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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종교(1) 가톨릭

CAS 디스커버리(1)
Web Journal   30호 2024.5

종교는 인간의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자, 행동과 이념 체계, 진리에 대한 인식, 세계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번 CAS 30호부터 베트남의 종교를 연재하여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필자의 관점은 베트남의 역사와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처한 상황을 통해서 고찰해본 종교 이해이다. 글 게재순서는 기독교를 우선적으로 다루어보겠다. 베트남 기독교 이해는 베트남이라는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 선교와 교회 현황 파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역사 고찰을 중심으로 가톨릭을 먼저 살펴보고, 이후 개신교는 교회 현황 위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기독교라는 외래 종교가 베트남이라는 특정한 사회・문화 가운데 어떻게 성장 발전하고 고난과 시련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외형만 보고 평가하는 잘못을 범하진 않을 것이고 베트남 기독교와 신학 건설에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동반자 역할을 더 잘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에 베트남의 종교를 조사하는 가운데 베트남의 가톨릭 교회가 ‘아시아의 장녀 교회’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아시아에 유일한 가톨릭 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필리핀에 필적한 만한 대상으로 베트남 가톨릭을 간주한다는 의미인데, 그 이유는 베트남의 역사에서 가톨릭이 500년 동안 생명력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베트남 천주교인들의 순교 영성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강한 신앙 때문이었다.

베트남에서 가톨릭 교회는 17세기 초반인 1625년부터 19세기 말 1886년까지 약 260년간 거의 300년 동안 오랜 박해를 겪었는데, 이때 3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순교의 피 위에 기독교의 토대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 베트남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오랜 전통문화 사상인 부모공경의 유교사상과 ‘머우땀푸 (Mẫu Tam phủ), 도모(đạo Mẫu )’라는 어머니 여신 숭배사상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베트남 가톨릭의 각별한 성모신심(聖母信心)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더 토착화 될 수 있었다. 이런 핍박과 순교영성, 성모신심 문화는 베트남에 가톨릭의 유명한 성지(聖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베트남의 가톨릭 성지는 박해 시기였던 1798년에 성모께서 발현해 신자들을 위로한 라방성지(La Vang)와 1885년 성모발현의 짜끼우성지(Trà Kiêu)이다. 이 두 성지는 바티칸 교황청과 베트남 가톨릭 교회가 공인한 성모발현지로서 지금도 베트남 및 해외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베트남 역사 속에서 오랜 부침(浮沈)을 통과한 가톨릭 교회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1).

고대 반얀나무 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이곳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한다, 사진출처:wikipedia

예수회 선교사들의 교회 개척 시기

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박해시기 민간 야사(野史)에 근거하여 이냐시오라는 프랑스 선교사가 비밀리에 전교를 했다는 1533년을 공식적인 복음화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베트남 가톨릭의 본격적인 복음선포는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베트남은 명나라를 축출한 후레왕조(Nhà Hậu Lê, 後黎朝)가 통치했으나, 정치적 실권을 쥔 응우옌(Nguyễn, 阮)과 찐(Trịnh, 鄭)이라는 두 가문이 각각 베트남의 남북을 나누어 다스렸던 때이다. 가톨릭 선교는 일본에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 부조미(Francesco Buzomi)와 카르발로(Diego Carvalho)가 다낭에 정착하면서 남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이후 1627년에는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가 북부에서도 선교를 시작했다. 로드 신부는 당시 지식인과 엘리트층이 쓰던 한자 대신 라틴어를 활용한 현재의 베트남 문자를 창안하고, 『베트남어-라틴어-포르투갈어』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학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와 베트남-라틴어교리문답, 사진출처:wikipedia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구문명과 과학사상을 전파하며 베트남의 근대화를 돕고, 새로 창안한 문자로 베트남 사람들의 문맹률을 낮추며 교리를 가르치는 등 베트남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 신앙은 공자와 조상제사를 중시하던 베트남의 유교 전통과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베트남 사람들의 풍습과 관습, 전통신앙을 존중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공자나 조상숭배 예식을 사회·문화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미신적인 요소를 배제한 후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베트남 통치자들은 가톨릭 신앙이 베트남의 풍속과 윤리를 해치고, 사회 통합을 방해한다고 여겨 일찌감치 선교활동을 금지시켰다.

