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 디스커버리(2)
Web Journal 30호 2024.5
베트남의 개신교 역사는 핍박과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선교 초기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톨릭의 대표국가였던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해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전파에 대한 반대와 핍박이 있었고,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에는 북위 17 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이 지원하고, 북쪽은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는 형태가 되어 북부 지방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서 벌어진 베트남전쟁, 미국이 일으킨 통킹만 사건 1년 뒤인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은 전쟁의 상흔과 고난이 있었으며,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의 통일 이후에는 대부분 교회가 폐쇄되고 목회자들이 큰 핍박을 당하였다.
역사적으로 기나긴 고난을 통해 형성돼가는 베트남 교회는 두 개의 큰 과제가 있다. 첫째는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복음성회의 총회가 하나가 되는 것, 곧 교단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며, 둘째, 가정교회와의 화해이다. 오순절 성령 운동, 혹은 다른 복음이라고 여겨 품지 못하고 갈라치기 하면서 박해당하고 나누어진 가정교회와 화해하는 일이 베트남 교회의 남겨진 큰 과제이다.
베트남 기독교를 이해하려 우선 CAS 30호 ‘베트남의 종교 1. 가톨릭’ 편에서 가톨릭의 과거와 현재를 고찰해보았다면, 개신교 부분은 현재 상황 파악에 초점을 두겠다. 작년 8월 UPMA 팀 베트남 현장 리서치 개신교 관련자 인터뷰에서 공인교회, 비공인교회, 가정교회, 남부 총회, 북부 총회 등 여러 개념이 사용되고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우선 베트남 개신교 관련 용어와 개념 정리부터 시작해보자. 지난 2004년에 공식적으로 베트남 정부가 ‘신앙, 종교 법령’을 제정하기 전까지 베트남에서 개신교는 정부의 승인 여하에 따라 공인교회와 비공인교회로 나누어졌으며, 다시 공인교회는 법인 자격이 있는 교회(교단)와 법인 자격이 없는 교회(교단)로 구분하였다. 당시엔 개신교 대부분을 차지하는 ‘베트남 복음 성회’만이 법인 자격으로 등록된 유일한 교회(교단)였다.
- 베트남 교회의 부흥과 현황1)
베트남의 기독교 인구는 국민일보 2009년 5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 2%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수민족이 분포한 시골 지역을 중심으로 놀랍게 부흥하고 있었다. 베트남복음성회 북부의 전 총회장인 풍 꽝 후옌(66) 목사는 2009년에 북부지역에 148개의 기도처가 정부의 공인을 받은 상태이고, 그해 연말까지 200곳이 넘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에 비해 목사의 숫자는 겨우 12명에 불과하다”라면서 “평신도지도자 1명을 파견하면 움막이나, 나무 아래나 가리지 않고 500∼600명이 모여든다.”라고 새로운 교회 부흥과 함께 이를 감당할 사역자와 목회자 부족의 심각성을 토로했다.
한편 이에 비해 당시 베트남 남부 지역의 교세는 2000개의 예배처소가 있고 이 중 목회자(목사 혹은 전도사)가 있는 정식 교회도 400곳에 이른다. 과거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던 남부 지역은 비교적 기독교에 개방적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의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북부는 호치민의 베트콩 정부가 통치하면서 베트남 북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교세가 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베트남 북부는 주로 북부 산간 지역의 소수민족 교회들이 빠르게 부흥을 하고 있으며, 선교사들도 소수민족 선교를 더 활발히 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성립이었다. 1975년 공산화가 될 무렵에 베트남에는 약 10만 명의 성도가 있었는데, 사회주의의 전면적인 통치, 더욱이 종교에 대한 인식과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의 역할로 인하여, 베트남 성도와 교회는 통일 이후 더 숨죽여 지냈다. 당시 아시아 굴지의 신학 교육기관이었던 남딘신학교가 즉시 폐교당했고, 모든 전도 행위가 일절 금지됐다. 이때부터 대부분 교회가 지하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베트남 교회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1980년대 후반의 ‘도이모이’ 개혁·개방 이후다. 정부가 교회를 인정해주면서 먼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기도처소가 생겨났고 그동안 중단됐던 신학 교육도 재개가 되었다. 남부 복음총회는 1976년에 폐쇄당한 지 27년 만인 2003년에 베트남신학교를 재건해 2006년 첫 졸업생 50명을 배출했는데, 당시 북부 복음총회에서도 이곳에 북쪽 지역의 신학생들을 위한 신학 교육을 위탁했다. 