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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대일로와 함께 떠오르는 ‘이산(อีสาน)’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8. 2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이산(อีสาน)
2017년 12월 21일 ‘코랏’이라고도 불리는 태국 “이산(อีสาน)”지역의 관문도시(Gateway City) ‘나콘라차시마’에서는 ‘방콕(Bangkok)-나콘라차시마(Nakhon Ratchasima)’간 고속철도 기공식이 있었다. 이는 태국 최초의 고속철도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동안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난항을 겪던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이 태국 구간 사업을 시작으로 다시 공식화되는 것이어서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국은 2013년부터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중국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일대)와 동남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일로)의 일대일로 전략을 천명해 왔다. 이것이 최근 각 분야에서의 중국 굴기(倔起)와 맞물려 전 세계로 뻗어가는 ‘중화 팽창’을 본격화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본 선교회가 현재 진행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 리서치에서 선교환경 변화와 관련해 매우 중요하게 예의주시하는 이슈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인도차이나 반도는 이 일대일로를 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 중국자본이 남하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르지만, 장차 이 고속철도는 중국 남부 쿤밍(곤명)에서 라오스를 거쳐 태국 방콕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을 관통하는 동맥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3/2017071300345.html, 2017.7.13

이 사업으로 인해 태국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지역이 바로 본 기획특집의 주제인 ‘이산’ 지역이다. 일대일로 고속철도의 태국 구간 주요 경유 도시인 나콘라차시마, 콘캔(Khon Kaen). 우돈타니(Udon Thani), 농카이(Nong Khai) 등이 모두 이산 지역에 속해 있으며, 이는 전체 구간의 약 60% 정도를 차지한다. 방콕에서 출발해 이산 지역의 첫 관문도시인 나콘라차시마까지 현재는 5시간 이상 소요되지만, 고속철도가 완공되면 1시간 남짓으로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로 인해 교통, 물류 상의 비약적인 발전도 예상되지만, 최근 저지대인 방콕에 홍수로 인한 침수피해가 잦아지면서 수도이전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 대안지로 태국 제 2의 도시 치앙마이와 함께 이 나콘라차시마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도 향후 주목해 볼 대목이다.

이산의 주요도시들에 속속 입점하고 있는 대형 쇼핑몰

태국 국내외 자본의 새로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고, 방콕에서나 있을 법한 대형 쇼핑몰들이 이산의 주요도시들에 속속 입점하고 있지만 이 지역이 원래 그럴만한 지역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산 지역은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태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불모지와 같은 곳이었다. 앞으로 달라질 것이 예상되지만 지금도 여전히 태국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임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이산 지역의 민족적, 역사적 배경이 다분히 깔려 있다. 향후 이산 지역 발전과 그와 함께 열리게 될 이산 지역의 선교적 돌파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산 지역의 지나온 세월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산의 역사적 연원
‘이산’은 지리적으로 태국 동북부 코랏 고원 일대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산’이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이샤(Īśa)’에서 온 것으로, ‘이샤’는 세계의 ‘동북부’를 다스리는 시바(Shiva) 신의 별칭이며 여기서 동북부를 의미하는 이산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태국 동북부 지역이라고도 하지만, ‘이산’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미전도종족 관점에서 과거에는 이들을 ‘이산족(族)’이라는 태국 타이족과 구별된 또 하나의 종족으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통상 비교적 덜 독립적인 ‘이산 지역(phak Isan)’, ‘이산 사람(phu Isan or khon Isan)’으로 칭하고 있고, 표면적으로는 당사자들도 스스로 구분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지역을 조금 더 깊이 리서치하면서 이들이 단순히 태국의 한 지방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태국 주류 타이족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실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점은 향후 이산 지역 선교에 있어서 이 지역과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다.

