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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7) 예루살렘 공의회 (사도행전 15:1-29)

성경이 말하는 CAS
D·I·G·I·T·A·L JOURNAL   23호 2020. 8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은 어쩌면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확장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기록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땅 끝까지” 비전을 주신 이후,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본격적인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다면, 이 사도행전 15장은 이제 이방 선교에 ‘고속도로’가 놓인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입니다.

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란, 복음을 듣고 믿음을 얻게 된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문화적으로 유대인과 같이 되지 않아도 됨’을 선언한 결정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들어야 할 세계 모든 종족의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모든 족속이 자신의 문화와 결별하지 않고도 예수를 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문화의 장벽을 넘어 전파되는데 가속도가 붙게 되었으며, 기독교가 이른바 ‘세계 종교’가 될 수 있는 문이 열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15장 1절을 읽어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안디옥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예수를 믿기는 하되, 여전히 유대주의적 문화의 뿌리 위에 복음을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2절에 보니 이러한 주장이 점차 안디옥 교회 안에 논쟁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즉, 예수를 믿으면서 ‘할례 받아야 되느냐.’, ‘유대의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라는 식의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가 쉽게 진정이 되지 않고, 또 이방 선교의 전진 기지와 같았던 안디옥 교회의 향후 사역과 관련해서도 사안이 매우 중대하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권위 있는 그룹에서의 책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이를 위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랬더니 5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도 당연히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을 하는 등 안디옥에서처럼 이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그야말로 핫 이슈가 되고,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7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7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을,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지는 유대인인 우리도 율법을 제대로 다 못 지키면서, 게다가 그것이 우리가 구원 얻는 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이방인에게까지 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짐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율법으로는 구원 얻을 이가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근거로 이 사안에 대한 해석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해 증언함으로 사역 현장의 실증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예루살렘 공의회 의장 역할을 하는 야고보가 일어나서 14절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중에서 자기 이름을 부를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했다고 하면서, 17절에서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여 함이라”라고 한 말씀과 일치한다고 성경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할례 받아라, 율법 지켜라’)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마지막 조건도 최소한 이 정도의 율법은 지키라는 새로 요약된 신학적 율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복음으로 하나 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문화적인 요인은 서로 조심하자는 권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다양한 지도자들의 수많은 변론과 주장이 오갔을 것 입니다. 비록 어떤 면에서는 의견이 달랐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하나였습니다. 그들 모두 그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이 사안을 그 복음에 기초하여 정리하고, 그 정리를 뒷받침할 만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현장의 실증을 제시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였을 수 있지만, 당시는 신약성경과 그 신학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기에 야고보가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베드로의 그정리가 성경적으로도 모순이 없음을 확증하는 매우 체계적인 검증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 역사 최초로 공의회를 소집하게 된 안건이었고, 그 최초의 안건이 선교에 관한 안건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 공의회의 결정과정도 매우 모범적인 교회 회의의 첫사례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22절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다시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안이 당시에도 매우 중요한것이었던 만큼 안디옥 교회에 속해서 파송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가서 예루살렘공의회에의 결정을 전달하기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대표 두 명을 파송하여 이 결정에 공신력을 더하고자 한 것으로보입니다.

그래서 22절 하반절에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 두 사람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23절에 그 두 사람 편에 발신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고, 수신자는 안디옥 교회와 이방인 신자들로 된 본문에는 편지라고 되어 있지만, 일종의 의회 결정공문을 전달하게됩니다.

그 내용은 24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이것은 ‘할례 받으라.’, ‘율법 지켜라.’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공식적으로 파송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5-2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을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라고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 사안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하는 유다와 실라가 말로 전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의 정당성과 공신력을 뒷받침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끝으로 28절에서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함으로서 이 모든 결정이 ‘우리 모인 사람들이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도 속에서결정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 때에 그들의 주어진 문화 속에서 구원 얻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되도록 강요받지 않아도 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이 어느 지역, 어느 민족 이방인일지라도 자유롭게 이방 문화 속으로 흘러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비본질인 문화적 요소들이 복음 앞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기독교가 유대인의 민족 종교에서 모든 열방 세계인의 종교로 확장되게 하는 결정적인 추진체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예루살렘 공의회가 없이, 이방 사람인들에게 ‘너희들도 예수 믿으려면 유대인처럼 할례 받고 율법도 지켜야 되고 예루살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야 된다.’라고 했다면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여전히 유대 종교로 남아있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선교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할 때 타문화권인 현지에 우리 한국 교회의 방식과 문화를 그대로 가져다가 전하고 이식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선교는 순전한 복음만이 전해져서 그들의 언어, 그들의 문화 속에서 그들 나름의 길로 교회를 만들어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한국교회를 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을 통해 새겨야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다른 문화 속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과제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 이 메시지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이해의 장벽’으로 비유되는데, 그 이해의 장벽을 넘어 그들이 이해할 수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인 것입니다.

