는 돈인 것 같다며 옷 한 벌씩을 선물하셨다.
대도시의 편리함을 멀리하고, 영적인 토양도 아주 어려운 곳이지만 씩씩하고 당당하게 이 땅을 섬기는 선교사님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데 있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상급이 크리라.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만난 러크나우의 선교사는 모두 여성 싱글 선교사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러크나우의 ‘여인 3총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러크나우를 지키는 영적 기동대 ‘여인 3총사’ 이름이 마음에 든다.
바라나시(Varanasi) – 내가 신이 되는 도시
우리 일행이 도착한 날의 바라나시는 안개 때문이었는지, 기분 때문이었는지 신비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우리를 반긴다. 힌두 최대의 성지답게 바라나시의 역사는 신의 모양을 닮은 신전과 흡사했다. 힌두의 여러 신들 중에 인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바신이 있는데, 그가 지니고 있는 삼지창의 뾰족한 끝이 떨어져 생성된 도시가 바라나시이며 그래서 ‘신들의 고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신이 되어버린 곳이라는 바라나시에 드디어 도착했다.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바라나시는 모든 인도인의 마음의 고향인 바라나시를 보려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든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인도의 무슬림을 리서치 하는데 왜 힌두성지인 바라나시를 찾았는지 궁금해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인도의 이슬람을 이해하려면 힌두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북인도의 무슬림들은 대부분 원래 힌두 그룹에서 개종한 이들이기 때문에 다분히 그들의 신앙 안에는 여러 힌두적인 요소들과 혼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가 가지는 이슬람의 독특성은 거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이 인생에 한번은 꼭 강가(Ganga, 갠지스강)에 가기를 소원하고 죽어서라도 강가에 뿌려지길 원한다는 곳에 가보기로 한다. 뜻밖에도 강가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이들은 인도인들이 아닌 히피풍의 서양인들이다. 이들은 강가 가트(ghat) 한쪽에서 바이올린과 기타연주를 하며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코브라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가진 한 아이가 보인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돈을 달랜다. 돈을 안주면 찍을 수 없다며 천으로 항아리를 덮어 버린다. 그 아이의 상술이 보통이 아니다.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인생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아이들을 계속 만나게 되었다. 한 3킬로미터 남짓 되어 보이는 바라나시의 강가 주변으로 수많은 가트들이 즐비하고 그 옆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신비함에 이끌린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두(Sadhu)(10)들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곳에서는 절대 타인이 권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면 혼자 온 여행자에게 수면제나 마취제를 탄 음료를 권해 혼절시킨 후 금품을 터는 강도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겁 없이 사두가 건네는 음료를 마시는 외국 관광객들 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계속 길을 걷다보니 화장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씻고 물을 마신다. 이 강물이 신비한 힘을 가져 살아생전에 갠지스에서 목욕하고 물을 마시면 죄가 씻어지고, 죽어서 그 강변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강에 뿌리면 바로 구원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여기저기 널 부러진 제사의식에 사용되었던 도구와 우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든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거나 돈을 요구한다. 사진을 찍어줄 테니 돈을 달라는 아이도 있다. 한 선교사님은 어떤 아이를 강가 주변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려하니 그 아이가 복음에 대해 줄줄 외우더란다. 그리고는 돈을 요구한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는 얘기를 들었다. 구원의 땅이라는 바라나시에 사는 아이들이 진정한 구원의 길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영희야! 모든 한국 여행객의 이름은 영희였다.
일행을 가이드 하시던 선교사님이 멀리 누군가를 향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하신다. “영희야! 영희야!” 이제는 손까지 흔들며 그녀를 부른다. 누군가 반가운 분인가 보다 생각하며 우리도 덩달아 두리번거리며 영희를 찾는다.
멀리 한국 여성인 듯 보이는 이가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영희가 아닌 듯 뒤도 돌아보지 않지만 선교사님은 계속 소리치신다. “영희야, 잘 지내니?”라고.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영희를 부르신다. 한국 여성만 보면 영희를 찾는다. 좀 이상해 보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들어보고 선교사님의 깊은 뜻을 발견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바라나시에서는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특히 홀로 여행 온 여성이 이곳에서 많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홀로 여행 왔다가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무조건 ‘영희’를 부르며 영이 깨어나도록 한다는 것이란다. 도시가 가진 독특성 때문일까, 바라나시에서는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참 많았는데, 많은 이들이 이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하고 절망을 안고 죽음을 선택하는 까닭이었다. 이 후로 우리 일행은 모두 또 다른 한국인 ‘영희’를 찾아 바라나시 골목을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메인가트의 뿌자
사람들로 북적대는 강가는 해질녘이 가까워오면 더 많이 분주해진다.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 펼쳐지는 시바(Shiva)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인 ‘아르티 뿌자(Aarti Pooja)’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르티’는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경배라는 뜻이며, 힌두교 전통 의식에 따라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든 브라만 사제들이 신을 향해 바치는 일련의 동작들을 30분내지 1시간 정도 계속해, ‘불의 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런 뿌자를 하는 행위를 ‘아가마’라고 하는데 제사의식을 통해서 제사장이 봉헌하는 사람에게 신과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간절함이 가득하다. 뿌자 의식을 행하는 내내 종소리와 북소리가 지독한 소음을 만들어 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지만, 제사의식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바라나시 특유의 묘한 느낌을 만들어 냈다.
예전에는 사제들이 이를 거행했으나 이 의식이 관광객의 인기를 끌면서 상업화되어 근처 힌두대학의 잘생긴 학생들을 아르바이트생으로 쓰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의식을 행하는 표정에는 신을 향한 진지함이 묻어난다. 매일 이런 돈이 엄청 많이 드는 화려하고 거대한 의식이 행해진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 자리를 떠나오면서 문득 ‘나 같은 관광객이 보기엔 그들의 뿌자 의식이 낭비처럼 느껴지지만 매일 같은 예배를 아낌없이 신에게 바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은 존중받을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과연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거룩한 낭비를 얼마나 드리고 있는가 반성해 본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종소리가 내 귀에 쟁쟁하다.
