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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콘캔 송형관 선교사

업마가 만난 사람
D·I·G·I·T·A·L JOURNAL  2018. 4

송형관 선교사

송형관 선교사는 2001년 콘캔으로 파송(안디옥 교회(신화석 목사) 파송)되어 현지인 제자 훈련, 교회개척, 신학교, 목회자 재교육, 스포츠 코칭, 복음 라디오 사역 등의 사람을 세우는 일과 현지교단 C&MA(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와 협력하며 사역하고 있다. 배우자 배명실 선교사와의 사이에 사랑, 드림 두 자녀를 두었다.

Q. 콘캔(Khon Kaen)은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곳이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나?
젊을 때 담임목사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했었다. 공부하고 교회사역에 몰두하다보니 그 서원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보는 중 선교사로 서원한 기억이 떠오르며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문득 이런 마음을 주셨다. ‘현지인과 한 번도 같이 먹고, 살고, 놀아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당시 나는 선교지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당장 회개하고 팀을 꾸려 단기선교를 나갔다. 그곳이 바로 콘캔이었다. 이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선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콘캔에 다섯 차례 단기선교를 왔을 때, 이곳이 “나의 선교지”라는 생각이 들어 당장 집사람과 함께 밥숟가락 하나 들고 들어왔다.

태국에 오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방콕에서 언어훈련을 하는데, 나는 바로 콘캔으로 들어와 현지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언어를 배웠다. 아마 콘캔이 아닌 방콕에서 언어훈련을 했으면 이곳으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선교사에게 언어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콘캔에서 언어 훈련을 한 것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또 한 가지는 파송교회 담임목사님이 태국선교에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더군다나 콘캔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C&MA 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C&MA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지 “태국 이산 선교의기초를 닦은 C&MA”참고).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한다.

ANTIOCH TRAINING CENTER (안디옥제자훈련센터)

Q. 사역소개를 부탁드린다.
제자훈련이 주 사역이고, 제자훈련 사역을 하다 보니 제자들이 현장학습을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해서 교회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크리스천 영어교사 훈련, 스 포츠 지도자를 세우는 사역, 목회자 재교육, 신학교 사역이 있다.

콘캔 시내에 동북부 신학교(NBS, Norheastern Bible Seminary)와 콘캔 신학교(KTS, Kon kaen Theological Seminary)가 있는데, 그곳에서 교수 사역을 하고 있다. 그 외 복음 라 디오 방송사역과 BEE(Bible Education by Extension), 어성경(어, 성경이 읽어지네)같은 사역을 통한 동북부 선교사를 돕는 일, 라디오 DJ 훈련 사역, 미자립교회 지원 및 교회개척사역 등 모든 게 사람을 세우는 사역들이다.

이렇게 사람을 세우는 일에 주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175년이 넘었지만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 못했다. 교회는 세워졌으나 일꾼이 없어서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동북부 지역만 봐도 50%이상의 교회가 비어있다.

한 목회자가 2,3개 군데를 돌아가면서 하는 순회목회를 하고 있고, 또 목회자가 없다보니 ‘푸 복크렁’이라 불리는 평신도가 성경을 가르치는 수준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장로라고 말할 수 있는데 교인들 중에 가장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나 연장자로 그들이 대부분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설교를 하는 식이다. 설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 정도를 가르치다 보니 사람들이 양육되지 못하는 현상들이 동북부에 주로 나타난다. 동북부 교회 50% 이상이 이런 상태이다. 사람을 세우는 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Q.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인력이나 재정적인 면에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많은 사역을 어떻게 감당하시나 궁금하다.
나는 한국에서 선교회 활동을 해본 적도 없고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다. 훈련의 마음도 있긴 했으나 교회 사역을 하다 보니 사실 어디 가서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한 교회에서 자라서 한 교회에서 훈련받아 나온 경우다. 이것이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된다. 그런데 모든 선교훈련은 교회에서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준비된 것 같다. 제자훈련을 주창하시던 목사님이기 때문에, 제자훈련하고 그 안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구성하는 것을 많이 해봤다.

