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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라카인과 로힝야, 그 슬픈 역사의 기원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7. 12

2017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의 노벨 평화상 박탈 거론까지 야기하게 한 민족, 로힝야족은 누구인가? 공식적으로 135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은 유일하게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소수민족이다. 로힝야족 학살, 난민 사태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지난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20세기 미얀마 군부 독재시절의 슬픈 역사가 있다. 이번 호 CAS에서는 과거 역사를 중심으로 어떻게 한 나라에서 종족이 형성되며, 종족 갈등과 종교 갈등이 유발될 수 있는지 미얀마의 라카인주의 라카인족과 로힝야족간 갈등의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이름과 지리적 위치
미얀마 언어로 라카인은 라카인 주(State: 소수종족 집거지)와 라카인 종족(People, Ethnic)을 의미한다. 라카인 주는 미얀마의 서해안에 있는데 북쪽으로는 친 주, 동쪽으로는 마궤 구(Division: 주류종족인 버마족 집거지), 바고 구, 에야와디 구 등 3개 버마족 집거지들과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벵골 만, 북서부는 방글라데시 치타공과 인접해있다. 비공식적으로 옛 명칭대로 아라칸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이들을 마르마족, 인도에서는 모그족으로 부른다.

2. 벵골 만과 아라칸 왕국
미얀마 라카인족은 아라칸의 후예라는 자긍심이 대단하다. 선조들이 미얀마 패권을 주도했던 버마족, 샨족, 몬족에 버금가는 강한 ‘아라칸 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아라칸 왕국은 미얀마 라카인주 서부와 방글라데시 사이에 있는 벵골만의 해안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활용하여 현재 방글라데시 주요 항구 도시인 치타공과 인도 북동부 트리푸라 주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들은 벵골 만 일대에서 15세기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해상 무역을 주도하면서 18세기 말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3. 라카인족과 인도의 영향
미얀마 라카인족은 주로 상좌부 불교(혹은 소승불교)를 믿으며, 버마족, 샨족, 몬족과 함께 미얀마의 대표적인 4대 불교 종족중 하나이다. 라카인주는 지리적으로 아라칸 산맥에 의해 미얀마 본토와 분리되어 있다. 이 산맥은 과거 미얀마 버마족으로부터 언어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라카인족을 분리시키는 역할과 함께 버마족의 침입을 막는 방책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라카인족이 지금은 미얀마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정치와 문화를 유지해 올 수 있게 해주었다. 오히려 지리적으로는 인도아대륙에 더 가깝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인도 문화의 흔적은 라카인족의 문학, 음악, 요리를 포함한 삶의 전반에 남아있다.

1800년대 후반의 산도웨이(Sandoway)출처: 위키백과사전

4. 세 차례에 걸친 영국과 미얀마 전쟁의 결과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1824년~1826년까지 영국과 미얀마가 싸운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해 미얀마의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 테나세림 등이 영국령으로 병합된 전쟁이다. 미얀마 서부 아라칸과 영국령 치타공 사이의 분쟁이 직접적인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다. 1784년~1785년에 미얀마의 버마왕조가 아라칸 왕국을 공격하자, 아라칸 피난민들은 영국령 인도 치타공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라칸 피난민들은 군대를 조직해 미얀마 본토를 공략했고, 미얀마 내 아라칸 반란군도 당시 아라칸 왕국의 수도인 산도웨이(Sandoway)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미얀마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령 벵골을 침공했다가 결국 영국 식민지 지배를 불러오게 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게 된다.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1852년~1855년까지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미얀마는 버마족 꼰바웅 왕조 바간 왕과 그 뒤를 이어 민돈 왕이 치리하던 때였는데, 미얀마의 패배로 영국이 저지대 미얀마 지역 양곤 주변까지 합병하게 되었다.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1885년 세 번째로 미얀마와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고지대 미얀마 전역까지 영국에 합병되면서, 미얀마가 완전히 영국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의 산도웨이(Sandoway)출처: 위키백과사전

5. 영국의 분할통치와 벵골인(로힝야족) 미얀마로 강제 이주
이와 같은 세 차례의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미얀마가 다른 지역보다 먼저 할양한 땅이 바로 라카인이라는 사실이 슬픈 비극적 역사의 시작이다. 바로 영국의 ‘분할통치 정책(Devide and Rule)’의 첫 대상이 라카인 지역이었던 것이다. 분할통치 정책은 피지배층의 민족 감정이나 종교,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해 피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켜 단합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정책이다. 이 정책을 통해 영국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얀마 주 종족 버마족을 탄압하기 위해 소수종족들에게 영국식민지 정부의 중간 지배층 역할을 맡겨 내부 갈등을 유도하고, 반(反) 영국 세력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였다.

2018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로힝야족은 2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로힝야의 기원에 대해서는 미얀마로 들어온 이슬람계 아랍인 선원들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인 미얀마 로힝야족의 기원은 1885년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에 승리한 영국이 미얀마 본토의 토지를 강제로 수탈한 뒤, 식민지 논농사를 위한 노동력 필요 때문에, 영국령 벵골에서 벵골 노동자들을 강제 이주시킨 데서 시작된다. 한 영국 문서 기록에 따르면 1872년 미얀마에 5만 8천명 이던 무슬림들의 숫자가 1911년 3배 이상 증가하여 16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이후에도 영국은 미얀마 식민통치 시기 동안 영국령 인도아대륙에서 많은 인도, 벵골계 무슬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 미얀마 본토인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중간 지배층으로 활용하여 직접적인 경제 갈등을 종족과 종교 갈등으로 확산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미얀마 독립 직전 인구 통계 숫자로 보면 미얀마 내 벵골인(로힝야족)들은 2%로 소수 비중을 차지했지만, 라카인 주에서는 30% 이상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현재는 라카인 에서 50%를 넘긴 라카인족 다음으로 제 2위의 인구 규모이다.

6. 20세기 미얀마 군부 독재 시절과 현재의 로힝야
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이 물러나면서부터, 그동안에 쌓인 불만과 원한이 폭발하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본격적인 보복과 박해가 시작된다. 미얀마 군정은 이들에 대해 로힝야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이주자’라는 뜻이 담긴 ‘벵갈리’라는 호칭으로 이들을 경멸했다. 이들은 미얀마 독립 후 미얀마 내에서 공식, 비공식 소수종족으로도 분류되지 못한 채, 아예 시민권조차 부여받지 못해 무국적 불법 이주민 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의료, 교육, 취업, 생존의 권리 등을 보장 받을 수 없다. 이는 2017년 현재까지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아라칸왕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므락우의 파고다(출처: 위키백과사전)

미얀마 군사정부는 로힝야족에게 무슬림에서 불교도로의 개종을 강요하면서, 이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등 박해와 무력 탄압을 행사했는데, 1970년대부터 더 박해가 심해지자 배를 이용해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인근 국가로 탈출해 보트피플이 되었다. 1991~1992년 2년 사이에는 25만 명이나 방글라데시로 피난하여 난민촌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다. 더 자세한 로힝야 이슈는 이번 호 CAS ‘로힝야 사태 팩트 체크’ 라는 글을 참고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로힝야족은 인도아대륙, 방글라데시에서 기원한 종족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방글라데시에 살던 사람들인데 19세기 영국식민통치시기에 미얀마에 강제로 이주되어 한 때는 미얀마 전역에서 중간계층 역할도 했으나, 현재는 미얀마 보트피플의 원조로 미얀마 내에서 버마족 군사정부, 이슬람 혐오주의, 불교 민족주의, 라카인 극우불교주의가 결합하면서 종족의 명운이 당장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글 | 정보애(SIReNer)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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