이후 1625년이 되자 베트남 남부에서 천주교를 믿거나 집에 십자고상, 성화, 성상을 두는 것을 금지하였고, 1628년에는 북부에서도 유럽인 선교사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1630년에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른 죄로 신자 한 명이 참수형에 처해졌고, 1644년에는 로드를 돕던 교리교사가 참수되었으며, 로드 신부도 체포되어 강제추방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북베트남에서는 1663년, 남베트남에서는 1665년에 모두 추방되었는데, 이 시기에 가톨릭 신자 수는 약 1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진출과 대규모 박해의 시작

베트남에서 영구추방된 로드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베트남 가톨릭 교회 설립과 선교사 파견을 교황청에 청원했으며, 베트남을 위한 선교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이후 1659년 교황청은 베트남에 2개의 대목구를 설정하고 프랑스인 라 모트(Lambert de la Motte) 주교와 팔루(François pallu) 주교를 각각 감목대리로 보냈다. 두 주교는 베트남으로 선교를 가는 도중에, 1664년 시암(현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에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현지 문화에 따른 토착화를 원칙으로 하는 파리외방전교회(M.E.P.)의 사목지침을 마련하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가톨릭 선교가 금지된 베트남 정세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에 더해 가톨릭 내부에서는 기존에 활동하던 예수회의 문화 수용과 다른 선교방식 및 감목대리의 수위권 확립과 관련한 불화 등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태국 아유타야에 세운 성 요셉 신학교, 사진출처:wikipedia
1665년 교황 클레멘스 9세 의 지시에 기초하여 프랑수아 팔뤼(François Pallu, 원형사진)와 피에르 램베르 드 라 모트(Pierre Lambert de la Motte) 가 쓴 “선교사에 대한 지침”, 사진출처:wikipedia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활동은 계속 확장되어 라 모트 주교는 1668년에 베트남 현지인 사제 4명을 처음으로 서품하고, 1670년 아시아 최초의 방인수녀회인 ‘성 십자가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다. 베트남교회는 1677년에 3개의 대목구로 확장되고,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 현지인 사제들과 수녀들, 헌신적인 평신도 교리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특히 1771년 일어난 떠이썬(Tây Sơn, 西山)의 난을 진압하는데 피뇨(Pigneau de Béhaine, Bá Đa Lộc, 百多祿) 주교가 후에 쟈롱(Gia Long, 嘉隆) 황제가 된 응우옌푹안(Nguyễn Phúc Ánh , 阮福暎)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앙이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피뇨(Pigneau de Béhaine, Bá Đa Lộc, 百多祿, 좌) 주교와 응우옌푹안(Nguyễn Phúc Ánh , 阮福暎, 우), 사진출처:wikipedia

그러나 이번에는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단체 파리외방전교회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가 폐교되고 베트남 선교 인력도 계속적으로 감소하면서, 19세기에 접어들어 베트남 선교활동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한편 베트남을 통일하고 왕위에 올라 비엣남(Việt Nam, 越南)으로 국호를 바꾼 쟈롱 황제는 처음에는 피뇨 주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톨릭 선교를 허용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으나, 그가 정권을 잡도록 도왔던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해 동아시아 진출을 엿보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이어 쟈롱 황제의 뒤를 이은 민망 황제(Minh Mạng, 明命)는 완고한 유교주의자로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식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했다. 쟈롱 황제의 등극에 큰 역할을 했던 레반주옛(Lê Văn Duyệt, 黎文悅) 장군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민망 황제에게 맞서 선교사들을 옹호했지만, 그가 사망하자 민망 황제는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후 1833년 레반주옛 장군의 양아들인 레반코이(Lê Văn Khôi, 黎文𠐤)가 민망 황제를 몰아내려고 무신정변을 일으켰는데, 그때 프랑스 선교사인 마르샹(Joseph Marchand)과 가톨릭 신자들이 반란군 측에 함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58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했다.