그때까지 북부지역에선 신학교가 재개방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북부의 목회자 수급을 위해 운영 허락을 받았던 하노이 신학교가 1994년에 마지막 졸업생 15명을 배출하고 정부 당국의 지시로 중단된 지 12년 만에 베트남 남북의 미래 교회지도자들이 같은 신학교를 통해 함께 공부하면서 베트남 교회의 통일을 위한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몇 차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24년 현재 아직도 베트남 남과 북의 교회는 통일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베트남 국가 통일 12년 만에 남부의 베트남신학교를 통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었던 베트남 교회가 화합과 화해, 하나 됨을 실현할 교회지도자들을 배출해내는 장(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80년대 개혁개방 정책 이후 1990년~2000까지의 베트남 교회 현황은 베트남 복음성회 남부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들이 호치민의 사이공 중앙교회를 중심으로 사이공의 40개 교회를 포함해서 약 200여 교회가 있었으며, 총 7개 노회가 있는데 2개의 노회가 고산 부족/종족 노회에 속했다2). 한편 북부의 복음성회 베트남 복음주의 교회는 하노이 항자교회를 중심으로 당시 약 35개 교회가 있었으며, 하노이 신학교는 1994년 당국의 지시로 문을 닫아야 했다3).
이후 2016년 베트남 선교사가 현지 자료에 의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공인교회 성도 수는 7십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약 150만 명의 소수부족 성도를 합한다면 전체 220만 명 정도라고 추정된다4). 한편 교역자는 공산화 이후 신학교가 폐쇄되어 그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받은 목사나, 신학교 과정을 수료했으나 안수를 받지 못한 전도사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어 오다가 2001년 2월 9일 복음총회가 열리고 총회가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총회 결의로 신학 과정을 수료한 158명의 전도사가 2001년 5월 첫째 주에 목사 임직을 받게 된다.
베트남의 교회 숫자에 대해서는 베트남 교회의 여건상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집회를 허락받은 공인교회와 교회가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처소교회, 기존 교회와 상관없이 비밀리에 모이는 처소교회와 가정교회들이 90년대, 2000년대 이후 점점 더 많아졌으며, 2020년대 이후에도 계속 교회가 부흥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인받은 교단인 베트남복음성회에 속한 교회 숫자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 2016년까지 총 625개 교회가 있으나 이 가운데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북부가 15개 교회, 남부가 193개 교회가 있으며, 교역자가 없는 교회들이 65개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75년 공산화 이후 문이 닫힌 교회가 287개, 빼앗긴 채 다른 용도로 사용 중인 교회가 65개 처로 아직도 교회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352개가 남아있다5).
- 베트남 개신교 관련 용어/개념을 통해서 보는 베트남 교회 이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건립된 1975년 이후,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개신교 교단 중 북부 베트남복음성회 총회(아래 설명의 4번 항목)가 가장 먼저 공인이 되었다, 한편 가톨릭과 개신교가 ‘75년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남부 베트남복음성회는 20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교단 총회로 공인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개신교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와 개념을 중심으로 베트남 개신교 상황을 알아보자.
(1) 공인교회: 베트남 정부로부터 교단 공인을 받은 교회를 말한다. 베트남 복음성회, 베트남 기독전도회, 베트남 은혜침례교회, 베트남 남침례교회, 베트남 개혁장로교회, 베트남 기독연합회, 베트남 하나님의성회, 베트남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2) 비공인교회: 베트남 정부로부터 교단 공인을 받지 못한 교회들을 말하고 전에는 지하교회 또는 가정교회로 불렸다.
(3) 가정교회(House Church: Hội Thánh Tư Gia): 처음 시작 때는 지하교회로 불렸으나 일반적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가정교회로 불렸다.
(4) 베트남복음성회(ECVN:Evangelical Churches of VietNam/HTTLVN: Hội Thánh Tin Lành Việt Nam): 베트남의 최대교단이며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교단이다. 베트남교회 역사는 대부분 이 교단의 역사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총회 연감에 의하면 총회 산하 공인교회의 성도 수는 25만이라고 보고했다
(5)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1897년 캐나다 장로교 출신의 심프슨(Albert Benjamin Simpson) 목사가 미국에서 설립한 초교파 선교 단체다. 베트남에 복음을 처음 전한 선교 단체며 지금은 베트남의 장자 교단인 위 (4) 베트남복음성회를 태동 발전시킨 단체이다. 베트남복음성회(ECVN:Evangelical Churches of VietNam/HTTLVN: Hội Thánh Tin Lành Việt Nam)가 베트남에서의 교단 이름이다.
