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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선교역사, 그 끝을 볼 수 있을까?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8. 10

맥길버리 선교사 부부   |   출처: 동남아선교뉴스레터

라오스 선교는 태국 북부 지역에서 사역하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다니엘 맥길버리(Daniel McGilvary, 1828~1911)의 라오스 북부 선교 여행을 통해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라오스 북부 지역은 미국 ‘C&MA’를 중심으로, 남부 지역은 ‘스위스 형제단’을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의 열심과 헌신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던 라오스 선교는 ‘2차 세계대전’과 1975년 ‘라오스 공산화’이라는 두 번의 큰 고비를 맞으며 위기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계속 되어왔다. 

맥길버리의 라오스 선교의 시작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처음 라오스 북부로 선교여행을 떠났던 1872년으로 보는 설(아짠 난티야 펟껟)과 태국 북부의 종교 자유 선포 후 본격적으로 라오스 선교사역을 시작한 1880년으로 보는 설(싸앗 차이완 박사)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이 라오스 선교의 첫 시작에 그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1. 선교 초기
(1) 라오스 선교의 시작: 맥길버리(라오스 선교단), 싸이나부리
태국 쭐라롱꼰 왕(1868~1910, 라마 5세)의 태국 북부 지역에 대한 종교의 자유 선포는 치앙마이 중심의 태국 북부 뿐 아니라 오늘날 라오스 북부 지역도 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그 지역 선교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맥길버리 선교팀이 태국 북부 전역과 중국 일부를 포함한 라오스까지 선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맥길버리는 수차례 라오스 북부의 선교 여행을 통해 무쏘족 노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므앙차이의 사찰 관리인이었던 센쑤리야 가족을 만나 예수를 영접시켰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라오룸족 일부와 주로 카무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맥길버리가 라오스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의 문을 열었지만, 그는 주로 치앙마이에 근거를 두고 사역하였기 때문에 라오스에 상주하여 사역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라오스 선교에 기초를 놓은 휴 테일러(Hugh Taylor) 선교사 역시 라오스에 상주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몽족과 카무족 중심으로 전도하면서 1900년에 몽족 290명이 예수를 영접하는 열매를 거두었다. 또한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라오족 개종자들도 얻었고, 그들을 태국 북부에 있는 신학교로 보내어 훈련받게 하기도 하였다. 지역적으로는 우돔싸이와 싸이나부리(Xayaboury) 등을 중심으로 사역했으며, 특히 싸이나부리는 크게 부흥하여 북부를 중심으로 한 초기 라오스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1925년 태국 난에서 장사하던 쯔아(쌘짠랑)와 툰(후아이싸우 지역 거주 카무족)이라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전도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이 라오스로 돌아와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여 마을 사람 전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 1926년에 싸이나부리 최초의 복음교회인 ‘후아이싸우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 복음을 들었던 태국의 난 교회에 성경교사를 요청해 난 교회는 ‘아짠 분타’를 파송하여 싸이나부리에 상주하며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라오스인들 가운데 1935년 ~ 1945년에 걸쳐 6명(1)이 태국 난으로 유학을 가서 심화 성경교육을 받고 돌아와 사역하기도 했다.

(1) 무 두앙 마라, 망 프롬리차이, 텅캄 마니완, 쑤판, 싼, 싸러 부인 등 6명

 

치앙라이 근처의 무쏘족 가정 | 출처: 동남아선교뉴스레터

(2) 남부 지역 선교 : 스위스 형제단 중심, 싸완나켓
라오스 남부 지역에 상주한 최초의 선교사는 스위스인 가브리엘 콘테스(Gabriel Contesse, 1876~1906년)이었다. 그는 24세이던 190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901년 파리 국제학교에서 언어와 문화 훈련을 받은 후 1902년 스위스 형제단의 파송을 받고 아내와 남동생과 함께 베트남을 통해 라오스 싸완나켓(Savannakhet)주, 썽콘(Song Khone)으로 들어가게 된다. 1905년 부활주일 60세 라오스인이 첫 세례를 받고, 이후 50여 명이 세례를 받기도 하였으나, 1906년에 유행한 전염병에 콘테스 선교사 부부는 7개월 된 아이를 남기고 소천하고 만다.

이처럼 전염병은 물론 당시 통치자들과 토착 민속종교의 극심한 반대, 접근이 어려운 열악한 환경 때문에 초기 라오스 선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08년에는 7명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역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들과 적은 무리의 라오스인 성도들은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고 성경을 읽고 전도해 점차 복음이 심기우고 열매를 맺어 갔다.

썽콘에서 시작된 선교는 싸완나켓 주를 중심으로 부흥하여 1936년에는 10개 교회로 늘어났고, 그 해 열린 싸완나켓 대회에서는 200여명이 참석하여 8일간 부흥회와 성경공부를 지속하며 이후 교회개척 사역의 지경이 싸와완켓 외부 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어갔다. 선교사들은 개척해서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를 라오스인 목회자들을 세워 이양하는 방식으로 사역해갔다.

