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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의 슬픈 ‘진주’ 라오스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8. 10

인도차이나의 슬픈 ‘진주’ 라오스, 들여다보기

인도차이나반도 중앙 내륙에 위치한 라오스. 정식 명칭은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사회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중국과 베트남처럼 실질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와 대외개방정책을 시행해오고 있다. 라오스의 전체 국토 면적은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약간 큰 약 236,000㎢이고, 남북 종단 길이는 약 965km에 이른다. 인도차이나에 대해 강의할 때, 라오스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국 위, 베트남 옆에 있는 나라”라고 답하면 그제야 알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인도차이나의 숨은 진주 라오스. 아름다운 진주의 영롱함과 함께 슬픈 운명의 국가! 지금부터 라오스의 현재와 과거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보고, 이해해보자.

태국 농카이에서 바라 본 메콩강

메콩강의 진주(The Jewelry of Mekong)
라오스 사람들 스스로 라오스를 일컫는 말이다. 메콩 강을 빼놓고 라오스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오스에서는 메콩 강을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의 ‘메남콩(Mae Nam Kong)’이라 부른다. 그만큼 메콩 강은 라오스를 탄생시킨 젖줄이자 오늘날까지 식수, 농업용수, 교통, 전력자원 등 라오인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는 그야말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길이 약 4,200km, 세계에서 12번째로 긴 메콩 강은 여러 나라를 관통하는 국제 하천이다. 그 가운데 1,898km 구간이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싸완나켓, 팍세, 참파삭 등 주요 도시를 관류하며, 라오스 전 국토의 90%가 메콩 강 본류 및 지류와 연결되어 있다. 최근 라오스 정부의 야심찬 수력발전 프로젝트인 ‘아세안 배터리’라는 54개 수력발전 댐 건설도 메콩 강이 라오스 전역을 흐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왜 슬픈 진주가 되었나?

라오스 운명을 결정해온 주변국
하지만 메콩 강의 아름다운 진주 라오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외부 강대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과거 주변 강대국인 중국 · 캄보디아 · 미얀마 · 태국 · 베트남의 침략을 받았고,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최근 20세기 베트남 전에서 미국의 호치민루트 파괴를 빙자한 대대적인 라오스 폭격을 당하는 등 등 굴곡 많은 역사의 아픔을 겪었다.
라오스는 중국과 인도차이나 4개국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북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서쪽으로는 태국, 남동쪽으로는 캄보디아, 동쪽으로는 베트남, 북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표1). 아래 도표는 라오스와 접경하고 있는 국가들을 접경 거리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도표를 보면 베트남이 라오스와 가장 긴 접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라오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진 나라 역시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975년 라오스 공산화 이전부터 라오스의 현 집권세력인 라오인민혁명당과 이념적 혈맹, 동반자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라오스는 베트남, 캄보디아에 이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회주의 후발주자로서, 국가체제와 발전모델로서 베트남을 벤치마킹하고 있으며, 기독교 등 대 종교정책 역시 베트남 모델을 따르고 있다.

과거 13세기까지 라오스는 태국,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의 전신인 크메르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국이 크메르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6세~18세기 크메르제국의 쇠퇴 이후에는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 주변 3국의 각축전 속에 라오스가 놓이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주로 태국, 베트남, 중국 등 3국으로부터 경제, 정치, 외교적으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우선 태국의 영향이란 태국 동북부 이산 지역과 라오스 간의 언어 · 문화 · 민족적 유사성에 기반한다. 역사를 보면 양국은 과거 라오스 란쌍왕국 시기부터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특별히 라오스가 공산화된 1975년을 전후해서는 왕족들과 중산층들이 대거 태국으로 이주, 정착해서 살고 있어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을 통한 왕래가 빈번하다. 당시 라오스 전체 인구의 1/10이 태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는 태국-라오스 접경지역을 통해 태국으로 유입되는 수많은 합불법 라오스 노동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국경 풍경이 조성되고 있다. 또한 라오스는 자국 산업 기반이 취약해 태국산 농수산품, 공산품 등은 물론 태국 방송을 라오스 전국에서 볼 수 있으며, 태국 화폐 바트(Baht)또한 라오스에서 자유롭게 통용되는 등 라오스 내 태국의 영향력은 독립국가 라오스를 태국의 한 지방, 혹은 문화 속국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보이는 일면일 뿐 라오스 국민들은 과거 자신들을 지배한 태국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히 크다. 마치 한국이 일본에 갖는 감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중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 라오스가 중요하다. 특히 중국은 라오스 지도부 내의 솜사밧 부총리 등 친중(親中) 인맥을 바탕으로 제조업· 광업· 도소매업 등 여러 분야에 계속해서 직접 투자를 늘려오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수도 비엔티안에서 개최된 동남아시안게임(Southeast Asian Games)을 위한 종합운동장과 선수단아파트 건설을 중국이 지원하기도 했으며, 2012년에는 아시아· 유럽정상회의를 위한 국제공항 증축, 대형 호텔건설 등에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13년에는 수저우(蘇州)대학이 중국 대학 중 처음으로 라오스 비엔티안에 분교를 열어 친중 인재를 양성하고 있으며, 이 대학은 라오스 정부가 학위를 인정하는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인가 난 외국 대학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중국 자본이 주도하는 라오스 북부에서 비엔티안에 이르는 고속철도 건설 사업을 시행되고 있는데, 이처럼 갈수록 중국의 라오스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라오스의 한국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이제 라오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배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라오스 씨앙쿠앙 주 일대에 대량 투하되었던 UXO(UneXploded Ordnance) 제거 작업

