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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은 왜 아직도 1%인가?(샨 선교역사 뒤짚어 보기)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7. 10

미얀마 샨 족 선교 역사는 올해로 157년(2017년 기준)이 된다. 그러나 샨 족은 여전히 복음화율 1% 미만의 미전도 종족이다.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나라보다 24년이나 앞선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미얀마 샨족은 미전도 종족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래도 미얀마 샨 선교 역사 속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샨 선교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1860-1889) : 따웅우, 샨 선교의 태동과 준비
미얀마 샨족 선교의 시작은 아도니람 저드슨 이래 미얀마 선교를 이어온 미국 침례교단이 1860년 빅스비(Moses H. Bixby)를 샨족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면서부터이다.(1) 사실 빅스비는 미얀마 선교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몰레먀인에서 버마족과 몬족 교회를 섬기다가(1853-1856), 건강상의 이유로 3년 만에 본국으로 철수해야만 했던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고 미얀마 “샨(Shan)족”에게로 다시 파송된 것이다. 그는 1861년 3월, 미얀마 양곤(Yangon)을 거쳐 북으로 약 200km 떨어진 따웅우(Toungoo)에 도착했다.

빅스비(Moses H. Bixby)선교사, 1827. 8. 20 ~ 1901. 3. 20

그런데 왜 샨족 선교의 첫 사역지가 미얀마 동북부의 샨 지역이 아닌 중부의 따웅우였던 것일까? 여기에는 절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었다. 당시 앵글로-버마 전쟁(2)으로 미얀마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점령 정부는 건설 목적으로 약 1만여 명의 샨족들을 그들의 원거주지로부터 따웅우(Toungoo) 인근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샨 지역을 포함한 당시 미얀마 북부는 반군 지역으로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여행이 불가능했다. 그 말은 빅스비가 샨족 선교사로 오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샨 족 마을 하나 만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왔을 때, 마침 샨족들이 무려 1만여 명이나 그것도 제 발로 안전한 중부 따웅우까지 이주해 온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하나님이 선교사를 샨 족들을 위해 보내셨을 뿐 아니라, 샨 족들을 선교사를 위해 보내기도 하셨다.”라고 말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샨 선교의 시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늦춰졌을 공산이 크다.

(1) 샨족이 선교대상으로 처음 발견된 것은 1831년 아도니람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대상 종족 리스트에서였고, 1835년에 인도 아삼 지역에 13세기 아홈 왕국 건설을 위해 이주해온 샨 족의 후예들을 대상으로 선교한 영국 선교사들은 있었으나, 본격적인 미얀마 샨족 선교는 1860년을 처음으로 본다.
(2) 당시 영국령에 속한 인도와 당시 버마가 벌인 국경을 둘러싸고 충돌한 전쟁, 1824년부터 3차에걸친 전쟁 끝에 1885년 미얀마는 완전히 영국 식민지가 된다.


비록 샨 본토는 아니었지만, 빅스비에 의해 따웅우에서 시작된 샨 선교 1기는 본격적인 샨 선교의 모판을 준비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사역 초기에 주력한 것은 샨어 연구와 복음 전도, 현지인 양육이었다. 빅스비는 들을 사람이 있는 곳이면 집, 짜얏(미얀마식 정자), 시장 등 가는 곳마다 항상 버마어와 함께 샨어로도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 빅스비가 도착한 이듬해인 1862년 5월 샨족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고, 첫 회심자인 마웅 아웅 미얏(Maung Aung Myat)이 침례를 받게 된다. 또한 초기부터 신학교실(Theological class)을 시작하여 회심한 샨족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함께 사역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1864년 말까지 3개의 예배 처소에, 성도가 96명까지 늘어났다.

