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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역사와 문화를 형성한 3대 종족: 버마, 샨, 몬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7. 10

에야와디강(Ayeyarwady River)은 미얀마의 중앙을 흐르는 강으로 이라와다강(Irrawaddy River)이라고도 부른다.

미얀마는 인도 동부, 방글라데시와 함께 북벵골 만에 위치한 나라로, 주변 5개국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는 태국이 위치한다. 국토 면적은 67만 6,578㎢이다. 이는 한반도의 3배 크기이며, 대륙부 동남아 국가 가운데 가장 크다. 현재 미얀마의 공식적인 국호는 1989년 5월 ‘버마 연방(The Union of Burma)’에서 변경된 ‘미얀마 연방(The Union of My-anmar)’이며,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다.

미얀마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종족은 아무래도 버마, 샨, 몬 족일 것이다. 이 세 종족은 우리 역사의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지역 패권을 두고 오랜 세월 대립과 통합을 거듭한 종족들이다. 과거 미얀마는 에야와디(이라와디)강 유역 평원 지대를 중심으로 상부(上部)와 하부(下部)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데, 상부는 버마족과 샨족이 지역 패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였으며, 하부(下部) 미얀마는 전통적으로 몬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버마족이 강성하여 남진함에 따라 버마족 중심의 중부(中部) 미얀마를 따로 구분할 필요가 생겼고, 근래에는 상(上), 중(中), 하(下)의 3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미얀마 역사를 형성해온 세 종족에 대해 알아보자.

버마족과 3대 통일 왕조
버마족은 현재 미얀마의 지배종족으로 미얀마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한다. 인종 계통상 버마족은 ‘티베트 버마계(Tibeto-Burmese)’로 분류한다. 이는 ‘시노티베트(Sino-Tibetan)’족의 지류인데, 이들은 원래 중국과 티베트를 거쳐 히말라야 산록 그리고 인도아대륙의 동부와 동북부 등지에 살고 있었다. 버마족들은 AD 9세기에 미얀마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무렵에는 상부지역 비옥한 평원지대인 짜욱세(Kyaukse)에서 농경생활을 통해 정착하고 버마족 근거지를 이룩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버마족 왕조이자 통일 왕조는 영어로 바간(Bagan), 미얀마어로 버강이라 불린다. ‘바간(버강)’은 왕조 이름이면서 동시에 11세기부터 13세기 까지 4백만 파고다의 도시로 알려진 수도의 지명(地名)이기도 하다. 이 왕조는 1044년 아노여타(Anawy-ahta) 왕에 의하여 성립되었는데, 그는 미얀마의 상부와 하부지역을 통합하고, 몬족 국가의 수도인 타톤을 공격하여 500여 명의 몬족 승려와 함께, 팔리 경전 등 상좌부 불교와 문화를 받아들여 불교 문명을 미얀마 전 지역에 확대 보급시켰다. 그는 전통 정령신앙 ‘낫’ 대신 고등 종교인 불교를 통해 국민을 통합시키려 했다. 지금도 바간 지역은 버마족과 불교의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결합한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헤발 236m 언덕 위에 있는 수타웅 파이 파고다(Su Taung Pyai Pagoda)(왼) 통일 왕조인 버강왕조 이후에 북부 지방에 생긴 샨족의 왕국인 잉와왕조(우)

다음으로 미얀마 역사 두 번째 통일왕조는 따웅우(Taungoo) 왕조이다. 16세기 1510년 버마족 왕조가 미얀마 거의 대부분을 통일했다. 특히 버잉나웅(Bayinaung) 왕은 잉와(Inwa) 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의 마니뿌르, 중국의 윈난성(云南省) 그리고 태국 등지까지 정복에 나섰다. 그는 독실한 불교도로 정복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강요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불탑을 보수하고 불교 경전을 일반에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발전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북쪽의 샨족 지역 산간벽지에도 불교 전법사(傳法師)를 파견하였다.