(6) VEF(Vietnam Evangelical Fellowship): 베트남 가정교회 교단들의 연합 모임의 이름이다.
(7) CFV(Christian Fellowship of Vietnam): 베트남 가정교회 교단의 또 다른 연합 모임이다.
(8) UGOC(United Gospel Outreach Church): 1997년 4월 2일 시작된 가정교회이다. 전국에 257개의 교회와 656명의 목사, 43명의 전도사가 사역하고 있으며 성도는 27,000여 명이다.
(9) VDF(Vietnam Developer Fellowship): 베트남 호찌민시 중심의 중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선교사협의회다. 1995년에 조직을 갖추어 모임을 시작했으며, 교단과 선교 단체를 초월하여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한 가지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공인교회’와 ‘가정교회’라는 용어가 주는 선입관이다. ‘공산국가에서 교회가 공인을 받으려면 어용이 되거나 적어도 친정부적인 성향이 있어야 한다.’는 의혹이 우선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또 혹자는 중국의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와 유사하게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베트남에서 공인교회는 사실상 그 정체성이나 의미가 매우 다르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일부의 교회를 제외하고 대다수 많은 교회가 폐쇄되고 신학교까지 폐교되고 말았다. 그때 가정에서 예배들 드리던 성도들이 고발되었으며, 설교를 한 사람이나 예배 장소를 제공한 사람들은 벌금을 물 거나 감옥에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이 되어 베트남의 사회주의 경제가 파산 직전에 이르러 민생이 극도로 어려워지고 민심이 돌아서려 하자, ‘도이머이’ (개혁)정책으로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고 사유재산 일부를 허용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종교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일부 종교의 자유를 복원해 주었다. 이때 닫혔던 교회 일부가 다시금 문을 열게 된 것이다. 1990 년대 초반에서 중반이 되면 모임을 허가받은 교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동안 철저한 사회주의 집단농장체제와 무신론의 공산주의 정치 속에서도 예배를 끝까지 사수한 성도들이 모여 있던 지역의 교회들이 다시 교회 건물을 되돌려받고 십자가를 달 수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공인교회는 이런 핍박과 박해 속에서 ‘예배 사수 전통’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를 되찾은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6). 이런 공인교회 대부분이 ‘베트남복음성회에 속한 교회들이다. 지난 2008년 말 약 64만여 명의 신자가 있은 것으로 교단 내 통계로 보고되었다7). 특히 2007년 이후 베트남 기독전도회, 남침례교단, 은혜침례교단, 베트남장로교단, 메노나이트 교단, 기독전도회, 베트남오순절교단 등의 작은 교단들도 공인교단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 15개의 공인교회가 되었다. 이들 공인교회 교단들은 이전보다 좀 더 베트남에서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하게 되면서 교단별로 부흥과 확산의 속도가 가속되고 있다.
- 베트남 개신교 가정교회 탄생 배경과 발전
베트남 가정교회는 베트남 전쟁 후에 정부의 통제와 핍박이 심해지는 가운데, 교회가 폐쇄되고, 목회자들이 없어서 성도들이 몇 사람씩 흩어져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특별히 1980년~1982년, 공인교회에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은사 운동이 일어났는데 공인교회에서 은사 운동을 금하면서 교단과 목회자 간의 갈등으로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면서, 이들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베트남 가정교회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베트남 가정교회가 탄생하게 된 큰 배경이다.
