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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이산 선교의 기초를 닦은 C&MA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8. 4

앨버트 벤자민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 1843~1919) 목사

지난 태국 동북부 이산 지역 리서치에서 가는 도시마다 선교사들이나 현지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빠지지 않고 들었던 것이 “C&MA”라는 이름이었다. 우리가 들은 C&MA에 대한 언급들은 대체로 “파송 받고 이산에 나와 보니 C&MA 교회가 있었다.”, “이 지역의 선교는 C&MA 선교사들이 처음 시작했다.”, “과거에 이산 지역에서 C&MA의 교세가 상당했다.” 등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인터뷰 했던 콘캔의 한 선교사는 태국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을 때부터 현지 C&MA와 정식 선교협약을 맺고 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우리 안에 ‘도대체 C&MA가 무엇인가?’라는 공통적인 관심이 일어났다. 선교적 기회와 도전에 직면한 태국 이산 지역으로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을 동원해야 하는 이 시점에 이산 선교의 기초를 닦은 C&MA에 대한 이해는 시의적절할 것이다.

C&MA(기독교선교연맹)은 미국에 본부를 둔 복음주의 교단이며, 그 명칭은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의 이니셜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교회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지나친 교리 논쟁으로 복음이 변질되고 복음전도와 선교는 오히려 약화되는 시대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캐나다 출신 장로교 목사 A. B. 심슨(Albert B. Simpson, 1843-1919)(1)을 중심으로 한 목사들과 선교사들은 침체된 교회의 한계를 깨기 위해 성결한 삶과 복음주의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면서 1884년 C&MA를 설립,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참여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나면서 1887년 하나의 교단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성결교단을 세운 정빈(좌), 김상준(중앙), 죽첨정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성서학원(1912)

이 과정에서 심슨은 장로교의 정통신학 교리에 ‘성결, 말씀과 성령역사의 조화를 이룬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제시하였다. 이후 20세기 중반 유명한 설교가 A. W. 토저 목사와 L. L. 킹 목사 등의 왕성한 활동으로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오늘날까지 ‘The Alliance(www.cmaliance.org)’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C&MA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후방 성도(Christian)들과 전방 선교사(Missionary)들이 연합하여 효과적으로 세계선교를 이루자는 취지로 시작된 선교 운동이었기 때문에 선교 교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동양 선교에 비전을 품고 집중하였는데, 그 결과로 심슨 목사의 설교를 듣고 헌신한 감리교 출신의 카우만 부부가 C&MA 파송으로 일본 선교를 시작하면서 1901년 일본에 동양선교회(OMS)가 세워지게 된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것은 이 동양선교회에서 세운 신학교를 졸업한 당시 조선인 신학생들(정빈, 김상준)이 귀국해서 1907년에 세운 교단이 성결교로서 C&MA와 한국 예수교대한성결교단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2)

콘캔신학교

C&MA는 2017년 기준 130여 년간 51개국에 1,23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단 교회들에 속한 성도 250명당 1명꼴로 높은 선교사 파송 비율을 보이고 있다. C&MA 선교사역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선교사 파송과 관리의 일원화로 투명하고 효율적인 선교사 후원
(2) 대도시와 같은 중요 지역에 선교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적 선교: 자체 교회를 지속, 재생산할 수 있는 교회 개척 방식 추구
(3) 선교하는 자생적 토착교회 설립 목표로 선교 파송: 초기부터 현지 지도자 양성전략
(4) 선교의 우선순위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 3세계 지역 선교

이러한 C&MA가 처음으로 태국 이산 선교를 시작한 것은1929년 아짠 폴 깐터 선교사가 우본 라차타니로 파송받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듬해 1930년 피터 화이트 선교사를 파송해 콘캔에서도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2년 만인 1931년 우본 전도처에서 첫 세례자를 배출했고, 1932년에는 콘캔 교회가 개척되었다. 이후 1936년에 코랏에 태국 동북부신학교(NBS, Northeastern Bible Seminary, 현재 콘캔 소재)의 모체가 되는 태국 이산 최초의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이후 C&MA는 코랏, 우본에서부터 콘캔, 우돈타니에 이르기까지 이산 주요 지역에서 활발한 선교사역을 진행해서 교세를 확장해 갔다. 1948년에는 마하살라캄에서 태국 C&MA 첫 총회(각 교회 대표 150여명, C&MA선교사 10명 참석)가 열렸고, 그로부터 17년 후인 1965년에 태국 정부로부터 정식 종교법인 승인을 받아 태국복음주의총회(GCT; Gospel Church of Thailand)로 교단 명칭을 확정하였다.