프랑스 선교사인 마르샹(Joseph Marchand)의 순교, 사진출처:wikipedia

이후 1848년부터 1869년까지는 거의 매년 천주교를 금하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고, 이 금령(禁令)으로 인해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아시아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 해군함대는 구금된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석방하고 선교사들의 안전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계속 압박을 가했다. 프랑스는 1857년 몽티니(Charles de Montigny) 사절단을 보내 베트남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와 프랑스와의 무역과 외교를 요구했으나, 베트남 왕실이 이를 거부하자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을 꾸려 다낭을 점령했다. 다낭이 함락되면서부터 천주교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1858년부터 1885년에 10만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천주교 신자는 크게 늘어 18세기 초에 35만 명이던 신자 수는 1885년에 68만 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고 대목구도 8개로 증가했다.

프랑스 식민통치와 베트남 독립운동

프랑스는 1885년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남부), 안남(중부), 통킹(북부)으로 분할해서 통치했고, 1893년에는 라오스까지 합병해 오늘날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거점은 베트남, 그것도 코친차이나 남부와 중부 지역이었다.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에 가톨릭교회는 선교의 자유를 누리며 급속도로 발전했다. 중심 도시와 마을 곳곳에 크고 화려한 성당이 건축되고, 신학교, 수도원 등 다양한 교회시설 건축이 이뤄졌다. 선교사들은 특히 학교교육에 큰 관심을 보여 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이런 부흥기에 1933년에는 응우옌바똥(Nguyễn Bá Tòng) 신부가 베트남인 첫 번째 주교로 서품되었다.

응우옌 바 통(Nguyen Ba Tong) 주교(1868-1949), 사진출처:wikipedia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가 약화되자 일본은 1940년 중일전쟁을 빌미로 베트남에 주둔하고, 응우옌 왕조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모색했다. 이와는 별도로 1941년에는 호찌민(Hồ Chí Minh, 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 Viet Minh, 越盟)이 결성되었다. 호찌민이 베트남 역사 전면에 부상했을 뿐 아니라, 강한 조직 장악력과 세계적인 변화의 기회를 만나게 된 것이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항복하자, 호찌민은 8월 혁명(전국적인 민중 봉기)을 일으켜 베트남 독립을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올랐다. 당시 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했지만, 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 식민권력에 부역했다는 반감이 매우 컸다. 반(反) 식민지, 반(反) 가톨릭 분위기가 점점 고양되기 시작했다.

남북 민족분단 시기 가톨릭 교회의 딜레마

한편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이후 동남아시아까지 공산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베트남을 다시 지배하려는 프랑스는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 군대의 무장해제를 빌미삼아 연합군을 베트남에 주둔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베트남 남부에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코친차이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6년 베트남 남부에 다시 주둔한 프랑스는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은 프랑스-베트남 전쟁 혹은 베트남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당시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하 북베트남)만을, 자유 민주 진영을 대표하던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남부 코친차이나공화국과 그 후신인 베트남국(이하 남베트남)만을 각각 국가로 인정했다.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과 미국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 군대는 이후 8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표방했는데, 1949년 7월 칙령을 발표하여 어떤 식으로든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협력하는 신도들은 파문을 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1950년 11월, 베트남 가톨릭 주교회의는 성명을 내어 가톨릭 신자들이 공산당이나 베트민(越盟)의 운동에 가담하거나 협력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독립에 반대하는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이었는데, 이를 공산당에 대한 협력으로 보는 바티칸 가톨릭 교회 중앙의 교회지침 때문에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던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戰役奠邊府)에서 프랑스 군대가 패전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민(월맹)의 승리로 끝났지만, 바로 그해 7월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다. 이에 북베트남은 사회주의를 따르고, 남베트남에는 친서방 정권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과 북에 있는 베트남 주민들에게 거주지 선택권을 주면서, 북베트남에 살던 65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과 대다수 사제, 수도자가 남베트남으로 이주했다. 당시 남베트남으로 내려온 이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다 보니, 북베트남 정부에서는 천주교가 ‘베트남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각인되었다.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신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완전한 종교자유를 약속했지만 이들의 탈주를 막지는 못했다. 당시 정부의 설득이 소용없자 조직적으로 남부로 탈출하려는 이들을 체포해 재판에 넘기거나 처형하기도 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점령된 프랑스 본부에 깃발을 꽂는 베트남 군대, 촬영: Trieu Dai, 사진출처:wikipedia