그러나 이 글은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와 갈등’을 중심으로 ’베트남 개신교와 소수민족 문제‘, ’기독교 종족인 몽족과의 갈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향후 베트남 개신교 선교가 베트남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더욱 민감하고 지혜롭게 접근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직접적으로 베트남 전쟁은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이유로 대규모로 베트남 북부를 공격함으로 발발하게 되었는데, 이런 정치적 혼란기에 미국은 소수민족들을 이용해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곧 베트콩(Việt Cộng)을 와해시키려고 했다. 베트남 개신교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미국과 베트남 남부를 대신해서 북부 베트콩과 싸우던 소수민족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정치세력들이 태동, 발전하면서 반정부활동을 강력하게 진행해왔다. 이로인해 종전 후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혹은 반국가적인 종교집단으로 전락하여 베트남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와 국가로부터 배타적인 집단으로 따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는 전면적인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종전 이후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에 걸림돌이 되었던 수많은 교회는 문을 닫게 되고, 소외된 그룹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베트남 전쟁 이후에 정부는 특별히 ‘서부고원 지역’ 및 소수민족 교회들에 대한 박해와 감시가 매우 심했다. 현재 베트남 중부의 서쪽 고원 지대를 까오응우옌중펀(Cao nguyên Trung phần)이라고 하는데, 곧 닥락성(Đắk Lắk), 닥농성(Đắk Nông), 잘라이성(Gia Lai), 꼰뚬성(Kon Tum), 럼동성(Lâm Đồng)이 이에 속한다8). 과거에 이 지역은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종주권을 주장했던 곳으로, 19세기에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배해 온 프랑스가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형식으로 베트남(안남)에 통합이 되었던 곳이다.
짬(Chăm)족, 몽족(Mong), 므엉(Mường)족, 에데(Ê Đê)족, 자라이(Gia Rai)족, 바나(Ba Na)족, 써당(Xơ đăng)족, 꺼호(Cờ Ho)족 등 베트남의 여러 소수민족이 중부와 서부 고원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짬족, 몽족과 에데족은 풀로(FULRO, 억압인종 해방을 위한 연합전선)를 결성하고 베트남 정부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하나 소수민족 중심으로 베트남 가정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로 복음화 사역에 주력했던 베트남 기독전도회(Hội Truyền Giáo Cơ Đốc)를 들 수 있다. 국제선교단체 WEC이 세운 베트남기독전도회는 특별히 베트남 중부 연안과 남부 고원 지역에 흩어져 있는 소수종족들에게 집중적으로 선교했다. 1956년 9월에 베트남복음성회 소속이었던 고든 스미스(Gordon Smith) 선교사와 소수종족 사역자 일부가 당시 소수종족 사역에 관심이 있던 WEC의 지원을 받으면서 베트남 현지에서 새로이 베트남기독전도회 교단으로 창설되게 된다. 이 교단은 다낭에 본부를 두고, 1964년에 교단 공인을 받게 되었으나, 곧이어 터진 베트남 전쟁으로 1988년까지 본부를 비롯하여 대부분 교회가 모두 폐쇄되었다가, 지난 2006년에 종교활동허가를 받았으며, 2007년에 합법적인 종교법인으로 교단 승인을 받게 되었다.
한편 베트남 가정교회 시대구분은 크게 세 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1975년부터 1997년까지는 가정교회가 생기면서 공인교회와 정부로부터 핍박을 견디어 온 고난의 시기이고, 1997년부터 2007년까지는 가정교회 연합체가 생겨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연합운동을 하는 시기였고,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혼란기와 재정립기라 볼 수 있다9). 그 이유는 2007년 말에 1975년 이전에 존재했던 기존 교회들에 대한 정부의 공인이 있자 가정교회들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인받은 교회들은 기뻐했고, 몇 교회들은 공인받을 준비를 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 연합운동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모습들을 보였다. 2008년 이후 2024년 현재의 베트남 가정교회 부분은 다음에 추가 보완이 필요하다.
위의 이유 외에 베트남 가정교회가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강력한 오순절 성령 운동으로 은사 신유와 기적 등이 베트남 개신교회에 나타나면서 대표 교단 베트남복음성회에 의해 교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미혹시킨다고 정죄를 당한 교회들이 교단 탈퇴를 당하면서 대거 가정교회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한 예로 1988년에 설립된 베트남기독연합회(Hội Thánh Liên Hữu Cơ Đốc Việt Nam)를 들 수 있다. 당시 베트남복음교회 뚜이리벙 교회(남부 호치민 8군에 위치) 딘 티엔 뜨 담임목사가 정부와 베트남복음성회에 의해 방언 기도, 치유와 은사의 성령 운동이 교단의 신학적 입장과 다르며 성도들을 미혹시킨다는 죄목으로 사임이 된다. 그러나 그 후 오히려 전도폭발훈련과 소그룹으로 양성된 사역자들이 강력한 결집력을 형성하여 고난 속에도 성장하고 있었는데, 1992년 뜨 목사가 수감 중에도 쓰띠엥(Xtiêng)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들 중 자기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 7명의 쓰띠엥족 무당이 신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그 일로 인해 쓰띠엥족 내에 32개의 셀그룹이 형성되었으며, 지난 2013년에는 72개 교회가 스팅족 안에 세워졌다.