또한 빅스비는 따웅우에서의 사역과 함께 동북부 샨 지역과의 접촉을 위해 계속해서 선교여행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1866년에는 당시 버마(미얀마)와 시암(태국) 왕으로부터 샨 지역을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는 어인이 찍힌 정식 통행증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빅스비 다음으로 샨족 선교사로 파송 받은 쿠싱(Josiah N. Cushing) 선교사 등은 1867년에 샨 내지까지 정탐할 수 있게 되었다.

쿠싱 선교사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 계속 해서 샨 지역 더 깊은 곳으로 정탐을 진행하면서도, 샨어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 등 샨 선교의 거의 모든 영역의 기초를 놓았다. 1869년에는 동부 샨의 중심 도시 짜이퉁(Kengtung)까지 무려 52일간 여행하면서 샨어 전도지를 배포하고, 가는 곳마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샨어로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이후 5개월 간 배를 타고 양곤까지 가면서 미얀마 내의 샨족 분포를 파악하며 수많은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한편 1876년에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사역하던 중국 국경 인근 바모(Bhamo) 지역 사역을 미국 침례교단 선교부가 맡게 되면서 따웅우 사역은 아내에게 맡기고, 쿠싱은 바모 지역의 샨 사역을 개척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쿠싱과 선교부는 산지가 많아 왕래가 어려운 샨 지역 특성상 각 거점마다 선교기지가 구축 될 필요성과 그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샨 지역 정탐을 통해 확인한 거점 도시들에 선교기지를 구축할 샨 선교 2기 사역의 전략적 모판을 마련하였다.

쿠싱(Josiah N. Cushing)선교사(1840. 5. 4 ~ 1905. 5. 17)

쿠싱 선교사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 계속 해서 샨 지역 더 깊은 곳으로 정탐을진행하면서도, 샨어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 등 샨 선교의 거의 모든 영역의 기초를 놓았다. 1869년에는 동부 샨의 중심 도시 짜이퉁(Kengtung)까지 무려 52일간 여행하면서 샨어 전도지를 배포하고, 가는 곳마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샨어로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이후 5개월 간 배를 타고 양곤까지 가면서 미얀마 내의 샨족 분포를 파악하며 수많은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한편 1876년에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사역하던 중국 국경 인근 바모(Bhamo) 지역 사역을 미국 침례교단 선교부가 맡게 되면서 따웅우 사역은 아내에게 맡기고, 쿠싱은 바모 지역의 샨 사역을 개척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쿠싱과 선교부는 산지가 많아 왕래가 어려운 샨 지역 특성상 각 거점마다 선교기지가 구축 될 필요성과 그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샨 지역 정탐을 통해 확인한 거점 도시들에 선교기지를 구축할 샨 선교 2기 사역의 전략적 모판을 마련하였다.

2기(1890-1929) : 의료 선교를 중심으로 한 거점 선교
양곤에서 쿠싱의 도움을 받았던 시포의 지방토호(샨어: 샤오파, Saohpa)가 그들을 초청하여 시포(Hsipaw, 1890)에 첫 병원과 함께 선교기지를 세우게 된다. 시포를 시작으로 몽나이(Mongnai, 1892), 남칸(Namkhan, 1896), 짜이퉁(Kentung, 1904) 등 4개 거점도시에 차례로 의료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샨 선교를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남칸(Namkhan, 1896)에 세워진 병원(좌),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들 단체 사진(우)
사진출처: History of Shan Churches in Burma 1861-2001 _ Christian Mission _ Evangelism

이 시기 사역의 특징을 몇 가지 짚어보면, 먼저 의료사역을 중심으로 선교 기지를 구축한 것은 초기 돌파 전략으로서 상당히 주효했다. 특히 소외되었던 샨족들에게 각 지역의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을 매개로 접근한 것은 선교사와 복음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남칸은 1922년부터 사역한 시그레이브(Dr. Gordon Seagrave) 선교사와 함께 한 동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병원 시설과 장비를 현대화하고, 간호사 훈련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샨족 2번째, 3번째 교회가 세워지고, 1942년 버마 전쟁 전에 약 500여명, 군부독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60년에는 약 2000여명의 샨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확실한 기초가 되어 지역 노회(Association)가 설립되는 등 교회 사역에서도 열매를 거두었다. 이를 통해 각 하부 지역까지 선교사역이 확산될 수 있었고, 복음이 전해질 토양이 마련될 수 있었다.