바라나시의 비단 짜는 안사리족(Ansari)
바라나시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종교 분쟁으로 인한 테러가 간혹 발생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바라나시는 이렇게 강한 힌두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이 20%나 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직물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과거 무굴제국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강제 이주된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안사리족이다. 바라나시의 유명한 산업이 몇 가지 있는데 비단산업이 그중 하나이다. 실크 산업은 영국 식민지 이전부터 중국의 실크와 함께 경쟁하며 타지로 수출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현재까지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바라나시의 오래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가다 보면 옛날 방식으로 비단을 직조하는 공장을 볼 수 있다.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가는 듯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십대 아이도 앉아 비단을 짜고 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용인으로서의 지위만 허락된 가업이며, 비단 산업의 무역상이나 공장주들은 거의 대부분 힌두이다. 힌두 성지 바라나시에서 실크 직조의 가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회적 혜택에서는 역시나 밀려나 있는 모습이었다. 비단을 짜는 십대 소년의 베틀 소리가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소리로 변화될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인구 백 만 명의 관광 도시
바라나시에서 11킬로 떨어진 사르나트(Sarnath)는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을 한 장소로 알려진 마을이다. 바라나시에서 오토릭샤나 기차, 버스를 이용해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불교 성지로 알려진 이곳에는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티베트 등지에서 단체로 성지순례를 온 사람들과 심지어 노르웨이에서 찾아온 베트남 디아스포라들까지 세계 각지의 불교도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라나시에는 세계 유명의 대학이 많은 곳으로 대학생들이 넘쳐난다(11). 이처럼 갖가지 이유로 바라나시에는 1년 동안 관광객만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 선교사님에 의하면 그 중에 교회에서 온 팀이 7~8만, 많게는 10만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바라나시를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한 지나쳐가는 도시로, 혹은 강가의 사람들과 힌두 문화를 관광하러 오는 목적만으로 방문 하는 경우가 많다며 더 많은 기도와 사역의 기회들을 만들어서 방문해 주시기를 부탁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영국 식민정부가 바라나시를 지배할 당시, 바라나시가 힌두교도들에 미치는 대단한 영향력을 인식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바라나시를 기독교 개종지역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그 물결이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이라 여기고 바라나시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오히려 서구인들이 바라나시의 브라만들에게 인도음악, 철학, 전통의학, 요가, 명상 등을 배우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한다. 바라나시의 영적 진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면이 아닌가 싶다. 더 많은 기도와 관심이 이곳의 선교사님을 포함한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듯싶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바라나시의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땅위에 뒹구는 소똥과 뿌자 의식의 요란한 종소리가 피로감을 더하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이래서 이곳에 더 많은 선교사들이 머물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같은 국가, 다른 나라 – 스리나가르(Srinagar)
우리들은 바라나시에서 인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스리나가르에 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있는 카슈미르 지역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마도 인도에서 유일하게 높은 산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스리나가르가 속해있는 잠무와 카슈미르(Jammu and Kashumir) 주는 여름(4~10월)에는 카슈미르 지역에, 겨울(11~3월)에는 잠무지역으로 주정부가 옮겨 다닌다. 잠무는 전형적인 인도 여름 날씨로 매우 덥고, 카슈미르지역은 해발 1600미터의 고도에 있어서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 좋은 기후환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낮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바라나시를 벗어나 스리나가르에 도착하니 고요함에 적막함까지 감돈다. 스리나가르는 인도-파키스탄간의 분쟁으로 테러의 위험이 있는 지역이어서 검문이 삼엄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출발한 지역이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인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김새 자체도 중앙아시아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고, 총을 든 군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도 몇 차례의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했다.
우리를 숙소까지 안내하는 운전기사는 카슈미르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코가 높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졌으며, 한눈에 보아도 보통의 인도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와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이런 일에 익숙해서인지 능숙하게 “why not?”이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젠틀함도 보여준다.
운전기사 아저씨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우리를 맞이해 준 숙소의 주인아저씨는 집을 둘러본 뒤 아내가 만든 음식이라며 아프가니 치킨커리를 내놓는다. 인도의 다른 지역의 커리에 비해서 느끼함이 좀 덜하고 특히 익힌 야채를 주는 것이 맘에 들었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이 한 국가아래 있다는 것이 단일 민족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내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달 호수(Dal lake)가 희망이다
달 호수는 18㎢의 면적을 자랑하는 광활한 호수로 스리나가르의 상징이다. 달 호수에 가까워오자 검문소를 거치면서 가졌던 공포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지상의 낙원’이라 불릴 만큼 달 호수 위로 드리워진 산맥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런 아름다운 배경위로 아직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의 공포 속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을 둘러싼 인도-파키스탄간의 영유권 분쟁은 독립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중국까지 가세해 이 지역이 인도-파키스탄-중국 간의 영유권 분쟁으로 긴장감이 더한다. 독립할 당시 이 지역의 종교 분포 비율은 잠무 지역은 53%, 카슈미르 지역은 93%로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당연히 파키스탄에 영입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도였던 이 지역 군주가 인도에 영입되기를 원하면서 두 국가 간의 전쟁이 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벌어졌던 수차례의 전쟁은 현재의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일단락 지어졌지만 언제 또 총알이 날아올까 노심초사하며 불안과 빈곤의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달 호수 주변을 걷다보면 “DAL IS OUR IDENTITY”라고 적힌 푯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가장 큰 주 수입원이 되고 있는 달 호수를 깨끗하게 보존하자는 의미의 안내판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이들의 절망감이 이제는 인도와 파키스탄 어느 쪽에도 귀속되고 싶지 않은 이들의 속내를 드러내 오직 호수에만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에게는 달 호수만이 이들의 정체성이 되고 위로가 되는 희망이 되는 셈이었다. 시카라(Shikara)(12)에 앉아 물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총알이 난무하고 폭탄이 터지는 현실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질 정도로 평화롭기 그지없다.
달 호수에 퍼져 흐르는 ‘이마자’
한 때 관광산업이 활발했던 스리나가르는 최근 힌두-무슬림들의 분쟁으로 인해 시위와 파업이 자주 발생하면서 위험하고 여행이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겨울이라 추운 날씨 때문인지 우리를 제외하고 관광객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또 생각보다 너무 추워(우리나라 초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가지고 갔던 모든 옷을 껴입어야만 추위를 이길 수 있었다.
우리는 스리나가르의 상징물인 하우스보트(House boat)에 며칠을 머물렀다. 이곳에 하우스보트가 생긴 것은 영국식민지 당시 이곳에 주둔하던 영국인들이 부동산을 취득하기 어려워지자 호수에 배를 개조해 생활하면서 생겨났고, 영국인 철수한 후 남은 배를 관광객을 위해 숙박용으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슈미르인 대부분이 무슬림인 것은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하루 5번의 ‘이마자(혹은 라마즈라고 도 일컫는다)’라고 일컫는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증명된다. 북인도의 다른 도시에서 보았던 무슬림들과는 다르게 힌두와의 혼합도 적어보이고 기도하는 모습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절도 있고 진지하게 보인다. 우리를 가이드하던 운전기사도 기도시간만 되면 차를 세워두고-기도시간이 가까워지면 움직이길 원치 않았다-꼭 근처 모스크에 가서 기도를 올리곤 했다. 이런 그에게 무슬림이냐고 묻자 자신의 종교는 ‘휴머니스트’란다. 스리나가르에서 인간애를 회복하고 삶의 소망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염원이 담긴 듯한 답변이다.
