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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도시에 살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7. 8

쉐인먀우 사원의 카렌족 리라 가족과 함께

지난 호 기획특집은 관문도시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며, 주로 태국에 들어온 미얀마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고 그 기회를 주목했다. 이제부터는 국경을 넘어 미얀마 본토 이해에 좀 더 중점을 두겠다. 미얀마는 총 인구 5,689만 명에 135개 종족이 있는 다종족 국가로 이웃 태국과 국경을 2,401㎞ 접하고 있다.

태국 매솟 국경도시와 접해 있는 미야와디는 미얀마의 꺼인족(카렌족) 자치주에 속한다. 한편 최북단 매사이는 미얀마 샨주의 국경도시 따칠레익과 접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샨족은 미얀마 주 종족 버마족 다음으로 가장 큰 종족이자 미복음화된 종족이어서 더 관심을 가져야할 종족이다. 샨족 다음으로 많은 소수종족은 꺼인(카렌족)이다.

미얀마난민촌 맬라캠프의 카렌족 아이들

카렌족 역사와 현재
꺼인족은 ‘카렌’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태국의 카렌족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미얀마 카렌족과 버마족은 오랜 앙숙관계이다. 그 시작은 19세기 말 영국 식민통치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은 ‘영국-버마(Anglo-Burmese) 전쟁’을 통해 1886년, 버마 즉 오늘날의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에 병합시킨다. 영국 식민통치당국은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카렌족을 선호하는 분할통치 전략을 사용했다. 이 때 카렌족이 많이 복음화된다. 카렌족 민족주의 조직을 이끈 사람들 중에도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도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 충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카렌족은 버마족과 일본 양쪽의 공격을 받아 집단 학살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카렌족은 오랜 세월 버마족 주류의 중앙정부의 핍박을 받았으며, 군부독재정권 시절 탄압이 더욱 심했다. 카렌족의 수난사 속에는 식민주의, 전쟁, 군부독재라는 역사의 그늘이 모두 들어 있다.

결국 근현대 역사적 격변 속에서 카렌족은 삶의 터전 파괴, 광산 채취, 노예 상태에 가까운 강제노동 등 억압과 가난 속에 상당수가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가거나 난민이 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카렌 난민이 최절정일 때 그 수가 40만 명에 달한 적도 있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2016년 기준 태국 내 미얀마 난민촌은 맬라(Mae La) 등 총 9개소이고, 2010년 이후 미얀마 난민촌 인구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감소 추세에 있다. 한동안 이슈였던 미얀마 난민선교도 이젠 돈벌이를 위해 들어온 이주 근로자 선교로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목가적 풍경의 슬로우시티 파안

먀와디(Myawaddy)를 거쳐 파안(Hpa-an)이라는 도시까지 육로를 통해 들어가 보았다. 파안은 카렌주의 주도(州都)임에도 도시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목가적 풍경은 슬로우 시티처럼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미야와디 국경에서 가격 흥정으로 우리와 합승 택시에 동승했던 사람들 역시 프랑스 파리에서 온 청년들이었다.

파안에서 여행안내 책자에 나오던 쏘 브라더스 게스트하우스(Soe Brothers Guest House)를 찾아갔다. 주인장이 쏘 할아버지였다. 원래 미얀마 사람들은 이름으로 어느 민족인지를 구분한다고 하는데, 쏘(Soe)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카렌족 이름이다. 70대 후반의 깡마른 몸매에 흰 눈썹을 휘날리면서 유럽인들에게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던 쏘 할아버지! 그 포스가 대단했다. 이곳은 자식과 손자 대까지 현재 3대가 게스트 룸을 운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파안의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였다. 미얀마 근현대사의 부침(浮沈) 속에서 카렌족인 이들의 가족사가 가히 짐작되어 가슴 한편이 뭉클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인터뷰할 기회는 갖지 못하고 사진만 남겼다.

따칠레익 쉐다곤 파야 주변의 밤 풍경

따칠레익 도시와 사람들
태국 매사이 국경을 통과하고 만나는 첫 미얀마 도시가 따칠레익(Tachileik)이다. 따칠레익은 샨주(Shan State)에 속한다. 따칠레익은 샨족이 우세를 이루는 샨주의 관문도시이다. 참여관찰 결과 태국의 매솟, 매사이 도시풍경처럼 상점가와 가게, 환전소, 호텔, 음식점 등 도시가 활기차고 역동적이었다. 위의 꺼인주(카렌주) 먀와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도시 규모도 크고 더 발달된 곳이었다. 도심에는 현대식 피트니스 센터, 발코니를 갖춘 태국계 싱하 맥줏집, 중국계 호텔들도 보이는 것이 도시가 다양하고 화려했다.

샨주는 미얀마 행정구역 중 가장 큰 곳이며, 남한의 1.5배(15.5만㎢) 정도의 면적이다. 미얀마의 샨족의 인구는 약 500만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버마족과는 언어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태국 북부 타이족과 그 뿌리가 같고 신체적 외관이나 언어가 유사해 다른 종족에 비해 태국어도 쉽게 배우고 태국생활에도 잘 적응하는 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Tai Yai(Great Thai)’로 부르며 타이족과의 동질성을 인식하고 있다.

샨주의 관문도시인 따칠레익의 시장 풍경

따칠레익 전역에서 태국 화폐 ‘바트’를 자국 화폐(짯)나 달러 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호텔뿐 아니라 동네 가게 등 어디서나 통용 가능할 뿐 아니라, 더 선호하는 것이 바로 태국 바트였다. 그만큼 이 지역에 서 태국의 영향력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또 하나 따칠레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태국 남성 트랜스젠더들이다. 여성처럼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다니는 트랜스젠더들을 처음에 호텔에서 만났다. 바로 호텔 매니저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태국계 트랜스젠더였다. 그 후에 음식점 서빙 직원, 심지어 불교 사찰에서도 볼 수 있었다. 태국의 세속화 영향이 국경 의 개방과 함께 보수적 미얀마 샨족에게도 점차 일상화된 풍경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를 모방한 쉐다곤 파야

한편 따칠레익에 있는 쉐다곤 파야는 미얀마 인들에게 마음의 고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얀마 주요 도시들에 다 있다는 쉐다 곤 파야는 바로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를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으로서, 규모만 보면 양곤에 비해 훨씬 작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미얀마 사람 들을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곳이었다. 우리 팀은 주말 저녁에 쉐다곤 파야를 방문했는데, 삼삼오오 몰려든 가족과 친 구들, 데이트 족들이 두런두런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각기 모셔둔 석가 제단과 작은 신상들 앞에서 촛불을 피우고 기도하며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미얀마 인들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 과 기도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구심점이자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하고 있는지, 미얀마 불교문화에 익숙한 사람들 에게 교회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한국 교회와 미얀마 교회에 대해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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