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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과 미전도종족 선교

성경이 말하는 CAS
D·I·G·I·T·A·L JOURNAL  2017. 12

성육신과 미전도종족 선교(마태복음 1장 1~23절)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의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의 선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강단에서의 선교적 설교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의 처음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단서가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2에,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로 하신 그 말씀의 성취가 성육신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며, 성취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의 약속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이 모아져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대로 주어졌고, 이 마태복음이 맨 처음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씀이 마태복음은 물론, 신양성경 전체를 시작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날 이 마태복음 1:1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오셨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두 사람에게 그 자손에 대해서 맹세로 약속을 주셨는데, 그 두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마태복음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all nations on all earth”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첫 번째가 창세기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여기서 그 “씨”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3:16에 보면,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이처럼 성경은 이미 그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한 분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한 분이 오시면 누가 복을 받습니까? 이스라엘 12지파만 복을 받습니까?

아니요! “all nations on all earth”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 한국 사람같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시면 이방인인 우리 한국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이 복음에 소외되었던, 또 지금 소외되어 있는 미전도종족들 입니다. 예수님은 이 미전도종족들을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분이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약성경을 시작하면서 첫마디가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셨다.’ 입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열방과 모든 사람들, 모든 미전도종족들에게 복이 되실 그 아브라함의 자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이 역사적인 선언으로 마태복음 뿐 아니라 이 신약성경 전체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런 맹세를 주셨을까요?
히브리서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른 때는 내가 한다고 했다가 안하는 일이 설사 있을지 몰라도 이것은 절대로 변경 안하고 그대로 한다.’라는 것을 확증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죠.

2. 다윗에게 하신 맹세의 약속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받은 다음 사람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에게도 맹세로 약속을 주셨는데,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시편 89:3-4)” 그 맹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즉, 너(다윗)에게서 소위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명사로 불릴 한 인물이 태어날 텐데 그의 왕위가 대대로, 아들, 손자, 증손자… 이렇게 다윗의 후손이 계속 왕이 된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그 다윗의 자손이 오면 그가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30에 보면 다윗은 이미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 한 분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다윗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 곳곳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 ‘그는 평화의 왕’이며, ‘그는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다 함께 통치할 왕’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 왕과 관련해서, 사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부패성향을 고려할 때, 일인 독재나 권력 세습 등의 폐해를 막기 위해 현존하는 최선의 통치체제인 것은 맞지만 가장 좋은 통치체제는 아닙니다. 사실 제일 좋은 통치 체제는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착한 왕,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공급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왕, 그런 왕이 부패하지 않고 계속 통치하면 그것이 사실 가장 좋은 통치제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으로서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렇게 완벽한 왕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대안으로 민주주의를 고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Republic of God이 아니고 Kingdom of God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완벽하게 좋으신 왕, 전지전능하신 왕이시니 그 왕이 통치하는 나라,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행복한 대한민국에 사니까 실감이 잘 안 나지만, 지금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 생각해보십시오. ‘아, 좋은 왕이 우리 먹을 것도 충분히 주고, 완전히 우리를 보호해주는 왕이 와서 통치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어려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 그 영원한 왕이 바로 그런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첫마디로 ‘바로 그 왕, 그 다윗의 자손이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1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가 오시는 이유, 바로 땅의 모든 족속을 복 받게 하기 위해서 땅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한 족속도 소외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그 모든 족속들이 알아야 합니까, 몰라야 합니까? 그것을 알려야 하겠습니까, 입 다물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랬으면 복음에 대해 이방인이었던 우리 모두 지금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것은 최악의 불행입니다. 인생과 생명을 걸고서라도 증거하고 전해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도 누리고 또 증거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와 열방을 위한 왕이심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속에 있습니다. 그 족보 속에 유독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이 바로 네 명의 여인들입니다.

4명의 이방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왜 들어갔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열방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대목인 것입니다.

다말, 룻, 라합, 밧세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는 왜 들어갔을까요? 언뜻 보면 다들 부정한 사연이 있는 여인들 같은데 어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것인지 의아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다 이방 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밧세바는 이방 여인인지 잘 모르시는데, 이 여인은 성경(삼하 11:3, 삼하 23:34)에 보면 나중에 압살롬과 함께 반역하게 되는 아히도벨의 손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히도벨이 사무엘하 15:12에 에 “길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이면 ‘어느 지파 누구’라고 하지만, 이방인인 경우 대체로 그 출생지를 따라서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길로 사람 아히도벨 역시 가나안 원주민으로 이방인이고, 고로 밧세바 역시 이방인의 혈통인 것입니다. 그렇게 네명 모두 이방 여인들인 것입니다. 이방인이지만, 이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참여시키고 이들도 함께 하나님의 구원 백성의 무리에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네명의 이방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왜 들어갔느냐?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열방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만이 선민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든지 아직 그 복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그야말로 미전도종족들을 위해 오신 것이고, 먼저 이 복을 소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또, 세월이 흘러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그 미전도종족들에게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복의 통로로서 미전도종족에게로 나아갈 책임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선교적인 사건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만의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예언하듯 열방을 위해,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조차 유대인의 히브리어가 아닌 당시 이방인들이 읽을 수 있는 공용어였던 헬라어였습니다. 결국 이방인들에게 이 성경을 읽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이 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복음, 진정한 성육신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 열방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누렸듯이 이 땅과 열방의 수많은 미전도종족들에게 이 복음의 빛이 전해지도록 헌신하는 생애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글 | 김병선 선교사, 정리: 강호석(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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