하우스보트의 주인아저씨도 요즘 스리나가르의 경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며 인도정부를 원망 섞인 말투로 꼬집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스리나가르 사람들이 관광으로 주 수입원을 삼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6시 이후로는 전기가 끊어져 아침까지 전기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발전기에 의지해서 저녁시간에는 전기사용을 최소화해야 할 정도였다. 이제 스리나가르는 단순히 종교만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알라’를 구할 수밖에 없고,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달 호수가 그들의 종교가 되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슈미르 계곡을 뒤로 하고 호수를 타고 퍼져 흐르는 기도소리는 스리나가르의 아픔을 대변하듯 애절하게 들린다. 정부로부터, 민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겐 믿을 것이라고는 하늘에 계신 분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달 호수 위로 잔잔히 흐르는 기도소리가 슬프게 스리나가르를 휘감는다.
풍요와 부요의 땅 펀잡인의 도시 – 암리차르(Amritsar)
파키스탄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육로인 국경도시로 가기위해서 암리차르를 거쳐야 했다. 카슈미르인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와서인지 넓디넓은 펀잡주의 곡창지대를 가진 이들이 한없이 부유해 보이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펀잡은 인도-파키스탄 분리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금은 가장 부유한 주가 되었다. 펀잡 사람들이 이처럼 부유하게 된 것은 천연자원이나 그 밖의 혜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근면하고 부지런한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고요하던 스리나가르에 비해 훨씬 시끄럽고 복잡하고 언어도 펀잡어를 사용한다.
시크(Sikhs)(13)가 다수인 이곳에선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들은 긴 머리를 자르지 않고 상투처럼 틀어서 큰 터번으로 감싸는데 꽤 멋져 보인다. 시크의 비율은 인구의 2% 정도지만, 이들이 인도에서 차지하는 부의 비율은 10%가 훨씬 넘어서서, 시크가 다수인 펀잡 주의 연평균 주민 소득은 전체 인구 평균 소득의 두 배나 된다고 한다. 암리차르 시내에서는 거리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그들이 가진 부와 넉넉함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시크들은 거지가 없다고 한다.
암리차르는 시크교도(Sikhs)가 전체 인구의 76% 이상인 도시로 시크들의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주일에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며, 타지마할의 관광객을 넘어설 정도로 아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인도에 갔다가 돈이 떨어지면 황금사원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는데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는 황금사원에서는 나그네를 위해 아무 대가없이 거저 먹여주고 재워주기 때문이란다. 황금사원을 짓기 위해 400kg의 황금이 사용되었다는 말만큼이나 그 위용과 화려함이 대단하다.
안으로 들어서니 그 유명한 황금사원 안으로 들어가려는 인파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사람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스승의 책이라는 뜻을 가진 시크교 최고의 경전 ‘그랜드 사힙(Grand Sahib)’을 보관하고 있는 황금사원을 향해 길을 걷는다.
그곳을 구경하다가 사원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인파속에 둘러싸여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배행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경전이 놓인 사원에 도달할 때까지 회랑을 따라 모두가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며 노래를 부른다(사원내부에는 대형 전광판에 황금사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와 찬양 가사인 듯 글자가 계속해서 안내되었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는데 급기야는 메시지를 전하는 시간인지 모두가 멈추어 메시지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20여분을 선 채로 기다리며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사원내부의 경전에 경의를 표하는 시크교인들 속에서 강한 전율을 느낀다. 그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의 힘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들이 이토록 간절히 구하고 찾는 신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인도에서 만났던 신을 간절히 찾았던 수많은 인도인들을 떠올려 본다. 종교와 철학의 중심답게 인도내의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등 수많은 종교를 접했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어 진 사실은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의식(예를 들면, 카슈미르에서 만났던 무슬림들의 하루 5번의 기도, 바라나시에서 만났던 힌두들의 매일 저녁 드려지는 뿌자 의식, 자이나교도들의 정결을 위한 금식행위나 고행)을 통해서 신을 찾고, 그 안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민족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문득 한국의 교회를 떠올렸다. 신앙의 자유와 개인주의 의식이 증가되면서 신앙공동체의 능력을 상실한 모습이었다.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능력 없는 경건의 모양을 경계하려다 예배의 형식조차 무시된 채, 진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아픔을 축제로 승화시키다 – 와가보더(Wagah border)의 국경폐쇄식
암리차르에서 차로 약 40분을 달려가면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근처의 유일한 육로로 알려진 와가보더(Wagah border)를 만난다. 이곳에서 약간의 절차를 밟으면 파키스탄을 걸어서 갈 수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가 악화되면 이곳을 통해 왕래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인도 측의 이미그레이션을 지나서 파키스탄 국경까지는 버스를 타야만 가능하다. 기껏해야 국경까지는 2분이면 충분한 곳이었다. 그리곤 몇 미터 안 되는 국경분계선을 걸어서 넘어야 한다. 분계선을 넘어가는 순간 설렘이 가득하다. 몇 걸음이면 닿을 곳에 있는데도 나라를 옮겨가는 이유로 절차가 복잡하다니….
이곳은 매일 오후 5시만 되면 인도-파키스탄의 국기하강식이 거행된다. 우리가 육로를 통해 파키스탄으로 가기로 한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5시가 되기도 전에 인도나 파키스탄은 이미 축제 분위기이다. 양쪽 진영에 마련된 관람석엔 이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빼곡하고 인도에선 힌디어로, 파키스탄에선 우르두어로 된 노래가 크게 틀어놓아 ‘누가 누가 더 큰가’를 겨루는 듯하다. 아마 한-일 전의 축구 경기 때의 응원전 같은 모습이다.
내가 파키스탄 국경 내에 들어와서 인지 나도 덩달아 파키스탄을 응원하는 무리가 된다. 이전엔 한 나라였고 어쩌면 이웃이었을 사람들이 어쩌다 이렇게 나뉘어져서 누가 더 큰가를 겨루는 사이가 된 것일까.
파키스탄은 인도의 무슬림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세운 나라이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무슬림 생활양식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무슬림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인도 힌두와의 경쟁과 무슬림 내부의 뿌리 깊은 분열로 인해 파키스탄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의미한 상징은 이슬람뿐이었던 것이다(14).
파키스탄에게 이슬람은 종교이상 인도와는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와가(Wagar)에서 행해지는 국경 폐쇄식은 그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규모면이나 인구수로나 국력으로도 인도에 비해 뒤떨어지는 그들에게 파키스탄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그들의 외침은 그들의 궁극의 열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도 목청껏 파키스탄 국민들과 함께 외쳐본다. “진다밧 파키스탄!! 파키스탄이여 승리하라!!”