이후 북베트남 정부는 1955~1956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는데, 대부분 농민이던 가톨릭 신자들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부농들이 인민재판으로 10만 명 이상 사형을 당하고, 강제 농업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가톨릭 교회도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했고, 성당 안에서 미사는 드릴 수 있었지만 교리교육이나 신자 방문 같은 선교활동은 금지되었다. 1955년 북베트남 정부는 중국교회처럼 ‘애국천주교통일위원회’를 설립해 가톨릭 교회를 와해 분열시키려 했으나, 주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남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북에서 내려온 신자들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남부에 많은 가톨릭 학교가 설립되었고, 의료와 사회복지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남베트남의 지도자인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吳廷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상당수가 열정적인 가톨릭 신자라서 당시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도 갈수록 커졌다. 남베트남의 정치인과 교회지도자들은 철저한 반공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후 1960년에 요한 23세 교황은 베트남에 교계제도를 세워 3개 관구에 17개의 교구를 설정했다. 북부 하노이 관구에 9개 교구, 중부 후에 관구에 3개 교구, 남부 사이공 관구에 5개 교구를 세웠는데, 17개 교구 전부 다 베트남인 주교를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이와 반대로 남북 베트남의 분단 시기 동안에 북베트남의 가톨릭 교회는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이 된 채 고난을 겪고 고립되었다.

베트남전쟁과 공산화 통일

그런데 북베트남과 달리 가톨릭의 영향이 강하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의 폐단 및 이에 더해 베트남 국민 대다수가 믿고있던 불교를 정부가 탄압하면서, 결국 정부에 저항하는 무쟁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남부의 혼란 시기에 1960년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남베트남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응오딘지엠은 1963년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실각당한 후 바로 처형되었다.

이에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에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해군 구춤함을 공격하여 양국 함대가 교전한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Sự kiện Vịnh Bắc Bộ)을 빌미로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을 공식화했다. 이 당시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북베트남에 투하하고 막강한 군대를 동원했으나, 베트남군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에 밀려서 결국 1973년 파리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북베트남의 총공세로 중부 다낭과 남부 사이공이 차례로 함락됨으로써 베트남은 결국 1975년 공산당이 통치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공산화된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의 적국 역할을 하던 서방과의 통상금지 정책을 하며 고립정책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1978년 캄보디아를 공격해 크메르루주(캄보디아 공산당)를 몰아내고 10년간 캄보디아를 지배하면서 우방이던 중국과도 긴장이 고조되어 베트남 정부는 오직 소련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고립 상황으로 인해 베트남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다.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선택과 억압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베트남 국민들은 결국 대규모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명 ‘베트남 보트 피플’이라 한다. 해로를 통해 베트남을 탈출하던 난민들을 일컫는 말이다. 1970년 이후 부터 1990년 사이 베트남을 떠난 ‘보트피플’의 수는 약 100만 명에 이른다. 대체로 보트 피플은 남베트남에서 정치인, 군인, 관료, 교사를 했거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절에 프랑스 정부 밑에서 일을 했던 친불파들과 부유층 즉 부르조아 계층과 지주, 그리고 1978년부터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간의 국경분쟁으로 인한 화교 탄압으로 화교들이 보프피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베트남의 이주난민으로 주로 미국에 그 외 호주, 프랑스 등 서구 국가로 망명했다.