18세기 중엽 버마족 얼라웅퍼야(Alaungphaya) 왕이 1753년 꼰바웅(Konbaung) 왕조 시대를 시작했는데, 이 왕조가 미얀마 역사상 세 번째 통일왕조이다. 당시 초대왕 얼라웅퍼야는 팽창정책으로 태국 아유타야(Ayutthaya)까지 원정했고, 제 5대 보도퍼야(Bodawpaya) 왕 때에는 동쪽의 테나세림(Tenasserim)에서 서쪽의 아라칸(Arakan; 오늘날의 미얀마 라카인 주)까지 미얀마 최대의 판도를 누렸다. 그러나 영국 세력과 충돌하여 3차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을 통해 결국 1885년 제 10대 왕인 시보가 영국군에 포로가 되면서 왕조는 133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시보의 아버지인 민돈(Mindon) 왕은 수도를 잉와에서 만달레이로 옮기고, 내륙 중심부를 흐르는 에야와디 강의 항로를 정비하고 교통체계를 확대하는 등 산업화와 근대화에 힘쓰는 한편, 영국의 위협에 맞서 민심을 불법(佛法)으로 수습하고자 제 5차 불교 결집(結集)까지 대대적으로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얀마는 영국 제국주의와 1824년과 1852년의 두 차례의 전쟁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 침탈 해(年)인 1886년 1월 1일을 기해 영국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곧 바로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州)로 편입되었다.

만달레이 궁전 보호를 위해 주변에는 해자를 건설(좌) 사가잉(Sagaing)에 위치한 야다나본 브리지(Yadanabon Bridge) 근처의 옛 영국군대 요새(우)

안타까운 영국 식민지시대의 유산: 지역·종족·종교 분리와 갈등
영국은 식민정책에 있어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노선을 채택하여, 미얀마 식민지를 다수종족인 버마족과 소수종족들에 대해 각각 차별적인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즉 다수종족인 버마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중앙평원지역은 영국 식민정부가 직접 통치하고, 소수종족들은 그들 고유의 정치와 사회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 국가인 영국은 불교도이면서 지배종족인 버마족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주변 산간 지역 소수종족들의 기독교 개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실제로 불교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고 부족 토속 신앙이 강한 문맹의 산악 지역 사람들이 많이 개종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미얀마 종족, 종교 간의 갈등을 초래한 역사적 배경에 불교도 종족보다 소수종족에 더 치중하여 선교한 기독교 선교사들과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한 영국 식민정부의 책임은 현재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통치술은 1948년 미얀마의 독립과정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이후 현재까지 미얀마의 고질적인 지역분리, 종족 갈등, 종교 갈등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버마화 정책이 샨족들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샨의 문화재들을 철거, 파괴했는데, 1991년 11월 11일 샨 왕국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호텔을 세웠다.

샨족의 형성과 골든 트라이앵글 아편
현재 미얀마에서 샨 주(洲, Shan State)는 그 면적이 가장 크다. 인구는 대략 800만인데, 이중 약 470만이 샨족이다. 샨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특징은 평야, 논, 농사라는 3종 세트이다. 전통적인 미얀마 북부의 강자로서의 샨족은 농경과 정착생활의 조직적 시스템 구축을 통하여 카친, 라후, 와, 아카 등 북부 소수종족들을 지배하고 영향을 끼쳐왔다. 이들은 샨 잉와 중앙 왕조가 있을 때부터, 버마 왕조, 영국 식민지 시대, 심지어 1948년 독립 후에도 지방 봉건 소왕국 형태의 수많은 토호 세력들을 이루어 왔다. 이들 소왕국 통치자는 ‘샤오파(Saohpa)’로 불렸는데, 곧 ‘하늘의 군주’라는 의미이다. 현재 짜이퉁(Kengtung)에 있는 Kengtung Hotel은 원래 샨 궁전으로 1903년 영국식민지시대의 샨 왕자에 의해 세워진 것을 1991년 중국 자본에 의해 개조된 것이다.