1994년 이후 베트남기독연합회는 흐레(Hrê)족, 몽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이후 이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더 확장되었다. 현재 베트남에서 개신교가 가장 크게 성장한 소수민족은 몽족인데, 몽족의 가정교회 부흥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례이기도 하다. 원래 몽족은 중국과 접하고 있는 베트남 북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몽족 중 40만 명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몽족에 복음이 처음 전파된 것은 당시 필리핀에서 송출되던 극동 방송(FEBC)의 몽족 언어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필리핀에서 라오스 몽족을 위해 몽족어로 복음 전파 방송을 하고 있던 라오스 출신 몽족 목사를 통해 오히려 베트남의 몽족들이 집단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10).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였다. 전통적으로 몽족은 조상을 숭배하고 정령을 숭배하는 부족이었는데, 몽족이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악한 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 몽족은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었지만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마을 족장과 심지어 주술사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인도를 받아 몽족의 기독교인들은 하노이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고, 베트남인 목사는 몽족 성경을 밀반입하고 지하 성경 학교에서 교회지도자들을 훈련 시켰다. 기본적으로 베트남 정부는 몽족 교회의 빠른 성장을 우려하는데, 그 이유는 몽족이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고 분리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 국경 넘어 라오스에 거주하는 몽족은 미국 편에 서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몽족이 기독교화되면서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주장하면서 몽족을 핍박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몽족 교회의 부흥을 저지하기 위해 몽족 목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죽게 내버려 두었고, 기독교인들의 땅을 몰수하고 기독교인들을 마을에서 추방했다. 경찰은 교회 모임을 해산시키고 몽족 마을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베트남인 목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몽족 교회의 부흥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복음이 몽족을 변화시켰다. 20년 전 몽족 마을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몽족 주민들이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대학과 대학원 교육까지 받고 있다. 많은 몽족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통해 베트남어를 읽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인이 된 몽족 부족민들은 더 이상 정령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또 몽족 기독교인은 이웃 종족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이 중에는 개신교인만 24,000명이 있는 자오족(Dao)이 있다. 현재 1,000개의 몽족 교회 중 400개가 정부의 등록을 받았으며, 몽족 교회가 받는 핍박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역 당국은 여전히 새 교회와 미전도 소수종족에서 개척되는 교회들을 핍박하고 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몽족들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
- 주류교단 베트남복음성회 교회의 역사와 현황
위 2)에서 가정교회 위주로 베트남 개신교회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다시 장자 교단에 해당하는 베트남복음성회를 중심으로 베트남 교회를 좀 더 이해해보자. 베트남은 처녀선교지가 아니라 이미 기독교 교회가 있는 국가이다. 현지교회는 C&MA 선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2가정이 정식으로 베트남 선교사로 입국했던 1911년을 베트남 개신교 원년으로 잡고 있다. 베트남복음성회는 지난 2011년 베트남교회 100주년 기념 자료집에서 7단계11)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이 글은 선교백서가 추가 보충한 부분을 토대로 8단계(아래의 8, 9번 항목이 모두 8단계에 해당), 혹은 9단계로 세분화한 자료를 사용하였다.
(1) 초기 단계
기독교가 베트남에 전해진 것은 10세기경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무역상, 선원, 외국 군인들 가운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베트남에 들어왔으나, 아직 공식적인 복음 전파의 단계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심프슨(A.B. Simpson) 목사가 창립한 복음선교연합회(C&MA) 선교 단체는 인도차이나반도에도 관심을 두고 베트남에 복음을 전할 방법을 모색했다. 1887년부터 심프슨 목사가 베트남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던 가운데, 마침내 1911년에 제프리(R. A. Jeffrey) 목사의 인도로 호슬러(P,M. Hosler), 휴스(Hughes) 선교사가 다낭에 도착하여 선교사무실을 열면서 개신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2) 1911~1918년/정착 단계
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식 이름을 가진 몇 명의 선교사가 추방되었다. 그런데도 초기 성도들은 그 어려움을 잘 통과하면서, 다낭, 호이안 등을 중심으로 하여 중부지역에 교회들이 먼저 세워지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하이퐁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북부지역에 교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18년에 복음은 사이공(현 호치민)을 근거로 하여 남부 지역에 전파되었고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3) 1918~1927년/사역자 양성 단계
이 단계는 베트남 목사, 전도사들의 양성을 위한 사역이 구체화되었다. 1919년에는 처음으로 성경공부반이 헛간을 개조한 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1921년에 다낭 성경 학교로 건립되게 된다. 1926년에는 성경 번역이 마무리되어 베트남어 신구약 성경이 하노이에서 출판되었다.