마지막으로 베트남이다. 라오스의 현재 대 베트남 관계는 중국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베트남과 라오스는 후발 사회주의 국가로서 서로에게 의미가 각별하다. 라오스는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이 주도하던 베트민이 승리할 수 있도록 ‘호치민 루트’라는 중요한 전략물자 수송루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수많은 폭격기들이 라오스 씨앙쿠앙 주 일대에 대량 폭탄 투하를 감행하여 UXO(UneXploded Ordnance, 불발탄) 문제로 현재까지도 라오스 인명피해가 상당하다. 어쨌든 라오스-베트남 양국은 1976년에는 공동성명을 통해 양국 관계를 ‘특별 관계(Special Relationship)’로 규정했으며, 1977년에는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해 국방 부문까지 협력을 확대하기까지 했다. 특히 라오스는 1979년 중국-베트남 분쟁시, 베트남을 지지하면서 베트남과의 우의를 더욱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라오스는 베트남과 동일하게 후발 아세안(ASEAN) 가입국(베트남은 1995년, 라오스는 1997년 가입)으로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대외 개방을 통한 경제개발 정책을 추구하는 베트남 모델을 따르고 있다.

란쌍왕국의 초대 왕 파 음(Fa Ngum)

란쌍 왕국과 3국(비엔티안·루앙 프라방·참파삭)분열
(1) 란쌍 왕국의 건립과 분열
란쌍 왕국(Lanxang Kingdom)은 메콩 강 중류 지역에서 14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왕조이다. 13세기, 초대 왕 파 음(Fa Ngum)이 당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호족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란쌍왕국을 세움으로써 최초로 하나 된 라오스의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을 가진 란쌍(타이 학자들은 ‘란창‘으로 표기)은 당시 북쪽의 쳉훙 왕국, 서쪽의 란나 왕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의 현재 라오스 영토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라오스의 정체성의 기반으로서 라오스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란쌍을 건국한 파 음은 라오스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당시 무앙수아(Muang Soua)로 불리던 현재의 루앙프라방을 수도로 삼고, 주변국인 크메르 앙코르(Angkor) 왕국과 타이 아유타야(Ayutthya) 왕국 틈바구니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소승불교를 도입하여 국가 발전을 꾀했다. 이 때 스리랑카의 황금 불상이라고 불리는 프라방과 수많은 불경을 들고 주변 국가들의 사절단이 라오스를 방문했다.