치앙샌에 위치한 마약 박물관

그렇다면 왜 13세기에 샨족이 득세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버마족 최초 왕조인 바간 왕조가 몽골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 군대에 의해 1287년에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몽골군들이 중국 남부 운남 일대를 점령하게 되자, 이때 운남 시쑤앙빤나(西雙版納) 지역 주변에 살고 있던 타이계열 따이족(Tai)의 한 갈래인 샨족이 남하하여 미얀마로 유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샨족은 지리적 위치상 중국과 미얀마, 태국 사이에 중간에 있어, 특히 중국과 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 이다. 미얀마에서 샨족의 팽창과 발전은 특히 14세기에서 16세기 중반에 최절정을 맞는다. 당시 미얀마 상부지역에서 ‘잉와(Inwa; 혹은 Ava)’로 불리는 샨 왕국들은 버마족들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3세기 동안 전성기를 이루며 이 지역의 패권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에는 영국 식민정부의 분할통치 정책의 결과로 상대적으로 버마족보다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샨 족 등 무장반군단체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아편을 재배하여 1970년대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 특히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이 전 세계 아편의 최대 공급지로 악명이 높았다.

마약왕 쿤 사(Khun Sa)(좌) 치앙샌 마약 박물관에 전시된 양귀비를 재배하던 고산족들이 아편 담배를 피우는 모습(우)

샨족 출신 마약왕 쿤사와 아편 박물관
전 세계에 마약 왕으로 악명을 떨쳤던 쿤사는 본명이 장치푸(張奇夫)로, 중국계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원래 미얀마 정부군 장교로 샨족 반군 토벌 임무를 수행하다가, 1970년대부터 샨 지역에서 양귀비 재배에 앞장서면서 그 후 40년 동안 전 세계 마약의 60%를 공급하는 최대 마약상이 되었다. 주로 태국, 라오스, 미얀마와의 국경에 거주하는 카친족, 라후족 등 소수 종족을 자기 세력에 흡수하여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을 마약 밀매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치앙샌에 아편 박물관이 있어서 마약 왕 쿤사와 그 지역민들의 아편 재배와 중독의 실상을 전시하여 마약의 위험성과 폐해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이후에 쿤사는 1993년 12월에 태국 접경에 있는 샨 주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몽을 샨국의 수도로 선포하여,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얀마 정부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으로 1996년 결국 미얀마 정부에 투항했으며, 1만 명에 달하던 반군들도 자진 해산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당시 쿤사는 투항의 조건으로 자신의 핵심 측근들의 안전 보장과 루비, 금 광산 및 호텔 등 막대한 수익 사업권을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양곤에서 미얀마 정부의 보호 속에 살다가 2007년 10월 26일, 74세의 일기로 양곤 자택에서 사망했다.

몬주의 짜익커미 파고다(Kyaikhami Pagoda)

몬족(Mon)
몬족의 과거 중심도시는 양곤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바고(페구)이다. 이 도시는 몬족의 한타와디 왕조(Early Hanthawaddy)의 수도이자, 중심지였다. 여기에 있는 쉐모도 파고다(Shwemawdaw Paya)는 ‘위대한 황금의 신(神)’이란 뜻으로 탑의 높이가 114m나 되는 미얀마에서 제일 큰 파고다이다. 이 파고다는 1000년 전 몬족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부처의 머리카락 두 개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쉐달랴웅 파고다(Shwethalyaung Pagoda)는 AD 994년 몬족 왕 미가데파 2세(Migadepa II)가 건축했는데, 이 안에 조성한 와불상이 유명하다.