사실 나는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앞에 열거한 것보다는 사역의 조직이 더 방대하다. 지금 현재 하고 있는 목회사역은 개척교회만 18개다. 물론 내가 직접 목회를 하지 않고 모두 훈련받은 사역자들이 파송되어 예배 인도, 찬양인도, 재정, 행정 등 교회운영을 리더들이 알아서 한다. 나는 그냥 둘러보고 메시지만 전하고, 그 외 제자훈련을 담당한다. 한 때 이양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지만 최종 목표는 제자에게 이양을 하는 것이다. 다른 프로그램의 경우 신학교는 직접 사역하고, 큰 훈련 프로그램은 주기적으로 있는 것이라 그리 바쁘진 않다.

그리고 현재 C&MA와 협력하여 사역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물질 선교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들의 동의하에 사역을 시작했다. 지금 있는 센터(안디옥훈련센터)도 거의 3만평 이상에 달하는데 모든 재산을 총회로 환원하고 협력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총회가 마음을 열고 나와 더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사역을 하게 되었다. 총회에 들어가서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데 그렇게 연계해서 사역하시는 분이 많지 않다.

나는 동북부 전체를 대상으로 사역하는데 C&MA 뿐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사역한다. 우리 사역은 현지인들이 차비를 들이고, 식대, 책값을 내고 스스로 훈련받는 자립을 원칙으로 한다. 수백 명이 모이는 훈련사역에는 현지인들 스스로가 낸다. 아직도 돈도 안 내주는데 무엇하러 훈련에 가나 이렇게 생각하는 현지 리더도 많지만 오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그렇게 진행된다.

지금은 한국에서 후원하는 교회가 없지만 현지 교회사역과 일부 개개인이 보내주는 헌금으로 사역비를 충당하는데 우리는 밥만 제공해주는 정도다. 그래도 행복하게 훈련받고 간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 건물들 모두 직접 땀흘려가면서 리모델링한 것들이다. 학사에서 훈련받는 학생들이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도 한다.

학사는 공동체 생활을 말하는데, 매년 전국에서 50명 정도(여기서 50명이면 우리나라 5천명과 맞먹는 숫자다)를 모집해서 그 중에서 2명을 뽑는다. 그 친구들과 8년 동안 함께 살면서 훈련하고 신학교까지 마치게 해서 평신도 리더로 파송하기도 하고, 목회자로 파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선발할 때 목회자 자녀가 우선이다. 왜냐면 목회자들이 생계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목회에 집중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회자 자녀들을 지원해 주고 그 목회자가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교단과 함께 하고 있다. 그 사역이 주된 사역이고, 나머지 사역들은 부차적인 사역들이다. 그렇지만 그 사역들이 학사에서 훈련받은 친구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한다. 물론 우리가 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Q. 콘캔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
태국 동북부 지역 도시 중 코랏이 제일 규모가 크고, 콘캔은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코랏은 방콕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실제로 동북부로 안 보는 경향이 있다.

콘캔에 미트라팝(Mittraphap) 즉 ‘우정’이라는 뜻을 가진 도로가 있는데, 말레이시아부터 라오스까지 직진으로 뻗어있는 2번 국도로 태국의 가장 중심을 가로지르는 아주 중요한 도로다. 도로 주변으로 큰 도시가 있는데 코랏, 콘캔, 우돈타니가 있고, 이 세 도시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들어가는 관문에 우본이 있다. 이를 일컬어 동북부의 4대 도시라 하는데, 콘캔을 통해 이 모든 도시에 이를 수 있다.