안디옥제자훈련원에 위치한 Sairung Khon Kaen School 학생들

이와 같은 C&MA의 태국 선교 초기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들의 선교사역의 목표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즉 선교사를 파송하고 즉시 복음전도를 시작하여 2~3년 안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 신학교를 설립해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불과 19년 만에 개척된 현지 총회를 열 정도로 그들은 ‘토착적이고 재생산 가능한 현지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선교 목표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록 1969년 교단 내부적 갈등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교단을 이탈하는 사태(3)가 있어 교세가 약화되기도 했지만, 태국 이산 지역의 초기 선교역사에 있어서 C&MA와 그들이 개척한 교회들이 수고한 흔적들은 지금도 그 현장에 생생히 남아 후대 선교사들에게 도전과 자산이 되어 주고 있었다. 특히 본 선교회 리서치 팀이 이산 지역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 예수교대한성결교단 파송(2001년)의 송형관, 배명실 선교사 부부가 태국복음주의총회(GCT) 교단과 정식 선교협약을 맺고 C&MA의 선교적 유산인 콘캔의 총회본부와 동북부신학교(NBS), 안디옥제자훈련센터(ATC) 등에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다.

일종의 교회갱신 운동으로 시작했던 C&MA는 목표가 분명했다. 교단이 되었지만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이 선명했다. 우리는 그 흔적을 어쩌면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선교적 바통(Baton)인 태국 이산에서 발견하게 된다. 태국 동북부 지역에 아직도 복음화율이 0.2%가 채 안 되는 무려 2,300만에 달하는 거대한 미전도종족 이산족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미 교회가 있지만, 태국의 강력한 불교 토양 속에서 여전히 선교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땅과 사람들을 복음과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C&MA가 콘캔에 세운 최초의 교회인 콘캔교회의 주일예배

C&MA 설립자인 심슨 목사가 교단 신문인 ‘Alliance Weekly’에 1899년 11월 11일에 기고한 글에서 C&MA가 추구하는 정신과 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가 모인 것은 새 교단을 설립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해온 사역을 답습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신학입장을 내세우거나 특정인이나 인물들을 찬양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소명은,
첫째,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충만한 그리스도를 높이고,
둘째, 말씀에 굶주린 성도들로 하여금 영혼육 모든 축복과 특권을 누릴 영적 유산이 그들에게 속했음을 깨닫게 하고,
셋째,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재림하실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넷째,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동안 게을리 했던 국내 불신자 전도와 해외 미전도종족 전도사역에 진력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 소명에 신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게을리 했던 국내 불신자 전도와 해외 미전도종족 전도사역에 진력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자극하는 것… 이 소명에 신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말이 오늘날 한 때 왕성했던 조국 교회가 서서히 쇠락해 가는 모습을 목도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사명을 맡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한국교회도 현실에 안주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C&MA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이 서린 그 땅 태국 이산에서 더욱 복음전도와 미전도종족 선교에 진력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축복을 누리게 되길 소망한다.  글 | 강호석(SIReNer)

(1) 심슨은 1843년 캐나다의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 1866년 캐나다의 낙스 (knox) 대학을 졸업하고 23세의 나이에 캐나다 ‘낙스 장로교회’의 담임목 사로 부임하여 탁월한 설교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리고 8년 후 미국 켄 터키 루이빌의 ‘체스트너트(Chestnut) 장로교회’와 뉴욕의 ‘13번가 교회 (Thirteenth Street Church)’의 담임목사를 지냈다. 찬송 작시자이기도 한 심 슨 목사는 우리 찬송가에 수록된 <어제께나 오늘이나>,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내 병든 손 내밀라고> 등 5곡의 찬송을 작시했다.
(2) 일본 동양선교회를 설립한 카우만이 C&MA 파송 선교사였지만, 감리 교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의 성결교는 감리교 알미니 안적 신학색채가 더 강하다. 한 때 장로교 칼빈주의 신학의 일부를 받아들 여 분파했던 예성(혁신)이 신학적으로 C&MA와 더 가까웠으나, 현재는 다 시 합쳐서 예수교대한성결교단은 신학적으로는 C&MA와 유사하지만 성령 론 등에서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3) 대표적으로 싸마키탐 교회를 비롯한 우돈타니 지역 여러 교회들이 대거 태국 CCT 교단 13노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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