    시그레이브(Dr. Gordon Seagrave)선교사, 1935년, 남칸(좌), 따웅우 선교본부(우)
    사진출처: History of Shan Churches in Burma 1861-2001 _ Christian Mission _ Evangelism

그런데 여기에 한계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 서구 선교사들이 적응하며 강도 높은 의료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예컨데 몽나이는 흑수열(악성 말라리아)이 심각하여 1926년 이후에는 선교사의 거주사역이 불가능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시포에서는 의사 선교사 수급이 어려워 1916년 이후 9년간은 폐쇄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샨 선교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초기 의료사역 정착에 상당한 역량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매우 본질적인 복음전도, 교회개척, 사역자 훈련 등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당시 선교사 동원에 있어서도 선교부가 당장 의료 선교사 수급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만, 전도자나 교회개척 선교사를 동원하고자 애쓴 흔적은 찾기 어려운 것이 그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커 쌍둥이 형제(Dr. Richard Buker & Rev. Dick Buker)선교사 가족사진(상), 리차드 부커(Dr. Richard Buker)와 병원 직원들(하), 사진출처: History of Shan Churches in Burma 1861-2001_Christian Mission _ Evangelism

의료사역과 전도, 교회개척 사역이 함께 집약적으로 행해진 사례는 앞서 언급한 남칸이나 가장 나중에 개척된 짜이퉁에서의 부커 형제(Dr. Richard Buker & Rev. Dick Buker) 선교사들에 의한 사례 정도이다. 1926년 부커 형제가 함께 동역하면서 치료와 말씀 사역을 함께 병행하는 이상적인 선교 모델을 이루었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그 해에만 3,864명을 치료했고, 이 지역에 인구의 6%에 달하는 나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위해 무려 16개의 나환자촌을 세워 그들의 치료와 함께 정상적인 삶을 돕는 사역을 하게 된다. 그와 함께 말씀 사역의 시너지 효과로 그들의 사역 동안 해마다 100여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는데, 특히 1939년에는 한번에 42명이 한꺼번에 침례를 받고, 11곳에서 800여명이 성경교실에 참여하는 열매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과 의료사역 우선 정책은 그 공(功)이 분명히 인정되지만, 대부분 지역에서 전도와 교회 개척, 사역자 훈련 등의 돌파는 너무나 더디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샨 선교 초기 역사에서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이후 제 3기에 불어 닥친 샨 선교의 단절기를 맞아 자생적이고 자전적인 교회와 선교 사역이 이어지지 못한 치명적인 한계 야기의 주요인이라는 과(過)를 남겼다.

3기(1929-1962): 선교의 시련과 단절
초창기부터 샨 선교는 미국 침례교단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2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샨 선교에 투입되던 재정적, 물적, 인적 후원이 대폭 축소되었고, 심지어 몽나이의 학교와 병원 시설들은 재정 고갈로 인해 지역 정부에 운영권이 넘어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어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얀마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전쟁의 격랑 속에 휘말리면서 그동안 일군 거의 모든 사역시설들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전후 복구와 재건 사역이 시작되었지만, 재정 후원과 선교사 지원의 부족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동부 샨주의 나환자촌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완콧 샨족침례교회