3) 북부 지역 선교 : C&MA 중심, 씨앙쿠앙으로 확장
1920년에는 남부에서 사역하던 ‘오데따(Odetta, 오데따 역 성경번역) 선교사’가 북부 쪽으로 선교 여행 중 맥길버리 선교사에 이어 라오스 북부를 비거주로 사역하던 휴 테일러 선교사를 만나 그와 선교 사역을 동역하게 된다. 그러나 남부에도 사역자가 부족하여 그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C&MA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1929년 당시 C&MA의 대표였던 탄 제피는 미국인 선교사 로프(G. Edward Roffe) 선교사를 라오스 북부 최초의 상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는 1929년부터 1951년까지 위앙짠(Vientiane) 등 북부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선교하였다. 1930년에는 남부의 스위스 형제단과 협력하여 루앙프라방에서 사역하였고, 1931년에는 라오스 왕에게 복음 전파를 허락해 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을 하기도 하였다.

위앙짠 중심으로 선교하던 C&MA는 1930년 경 동북부 씨앙쿠앙(Xiengkhuang) 지역으로 사역을 확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라오스 남부 스위스 형제단에 현지인 사역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스위스 형제단은 ‘아짠 쌀리 쿤타빤야’와 왕족이었던 ‘씨타’를 파송하여 함께 동역하게 하였다. 그 지역은 밀림으로 인해 도로 사정이 매우 좋지 않고, 마을간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을 비롯한 함께 한 사역자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씨앙쿠앙 지역까지 복음 사역이 확장되었다.

그러던 1939년, 라오스를 점령한 일본과 프랑스 간 전쟁으로 모든 사역이 중단된다. 그러나 1942년 ~ 1943년 트레드와 룻 앙드리아노프(위앙짠에서 라오스어 배움) 두 선교사들이 루앙프라방에서 성경공부 중이던 라오스인 캥의 도움을 받아 씨앙쿠앙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게 되면서 이 지역 복음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을 통한 복음의 문은 의외의 방법으로 열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이 씨앙쿠앙의 어느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묵을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지역의 영향력 있는 ‘무아이아’라는 무당이 일종의 시험으로 자신도 제압하지 못한 강력한 귀신이 나오는 한 집을 내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 일행이 아무 이상 없이 지낸 것이다. 이를 보고 놀란 무아이아가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고 이후 씨앙쿠앙에서의 복음은 빠르게 확산된다.

이후 두 선교사만으로는 사역이 버거울 정도가 되자, 루앙파방의 로프 선교사에게 도울 사역자들을 요청하였고, 이미 씨앙쿠앙 선교를 위해 남부에서 파송받아 10여년 사역해 온 아짠 쌀리 쿤타빤야(당시 루앙파방 신학교 교장)를 그 지역에 상주하여 사역하도록 하였다. 그의 주된 사역은 씨앙쿠앙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특이할 만 한 것은 씨앙쾅 선교확산의 시작이 되었던 무당 무아이아의 아들 두빠우도 그 신학교에 입학하여 훗날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2. 2차 세계대전 전후
싸이나부리, 사완나켓, 위앙짠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라오스 선교는 맥길버리 선교사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 루앙프라방, 우돔싸이, 씨앙쿠앙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자유로운 복음 전도와 심방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라오스 선교와 교회 사역은 위기를 맞게 된다. 1940년 일본 군대가 점령지 군대를 동원하여 라오스 북부 싸이나부리를 침략해오면서 모든 선교사역은 중단되고, 우상숭배를 강요당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된다. 이에 신자들은 흩어져 도망가게 되고, 사역 중이던 선교사 2가정이 필리핀으로 피하게 된다. 1942년에는 다른 선교사 그룹이 집에서 체포당하고, 그 중 사이공으로 피신했던 탄 프랭 커프 선교사는 얼마 후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라오스 교회와 성도들은 흩어져서도 예배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전쟁 후 다시 돌아와 교회를 재건하게 된다.

1947년 전후 선교사들이 복귀하여 파괴된 교회들을 라오스 사역자들과 함께 복구하는 한편, 선교사들은 위앙짠과 루앙프라방 등에서 부흥 집회를 열고, 성경을 가르치며 신앙의 회복을 도모한다. 특히 치앙마이에서 온 선교사 아짠 싸마리의 사역으로 라오스 교회가 다시 힘을 얻게 되었고, 1950년에 남부 스위스 형제단에서도 아짠 쁘라타나 씻티뎃을 북부로 파송하여 전후 회복을 위해 동역하기도 하였다. 

이후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되기 전까지 라오스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며 확장되어갔고, 특히 1969년을 전후로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라오스 교회 최대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전쟁 후 다시 한 번 큰 사역의 열매를 맺는 시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3. 1975년 공산화 이후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프랑스 지배 하에 들어갔던 라오스는 1946년 독립하게 되지만, 1950년부터 베트남 공산당과 연대한 ‘빠텟 라오(Pathet Lao)’와 라오스 정부군 간의 내전이 시작된다. 이 내전은 결국 빠텟 라오가 승리하는 1975년까지 무려 25년간 계속 되었고, 이후 라오스는 공식적으로 공산화되었다.

