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사람들
D·I·G·I·T·A·L JOURNAL 2018. 10
라오스는 장기간에 걸친 강대국의 지배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내전을 치르며 최빈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비엔티안 시내에 진입하자 라오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답게 프랑스 식민시대의 흔적과 6,70년대의 과거 그리고 빠르게 발전하는 현대 도시의 모습이 공존하는 것이 보인다. 현재 비엔티안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의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중국의 거대한 자본 유입으로 시내 중심부에 중국 백화점이 들어서고 고층 빌딩 건설이 진행 중이다.
비엔티안은 수도이자 라오스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도시이기도 하다. 라오스 중요한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비엔티안은 ‘위앙짠(Viangchan)(1)’이라고도 불리는데,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에 란쌍(Lan Xang)왕국을 세울 때부터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세타티랏(Settathirath)왕이 1563년 버마 왕국의 공격을 피해 비엔티안으로 옮겨 오면서 공식적으로 란쌍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 라오어의 현지 발음으로는 “위앙짠(Viangchan)”이라고 부르며 비엔티안(Vientiane)은 프랑스어 표기이다. |
이후 세타티랏 왕이 천도를 기념하며 ‘탓루앙(Pha That Luang)’이라는 황금빛 탑을 세우게 된다. 탓루앙을 개축하고 세타티랏 왕은 자신을 불교의 수호권자로 각인시키고, 란쌍 왕국 전 지역에 있는 지방 관리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왕국이 안전하게 유지되도록 강화시키고자 종교적 행사를 마련했다. 이는 매년 11월 14일 ‘분 탓루앙’ 축제일로 라오스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중요한 축제가 되었다.
탓루앙을 종교적 상징물로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상징물로서 라오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 1호로 지정하여 보호한다. 라오스 지폐에는 공산화 주역인 까이손 1대 총리와 탓루앙이 포함된 국장이 표시되어 있을 정도다. 탓루앙 광장 앞에 세워진 불탑과 유사한 무명용사 탑에는 원시불교와 불교의 유입, 공산화 과정, 발전된 미래 모습을 함께 새겨놓았다. 국가적 경축일 및 장례식 등 각종 행사들을 탓루앙 광장에서 개최하면서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건국이념과 불교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체제의 정당성을 계속 각인시키고 있다.
세타티랏 왕은 탓루앙 외에 태국 북부지역 왕조인 ‘란나’ 왕국에서 가져온 에메랄드 불상을 비치할 목적으로 호 파깨오(Haw Phra Kaew) 사원도 건설했다. 하지만 세타티렛 왕 이후 수차례 전쟁 끝에 소실되었고 에메랄드 불상도 태국에 빼앗기고 말았다(이 불상은 방콕의 왓프라깨우Wat Phra Kaew 사원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36년~1942년 사이에 재건축된 것으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비엔티안에 남아있는 사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왓 시사켓(Wat Si Saket)이다. 이 사원은 1818년 란쌍 왕국의 마지막 왕인 짜오 아누웡(Chao Anouvong)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군주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1828년에 시암군에 의해 모든 사원들이 파괴되었으나 왓 시사켓만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사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1924년과 1930년에 프랑스 제국이 보수 재건하여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후기 라오건축의 보석’이라 불리는 사원이다.
라오스에는 총 1,500km 길이를 자랑하는 13번 국도가 북부에서 남부까지 관통한다. 육로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이 13번 국도는 비엔티안 시 중심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를 따라 명소들이 들어서 있어 방문 시에 기점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특히 가장 중심부에는 비엔티안의 랜드마크인 빠뚜싸이(Patuxai)가 위치해 있다. 빠뚜싸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독립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건설된 승전기념비로 프랑스의 개선문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입장료를 내고 7층 높이의 전망대에 올라가보면 비엔티안 시의 고도제한을 풀고 건설 중인 중국의 대형건물들과 비엔티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에 중국이 조성해 줬다는 공원도 보인다. 부처의 형상을 한 창틀로 보이는 비엔티안 풍경은 급변하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라오스인들이 부처의 자비로 인해 평안과 번영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13번 국도를 따라가 보면 라오스에서 가장 유명한 세 인물들의 기념비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라오스의 전신인 란쌍 왕국을 세운 파음(Fa Ngum)왕, 태국에 반기를 든 영웅 아누웡(Anouvong)왕, 라오스 독립과 공산화 혁명의 주역인 제1대 총리 까이손 폼위한(Kayson Phomvihane)으로 라오스 역사의 맥을 잇는 인물들이다.
파음 왕은 라오민족의 첫 통일국가인 란쌍 왕국(1353년)을 세워 외부세계에 라오스라는 이름을 알리는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크메르 왕국의 도움을 받아 크고 작은 왕조 세력들을 통합하여 왕좌에 올라 루앙 프라방를 수도로 삼았다. 또한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를 국가 종교로 도입하고, 후에 아유타야 왕조의 공주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태국의 강대 왕조 사이에서 메콩강 유역뿐 아니라 태국의 코랏 분지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후에 왕위 다툼으로 란쌍 왕조가 분리되고 1779년에는 태국의 시암(Siam)왕조의 침략을 받게 되었지만 란쌍을 세우고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여겨지고 있다(란쌍과 분열왕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호 “인도차이나의 슬픈 ‘진주’ 라오스, 들여다보기”를 참고).