(4) 1927~1942년/자립교회, 자민족 교단 설립 단계
이 시기에는 교회가 자립을 하게 되었고, 교회 행정에 대해서도 자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24년부터 시작된 총회 모임이 목회자 영성 수련회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1927년이 되어 최초의 행정 실무를 논의하는 총회(4회)로 모여 첫 회기 임원회를 조직하였다. 베트남 교단의 명칭은 동팝복음회(1927), 동팝베트남복음성회(1936), 베트남복음회(1945) 그리고 베트남복음성회(1950년 이후부터 사용됨)로 변천되었다. 1932년부터 고원 지역에 소수부족, 소수민족을 위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5) 1942~1954년/고난을 통과하던 단계
2차 세계대전과 대불(프랑스) 항쟁인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5-1954) 사이에 교회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교통은 끊기었고, 기근이 발생했으며, 선교사들은 투옥당하고, 신자들이 뿔불히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성경 학교는 1944년~1948년까지 중단이 되었으며, 예배당들이 폐쇄되고, 불건전한 사상들이 나타나서 교회의 자치 자립의 기운이 다 소진되었다. 그런데도 목회자들은 신실하게 교회를 지켰고, 신자들은 믿음을 고수하였다. 전쟁의 영향은 계속되었지만, 신자 수가 증가했고, 교회의 회복과 예배당이 재건되었다. 1950년에 베트남복음성회 최초의 찬송가가 출판되었다.
(6) 1975~2001년/연단의 단계
1975년 이후 각 교회의 대부분의 소수민족 교회들과 반공산주의 성격이 강했던 목회자들이 시무하던 교회들이 폐쇄되고 교회 밖 전도 활동이 금지되었다. 총회 교단 조직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신학교도 이때 폐교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교회가 빠르게 재건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는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해외 교회의 도움으로 많은 교회가 증축되거나 신축되었다. 2000년에 총회준비위원 노회가 헌장(교회헌법)을 마련하여 2001년 2월에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설립 후 첫 총회(베트남 교회사로는 43차 총회)를 호찌민시 사이공교회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총회 헌법이 통과되고 2001년-2004년도 임기의 임원을 선거로 선출하였다. 이후 3월 16일 정부 종교성에 의해서 베트남복음성회(남부 총회)가 합법적인 종교법인체로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인교단이 되었다.
(7) 2001~2008년/새로운 도약의 준비단계
2001년 3월 합법적인 개신교 종교법인으로 허가를 받은 직후 5월에 총회 결의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설립 후 20년 이상을 교회 담임으로 사역하고 있던 158명의 사역자에게 임직 목사의 자격을 주었다. 2003년에 이르면 1975년 공산화 이후 폐교되었던 베트남복음성회 성경신학원이 다시 개교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총회에서는 2009년~2012년 임기의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였다.
(8) 2009~2012년/전진하는 시기
2011년 6월 다낭을 필두로 해서 하노이, 호치민 등 3개 도시에서 베트남 개신교 전파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었다. 100주년 행사 마지막 날에는 전도 집회가 열렸는데 다낭에서 800여 명, 하노이 400명, 호치민(2회) 2,100명 등 총 3,300명의 결신자를 얻기도 했다 2010년도에는 성경신학원이 호치민 2군에 있는 새로운 신학교 건물로 이전하였다. 2011년 11월에는 신학교 내 채플 겸 100주년 기념교회 기공식을 개최했는데 2,350석 규모의 예산을 계획하고 기초공사를 진행했다. 2009~2013년 회기 총회의 가장 큰 이슈는 베트남복음성회 남부 총회와 북부 총회 통합이었다. 이미 두 교단의 내부 협의를 통해 통일 정관을 다 준비하여 베트남 종교성에 교단통합의 건을 신청해놓고, 2012년 12월 말까지 답변을 달라고 기다렸으나, 정부에서는 개신교가 북부에서 더 확장이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여 허락을 늦추고 있다. 2024년 현재까지도 남북교단의 통합을 아직 허락하지 않고 있다.