바고 외에 전에 미얀마의 수도였던 양곤도 몬족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18세기 중반까지 양곤은 ‘다곤(Dagon)’으로 불렸다. 바로 몬족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몬족 한타와디 왕조(825년~1747년) 기간 동안 줄곧 다곤으로 불리다, 1755년 버마족 꼰바웅(Konbaung) 왕조의 얼라웅파야(Alaungphaya) 왕이 ’전쟁의 끝‘이라는 뜻을 지닌 ’양곤‘으로 개칭하여 버마족의 자존심이 되었다. 현재 미얀마의 몬족은 대부분 몬 주, 바고 구, 이라와디 삼각주와 태국-미얀마의 경계지역에 분포하여 살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초기부터 거주하던 종족 중 하나인 몬족은 미얀마와 태국에 상좌부 불교를 전파하였을 뿐 아니라, 버마 문화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티벳계 버마족의 문명화와 문화 발전에 기초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의 기원은 기원전 1500년경으로, 현재 동남아시아 소수종족으로서 최초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기원전 300년경 태국 수완나품(Suwannaphum) 왕국을 건국하고, 기원전 200년에는 인도 아소카(Ashoka Maurya) 왕이 보낸 전도자에 의해 상좌부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 후 몬족은 AD 550년경 태국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하게 된다. 몬족의 초기 왕국 드바라바티(Dvaravati)와 하리푼자야(Haripunjaya)는 고대 캄보디아 왕국, 중국, 북부 말레이 왕국들과 유대를 맺고 있었으며, 크메르 문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몬족은 825년경 하부지역 미얀마에서 확고히 자리 잡고 바고(페구)시를 세웠다. 서쪽의 하부 미얀마로 이동한 후 스리랑카 실론 섬과 남부 인도에서 소승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고 인도의 팔리 문자를 채택했다. AD 1000년경까지 몬족은 동남아시아에서 번영했으며, 몬 문자 등을 개발해 선두 문명 종족으로서 동남아시아에 군림해왔다.

미얀마 사람들, Photo by 김윤하 목사

버마와 미얀마 연방 사이의 딜레마
미얀마의 현재 공식 국가 명칭은 미얀마연방공화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대한 호칭(呼稱)은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지금도 영국, 미국 등 많은 국가들이 버마(Burma)라 부르고 있다. 이유는 미얀마 군부 독재 정부에 대한 인정 여부 때문이다. 과거의 명칭이었던 버마는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종족인 버마족의 나라라는 의미였기에 여러 종족을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바꾸었으나 원래 미얀마라는 단어의 어원이 결국 버마이기 때문에, 다종족성을 표방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1989년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국호를 개칭할 때 그에 관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부와 관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독단적인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 산 수치 여사는 버마라는 단어를 사용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비단 국가 이름에서 만이 아니라, 미얀마는 지금도 지역, 종족, 종교 갈등의 딜레마로 국가 통합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135개의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족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주류종족이다. 버마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종족이 샨족으로 전체 인구의 약 9%에 해당된다.

그러면 몬족은 어떤가? 인구 2%가 몬족이다. 고대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동남아시아의 전통 강자이자 버마의 불교문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오고 버마족에게 전수하였던 몬족은 미얀마에서 버마족과의 결혼, 버마족들의 대대적인 이주와 버마 화를 통해 소수종족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몬족을 생각하면 중국 청나라의 만주족이 연상된다. 게다가 영국식민지 시대에 몬주 수도인 몰레먀인은 영국 기독교 선교의 기지였을 뿐 아니라, 인도 무슬림들을 대거 이주시킴으로 독립 후 버마족 군부정부에게 식민지, 외세와 기독교 선교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각인시켜버렸다. 카렌족 기독교도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카렌족 불교도, 카렌족 크리스천, 샨족 불교도, 샨족 크리스천, 몬족 불교도, 몬족 크리스천 등 종교와 종족 정체성, 여기에 로힝야족 탄압으로 인한 이슬람교 박해와 갈등까지 아웅산 수치 정부가 풀어야할 숙제가 대한민국 현 정부의 과제처럼 산적해 있다.   SIReNer 정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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