남베트남이 베트민 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정권이 된 이후 탈출하는 보트피플, 사진출처:wikipedia

북부 베트남이 승리하여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되면서 분단시기에 강력한 반공주의 태도를 보였던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더 큰 수난을 받아야했다. 통일정부는 일례로 응우옌 반투안(P.X.Nguyễn Vãn Thuận) 대주교를 남베트남 정권과 관계가 있었을뿐만 아니라, 민족해방(통일)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이공 대교구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1974년부터 1988년까지 14년 동안 구금시켰다가, 1991년에는 해외로 영구 추방했다. 반투안 대주교는 이후 바티칸에서 로마 교황청과 베트남 가톨릭을 연결하는 주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 협정 이후 남으로 내려왔던 신자들 역시 수용소에 억류되어,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에 적합하도록 집중적으로 개조학습을 받아야 했다. 당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수용소에서 죽거나 병들며, 가난하게 고통을 당했다. 가톨릭이 운영하던 시설들도 북베트남에서 그러했듯 남베트남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던 341개의 학교를 비롯하여 병원, 사회복지 시설 등이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고, 교회활동과 종교서적은 전면 금지되었다. 신학생 선발 인원과 자격에 대해서도 정부가 2년마다 입학허가를 하고, 1975년에는 교황사절과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했다. 정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이들은 정부승인 없이 몰래 서품을 받고 ‘불법적인’ 지하교회 사제로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

또한 베트남 정부와 공산당은 베트남 가톨릭교회가 ‘모든 외국으로부터의 종속에서 자유로운 독립교회’가 되도록 요구하며,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1980년이 되면 그때까지 남북으로 나뉘어 있던 두 개의 주교회의가 ‘베트남가톨릭주교회의’로 통합된다. 베트남 개신교가 현재까지 아직도 남북 교단으로 두 개의 교단으로 존재하는 것과 대비된다. 하나로 통합된 베트남 주교회의는 1980년 당시 공개서한을 통해서 과거 베트남의 역사에서 식민지배세력과 함께했던 베트남 가톨릭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후 1983년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주도로 전국 ‘애국천주교통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베트남 박해시기 순교한 안드레아 둥락(Anrê Dũng Lạc) 사제 등 117명의 베트남 가톨릭 순교성인을 로마에서 시성했다. 이때 베트남 정부는 ‘식민주의자들의 주구(走狗)’를 시성한다며 공식대표단의 시성식 참석을 불허했다. 80년대 베트남 가톨릭은 사회주의 체제 가운데 가톨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하여 우선 내부적으로 주교단 통합과 국민들에게 공개적인 사과를 통해 베트남 가톨릭을 다시 정립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아 둥락(Anrê Dũng Lạc)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사진출처www.flickr.com

도이머이 정책과 종교 자유 확대

한편 베트남의 대서방 견제와 고립정책으로 베트남의 민생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점점 더 커지자 결국 베트남은 1986년에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많은 요소를 포함한 개혁정책인 ‘도이머이(Đổi Mới)’로 전환했다. 이후 1989년에는 베트남 군대를 캄보디아에서 철수시키면서, 1991년 중국과 국교를 다시 재개 정상화했다. 90년대 1994년에는 미국이 베트남의 경제봉쇄 조치를 해제하고, 1995년에 베트남과 수교하면서 지난 25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적에서 동반자 시대를 맞이했다.

이런 개방의 움직임은 가톨릭교회가 다시 활동을 재개할 기회가 되어. 오래된 낡은 성당을 대신할 많은 성당이 지어졌고, 가톨릭 교회단체와 신자들은 베트남 정부의 묵인 아래 자선활동 을 다시 시작했다. 가톨릭 선교의 자유는 얻지 못했지만, 완전히 제한되었던 종교의 자유가 점차 확대되었다. 1999년 8월에는 베트남 가톨릭 교회가 ‘라방 성모 발현 200주년’을 맞아 전국 차원의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오늘의 베트남 가톨릭 교회

지난 2016년 교황청 공식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 가톨릭 교회의 신자 수는 약 671만 명으로 그 당시 전체 인구 중 7.4%를 차지한다. 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 총 3개 관구 26개 교구에 총 2,979개 본당이 있어 공산권 국가임에도 필리핀교회만큼이나 성당이 많다. 이런 베트남 가톨릭의 교세로 가톨릭 사제성소 지원자들은 많지만, 정부가 신학생 선발과 사제서품 승인 등을 통제하기 때문에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그래도 3,601명의 교구사제와 1,320명의 수도사제가 있고, 남자 수도자 2,644명, 여자 수도자 16,884명으로 동남아시아 국가 중 수도자의 수가 가장 많다.