공산화 이후 라오스 교회는 상당한 박해를 당하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해체, 폐쇄되고 사실상 사역과 예배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폐쇄된 예배당은 공산정부의 지역 행정사무소로 강제 수용되었다. 또한 각 지역의 마을 이장 역할을 하는 공산정부 담당자를 중심으로 남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9년 1월, 공산화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했던 싸이나부리의 반 후아이 싸우 교회와 반 후 아이 룬 교회가 4개월 간 예배가 금지되고, 지역 행정 사무소로 강제 수용되었다. 이에 맞선 교회 지도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89년 4월, 위앙짠에서 열린 기독교 관련 정부 회의를 통해 ‘라오스 복음교회 교단 및 복음교회 설립’을 허가받게 된다. 이에 교단(Laos Evangelical Churches, 이하 LEC)이 설립되고, 지도자들을 세우게 되나 내부적인 리더십의 갈등을 겪기도 한다.(일반 교사 출신인 아짠 텅라가 회장이 되자 그의 리더십에 반발) 그러던 중 1994년 다시 공산 정부의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신앙 포기를 강요 당하고, 교회 십자가가 제거되었으며, 반 후아이 룬 교회는 파괴되고, 학교 등의 교회 재산이 몰수되기도 하였다. 이에 아짠 텅라와 아짠 짜런 등의 교단 지도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여 결국 다시 라오스 정부에 의해 제한된 교회사역과와 신앙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비엔티안 나캄교회 주일예배

4. 한국인 선교 현황
1975년 공산화된 라오스는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사실상의 전도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라오스 전국에 정부 공인교회와 가정교회까지 약 900여 교회와 약 13만 여명의 성도가 있다. 특히 수도 위앙짠에만 35개 교회가 있고,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위앙짠 주에 약 100여개의 교회가 있다.

라오스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서구권 선교사들은 공산화 이후 상당수 철수한 상태이고, 한국인 선교사로서는 1994년 김재양 선교사가 최초의 라오스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역했다. 이후 현재 약 100여 가정의 선교사들이 라오스에서 사역하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 선교사가 12가정에 불과했지만, 2009년 이후 한 해 10가정씩 늘어나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어서 2009년을 기점으로 전후 세대 선교사로 나뉜다고 한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라오스 전체 18개 주 가운데 12개 주에 들어가 사역 중이며 6개 주에는 아직 사역 중인 선교사가 없는 상황이어서 이 지역에 대한 사역 돌파와 개척이 필요하다.

라오스는 공식 라오스 복음 교단(LEC)이 있지만 종교 비자는 없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사실상 주로 스포츠, 문화, 학원업을 통한 비즈니스 비자나 NGO 단체 소속으로 신분을 비밀로 하는 보안 사역 중이다. 그러나 라선협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라오스 정부에서 선교사들을 다 파악하고 있으나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은 선교사들이 라오스 자국에 경제, 교육 등 실제적인 유익을 주고 있고, 주로 소수 종족 대상의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호하려는 가치에 위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이러한 라오스 정부가 용인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사역할 경우에는 사실상 선교사역을 묵인하고 있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현지 라오스 복음 교단(LEC)과의 관계도 선교 사역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살펴본 라오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듯이 라오스 교회는 공산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상당히 제한된 틀 안에 조정되었다고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선교사들의 신분과 사역의 유지는 라오스 교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라오스 정부 또는 라오스 복음 교단(LEC)이 상정하는 제한된 범주를 경계로 끊임없이 긴장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계를 잘 지킨다면 라오스에서의 선교사역은 공산국가이며 선교사역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암묵적으로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비엔티안 나사이교회 주일예배를 마치고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라오스 선교역사, 특히 최근 공산화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그것은 라오스에서 선교사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과연 라오스의 온전한 복음화를 이루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현재도 라오스의 공인된 예배 처소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적지 않은 수의 선교사들의 사역이 열심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 라오스와 그 안에 여전히 미전도종족인 주 종족 라오룸 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들에 대한 온전한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지 다소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난 라오스의 선교사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라오스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만 역사를 살폈으니,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끝을 한 번 전망해보자는 것이다
.

비근한 예로 바로 이웃 나라 태국은 공산 국가도 아니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무려 190년 선교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태국의 사회를 들여다보면 그 권력 트라이앵글(왕실-군부-불교) 체제를 지키기 위한 사회 구조와 장치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된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이면서도 한편 철저한 통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태국에서의 선교사역 역시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 한계를 넘지 않고 아무리 선교 역사가 10년 모자란 200년이라 한들 결국 여전히 복음화율 2% 미만의 미전도 종족, 타이 족에 대한 진정한 복음화가 가능할 것인가.

라오스도 마찬가지다. 양국의 정치체제는 확연히 다르지만, 사실상 그 권력구조와 유지 장치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실상 같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 구조적 환경을 넘어서지 않고, 라오스의 복음화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형태를 바꾸어 선교사역은 계속되고, 선교사들도 계속해서 사역은 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과연 라오스 복음화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태국을 향해 ‘순교의 피가 필요한 나라’라고 탄식했는데, 어쩌면 라오스도 그러하지는 않을지 역사를 반추해 숙고해볼 문제가 아닐까.  글 | 강호석(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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