13C 말 수코타이 왕조의 최대 영역 / 출처: 두산백과

이산 지역은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주변 왕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지배세력의 교체가 반복됐던 지역이다. 13세기 이전까지 이 지역은 앙코르(Angkor) 왕국의 크메르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던 1238년 앙코르 왕국으로부터 독립 한 타이족의 수코타이(Sukhothai) 왕국이 13세기 말 경 이산 지역의 코랏 고원 북부를 영토에 편입하면서 이 지역은 잠시 타이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란쌍 왕국을 건설한 파 응움왕

하지만 이후 라오족과 크메르족이 반(反)타이족 연대를 형성하게 되면서, 14세기 경 라오족으로서 크메르 군대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 라오스 지역을 통일하여 란쌍(Ran Sang) 왕국을 건설한 파 응움(Fa Ngum) 왕이 이산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된다. 그와 함께 이산 지역으로 라오족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라오족이 이산 지역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산 사람들의 혈통적 뿌리는 라오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오랜 시간 이미 그 지역에 거주하던 크메르 문화를 수용하면서 ‘라오 + 크메르’의 혼합요소가 이산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4세기 이후 계속 된 라오족 란쌍 왕국에 의한 이산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쇠퇴하던 란쌍 왕국이 이산 지역을 둘러싼 경쟁에서 타이족 아유타야 왕국에 우위를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산 지역은 아유타야 왕국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18세기 미얀마에 의해 아유타야 왕국이 붕괴되지만, 탁신(Taksin) 장군이 다시 태국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라오스의 분열 왕국인 루앙프라방(Luang Prabang), 위앙짠(Viangchan), 참파삭삭(Champassak)까지 모두 속국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1827년 위앙짠의 짜오 아누(Cao Anu)왕의 반란에 대해 군사적 응징을 감행하면서 위앙짠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라오스 왕국들을 비롯한 이산 지역이 태국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이후 1893년 제국주의 프랑스와의 조약체결로 메콩강 동쪽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게 되면서 현 라오스 땅을 상실하게 되지만, 여전히 이산 지역은 태국의 영토 안에 남게 되었다.