또 다른 펀잡인의 도시 라호르(Lahore)
와가보더의 국기하강식을 관람 후 진짜 파키스탄 땅을 밟고 길을 걸으니 우리가 파키스탄에 왔음을 실감한다. 인도에서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호객꾼도 보이지 않고, 외국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눈에 다시 한 번 옷차림을 바로 한다. 이제 이슬람의 나라에 들어왔음을 인식하고 두빠따(15)로 머리도 잘 감싼다. 그리고 이곳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인도에서 입에 붙었던 ‘나마스테’도 우르두 인사말인 ‘앗살람 알라이쿰’으로 전환한다. 그렇지 않고 파키스탄에서 ‘나마스테’를 외쳤다가 스파이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호르를 향하는 차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파키스탄은 우리의 상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좁은 도로를 빼곡히 채우던 차들과 오토릭샤의 경적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인도와는 다르게 넓고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은 질서 있어 보였고, 길거리에 소음도 소똥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끔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발견되기도 하는 깨끗하면서 목가적인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파키스탄의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대우 건설의 작품이라며, 이슬라마바드에 갈 때 이용할 버스도 대우버스란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는 ‘대우 = 코리아’ 라는 이미지가 있어 한국을 좋아한다고 한다.
라호르는 파키스탄의 펀잡주의 주도로서 파키스탄의 문화, 교육, 예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무굴제국의 지배를 받던 2백여 년 동안 델리, 아그라와 함께 이슬람 지배의 중심지였다. 한때 서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지금도 파키스탄의 상업, 금융 등 유통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16).
파키스탄은 독립 당시 서쪽으로 펀잡주의 절반, 신드, 발루치스탄, 아프간 국경지역 그리고 동쪽으로는 벵골 지역의 반이 인도로부터 분리되었다. 특히 서파키스탄 분단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펀잡는 그 피해와 상처가 어느 지역보다 컸다.
원래 하나의 펀잡이 인도에 하나 파키스탄에 또 다른 펀잡으로 나뉘어졌기에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 자신의 종교가 안전한 곳을 찾아 천만 명 이상이 새로 생긴 국경을 넘은 것이다.
1951년의 통계를 보면 분리 독립 당시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800만 명의 무슬림이 이주하였고, 새로운 국가가 세워져 가는 동안 펀잡의 군인, 관료, 지주 엘리트들이 파키스탄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현재도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44% 이상이 펀잡인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파키스탄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고 볼 수 있다(17). 현 대통령도 라호르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라호르는 무굴 제국의 악바르와 제항기르 황제 아래 있을 때에 수도 역할을 해왔던 곳으로 무굴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 ‘무굴인들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도시다. 그래서인지 간간이 외국인들도 눈에 띄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파키스탄에서 라호르는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느껴진다. 종교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인도의 펀잡주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교한국에 비견될 만한 몰비캠프
우리 일행 중 유일한 남성이었던 한 형제는 이슬람권에 적응하기 위해 여행시작 전부터 수염을 길러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외모를 갖추어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그런 그를 보고 선교사님께서 “이 형제는 꼭 몰비(이슬람 사역자, maulvi)(18)같아 보이네.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겠어.”라고 말씀하신다.
파키스탄에서는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마스지드(이슬람 사원)’에서 무슬림들이 모여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마스지드에서 이슬람 사역자인 ‘몰비’ 들이 코란을 가르친다. 라호르에서 약 5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라이윈드(Raiwind)(19)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은 해마다 몰비캠프가 열리는 곳이면서 이슬람 사역자 양성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밀려난 파슈톤족 몇 명으로 시작한 몰비 캠프는 지금은 전 세계 무슬림들을 훈련시키고 파송시키는 대형 캠프로 성장했다고 한다. 연 2-3회에 걸쳐서 실시되는 훈련 캠프 참석자의 숫자가 3백만명에 달한다고 하니 그 숫자가 대단하다. 이런 몰비들이 훈련을 받고 전도여행을 가고, 무자히딘, 알카에다, 탈레반 등 이슬람 테러단체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라이윈드에 가까워 올수록 몰비들의 모습이 점점 많이 눈에 띈다. 근처 시장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몰비들이 캠프동안 사용할 담요, 텐트, 군용배낭 등 갖가지 생필품을 구입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차로 조금 더 달려가니 캠프가 열리기로 예정된 장소에 도달했다.
빈 공터위에 우르두어로 지역명을 쓴 듯한 안내판을 보니 각국에서 모이니 지역별로 구분하려는 듯 보인다. 캠프 참석자들을 위한 시설을 짓고 있었는데 족히 수십 만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광활한 대지다. 곧 있으면 이곳에서 캠프가 진행될 예정이라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며 활발히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먼 곳에서 캠프를 미리 준비하러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오는 순례자도 보인다. 이들을 보니 여름마다 열리는 ‘선교한국’에 참여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오버랩 되어 스쳐 지나간다. 캠프를 위해 준비하는 많은 이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슬람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을 보니 우리가 더욱 분발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고마워요 대우버스
라호르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가려면 보통 ‘럭셔리 버스’라 불리는 대우버스를 이용하는데, 이 대우버스는 한국의 대우건설이 닦아놓은 6차선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려 4시간이면 이슬라마바드에 도달할 수 있다.
버스를 타기위해 터미널로 가던 도중 조금 시간이 촉박하여 지름길로 가려는데 그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선교사님이 기치를 발휘하여 대우버스 만든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문을 열어줄 것을 부탁하신다. 그들은 ‘코레아’ 라는 말에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어 시간 안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대우버스가 파키스탄에서 한국의 위상을 많이 높여 준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버스에 올라타니 그 유명한 버스 안내양이 등장한다. 비행기에 탑승한 것처럼 출발 전 주의사항을 우르두어와 영어로 안내방송을 한 후, 차례대로 신문,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헤드폰, 간단한 간식과 음료가 제공된다. 역시 ‘럭셔리 버스’에 걸맞게 서비스가 최고다. 파격적인 채용조건으로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이 얼굴을 드러내놓고 서비스 업종에 일을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지만 이 직업을 얻기 위해 엘리트 여성들의 입사 지원률이 치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슬라마바드로 가던 도중 휴게소에도 들러 화장실과 간단한 스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이곳도 물론 대우건설에서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KFC와 SUBWAY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서 있다. 한국에 비하면 많은 것이 부족해 보이지만 파키스탄에서 이런 세련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휴게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놀라게 했다.
네모반듯한 이슬라마바드(Islamabad)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짐을 실어준 택시 운전기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얼마의 팁을 주려하자 극구 거절하고 가버린다. 짐만 하나 들어줘도 팁을 줘야만 하는 인도인들에게 얼마간 단련되어 있어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슬람 문화에서는 이런류의 돈은 다른 사람 모르게 조용히 주어야 하는 ‘체면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온 것을 실감했다. 결국은 우리가 택시 운전기사의 체면을 구긴 셈이 된 것이라 생각되니 미안해졌다.