설상가상으로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얀마 북부 지역에서 소수종족 반군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선교사들이 더 이상 현장에서 사역하기가 어려운 위험 속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당수 선교사들이 위험지대가 된 거점 선교기지에서 안전한 지역 또는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고, 병원 등의 운영을 황급히 선교사들을 돕던 샨족 의사들에게 이양하게 된 것이다. 남칸은 시그레이브 선교사의 조력자였던 샨족 의사 아이룬(Dr. Ai Lun)이, 짜이퉁은 샨족 책임 간호사였던 살라마 아이 보(Salama I Bo)가, 나환자 사역은 그의 남편인 살라 아이 판(Sala Ai pan)이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그 외 지역도 대부분 급작스럽게 현지인들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실상 이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동역한 신앙을 가진 의사들이기는 했으나, 설교나 전도, 교회 사역에 전문적으로 훈련된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남겨진 병원을 재건하고 운영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얀마는 1962년 군부독재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나마 남아있던 미얀마 선교사들은 대거 추방되었고, 그나마 간접적으로 사역을 돕던 샨 선교사들도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병원과 학교 등은 상당수 국유화되고 만다. 충분한 출구전략 준비 없이 불가항력적 위기 속에 황급히 현지인들에게 이양된 선교사역은 결코 발전적인 선교의 상을 만들어 낼 수 없었고, 특히 사전에 전문 사역자들을 양성해 두지 못했던 전도, 교회개척, 사역자 훈련 등의 영역은 이후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한 채 암흑기와 같은 미얀마 군부독재 하의 20세기 후반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여전히 복음화율 1% 미만의 미전도종족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서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시작했다. ‘선교 157주년의 미얀마 샨족이 어째서 아직도 복음화율 1% 미만의 미전도종족으로 남아 있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샨 선교의 역사를 곱씹어 볼 때, 하나는 선교의 본질인 복음전도, 교회개척을 약화시킨 초기 선교전략 설정상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대공황, 전쟁 등과 같은 불가항력적 외부 악재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 대해 강력한 불교권인 미얀마 샨족을 대상으로 초기 선교전략으로서 불가피했다거나 샨족의 종족 특성상 “샨족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너무 더디다”라는 평들이 있다. 그러나 같은 미얀마의 버마족이나 몬족 선교 역사에서는 강력한 불교의 반발로 인해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증언들이 있어도 샨족 선교 역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짜이퉁에서 의료와 전도사역 합작의 시너지 모델을 제시했던 부커 형제가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전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받아들이는데 더디다고 말하는가?”라는 외침은 당시 샨 선교 전략의 맹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후자로 제시한 외부 악재들에 대해서도 후원이 끊어지고, 전쟁이 터져서 부득이 선교사가 현장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말그대로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의 선교전략 설정과 관련해서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중국 선교의 경우도 공산당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일거에 추방당하고, 모든 자산이 몰수되는 등 중국 교회는 암흑기에 들어갔지만, 이후 중국이 개방되고 드러난 중국 교회의 엄청난 부흥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샨 선교에 있어서도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복음전도와 그들을 통한 교회개척, 사역자 훈련에 대한 돌파 노력이 더 있었다면 비록 더딜지언정 그 노력이 한 알의 밀알처럼 심겨져 선교 단절의 암흑기를 지나 성령의 결실을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19C 샨족 마을 모습(좌) / 샨 5일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쿠싱선교사. 1869년 경(우)

 다시 샨 선교
우리가 지난 5월에 방문한 짜이퉁의 샨 교회는 과거의 선교부지와 선교시설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교단도 있고, 교회도 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생명력이 없었다. 샨 교회의 한 목사는 샨 선교의 가장 시급한 필요로 첫째도 사역자 훈련, 둘째도 사역자 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남겨진 샨 교회의 유산 속에서 복음으로 부흥시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진정 샨족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열과 성을 다해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할 사역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천금같은 주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교회를 이루도록 도우며, 또 그러한 사역자를 양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선교사가 오늘도 필요하다. 오늘 우리는 짜이퉁에서 바로 그 구령의 열정으로 작은 부흥을 이룬 부커 선교사의 “왜 우리는 그들에게 전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받아들이는데 더디다고 말하는가?”라는 고요한 외침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샨족으로 향해 157년 전 못다 이룬 구령의 열정, 힘 있는 교회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때이다.   SIReNer 강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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