란쌍 왕국의 분열로 인해 현저하게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특히 시암과 베트남 응우옌 왕조에 모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신세가 되어 있던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아누웡(Anouvong)왕이다. 아누웡왕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위에 오른 후, 예전의 란쌍 지역의 재통합 계획에 착수하였다. 아누웡은 1827년 시암령 코랏 분지 지역으로 진격하여 시암 북동부의 주요 도시 나콘라차시마(Nakhon Ratchasima)를 점령하고, 수도 방콕에서 10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부의 사라부리(Saraburi)까지 일시적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나, 결국 절대적인 군사력의 한계에 직면한 비엔티안군은 우돈타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대패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시암군은 역으로 비엔티안까지 진격하여 도시를 초토화하였다. 시암군의 보복침공으로 라오인들은 시암으로 강제이주 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국의 이산 지역에는 약 1,900만 이상의 라오계 타이족인 이산족이 살게 되었다. 반면 독립국가인 라오스에는 6백 만의 라오인이 거주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결정적으로 태국과 라오스 두 국가사이에 역사적인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두 나라의 자존심을 건 역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010년 라오스 정부는 비엔티안 설립 450주년 기념식에 맞추어 태국과 가장 가까운 메콩 강변에 짜오 아누웡 공원을 만들고, 라오스 민족의 영웅인 거대한 아누웡 동상을 세웠다. 아누웡 상은 시암왕국에 당한 역사적 설움을 설욕하고 란쌍 왕국을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한손에는 큰 칼을 차고 다른 한손은 국경을 가르는 메콩강 너머 태국을 향해 뻗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대하여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메콩강을 따라 중국까지 교역로를 확보해야 했던 프랑스는 라오스를 북부 베트남 보호령으로 만들면서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의 잇따른 승리에 라오스에서도 펫싸랏(Phatsalat) 왕자를 중심으로 저항 세력인 ‘라오 이싸라(The Lao Issara; 자유 라오스)’를 구성하며 1945년 9월, 독립을 선포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후 1950년 베트남 독립동맹(Vietminh)을 모델로 한 사회주의 해방운동단체 ‘빠텟 라오(Pathet Lao)’가 조직되고, 수파누웡(Souphanouvong) 왕자와 까이손 폼위한이 이끄는 저항군이 1954년 12월 디엔 비엔(Dien Bien)산에서 승리함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낸다.
빠텟 라오는 1975년 1월 6일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왕정을 무너뜨리고 같은 해 12월에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Lao PDR)을 세웠다. 빠텟 라오가 현재 라오스의 유일 정당인 라오 인민혁명당의 모태인 셈이다. 그 후 라오스는 까이손 인민혁명당 서기장 겸 총리의 지도하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해왔다. 그는 1975년부터 1991년까지 라오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수상을 거쳐 1991년부터 1992년 서거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하면서 라오스 건국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2천 낍 이상의 라오스의 지폐에는 공산화 주역인 까이손 폼위한이 새겨져 있다. 까이손은 1992년 사망했으나 그의 동지들은 지금까지도 당의 정치국원이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통치철학을 계승하고 있다. 라오스 정부는 카이손 사후에 베트남에서 부분적인 지원을 받아 8백만 달러의 금 도금을 한 기념관을 비엔티안에 건립하였다. 베트남은 라오스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 큰 역할을 했고, 양국 공산당이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활동했던 인연으로 현재까지 ‘공산혁명의 동지’라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은 라오스의 주요 3대 투자국으로 이 특별한 관계는 경제적으로도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해가 지고 난 후 메콩 강변의 아누웡 왕의 동상이 있는 공원을 다시 방문했다. 라오스 메콩강 주변은 우리나라 한강처럼 일부 구간이 조성되어, 매일 5시가 되면 강변도로가 차단되고 시장이 형성되어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급변하는 라오스의 단면을 보듯 한쪽 편엔 라오스인들의 지역 야시장과 다른 한편엔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중국 대형마트와 호텔들이 들어서있다. 동남아 5개국에 둘러싸인 내륙국으로 인프라가 열악해 인근 국가 경제 의존도가 높은 라오스가 아세안 경제공동체 출범 이후 경제발전을 꾀하면서 2020년까지 세계 최빈국 탈출과 함께 인도차이나 반도의 물류 허브로의 도약을 꿈꾸며 기대감에 차 있다.
그도 같은 꿈을 꾸는 것일까. 조명 때문인지 아누웡 왕이 마치 란쌍 왕국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꿈꾸며 태국을 향해 서서 애처로운 연가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메콩강 건너 농카이에서 라오스의 영적 부흥의 날을 꿈꾸며 매일같이 라오스를 향해 목 놓아 ‘라오스 연가’를 부르시던 선교사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는 가리라 저 예루살렘
기를 들고 나팔을 불며
전하리라 주님의 이름
임하게 되리 하나님 나라
주 사명 가슴에 안고
깨우리 비전의 라오스
비록 피를 흘려도 나는 멈출수 없네
주비전 이루게 되리 보게 되리 선교의 라오스
이 복음 땅 끝에 이를 때까지”
글 | 채형림(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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