이슬라마바드는 1959년에 파키스탄의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계획도시로 도시 조경이 양호하고 조용한 도시이다. 예로부터 내륙교통과 상거래의 요지로 발전해 온 라왈핀디(Rawalpindi)의 구시가지(old city)와 인접해 있고, 인구 40만의 이슬라마바드와 100만의 라왈핀디는 같은 생활권으로 취급하여 Twin city로 지칭되기도 하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는 동안 우리들은 높은 고층 건물과 주택들이 네모 반듯이 정리된 모습에 계속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상상했던 파키스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주소만 알면 주소를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정리가 잘 된 도시였다. 빈라덴이 붙잡혔다는 아보타바드(Abbottabad)와는 110㎞떨어진 이곳은 지금까진 테러의 위협이나 그리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이슬라마바드 한 건물에서 폭탄이 터져 대사관으로부터 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은 선교사님은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며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이런 상황을 보고나니 우리가 있는 곳이 안전지대가 아님을 깨닫는다. 심지어 우리가 어제 밤 저녁식사를 했던 바로 그 건물 옆에서 난 사고라니 식은땀이 주룩 흐른다. 이슬라마바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 중에 하나라는 파이살 모스크(faisal mosque)를 방문해 보았다. 겉에서 바라본 파이살 모스크는 그 크기가 엄청나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10만 명의 무슬림들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약간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이 모스크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의 기부로 1985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아랍세계와 파키스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 같다. 그 크기 때문일까 서민들의 삶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듯해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스크다.
파키스탄의 크리스천 종족(?)
우리 일행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라 한인교회 예배가 있다는 성 토마스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과거 서양 선교사가 세운 교회로 한 눈에 보아도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모양이다.
사실 파키스탄 국민의 96%이상이 무슬림인 이슬람국가에서 버젓이 십자가를 세운 교회가 여러 곳 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타종교를 인정하는 파키스탄에는 기독교를 소수종교로 인정하고 ‘알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아니면 교회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파키스탄의 기독교 역사는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 되기 이전에 신드(Sindh)와 펀잡(Punjab)지방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이 사역은 당시 펀잡 지방에서 불가촉천민으로 분류되던 쭈르하(Chuhra) 종족이 집단개종을 하게 되면서 비약적인 진전이 일기 시작했다(20).
1947년 당시 펀잡의 크리스천들은 약 50만명의 인구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분단은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천민의 삶은 예전이나 분단 이후나 똑같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거지인 펀잡 중부는 인도-파키스탄의 국경선이 그어져야 하는 곳이었다. 국경선이 그어지고 나니 공교롭게 파키스탄에 크리스천의 80% 이상이 거주하게 되어, 인도 펀잡에서는 기독교가 매우 적은 소수 종교집단으로 전락했고 파키스탄에서는 반대로 기독교가 최대 소수 종교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21).
독립 이후 동부 펀잡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무슬림들에게 땅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직업을 잃어버렸고, 대부분 쭈르하 계급의 전통적 직업인 청소부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청소부나 가장 지저분하고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을 보면 대부분 크리스천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슬람에는 카스트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인도에 뿌리박힌 카스트 계급에 대한 편견은 이들을 계속 비참한 삶을 사는 종족으로 남겨지게 했다. 덩달아 기독교도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인식되어 복음전파에 아주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파키스탄의 기독교 인구는 총 인구의 1.6%인 약 200만 명 정도 된다(22).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쭈르하 종족의 후손으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 선교사님은 그들을 파키스탄의 ‘크리스천 종족’이라고 얘기하신다. 이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전해져야 되고 이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파키스탄 교회에 남겨진 더 큰 문제는 재산 분배에 대한 소송문제라고 한다. 많은 교회의 리더들이 과거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남겨놓은 학교, 병원, 교회 등의 재산이 갑자기 그들에게 남겨지자 이 재산을 두고 리더들끼리 그 재산을 갖기 위한 분쟁소송이 상당하고 한다.
함께 힘을 합쳐도 힘든 상황에서 서로 분열을 일삼는 이곳 상황을 보며 눈물을 보이시는 선교사님의 마음이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주님 파키스탄의 교회를 살려 주소서~!
파키스탄 제1의 도시 – 카라치(Karachi)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카라치는 파키스탄 제1의 도시답게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넓게 퍼져 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에는 파키스탄의 수도였으며 현재 거주 인구 약 2천 4백만에 육박하는 파키스탄 최대의 도시이며 금융의 중심지이다.
한국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가 이 도시에 밀집되어 있는 셈이니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높은 빌딩들과 바쁘게 직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카라치 인구의 절반 이상이 1947년 이후 인도나 파키스탄의 다른 도시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인종이 없이 여러 민족과 문화가 섞여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러나 이 중 파슈톤 종족이 5백만 명이나 거주하는 지역으로 그 유명한 탈레반(23)이 활동하기 좋은 곳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도 카라치에서 몇 번의 반정부 테러가 일어났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라고는 하지만 카라치를 거주하는 이들에게 큰 위험요소가 된다.
이 외에도 카라치 생활의 또 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이는 강도의 위험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다음 목적지가 카라치라는 이야기를 들은 한 선교사님이 “어머, 그 위험한 곳에 가는구나. 나도 무서워서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기도 많이 해야겠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심지어 전날 폭탄이 터졌던 이슬라마바드에 사시는 분까지도 카라치를 위험하고 범죄가 많은 곳으로 인식하고 계셨다.
우리 일행이 카라치에서 만난 현지인들도 모두 하나같이 강도를 만난 경험이 몇 번씩 있다고 할 만큼 실제로도 많은 도난사고가 많은 곳으로 악명이 높긴 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카라치 공항에 들어선 순간부터 카라치를 떠날 때까지 우리들은 바짝 긴장했다. 우리를 안내하던 현지인 사역자도 절대 차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사진도 차 안에서만 찍으라며 신신당부를 한다. 그리고 카라치를 떠나오는 날까지 우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카라치 시내를 바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전히 카라치는 내게도 베일에 싸여있는 도시다.
파키스탄의 희망을 보다
카라치에서 성경공부나 신학과정 프로그램을 통신으로 진행하는 사역자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이들은 홍보를 통해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현지어나 영어로 된 문서로 방송, 전화 혹은 우편물을 주고받으면서 성경을 가르치며 크리스천을 양육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주로는 전통적인 우편물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신앙성장을 돕는데, 예전에는 16명의 전임 사역자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4명으로 줄었고 카라치의 상황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한다.
이들의 주 사역대상이 무슬림들이긴 하지만 크리스천들에게도 주목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크리스천이 되긴 하지만 한 번도 교회에 가본적도 없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의 비율을 20~30%로 보고 있는데 이들이 개종 후 직업의 문제, 알콜 중독 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살기 때문에 이들을 바로 세우고 제자로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교육에 대한 중요성도 빼놓지 않았다.