파 음 사후, 아들 삼센타이(Sam Sen Thai)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인구조사를 통해 라오스 조세 제도의 기반을 확립하고, 당시 수도였던 루앙프라방을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렇게 발전하던 란쌍 왕국은 1520년 왕위에 오른 포티사랏(Photisarath) 시대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미얀마, 시암(Siam, 타이 왕국의 옛 이름)과의 전쟁의 여파로 란쌍 왕국이 서서히 쇠퇴해가던 중, 1560년에 세타티랏(Setthathirath) 왕이 미얀마의 침공을 두려워해 수도를 위앙짠(Viangchan, 비엔티안)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약 100년간 미얀마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혼란에 빠져있던 란쌍 왕국은 수리나웡사(Sourigna Vongsa) 왕이 즉위한 후 일시적으로 안정을 누렸다. 그는 라오스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1637년~1694년, 총 57년), 많은 업적을 쌓아 란쌍 왕국의 ‘황금기’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한 수리나웡사의 치세에 란쌍 왕국은 국제적 위상을 되찾았으며, 여러 인접국들과의 평화조약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690년 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 다툼이 발생했다. 이후 1698년 세타티랏 2세가 왕위에 즉위함으로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그 과정에서 축출된 수리나웡사의 친족들과 지방 세력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 등 세 왕국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리나웡사(Souligna Vongsa, 1637-1694) 왕 사후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짬빠싹 왕국으로 분열

(2) 루앙프라방 왕국
루앙프라방이라는 이름은 크메르(캄보디아)에서 들여온 유명한 불상(‘Phra Bang’이라는 황금 불상)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1353년부터 란쌍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불교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비단길의 교차 지점에 있어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1560년 비엔티안(Vientiane)이 수도로 정해지기까지는 루앙프라방이 수도의 지위를 지켰다.

그 후 1707년 란쌍 왕국이 분열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한 루앙프라방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초대왕은 낏사랏(kitsarat)인데, 왕조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주변 강국인 시암 타이, 버마, 베트남에게 시대를 달리하면서 공물을 바쳐야 했다. 1828년에는 타이 군대가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을 추방해 왕국이 사라지고 나자, 인접한 루앙프라방 왕국도 타이 권력자의 꼭두각시로 전락을 하고 만다. 1887년~1893년까지는 해적 파빌리온 누아르의 점령과 약탈로 타격을 입었으며, 1893년 프랑스가 들어오고서야 해적 세력과 타이의 속국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루앙프라방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시사왕웡(Sisavang Vong)은 1885년에 태어났는데, 프랑스의 보호아래 시사왕웡의 치세 기간 동안 루앙프라방은 종교 도시이자 왕국의 수도로 재건되었으며 많은 사원들이 복원되었다. 그는 190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루앙프라방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라오스를 다스리다 1959년 10월 29일 사망했다.

란쌍 왕국의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긴 세타티랏(Setthathirath)왕

(3) 비엔티안 왕국
비엔티안 왕국은 현재 라오스 중부에서 18~19세기에 존재했던 왕조로서, 1706년 란쌍 왕국에서 분열되어 비엔티안에 수도를 둔 왕국를 가리킨다. 비엔티안 왕국의 성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1706년, 수리나웡사의 손자인 낏사랏과 인타솜 형제가 루앙프라방에서 독립을 선언하자, 당시 왕이었던 세타티랏 2세는 독립 세력을 제거할만한 힘이 없어 이웃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 산페트 8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다음해 1707년 아유타야의 군대가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란쌍 왕국의 약화를 노리는 아유타야 군대가 비엔티안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이라는 두 분단된 나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이후 비엔티안 왕국은 루앙프라방을 지지하는 형태로 갈 수 밖에 없었지만, 1713년에는 다시 타이 아유타야 왕국의 계략에 의해 참파삭 지역이 참파삭 왕국으로 분리 독립되면서 세 왕국으로 분열되고 만다. 이중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은 란쌍 왕국의 정통성으로 갈등하게 되는데, 1773년 비엔티안 왕국이 루앙프라방 왕국으로부터 침공을 받지만, 이 때 동맹 관계에 있던 타이 시암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않고, 주둔지가 가깝다는 이유로 당시 시암과 전쟁 상태에 있던 버마 꼰바웅 왕조에 원군을 요청하여 이 문제로 타이의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 결국 시암의 탁신은 1777년 버마의 침공을 저지하는 동시에 비엔티안을 침공하여 수도를 점령하고 비엔티안 왕국을 속령으로 삼았는데, 당시 시암은 수많은 귀족들과 에메랄드 불상을 전리품으로 얻고, 1780년에 철군했다.

