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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바르 파키스탄”, “빅토리 파키스탄”

업마생각
D·I·G·I·T·A·L JOURNAL 23호 2020. 8

지난 카스(CAS) 22호부터 서남아 무슬림권역 자료를 게재해오고 있다. 현재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와 필요를 지닌 서남아무슬림권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보다 올바른 선교적 협력 방안을 강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지난 카스 22호에서는 서남아무슬림권역의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하면서 전체적인 방향을 설정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파키스탄에 집중하여 파키스탄에 대한 선교적 이해와 실천을 강화하는데 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카스’ 외 모든 내용을 파키스탄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해보았다.

현재 파키스탄은 세계 5위의 인구 대국(2억 1,656만 명)이자, 세계 2위의 이슬람 대국(2억 49만 명)이며, 한때 세계 최고의 부국이었던 무굴 제국의 후예이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필자가 업마팀들과 함께 현지 국경을 통과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으로 이번 업마생각도 통일해보겠다. 우선 파키스탄으로 들어가는 문(門)을 열기 위해 국경을 통과하면서의 단상(斷想)을 시작으로 파키스탄의 독립 역사 등을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살펴보겠다.

다른 판문점, 와가보더(Wagah Border)
“진다바르 파키스탄”, “진다바르 파키스탄”. 와가보더 국경의 파키스탄측 국기 하강식에서 필자에게 가장 많이 들렸던 파키스탄 사람들의 함성이다. 후에 물으니 “파키스탄 만세”, “빅토리 파키스탄(Victory Pakistan)” 이라는 뜻이란다. 인도제국에서 억눌려 살았던 무슬림들이 자유 파키스탄 독립국가에서 자긍심으로 목이 터져라 “진다바르 파키스탄”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축제로 승화되어 매일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된 국경 와가보더가 부럽기도 하면서도, 필자에게는 우리의 판문점 국경 검문소가 연상되면서 마음이 더 아려왔다. 전쟁과 상처가 다시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와가보더(Wagah Border). 그곳은 축제의 장이기도 하지만 사실 전쟁과 갈등의 기억을 가진 공간이자, 매일 양국의 국기 하강식을 통해 서로가 다른 민족이라는 분리를 재현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국토와 민족이 분단된 채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실체적으로 다른 국명(國名)으로 살아오게 되었다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다른 ‘종교’ 때문에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곧 힌두스탄이란 ‘힌두교인의 땅 인도’와 ‘무슬림들의 성스러운 땅 파키스탄’ 종교 갈등과 전쟁으로 근현대를 경험한 인도아 대륙의 인도와 파키스탄. 이 두 국가의 현재를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국경이 바로 와가보더(Wagah Border)였다. 이 국경은 외국인에게 허용되어 있는 유일한 육로를 통한 국경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더 우리와 비교해보면 우리가 35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던 것에 비해, 인도는 정확하게는 89년, 세포이 반란 진압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실질적인 통치로 볼 때는 90년간이 식민통치 시대에 해당된다. 거의 백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통해 해방과 독립을 맞게 되는데, 그 2년 후인 1947년 8월 15일에 인도가 영국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인도 독립 하루 전 1947년 8월 14일에 파키스탄이 독립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독립을 위한 갈등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국가의 독립과 건국으로 발화되면서 이후 인도-파키스탄 간의 현대 역사에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곧 이어 촉발된 1947년 10월-1948년 12월까지 1년 2개월간의 제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년 8-9월 제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71년 12월 제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의 긴장과 대치는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30년 동안 극단으로 치달았다. 지난 2002년에도 양국 사이의 또 한 차례 갈등과 긴장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독립과 국가 탄생
역사적으로 파키스탄의 독립운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니, 18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77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에서 무슬림들의 독립운동은 영국 식민지 경험 7년 째 되던 해부터 결집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를 비롯한 힌두교도의 지도 아래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오다, 1907년에 본격적으로 ‘이슬람 동맹’이 결성되고, 1930년대 초 이슬람교 시인 알라마 익발(Allama Iqbal) 등에 의해 태동된 이슬람 국가의 분리 독립 이념을 바탕으로 인도 대륙에 두 개의 국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후 이슬람 동맹은 1940년 3월 23일 라호르(Lahore)에서 개최된 정당 회의에서 독립국가의 영토를 이슬람교도 밀집 거주지로 하는 ‘파키스탄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의 지원으로 1946년 10월에는 파키스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도 이제 파키스탄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파키스탄 영토와 관련해서는 1946년 초 영국정부의 각료 사절단이 인도와 파키스탄 대표들에게 3개의 연방그룹 결성계획을 건의하였는데, 이에 따라 1947년 6월 3일 분리계획서가 공포되었다.

이후 이 분리계획서에 따라 이슬람교도가 다수 거주하고 있는 벵골(Bengal)과 펀자브(Punjab) 두 지역이 인도를 사이에 두고 먼저 분리되었다. 이어 서부 펀자브, 동(東) 벵골,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지방의회와 퀘타(Quetta) 자치 주가 파키스탄 편입을 지지하였다. 또한 북서부 변방지역과 아삼(Assam)주의 실헷(Sylhet) 지역 주민들도 국민투표를 통해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방들을 국가의 영토로 하는 파키스탄이 드디어 영국령 인도제국에서 해방되어 독립국으로 1947년 8월 14일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파키스탄(Pakistan)이라는 국가 명칭
업마생각을 마무리 하면서 파키스탄(PAKISTAN)이라는 국가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료를 살펴보니 펀자브(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의 영어 첫 알파벳 글자와 발루치스탄(Baluchistan)의 영어 끝 글자에 해당하는 스탄(stan)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1933년 영국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으로 무슬림 독립운동을 하던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Choudhry Rahmat Ali, 1897~1951)가 당시 독립운동 팜플렛 「Now or Never」에 인더스강 유역의 위 다섯 개 지역을 지칭하면서 후에 파키스탄으로 공식화되었다. ‘stan’은 또한 이슬람지역에서 국가(state) 또는 땅(land)을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정식 국명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 이다.

파키스탄(Pakistan)! 1947년 인도로 부터의 독립 쟁취 이후 1971년 방글라데시라는 서 벵갈(West Bengal)의 분리 독립으로 영토 축소, 인도와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핵무장 구축과 이후 탈레반 세력 등장과 내부 갈등 등 복잡한 국제 정치 현실에서 여전히 국가 건설 중인 파키스탄!

필자도 ‘진다바르 파키스탄!’이라고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빅토리 파키스탄(Victory PAKISTAN)!’을 외쳐 본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그동안 최전방 개척지 파키스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무슬림 주류 사회 속에서 천대받는 현지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건설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진다바르 파키스탄!’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차원이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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