“카라치에는 엄청 많은 모스크와 지하드가 있어서 이곳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이슬람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난다. 이들은 성경은 왜곡되었고 기독교는 거짓 진리라고 교육받고 세뇌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다. 카라치 인구의 50%이상이 1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에 희망이 있다. 지난 10여 년간 카라치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해서 거의 호주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들을 위한 접근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파키스탄은 준비하면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곳이었다. 왜냐면 나라에 대한 정보나 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니 파키스탄은 ‘두려움’이라는 허구에 우리가 마음을 많이 빼앗기게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위험과 어려움이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곳을 잘 모르는 이들도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알려고 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
파키스탄의 선교사님들의 어려움이 그곳 현지의 상황만이 아니라 보낸 사람들의 무관심도 한 몫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을 파송한 교회조차 한 번도 선교지를 방문하거나 단기선교를 와 본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위험하다는 장벽에 갇혀 그곳에 계시는 선교사님들까지 외로움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안에 고립되게 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그런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다음세대를 위한 학교나 학원설립의 기회와 제한된 수이긴 하지만 선교사 비자의 허가, 실크로드를 타고 페르시아권과 아랍권으로 가는 선교의 요충지가 되는 희망의 파키스탄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현지 선교사님의 말처럼 파키스탄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가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행복의 나라 방글라데시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는 비행기 안에는 한 무리의 방글라데시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시 눈을 부치려던 나는 눈을 뜨고 무슨 일인가를 살핀다. 한 눈에 보아도 벵골인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도 카라치에서 얼마간의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보인다. 비교적 조용한 사람들(파키스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임) 틈에 있다가 갑자기 벵골어로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이들의 수다는 비행기가 뜰 때부터 다카(Dhaka)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우리에게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고 알려진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이다. 국가 면적이 비슷하다는 네팔(약 3900만명)이나 그리스(약 1000만명)와 비교하여 볼 때, 1억 6천명의 인구를 가진 방글라데시는 인구밀집도가 매우 높은 국가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5세 이하 아동사망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고 어린이들 중 약 60%가 영양실조이며, 인구의 53%가 문맹이며 인구의 반 이상은 국가 발전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가장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일 수가 있는지 믿기 힘든 실정이다. 어떤 이는 행복지수를 측정할 때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였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높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억압받던 시절을 떠나 독립을 이룬 순간 그 누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독립 당시 적대적인 인도를 가운데 두고 1천 6백 킬로미터 거리를 떨어져 있는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후일의 방글라데시)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출범하였다. 인종과 언어와 관습이 다르게 생활해 온 두 지역이 이슬람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리하게 한 나라로 통합하였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다. 막상 다카에서 직접 이들의 삶을 접하고 보니 이들은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 나라일수가 없음에 틀림없다.
독립 당시의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과 한 국가로 생존하는 것은 단지 ‘힌두 지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파키스탄 독립 후 서파키스탄의 지도부는 동파키스탄의 동료국민을 평등하게 바라보지 않았고, 실제로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벵골인들의 이슬람은 힌두교에 의해 오염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실제로 그들의 이슬람은 힌두와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중앙정부와 모든 경제·행정적 중심이 서파키스탄에 집중되어 모든 자원이 벵골에서 서파키스탄으로 빠져나갔다. 더군다나 동파키스탄의 98%가 벵골어를 사용한 하나의 동일한 언어와 문화적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벵골어 대신 강제적으로 우르두어를 사용한 정책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벵골 민족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방글라데시는 국민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무슬림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파키스탄과 분리되어 1971년 12월 16일 독립을 이루었다.
1947년부터 1971년 독립할 때까지 방글라데시는 서파키스탄의 엘리트들에 의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고 전쟁을 통해 독립은 이뤘지만 그 상처는 엄청났다. 경제적 손실이 10~20억에 육박했고 교통, 통신, 발전, 항구, 도로 시설 등이 모두 폐허가 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이는 부패가 심한 정부의 통치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카 시내 곳곳에서는 집권 여당과 그를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의 현장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년 초에 실시된 총선의 결과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과 정부와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이후로 1,2월 동안 시민들은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현지 선교사님은 방글라데시는 독립한지 이제 40년이 조금 넘은 어린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로 가기위한 진통을 많이 겪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마 우리나라의 80년대 민주항쟁의 모습을 떠올리면 비슷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방글라데시의 빈곤한 삶과 견주어 멋들어지게 지어진 방글라데시의 국회의사당을 보니 왠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다카(Dhaka)에서 만난 사람들
다카는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자 방글라데시의 최대의 도시이다. 시내에는 700개 이상의 모스크가 있어 모스크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소수 종교 집단인 힌두교도들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그룹이다.
방글라데시 전체 인구의 90%가 무슬림이지만, 12%의 힌두교도가 존재한다. 이슬람으로 개종 전에는 대부분이 힌두교도들이었던 벵골 무슬림들에게서는 그들의 민속종교인 힌두의 모습이 이슬람 신앙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카 시내에는 ‘다카의 여신’이라는 뜻을 지닌 다케슈와리(Dhakeshwari) 국립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사원에 도착하자 막 예배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하나같이 경전인지 기도책인지 잘 모르겠지만 책을 한권씩 들고 열심히 읽더니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구령에 맞추어 북소리가 시작되고 갑자기 한 목소리로 혀를 내두르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들의 신을 부르는 듯한 모습이다.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모습은 기존의 힌두사원에서도 보기 힘든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 적인 요소가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델리의 니자무딘에서 만났던 수피교인들이 문득 떠오르며 그들과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에서 만난 무슬림, 방글라데시에서 만나 힌두는 그렇게 다른 듯 닮아 있고, 닮은 듯 하면서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
그 소리를 피해 사원 밖 마당으로 나오니 한 무리의 힌두 여인들이 지나간다.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사원에 모인 신부 측 사람들이란다. 한 눈에 보아도 부유해 보이는 옷차림에 소수 종교 집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축된 모습이 아닌 상당히 당당해 보인다. 다수의 무슬림 가운데 살아가는 힌두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북인도의 무슬림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상상했던 탓 일게다.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회계층이 낮은 천민 취급을 받던 종족이었다는데 그런 이유였을까. 역시 종교보다는 카스트와 경제 원리가 한 수 위인 방글라데시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한편으로 씁쓸해진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다카 대학으로 향한다. 다카대학의 수준이 우리나라의 서울대학교 보다 높다는 이야기에 나라가 가난하다고 지식의 수준까지 모두 가난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깨버린다.
마침 과학기술 분과의 대학 축제가 진행 중이라 학생들의 열띤 토론을 즐기는 모습이 대학 캠퍼스다운 활기를 띤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연애결혼이 어려운 사회에서 건물 구석진 곳마다 몰래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슬람 사회이지만 사회계층간의 차별이 존재해서 연애와 결혼은 절대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면 이미 상류층의 남학생들은 거의 해외로 유학을 가고 그 다음 계층의 남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대학을 다니는 상류층의 여학생과는 태생적으로 신분이 맞지 않아 결혼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런 비극적인 사실에도 따스한 날에 즐기는 그들의 데이트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들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도로는 이 나라의 상황만큼이나 꽉 막혔다. 역시나 40만대의 사이클 릭샤가 매일 거리를 활보하는 ‘릭샤의 수도’라는 말이 실감된다. 우리가 움직이는 날은 휴일인 금요일이어서 교통상황이 좋은 편이라고 하니 평소의 교통체증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가 보다. 종일 답답한 날을 보낸 하루다.