현재 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민족의 화해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베트남 주교회의는 2010년 교계설정 50주년을 맞은 특별 성년을 보내면서 공개적인 발표를 통해 또 다시 ‘참회’와 ‘사과’를 언급했다. 이유는 베트남 가톨릭교회 당면과제가 정부의 통제를 극복하는 것과 베트남 사회에서 ‘개인 신앙 생활 중심’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인 참여와 봉사를 통한 이미지 개선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공산국가인 베트남 가톨릭 교회는 현실적 상황으로 주교임명 과정에서 정부와 교황청이 협상을 거친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교황이 주교를 임명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바티칸에 제출되는 주교 후보자 명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바티칸의 결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교임명을 두고 교황청과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중국 가톨릭의 경우에 베트남의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외부인들이 보면 베트남의 가톨릭이나 개신교 양자 다 개인적인 신앙 위주의 울타리가 강하다고 비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역사 내부로 들어가 보면 베트남 가톨릭 역사에 각인되어 있는 박해가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외부인들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울타리를 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타종교인 및 다른 주변 베트남 사람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으며, 자기들끼리 생존을 위한 ’게토 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 교회는 개인 신심 위주의 신앙이 강하다. 사회주의 정부의 수많은 제약적 원인으로 주로 ‘나 홀로 구원’의 신심이 강한 것이다.

현재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사회 선교 차원에서 베트남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야기한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숙자와 장애인 사역, 경제발전의 여파로 이혼과 마약중독이 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사회에는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과 남아선호의 유교문화, 성개방 풍조로 인해 낙태문제가 유난히 심각해서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생명운동도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교육, 의료나 사회복지 등 사회적 영역에서의 참여를 조금씩 더 확대하고 있다.

베트남 가톨릭은 90년대 들어 불교와 함께 ‘베트남조국전선(VFF: Vietnam Fatherland Front)’에 소속되면서 다시 베트남의 주도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 사이공 노트르담 성당(Vương cung thánh đường Chính tòa Đức Bà Sài Gòn or Nhà thờ Đức Bà Sài Gòn)등 프랑스 식민시절 지어졌던 주요 성당들도 주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내외 여행자들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매주 일요일 수 천명이 참여하는 미사도 도시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사이공 노트르담 성당(Vương cung thánh đường Chính tòa Đức Bà Sài Gòn or Nhà thờ Đức Bà Sài Gòn), 사진출처:wikipedia

현재 베트남에는 약 70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의 신도 수로만 보면 아시아권에서는 필리핀, 한국에 이어 3위 수준이다. 작년 2023년 7월 27일에는 바티칸을 방문한 베트남 대통령 보반 트엉(Võ Văn Thưởng)과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48년 만에 베트남과 바티칸 간의 관계회복의 신호탄으로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9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베트남의 700만 가톨릭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 일을 계기로 베트남에서 가톨릭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베트남 가톨릭의 긴 어둠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적인 미래의 도래를 다시 꿈꾸게 된 것이다. .글 | 정보애(SIReNer)

[각주]
1) 베트남 가톨릭 역사 부분을 기술하기 위해서 주로 참고한 자료는 아래와 같다.
편집부, 아시아에 뿌리 내린 가톨릭: “순교영성과 성모신심을 간직한 베트남교회”, 『가톨릭 평론』, 2017년. 7-8월호. 우광호, “아시아 교회가 간다Ⅱ 34. 베트남(2) 베트남 교회 역사와 현황”, 『가톨릭신문』, 2007. 2. 11 에안, 이도경, “베트남 교회를 가다 (1) 베트남 사회와 교회 상황”, 『가톨릭시눔』, 2010. 3. 7. 편집부, “베트남 교회, 교황 방문 공식 요청”, 가톨릭신문, 2023. 11. 05. 위키피디아, 베트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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