행정, 교육도시다보니 큰 학교들, 대학생 그리고 행정 공무원들이 많다. 콘캔은 만미라 부르는 실크의 산지다. 주로 아낙네들이 누에고치를 재배해서 베를 짜는 일을 주로 하고, 농사도 짓는다. 태국의 다른 지역은 1년에 2, 3모작도 가능하지만 이곳은 비가 거의 안 와서 1모작도 어렵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농사 외에 소를 키우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말을 재배하고 베를 짠다. 이렇게 열악하고 소외된 지역이라 경제가 살지 않아 젊은이보다는 노인과 어린이가 대부분인 곳이 많다.

젊은이들은 큰 도시나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태국인 노동자들 대부분이 이곳 동북부 지역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도 훈련된 제자를 선교사로 역파송했다. 내가 한국에 들어가서 태국인 교회를 개척을 하고 지금 태국인 제자가 태국인 목회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태국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전략이다. 그분들이 다시 돌아와서 동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한국에 간 태국 노동자를 약 10만 명(비자소유 6만 명, 무비자 4만 명) 정도로 보는데, 태국에 있는 한국인이 2만 명 정도 밖에 안 되는것에 비하면 10만 명은 상당한 숫자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중부 방콕, 파타야 등의 관광지에 많이 간다. 그곳에서 서빙하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 사람이다. 태국 동북부의 경제권은 대부분 중국과 일본이 잡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일본은 자동차, IT 공장 등을 세우고, 중국 계 태국인들은 이를 판매하는 직종에,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동북부 사람들이다.

태국인들도 보이지 않는 차별을 하면서 동북부 이산 사람들과 중부 오리지널 족속과 구분을 짓는다. 특히 방콕에서 동북부 이산어(라오스어)을 쓰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우리도 방콕에 가면 이산어가 아닌 표준어를 쓴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을 당하기 일쑤다.

콘캔 국제 컨벤션 센터

태국은 다양한 민족들이 사는 나라다. 동북부는 특별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사람들이 많이 산다. 예전에는 콘캔도 라오스에 속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언어적, 문화적으로 라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른 도시인 우본 라차타니, 시사켓, 이쪽으로는 캄보디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캄보디아인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특별히 캄보디아, 라오스 영향이 크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다. 콘캔에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가 나오는데 그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베트남 중부의 다낭에 다다른다. 이 때문인지 베트남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이곳에서 베트남 식당을 많이 운영한다.

콘캔이 지금과 같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2004년도 APEC정상회의가 열리 면서다. 2001년도만 해도 2차선이었던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도 들어서고 오래된 차량들도 바뀌는 등 발전이 있었다. 당시 수상이 탁신이었는데 가장 열악한 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동북부 지역을 많이 발전시켰다.

콘캔은 행정, 교육도시라고 했는데 이곳에 왕이 세운 콘캔 대학이 유명하다. 동북부 안에서는 콘캔 대학이 가장 수준이 높고, 태국 안에서도 4,5번째 되는 대학이다. 전에는 왕이 직접 와서 졸업식을 진행했는데 지금은 두 번째 공주인 시린턴 공주가 와서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아세안 경제협력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콘캔에서는 아직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아세안의 관문을 콘캔으로 이야기한다. 크라비는 관광을 위해서 개발한 지역이고 콘캔은 아세안을 위해서 개발한 지역이기에 정부에서 공항을 넓히는 등 지원을 많이 한다. 콘캔이나 동북부는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다. 콘캔에서 유명한 것은 거북이 마을, 코브라 마을, 공룡 마을 이 3가지다. 콘캔은 과거 공룡이 서식했다고 한다.

 