다카에서의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갔던 것 같다. 짧은 일정이 더욱 아쉽기만 했다. 방글라데시의 삶을 더욱 들여다보지 못한 아쉬움이 다음을 기약하게 했던 것 같다. 공항으로 향하던 차안에서 곧 열리게 될 ‘크리켓’ 경기 광고판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띤다. 그들의 크리켓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오면 크리켓 경기를 꼭 보리라 마음먹는다.
영국과 인도의 적절한 조화를 이룬 콜카타(Kolkata)
콜카타 공항에 도착한 순간 드는 생각은 ‘이곳이 인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현대화된 모습이라 깜짝 놀랐다. 인도의 수도 델리의 공항에서 마주한 인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공항 밖에서는 인도 전역에서 흔히 보이는 릭샤와 택시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일 대신에 널찍한 노란 택시가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시내로 들어서서 골목을 걷는 순간 끊임없이 따라붙는 호객꾼과 릭샤의 시끄러운 소음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인도에 있구나!’를 곧 실감한다.
콜카타는 인도의 서벵골주(West Bengal)의 주도로 인도가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서 식민지화가 되는 동안 주도였다.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된 후에도 1912년 뉴델리로 수도를 옮겨갈 때까지 수도로 있어서 인도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면서 또한 19세기 독립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콜카타의 거리를 다니다 보면 영국의 한 도시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콜카타의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콜카타에서 만난 인도인들도 오랜 세월 인도의 수도였던 자신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영국의 식민제국주의의 나라라는 부정적인 시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영국적인 모습도 인도의 것으로 적절히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들처럼 보인다.
콜카타는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타고르가 출생하고 활동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가 여생을 봉사하며 머무른 곳이기도 하다. 타고르 하우스와 마더 테레사 하우스가 있는 콜카타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여행자의 거리에서 만난 노숙자의 모습을 한 호주인은 인도가 좋아서 무작정 인도에 거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며 자신의 무용담을 여행자들에게 쏟아 놓는다. 짜이를 마시는 동안 그의 입담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콜카타에서 네팔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마오이스트(24)를 만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도가 싫어졌다고 하더니 이내 다음 행선지가 남인도란다. 남인도는 안전한 곳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이 콜카타를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 한 자리에 앉아 인도 전역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콜카타의 여신 ‘칼리’
인도에는 지역마다 섬기는 신이 다르다고 하는데 콜카타에서는 죽음의 여신이라 불리는 칼리(Kali)를 신봉하여, 이 여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염소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매일 행해지는 칼리신전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콜카타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칼리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하니 이 도시에서 얼마나 중요한 신인지 알 만하다.
입구에 도착하자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선다. 자신을 브라만 사제라 소개하며 사원 안으로 인도하겠단다. 일단 따라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곳은 아주 유명한 곳이고 이곳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도 전역에서 몰려든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더니 더 안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는 우리를 칼리 여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수많은 인파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밀치며 뭐라 떠들어대고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틈을 내주며 ‘저 안쪽에 있는 칼리여신을 보시오!’라고 소리친다. 그 틈으로 살짝 얼굴을 비친 성상은 이내 인파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린다. 모두들 그 칼리여신 앞에서 사제를 통해 기도를 올리며 기부를 하는 식이었다.
그 정신없는 곳을 나와 한숨 돌리고 나니 자신은 매일 세계의 평화와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서 매일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이 복 받기 원하고 우리 일행이 또 복 받기를 원한다고 기도를 올리더니 칼리여신에게 봉헌을 하면 더 많은 복이 올 거라며 돈을 요구한다.
사원을 빠져나오는 우리 뒤를 따르던 그에게 가이드를 너무 열심히 해 준 그의 노동력의 대가로 얼마의 팁을 지불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사제라기보다는 가이드에 가까웠다. ‘사원 입구에 들어서면 사제를 가장하고 돈을 뜯으려는 사람이 있다. 별로 안내가 필요 없는 사원이니 도와준다고 해도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면 된다.’는 안내문이 여행 가이드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토록 평화의 복을 비는 그의 내면에는 진정한 평안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콜카타의 또 다른 벵골인
콜카타에는 이렇듯 칼리 여신을 섬기는 힌두가 약 450만 명의 인구 중 77%를 차지하는 다수그룹을 이루고 있지만 20%의 적지 않은 무슬림도 함께 어울려 있는 도시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벵골어를 사용하는 벵골인이다. 콜카타가 있는 서벵골 주는 역사적으로 영국령 인도의 벵골 주였다가 영국의 벵골 분할령으로 인해 동·서벵골로 분할이 되었었다.이는 후일 긴 세월동안 잠재워져 있던 힌두-무슬림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오늘날과 같이 분리 독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도가 독립한 1947년, 무슬림이 많은 동벵골은 파키스탄의 일부인 동 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이 된 반면, 힌두신자가 많은 서벵골은 인도의 주가 된 것이다. 이후 동 파키스탄 내에 약자로 남게 된 힌두들이 국경을 넘어 난민이 많이 유입되어 큰 혼란이 일었고, 그로인해 지금도 빈곤한 하층 시민의 수가 많고 근래에도 방글라데시로부터 난민유입이 계속 증가하여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델리, 뭄바이와 함께 인도의 대표 3대 도시인 콜카타는 대상공업도시이면서도 빈곤층이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눈에 보아도 한 민족인 것 같은 다카와 콜카타의 벵골인들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슈로 하루아침에 분단이 되어 ‘서로 다름’을 외치는 모습이 오랜 세월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이것을 아는 듯 방글라데시는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서벵골의 벵골인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서벵골의 영향을 줄여보려는 노력이 두드러져 보였다. 왜냐면 그들은 달라보여야 했으니까.
콜카타는 원래 리서치 계획에는 없던 도시였다. 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방글라데시를 거쳐 귀국하는 루트를 짜다보니 콜카타는 어쩔 수 없이 한번 쉬어가는 도시 정도로만 여겼던 곳이었다. 그러나 콜카타는 그냥 거쳐 가는 정도로만 여기기엔 인도 역사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을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야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게 콜카타는 영화 ‘시티 오브 조이’라는 영화의 도시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만 기억되었던 곳이었다. 지금 콜카타는 과거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천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유했다던 콜카타는 과거의 영화를 다시 누리려는 듯 세계적인 대도시로 계속 성장 중이다.
뷰티플 인.방.파!
한 달 남짓의 인방파 리서치 여행을 마치고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무어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참으로 어렵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참 많이 ‘다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이른다. 종교와 철학의 중심답게 인도 내에서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등 수많은 종교를 접했고, 국가적 위기의식 속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부각시키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수많은 무슬림들도 만났다.