- 베트남 개신교 역사 이해, 연대표 중심으로
위에서 베트남 개신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베트남복음성회 중심으로 고찰해보았다. 이제는 베트남의 개신교 역사를 연대표 중심으로 이해해보자.
1897년 — 중국선교사 라이브(Reeves)선교사가 베트남 국경에 도달하다.
1899년 — 선교사 제프리(R.A. Jeffrey) 배로 홍하에 들어왔으나 교회 개척은 못 함.
1902년 — 다이얀(Sylvian Dayan) 선교사 부부가 하이퐁에 들어왔다가 어려움이 많아 중국 으로 감.
1905년 — 랑선(Lang Son, 중국 광서 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방)에 첫 거점 설치. 그러나 프랑스 관리의 반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함.
1911년 — 선교사 제프리(Jeffrey), 폴(Paul), 호슬러(Hosler), 휴스(Hughes) 다낭에 도착.
1914년 — 1차 대전 발발로 호슬러 선교사 추방당함.
1916년 — 제프리 선교사 베트남 재입국, 프랑스 총독에게 정치 불간섭,
가톨릭과의 비경쟁 전략을 이해시킴으로 하노이와 하이퐁에 교회를 열고 지방 선교도 허락받음.
1918년 — 다낭에서 성경공부반 시작, 사이공 및 남부지방에 복음 전파. 4 복음서, 사도행전 베트남어로 번역됨.
1921년 — 제프리(D.I.Jeffrey) 선교사가 다낭에 성경 학교 설립. 총 5년 과정의 성경 학교
1922년 — 선교사 올슨(I.D.Olsen)에 의해 신약 전체 번역 완료, 발간됨.
1923년 — 여자 성경 학교 운영.
1925년 — 선교사 캐드만(W.C.Cadman)이 주관한 성서 번역 부에 의해 구약 번역 완료.
1926년 — 신, 구약 성경 간행됨.
1927년 — 베트남 복음총회 조직. 성경 학교 1회 졸업생 9명 배출, 총회 때 9명 목사안수.
1931년 — 복음 전도용 선박을 이용하여 메콩 삼각주 지역에 복음을 전함.
1932년 — 총회 결의로 소수 민족에게 목회자 파견, 캄보디아, 라오스에 선교사를 파송.
1936년 — 하노이에 성서인쇄소 설립.
1937년 — 성경 학교 교실 확장, 성경신학원으로 발전.
1942년 — 정부(프랑스 총독)로부터 종교단체로 인정받음.
1950년 — 찬송가 출판.
1954년 — 남북 국토분단으로 북부지역 신도 10만 명 남부로 이동. 복음방송국 설립.
1960년 — 다낭신학교 냐짱으로 이동.
1962년 — 나환자 사역을 하던 아델 비에 티, 아기 미첼, 댄 버거 등이 게릴라에 붙잡혀간 후 생사불명.
1967년 — 전쟁터의 군인들을 돕기 위한 군목협의회 활동 개시.
1968년 — 베트콩의 구정 공세 때 선교사 마을 공격으로 5명의 미국인 선교사 순교.
1975년 — 남부 베트남 공산화된 이후 모든 교회 활동에 대한 제재와 감시가 강화됨.
1976년 — 냐짱 신학교 폐쇄.
1980년 — 폐쇄되었던 복음교회 일부 다시 오픈되어 예배드리기 시작.
1988년 — 정부에서 종교활동에 관한 법률 제정 공포함.
하노이 신학교 1기 시작.1993년 — 하노이 신학교 1기생 (13명) 졸업 후 폐쇄.