또 복음이 이해될 수 있게 그들에게 전하고 또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맞지 않아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기 어렵다면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수용의 협곡’ 으로 비유하면서, 이 문화의 협곡 사이에 있는 문화적 거리감을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이해의 장벽을 넘고, 수용의 협곡을 건너서 복음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줌으로서 그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나아가서 회심의 반응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핵심이 바로 언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해와 문화에 맞는 언어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는 그들이 해야 할 노력이 아니고, 전하는 선교사가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쉽게 잘 받아들이도록 복음 증거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에다 맞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타문화 의사 전달하기’라고 합니다.

선교사가 되려는 분이 있다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훈련이 ‘타문화 의사전달하기(cross cultural communication)’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그들의 이해에 맞추어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잘 훈련되고 준비되어야 효과적인 타문화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역에 사용되는 모든 문화 요소가 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은 지역과 종족을 불문하고 메시지 전달과 마음을 여는 공감 면에서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사역에 다양하게 많이 이용합니다. 이 음악 역시 그 땅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그들의 음악 언어를 파악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온 서양 선교사님들이 음악을 분석하는 능력이 있어서, 당시 조선 사람들은 ‘궁상각치우’에다가 ‘8분의 6박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파악하여 찬양을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양입니다.

가락이나 곡조가 한국 사람들 정서에 잘 맞으니, 그 음악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빨리 머리에 이해되고, 마음에 수용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음악을 가져다가 강제로 전달하면 거기서부터 거리감이 생기고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지만, 인도에 간 선교사가 자신이 은혜 받았던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를 인도말로 번역해서 인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가르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찬송의 곡도 훌륭하고 가사도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의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인도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좋은 찬송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의 곡은 영국 국가(國歌)입니다. 그런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곡을 듣는 인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조국 인도를 식민지배 했던 원수 나라의 국가를 우리에게 부르라고 하다니’ 하면서화를 내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음악 뿐 아니라 음식도 선교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도에 간 어떤 한국 선교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자 한국음식을 인도인들에게 대접하는데, 하필 한국의 유명한 소불고기를 대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먹겠습니까? 힌두교 문화권에 사는 인도인들에게 소는 신으로 섬기는 대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잡아 먹을 수 없는 금기 중의 금기인 것이죠. 그러니 소불고기가 아무리 가장 유명한 한국 요리라 한들 그 노력과 수고가 인도 힌두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제 친구 중에 인도인 목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기독교 목사님이지만, 그가 나고 자라온 문화 때문에, 또 그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인도인들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에게 생각 없이 소불고기를 대접하면 안되는 것이죠.

또 인도네시아 한 교회에서 한국 목사님이 전도 집회를 인도하시는데, 이 목사님이 집회에 온 사람들을 대접한다고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에 돼지고기를 맛있게 요리해서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이 교회는 이제 앞으로 전도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아니 이슬람 나라에서 이슬람 사람들을 초청해서 어울리며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이슬람에서 금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내 놓으면 누가 그것을 먹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고기도 돼지고기도 좋아해서 맛있게 먹지만,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이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 이러한 문화적 요소들을 미리 알고 조심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증거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가서 그들에게 텍스트나 메시지로서의 복음을 잘 증거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교사가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하려는 복음과 그들의 문화 사이에 이해와 수용의 걸림돌들이 있다면 사전에 제거하여 어찌하였든지 그들이 쉽게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까지가 선교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들과 같아져 그들 문화 속에 한 알의 밀알처럼 심겨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성경 말씀처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어 그 땅에서 복음의 큰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선교지의 문화를 고려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그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을 기존 자기 공동체에서 빼내어서는 안 되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선교사들의 실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이 사람이 그들의 동족 공동체 속에서 핍박 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선교사의 선교 캠프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 종족이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잘 지내는 착한 사람을 속여 유괴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복음에 대해서 더더욱 적대적이게 되고 이전보다 훨씬 깊은 수용의 장벽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처음 믿은 그가 그들 동족 공동체 안에서 핍박을 받는 것 같아도 오히려 그를 격려하고 도와 그의 삶의 터전에 그대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그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을 회복시키시고 돌아가시려고 하셨을 때, 그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39절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셨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였습니다.

정말 회심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면, 그도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제자가 되었으므로 비록 남아서 핍박을 당할 수 있지만, 견디며 그곳에 남아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사랑을 그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지 거기서 빼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그들의 문화를 떠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자신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더욱 바르게 가르치며, 그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수 있도록 양육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질 때, 복음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하여 그들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이 증거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누어지면 그들만의 독특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열매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사랑이 있을 뿐이지 복음을 이루는 어떤 정형화된 문화적인 모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잘 접목되고,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선교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선교사가 선교현장에서 그것을 고집하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를 다시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선교사는 선교할 그 땅의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앞에 철저히 겸손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순전한 복음을 전달해주기 위해 철저히 그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과 같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선교사 자신이 순전한 복음을 온전히 소유하고 전하고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잘 복음을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함께 받았던 복음을 둘러싼 그 모든 껍질들을 다 벗겨내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탁월함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만 잘 할 수 있다면, 그 순전한 복음은 꿈틀대며 그 땅과 사람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나갈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소유하고 전하는 복 된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 설교편집 | 강 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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