후에 비엔티안 왕국은 1803년 인타라웡(Intharavong)이 사망하자 차오 아누웡이 왕위를 잇게 했다. 아누웡의 치세(1804~1829)에 비엔티안 왕국은 황금기를 맞아 1807년 새로운 왕궁, 1808년 타트 파놈 다리와 시분판 사원(농카이 주), 1824년 세인 사원을 건설하는 등 각지에서 당시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또한 1827년 아누웡은 왕실 회의를 열고 시암 짜끄리 왕조의 국내외 정세의 혼란을 틈타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꾀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누웡은 방콕 침공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루앙프라방 왕국과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왕 티사 등에 의해 전략이 누설되었고, 결국 작전 도중에 시암에 간파되어 도리어 수도 비엔티안이 역공을 받아 점령당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아누웡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1828년에 시암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시암은 비엔티안 점령 후 아누웡 추종세력에 의한 반란을 우려하여 수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비엔티안 왕국의 주권을 박탈하여 영토를 시암으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1828년에 비엔티안 왕국은 멸망하고 만다.

(3) 참파삭 왕국
참파삭 왕국은 현재 라오스 남부 참파삭 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1713년에서 1946년까지 존재했던 왕조이다. 참파삭은 고대 참 족이 세운 참파 지역이었다고 추정되는데, 이후 란쌍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직접적으로는 1690년 수리나웡사 왕의 사망 후 수도 비엔티안에서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으로 스만카라 공주가 신하 3,000명과 함께 메콩 강을 건너 남부의 참파삭에 이르게 되면서 참파삭 왕국이 시작되게 되었다.

당시 참파삭에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고승(高僧) 뇻께오와 그의 승려집단, 사원이 있었는데 스만카라 공주는 이들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해 비엔티안 왕국에서는 무력으로 뇻께오 일파에 대항했지만, 란쌍 왕조의 약화를 노린 아유타야 왕조 산펫 9세의 계략으로 1713년에 뇻께오가 참파삭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이것이 참빠삭 왕국의 기원이다.

독립 선언 후, 초대 국왕 스만카라 공주의 장녀인 노까삿이 즉위하여 참파삭을 통치하다가, 1737년 그녀가 사망한 이후, 장남 사야꾸만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동안 왕국은 번영하였고 왕국의 세력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1779년에 시암(톤부리 왕조)이 비엔티안 왕국과 루앙프라방 왕국을 침공하여 제압하면서 참파삭 왕국도 다른 두 왕국과 마찬가지로 무력으로 시암의 속령이 되고 만다.
참파삭의 다른 명칭은 바삭(Bassac)이다. 북쪽으로 살라완 주, 북동쪽으로 세콩 주, 동쪽으로 아타푸 주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타이 우본랏차타니 주, 남쪽으로 캄보디아 스퉁트렝 주, 남서쪽으로 캄보디아 프레아비히어 주와 국경을 접한다.

이후 1986년 비엔티안 주와 캄무안 주에서 분리되어 주(州)로 신설되었다. 몬 크메르(Mon Khmer)족에 속하는 라오 텅족(Lao-Theng) 등 소수민족의 주 거주지역이다. 주도는 팍세로 라오스 남부의 행정,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다. 참파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왓푸 덕분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라오스 왕궁 박물관(하우 캄, Haw cham), 1904년 루앙프라방 지방에 왕족을 위해 지어졌으나 1975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왕궁 박물관으로 전환

결론: 슬프지만 영롱한 진주 라오스
지금까지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와 내부 란쌍왕국을 통해 라오스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라오스는 한국인들에게 TV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라오스 편)’을 통해서야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교계와 선교계 역시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라오스라는 국가와 라오스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을 작성하기 위해 자료들을 읽어가면서 작지만 강한 라오스의 면모를 보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영국과 프랑스라는 서구 식민제국주의 영향, 미국과 베트남간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딛고 일어난 독립국가 라오스! 란쌍왕국이라는 찬란함이 오히려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고, 인구도 약소한 라오스지만, 국가를 보존하고 문화를 꽃피어 온 라오스!

지금 라오스는 과거와 현재의 고난과 갈등을 극복하고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지혜로운 외교를 행하며, 내륙 관문국가(Gateway Country)로서 도약의 꿈을 꾸고 그 가능성을 실현해가고 있다. 쉽지않겠지만 라오스를 응원한다.
역사가 알려주는 한가지 진리가 있다. 영원한 제국은 없으며, 영원한 변방도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조개가 모래와 이물질의 침입으로 그 상처를 끌어안고 결국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메콩강의 진주 라오스가 극동의 변방 우리 대한민국처럼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고, 복음의 빛된 증인들을 주변 인도차이나와 열방에 보내는 나라가 되길 소망한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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