나는 태국에서의 선교를 ‘복층 선교’라 말한 적이 있다.
태국의 크리스천은 1층에서 불교인으로 태어나 살다가
복음을 듣고 크리스천이 되면 2층으로 옮겨와 살게 된다.
평일에는 불교행사와 불교문화를 접하고 살다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생활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가 친척들의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면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Q. 콘캔의 기독교 상황은 어떠한가?
동북부 지역 중에는 콘캔이 복음이 많이 들어갔다. 특별히 콘캔이 태국 전체 복음화율의 2%정도로 제일 높고, 그 나머지 지역은 1%도 안 된다. 교회 분포를 보면 동북부지역 교회들의 성도 숫자가 평균 10여 명에 불과하다. 보통 50명 이상의 성도수면 목회자 한명을 지원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 정도가 되면 자립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는데 완전한 자립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유지되는 정도다. 동북부지역의 성도 50명 정도 규모의 교회를 약 10%로 본다. 태국에는 각 지역마다 목회자 연합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정도 모임을 갖고 여러 방향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C&MA 모교회인 콘캔 교회의 성도는 320명 정도다. 동북부 선교는 C&MA 선교회가 주도하다시피 했다. 아마 C&MA가 꾸준히 사역을 해왔 으면 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중도에 여러 어려움이 있어서 C&MA가 약화되었다.

안디옥제자훈련센터(ATC)는 C&MA가 전초기지로 사용했던 곳으로, 나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킨 곳으로 시작되었다. 나중에 C&MA가 본거지를 시내에 있는 동북부 신학교로 옮기고 지금은 제자훈련 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C&MA 소속교회는 135개 교회로 동북부에 가장 많고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 안식교가 있다.

현재 태국의 종교 현황에 기독교가 0.4%라고 하는데, 이 0.4%는 천주교, 이단까지 합해진 숫자다. 동북부 지역에서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일하러 갔다가 교회를 나간 경우 그 교회 성도들 중에 동북부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숫자들이 겹쳐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적으로 기독교 인구를 0.4% 로 봐야 하느냐는 의문이다. 우리 태국인 학생들도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이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

나는 태국에서의 선교를 ‘복층 선교’라 말 한 적이 있다. 태국의 크리스천은 1층에서 불교인으로 태어나 살다가 복음을 듣고 크리스천이 되면 2층으로 옮겨와 살게 된다. 평일에는 불교행사와 불교문화를 접하고 살다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는 생활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가 친척들의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면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또 태국인들은 교회 행사 때는 한 번 가줄 수 있지만 종교는 절대 못 바꾼다는 의식이 있다. 왜냐면 죽으면 내 남편, 내 부모를 못 만난다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주민등록상에 종교를 쓰게 되어 있어서 기독교인이라 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태국동북부지역 축구를 통한 선교사역

Q. 콘캔으로 오는 신임 선교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선교사들이 태국에 오면 먼저 방콕에 머물면서 언어 공부를 하고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곳에 못 간다. 왜냐면 개척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자녀들의 교육 문제 때문이다. 동북부 지역은 자녀교육이 힘든 지역이다. 지금은 국제학교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마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다.

콘캔에는 영어와 태국어를 같이 사용하는 이중언어(Bi-lingual)학교들이 여러 개 생겼다. 비용은 한 학기에 150~400만원 정도로 비용에 따라 영어와 태국어의 비율이 달라진다. 이런 선교사자녀 교육을 위해서 MK들을 홈스쿨링해주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상당히 좋을 것 같다. 다른 나라의 선교사 그룹은 MK 홈스쿨링 프로그램만을 지원해주는 단기선교팀이 해마다 방문한다고 들었다. 우리처럼 학교를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면 그런 홈스쿨링 선교 프로젝트가 생긴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선교지를 가보고 현장에서 응답을 받으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하나님이 현지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 사역을 시작하면 좋겠다. 그리고 현지인들 사역을 돕고 현지인들이 세워지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그것이 성취되면 빠져나가서 선교 사역을 마치는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내가 태국에 처음 왔을 때 태국에 선교사가 6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1,000명 이상이 되었다. 선교사가 많은 것은 좋은데 한국 선교사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커지면 법인을 만들어서 재산권을 보호한다. 나는 이것을 절대 반대한다. 웬만하면 태국 총회에 들어가서 태국교회를 돕고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하면 좋겠다.

나는 현지인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해서 그들이 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고, 결국에는 이양하는 것이 목표다. 이 사역을 마치고 나면 한국에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태국인 사역을 하고 싶다.  글 | 채형림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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