Chantaburi에 있는 신뢰하는 병사와 함께한 탁신장군 기념탑

태국 중앙정부의 내부식민주의
오늘날 태국을 크게 북, 중, 남부로 구분할 때, 방콕 중심의 중부가 전 국가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나머지 북부(치앙마이 등 북부와 동북부 이산 포함)와 남부(이슬람 지역)를 통치하는 형태로 국가 구조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산 지역이 17세기 이후 점차 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확인한 바와 같이 이미 이전 300여 년간 확립된 라오에 근간한 이산 정체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살펴본 역사적 배경 하에 이산 지역에 대한 차별과 희생을 바탕으로 중앙 정부의 발전을 도모하는 소위 ‘내부식민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산 지역의 중앙 정부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만은 구조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계 수치(1990년대)로만 보아도, 이산 지역 인구는 태국 전체의 1/3 정도로 방콕 중심의 중부 지역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총생산 중 동북부 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은 계속해서 더 낮아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전국에서 가장 낮을 뿐 아니라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그야말로 불모지와 같은 곳으로 국가발전에서 소외되어 왔다.
이와 같은 차별과 빈곤 상태는 1932년 입헌혁명을 통해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가 결성되면서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는 듯 했다. 이산 지역 출신들이 국회로 진출하여 이산 지역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7년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산 지역 출신 의원들이 라오스 공산주의와 결탁되었다거나 공산화나 분리독립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탄압을 당하게 된다. 이후에도 태국 내 정치적 변동 속에서 1980년대까지 이산 지역의 불만을 중앙에서 대변할 통로를 마련하지 못하다가 2000년대 들어 집권한 중국계 탁신(Thaksin Shinawatra) 총리 정부가 자신의 지지층인 북부(치앙마이 중심)와 동북부 이산 지역을 의식한 정책들을 펴게 되면서 상황이 다소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탁신 총리마저도 부정부패로 실각하게 되면서 해묵은 이산 지역의 불평등 현상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고,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산의 이중정체성
이러한 태국 중앙정부와 이산 지역 간의 배경적 역사는 이산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소속 vs. 분리’라는 독특한 ‘이중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산 지역 정체성의 본질은 라오스와 태국의 주도권 다툼 속에 어느 한 쪽으로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던 18세기 이전 약 200여 년 간 소위 ‘이산 지역주의’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는 혈통적으로 라오족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정치경제적으로 약소한 국가인 라오스에 의존할 수도 없고, 점차 태국의 영향력 하에 속하게 되면서 점차 태국이라는 국가적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 경향이 있다. 이를 더욱 강화하였던 것은 19세기 말부터 태국 중앙정부가 시행한 ‘중앙집권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934년까지 태국 전역의 중앙정부에 의해 통일된 의무교육이 확립되었다. 이산 지역 학생들도 타이어는 물론 중앙정부 중심의 국가관과 국왕, 불교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이산 사람들로 하여금 중부 타이 주류 문화와 사회에 더욱 동화되기도 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이산 문화는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의식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의식은 태국 중앙정부의 이산에 대한 내부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불만을 가중시키고 중앙에 대해 저항하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본 선교회의 지난 리서치(2017. 11) 결과, 이렇게 형성된 이산 지역의 태국 중앙정부에 대한 ‘소속 대 분리’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외부인에 대해서나, 공식적으로는 ‘소속감(즉 자신들이 이산족으로 구별되지 않고 태국인의 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바라는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았고, 더 깊이 개입했을 때는 태국 또는 타이족과는 다른 이산지역 또는 이산주의로서의 ‘분리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였다. 공식적, 표면적인 관계에서 후자는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분리’의 정서와 더 나아가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감은 내심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단순히 태국의 한 지방, 태국민으로서의 지역 사람들로 보는 것도, 그렇다고 대놓고 ‘이산족’ 내지는 최소한 구별된 ‘이산 사람’이라고 보기도 쉽지 않은 이산의 이중정체성은 이산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 접촉을 시도하거나 사역을 전개해나갈 때 아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이슈가 될 것이다.

이산지역에 건설중인 고속철도

이산의 새로운 선교적 기회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태국 동북부 ‘이산’ 지역은 오랜 시간 소외와 희생 속에 방치되어온 지역이었다. 계속해서 태국 내부적인 개선 과정들이 있어왔겠으나 그나마 서두에서 다룬 고속철도 건설 계획 등이 발표되면서 최근 이산 지역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고, 코랏(나콘라차시마)을 시작으로 고속철도 통과 도시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 대한 투자 붐이 일면서 향후 이산 지역에 대한 개발이 가속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마침 본 선교회에서의 리서치 당시 확인한 이산 지역의 풍경만 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변화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코랏, 콘캔, 우돈타니, 농카이 등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도로가 새롭게 확장되고 쇼핑몰 등의 대형 빌딩들이 건설되는 등 도시 중심부는 거의 대형 공사장 같았다.

이산지역에 새로이 지어지고 있는 대형 쇼핑몰 내부 전경

도시의 확장과 새로운 도시의 건설은 투자되는 자본과 함께 반드시 일자리와 새로운 삶을 찾는 원거주지로부터의 사람들의 이동을 야기하게 마련이다. 또한 이는 반드시 새로운 환경과 관계 속에서 정서적, 영적 공허와 갈증이 수반된다. 이것이 곧 복음의 필요와 맞닿아 있고, 마감은 알 수 없는 결코 짧지 않은 한시적인 선교적 기회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지금 변화의 때를 맞은 이산 지역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방콕과 치앙마이 등지에 집중되어 있는 태국 선교 현실에 새로운 기회를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랏(나콘라차시마), 콘캔, 우돈타니 등 고속철도가 지나는 주요 도시마다 그동안 소외받았던 이산 사람들의 손짓이, 복음과 선교의 청신호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글 | 강호석(SIReNer)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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