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CAS
Web Journal 32호 2024.12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막 11:1-10)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막 11:17)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
십자가 대속 사역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다 살펴봐도 그것이 무엇이든 짐승을 타고 다니시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이신데, 뜬금없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나귀를 준비하라 하시고, 직접 그 나귀에 올라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특이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스가랴 9장 9-10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일종의 선언적 행보였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9:9-10)
스가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그것도 땅 끝까지 이르러 화평을 전하시며, 그 모든 영역을 다스리실 정권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임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선언이 바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 모습은 물론, 스가랴 9장 9절 말씀처럼 왕이시나 겸손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지금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가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에 대한 상징적인 선언으로서의 메시지가 더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왕의 임재 메시지에는 스가랴 말씀에 나타난 그 왕이 어떠한 왕이신지에 대한 메시지도 함축되어 있는데, 9절 중간에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그림이 있는데요.
여기 보면, 죄인이 있고 그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는 공의가 적용되고, 동시에 좋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사랑(긍휼)이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에게 있어서 ‘공의’와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동시에 적용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의 형벌로 임해야 하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죠.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함께 임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에 예수님이 왕이신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상징 이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행하시려고 하시는 십자가 대속의 사역인 것입니다. 즉 대속은 대신 벌 받아 주는 제도이고, 이 제도의 예표는 이미 구약에서 속죄 제사를 통해 보여주신 개념입니다. 즉 죄를 범한 인간 대신 속죄 제물을 바침으로 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인정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고. 또 그 대신 대가가 치러진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만족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되, 죄는 없어야 하며, 모든 인류를 대신할 가치를 지닌 존재, 곧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대속자의 조건을 만족시키시기 위해 겸손히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 비하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신 벌 받아 주는 제도, 속죄 제사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나귀를 타고 가는 이 상징 하나에 ‘공의로우신데, 구원, 즉 대신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렇게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실 만큼 겸손하신 왕’이라는 의미를 다 함축시켜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왕으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늘 함께 중요한 것!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사람을 다 아우르는 온 세상, 모든 열방, 모든 종족들을 향하며,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실 왕이 되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5-16절에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글로는 사뭇 점잖게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해본다면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기록 가운데 가장 폭력적이고 분노하신 장면으로 그려질 것입니다. 일어난 시기는 다르게 보기도 하지만, 유사한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2장 15절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성전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얼마나 격노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마가복음 11장 17절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격노하신 이유, 즉 성전의 참된 의미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56:7)
예수님이 격노하신 진정한 이유, 그것은 물론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구역질나는 부패한 인간들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은 바로 그 성전이 무엇을 위한 장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말씀에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장소로 이 성전의 의미와 목적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겸비하여 드려야 할 제물을 불경하게 사고파는 더러운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도 큰 문제였지만,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공간과 그 기회 자체가 차단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분노가 더 컸던 것입니다. 성전을 성전되게 하는 그 가치와 이유, 목적이 완전히 파괴된 현장을 예수님은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으셨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이 예수님의 본심으로 들어가 본다면, 하나님께 기도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닙니다. 이 성전은 애시당초 “만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고통을 신원하고, 간절한 소망을 아뢰고, 하나님과 깊은 소통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바로 만민을 위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 만민에는 당연히 처음부터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사야 56장 7절 전제의 근거는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열왕기상 8장 41-43절과 역대하 6장 32-33절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먼저 역대하 말씀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32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3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역대하 6:32-33)
너무 감동적인 기도이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처음 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할 때부터 이 성전은 이방인에게도 활짝 열려 있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먼 지방에서부터 와서 이 성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해 주시고, 그들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백성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목적, 이 성전의 존재 이유 자체가 지극히 선교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지은 바 된 예루살렘 성전인데,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불과 며칠 앞두신 예수님이 목격한 성전의 실상은 인간의 온갖 탐욕과 욕심이 가득한 추악한 곳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막 11:17)이라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더러운 곳이 되어 버렸을 뿐 아니라, 원래의 목적인 이방인이 발붙일 수도, 아니 발붙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도록 망가진 모습에 예수님이 격노하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귀 타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해야 할 만민, 모든 열방과 모든 민족들까지 구원하시기 위해 그 속죄제사의 제물로서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대속의 중심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이 꼴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진노는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성전까지 오거나, 성전을 향해 기도할 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원래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과 열방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할 사명을 받은, 그래서 먼저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게 구약시대부터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복음을 증거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이 성전에 나아와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도록 돕는 자들이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책무와 사명, 먼저 받은 그 은혜의 목적을 망각한 채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열방으로 전파되어야 했던 복음은 가두어져 있어야 했고, 고인 물이 썩듯 그렇게 부패하여 이와 같은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가서 전했어야 했고, 그들이 그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8장 60절 말씀처럼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한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하신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의미 규정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 성전의 원리, 목적, 존재이유는 아직 이 땅에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들,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열방의 족속들이 남아 있는 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원리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그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 삶으로 증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복음과 우리의 믿음의 삶을 보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께 나아와 구원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그 고통을 신원하고, 간절한 소망을 간구하는 하나님 백성되게 해야 할 책무와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루살렘 입성과 그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 가운데 흐르는 열방을 향하신 소망, 곧 선교의 심장을 확인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중심이 그러하시다면, 그 심장을 이어받은 저와 여러분 역시 동일한 소망과 비전으로 참 성전 된 삶, 선교의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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