6. 결론
베트남에 이미 현지교회들이 고난과 핍박 가운데 성장 부흥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교회와의 ‘동반자 선교’가 매우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때 베트남 교회 이해가 더 필수적으로 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번 카스 저널을 통해 베트남의 기독교 중 가톨릭을 “베트남의 종교 1. 가톨릭” 편에서 역사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어서 베트남의 종교 2. 개신교 편에서는 1) 베트남 교회 부흥과 현황, 2) 베트남 개신교 관련 용어/개념을 통해서 보는 베트남 교회 이해, 3) 베트남 개신교 가정교회 탄생 배경과 발전, 4) 주류교단 베트남복음성회 교회의 역사와 현황, 5) 베트남 개신교 역사 이해, 연대표 중심으로라는 소주제별로 역사와 현황을 고찰해보았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1975년이라는 시대가 베트남 개신교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건립 이전과 이후로 베트남에서 개신교가 공인교회와 비공인교회인 가정교회로 나누어져서 2024년 현재의 모습으로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복음은 결코 진공상태에서 성장,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통시성(通時性)’을 가지고 있기에, 베트남에서 가톨릭은 프랑스 제국주의 외래 종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사회문화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더 토착화되어야 하듯이, 베트남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라는 오늘날의 오명을 벗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종교라는 이미지에는 베트남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한국인, 한국교회의 이미지도 함께 각인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시 한국은 건국 이후 남의 나라 전쟁에 연인원 32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을 파병하면서, ‘자유민주주의’수호를 외쳤지만 결국 그 안에는 ‘월남 특수’로 인한 반사 급부의 경제적 유익과 용병, 민간인 학살이라는 치명적 오명이 아직 한국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13).
이처럼 베트남 현대사에서 베트남의 기독교는 프랑스와 미국. 두 제국 사이에서 명암과 굴곡의 역사를 거쳐 형성되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상황이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베트남 교회는 무엇이며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특별히 한국의 베트남 선교가 30년이 된 현재, 한국교회는 이미 쇠퇴기에 있지만 베트남 교회는 부흥과 성장기에 들어서고 있어서 이 글이 우리의 선교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와 함께 베트남 교회를 통해 교훈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글 | 정보애(SIReNer)
[각주] 1) 이 부분의 현황 통계는 김지방, “깨어나는 베트남, 기독교 부흥의 불길”, 『국민일보』, 2009. 5. 21. 기사를 인용했다. 따라서 관련된 통계 숫자, 규모는 국민일보 기자가 베트남 교회 파악을 위해 현장 취재했던 2009년의 현황 통계이다. 2) VDF, 베트남선교백서 1권, 1998년에 발표된 관련 내용을 재인용함 3) 위의 글. 4) 임도마, “선교사가 본 사역지 나라의 어제와 오늘”, 『GP선교행정연구소 선교 자료』, 2016.06. 27 https://limdoma.tistory.com/355 5) 위의 글. 6) VDF편집부, 『베트남 선교백서』, pp. 15-16. 2013년 발행. 7) 위의 글. 8) 위키피디아, 베트남, 까오응우옌중펀 9) 베트남선교백서에서 베트남 가정교회 유형을 다음과 같이 4개로 구분하기도 한다. 첫째, 1975년 전후: 복음이 베트남에 들어온 후로 수십 년간의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생겨난 정치적 혹은 자민족중심적 성향을 띠고 있는 가정교회 둘째, 1975년~1988년: 베트남 전 민족에게 유일한 하나의 개신교회로서 베트남 내 모든 교회가 C&MA 교회로 통합이 되었다. 곧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로 생겨난 가정교회 셋째, 1988년~2001년: 도이모이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이후 성령의 역사가 공인교회에 강하게 나타나면서 C&MA 교회로 다 흡수되었던 각 교단이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중국의 백가쟁명 시대처럼 합종연횡하면서 개신교 연합체를 형성했다. 이것이 VEF((Vietnam Evangelical Fellowship) Ι 이다. 넷째, 2001년-현재: 정부의 교회법 개정과 베트남 정부의 WTO가입으로 국제화, 세계화가 가속화되었다. 많은 가정 교단과 교회들이 법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VEF((Vietnam Evangelical Fellowship) Ⅱ 이다. 10) 한국선교연구원,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교회(2), 『파발마』, 2018년 8월호, 942호. VDF편집부, 『베트남 선교백서』, pp. 48-49. 2013년 발행. 이 글의 2) 베트남 개신교 가정교회 탄생 배경은 두 자료를 많이 참고하였다. 11) (1) 복음이 들어오기 전, (2) 교회의 설립에서 독립까지(1911-1927) (3) 교회의 독립에서 공인되기까지(1927-1942) (4) 공인에서 나라의 분단까지(1942-1954) (5) 분단에서 통일까지(1954-1975) (6) 통일에서 공인되기까지(1975-2001) (7) 공인되고 지금까지(2001-2011) 12) 1989년 VDF(Vietnam Developer Fellowship)가 발행한 베트남선교백서 1권에 정리된 내용을 인용함. 13) 윤한열, “베트남 전쟁을 통한 한국선교전략―출구전략을 중심으로, 『제4회 KMAC포럼 자료집』, pp.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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