인도 아대륙으로 표현될 만큼 방대한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한 나라로 통일할 수 있었던 이슬람 제국이 남긴 복합적인 문화유산, 그리고 인도 고유의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흡수해 버리는 특성이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기 다른 종교적 의식을 통해 민족적 공동체성을 확립해 가려는 모습은 하나인 듯 다르며 다르면서 하나처럼 보이는 그들의 이면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도시인 델리에서 만났던 한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여러분들 모두가 이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삶속에 더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었지만 내게는 이미 그들이 전해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돌아온 듯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 안에 발견된 ‘다름의 미학’에 매료되어 인도행 티켓을 집어 들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글| 채형림(SIReNer)
[각주] (1)인도내의 무슬림 인구는 인도 인구의 15%로 약 1억 7천 명 정도이지만, 인도 무슬림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에 있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 본다면 전 세계 무슬림의 40%인 약 5억 명의 무슬림이 동일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인도내의 무슬림 인구는 인도 인구의 15%로 약 1억 7천 명 정도이지만, 인도 무슬림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에 있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 본다면 전 세계 무슬림의 40%인 약 5억 명의 무슬림이 동일 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이 제국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1858년까지 존속하였다. 힌두교는 이슬람교와 충돌하면서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대립 혹은 혼합의 두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4) http://www.un.org/en/development/desa/news/population/world-urbanization-prospects-2014.html (5) http://en.wikipedia.org/wiki/Delhi (6) 2014. 2. 14. 델리에서 P.Samuel 선교사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 (7)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2』 (서울: 이산, 2008), 600-603. (8) 러크나우 무슬림들의 갈등은 비단 종파적인 이유 이외에도 정치, 경제적 원인도 있다. 시아는 무슬림 전체인구의 30%만 차지하는 소수지만 전통적으로 러크나우 지배계급이었고 독립이후부터는 무슬림 엘리트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수니 무슬림은 과거 아와드 왕조 때 피지배계급이었으며 독립이 후 대부분 임시직이나 낮은 보수를 받는 육체노동을 하는 하층민들이다. 사실 러크나우 서부지역의 무슬림들 중에서 시아는 상대적으로 부유했으나 수니는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는 두 집단은 오랫동안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 집단 간의 갈등은 1978, 1999, 2007년 대규모 충돌로 비화되기도 했다. (9) 우리말로 ‘아저씨’와 같이 의미로 일반적으로 남자성인을 부를 때 사용한다. (10) 성스러운 사람을 뜻하며 힌두교에서 최고의 경지인 목샤(Moksa, 해탈)을 실천하는 종교인이다. 바바(Baba, 삼촌)라고도 부른다. 가족을 떠나 숲, 동굴에서 수도하며 종교 축제 때 잠시 도시로 나온다. 대개 오렌지색 천을 몸에 두르고 목에 염주(mala)를 걸고 있다. 이들은 모시는 신에 따라 시바, 비슈누 계열로 나뉘는데 시바계 사두들은 신과의 소통을 위해 차라스(chara, 대마초의 일종)를 피우는 의식을 한다. 힌두교도들은 사두를 존중하여 식사, 기차무료 승차 등 기부금을 제공한다. (11) 바라나시에는 인도 철학, 문화연구의 최고의 대학이라는 베나레스 힌두대학, IIT대학, 싼스크리트 유니버시티 등을 포함한 유수 대학이 10여개가 있다. (12) 스리나가르 곤돌라와 비슷한 보트로, 달 호수위의 하우스보트(house boat)를 이용하는 관광객에겐 유일한 교통수단이 된다. (13)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따서 구루 나낙(Nanak)이 창시한 종교로서 유일신을 믿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 힌두처럼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카스트를 거부하고 갠지스 강을 순례하지도 않는다. 시크교의 교세는 무굴 제국 말기에 크게 성장하여 펀잡 중부 지역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14) 파키스탄 정부는 이슬람을 통해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 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펀잡인(Punjabi), 파슈톤인(Pashton), 신드인(Sindh) 사이의 이해 상충, 순니파와 시아파의 불화는 이슬람의 가치를 내세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2』 , 1091.) (15) 두빠따(Dupatta)는 여성들이 머리나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긴 천을 말한다. (16) 라호르는 파키스탄의 다른 도시와 다르게 휴일이 일요일로 국제 무역, 금융 등의 역할을 하는 국제도시로서의 역할도 감당한다. (17) 2009년 파키스탄 민족별 통계에 의하면 펀자비가 7천8백만(44.15%), 파슈톤 2천7백만(15.42%), 신드족 2천4백만(14.1%), 시라이키 1천4백(10.53%), 무하지르 1천3백(7.57%), 발로치 6백만(3.57%) 순으로 나타났다. (18) 이슬람의 성직자는 ‘이맘’이라고 부르고, ‘몰비’는 이슬람적인 삶을 사는 종교가를 말한다. (19) 라호르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로 세계의 무슬림들(중국 우루무치,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러시아 등)이 이곳 타브릭 마르카스 마드라사에서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고 이곳에서 숙식하며 신학을 공부한다. 1947년 독립과 동시에 시작된 곳으로 무슬림 또는 무슬림 가족 태생이 아닌 경우 입문 허가를 주지 않는다. (20) 1900년까지 7천명의 장로교회 개종자와 5천명의 성공회 개종자가 생겼고, 1915년에는 시알콧(Sialkot)지방의 거의 모든 쭈르하 종족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당시 펀잡 지역의 크리스천들의 90%이상을 쭈르하 종족이 차지했다. (21) 공영수, 『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133-134. (22) 크리스천 사이에서는 공식적인 인구조사에서 기독교 사회가 계속적으로 숨겨져 왔으며, 실제 기독교 인구는 훨씬 더 많은 총인구의 3%가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천을 가진 나라이며, 공식적으로 선교사 비자가 가능하며 헌법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나라다. 가장 큰 개신교 종파는 성공회, 감리교, 루터교,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파키스탄 연합교회(the Church of Pakistan)로 기독 인구의 약 27%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UP(미국연합장로회)와 Lahore Church Council(라호르교회회의) 연합으로 구성된 파키스탄 장로교회, 그 외 구세군, 오순절교회 등이 있다. 연합교회는 분파의 고통을 여러 번 겪었으며 분열된 장로회 파벌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3) TTP(Tehrik-i-Taliban Pakistan)이라 불리는 파키스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을 타라 활동하는 북서부 연방 지역에 기반을 둔 이슬람 무장단체이다. (24) 인도에는 낙살리스트(Naxalist) 혹은 마오이스트(Maoist)로 불리는 반정부 게릴라군이 극성이다. 낙살리즘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전투적 극좌파 공산당의 이념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낙살반정부군(Naxal)은 스스로를 마오이스트(Maoist)라 칭하며 현재 인도에서 급속으로 지지세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적어도 12개주에서 소위 ‘낙살라이트 운동(Naxalite Movement)’, 즉 반정부 마오이스트(Maoist) 공산당 집단이 활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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