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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아도니람 저드슨과 미얀마 선교역사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7. 8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

미얀마는 최근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면서 자유화와 개방의 문이 열리고 급속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 다. 이제 1년 비즈니스 비자가 가능해졌고 최근 종교 비자도 법안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역동적인 선 교 잠재력을 지닌 나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닫혀졌던 미얀마에 남아있는 선교의 흔적들을 다시 복원하 고, 그 선교의 역사를 다시 읽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 러한 의미에서 미얀마 선교 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큰 줄기 와 같은 사람이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도니람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에 관한 몇 가지 키워드 를 통해 미얀마 선교역사를 이해해 보고자한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3년 7월 13일 랑군(양곤)에 도착했다.

초기 선교사 공식 = 수재 + 방황 + 헌신
초기 선교사들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아도니람 저드슨 역 시 뛰어난 수재였다. 178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회중교회 (Congregational Church)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세에 브라 운 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3년 만에,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하 였다. 학창시절 자연신론(deism, 이신론) 사상의 영향으로 한동안 신 앙적 방황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친구의 우연한 죽음 앞에 충격을 받고 영혼에 관한 문제로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앤도버 신학교 (Andover Theological Seminary)에 들어가 회심하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서약하게 되었다.

미얀마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국이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미얀 마 최초의 선교사는 아니었다. 미얀마 개신교 선교보다 253년 앞선 로마 카톨 릭 선교(1554년)가 선행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 미얀마 땅을 처음 찾은 것 은 1807년 영국 선교사 채터와 윌리엄 캐리의 아들인 펠릭스 캐리에 의해서였 다. 올해(2017년)로 미얀마 선교 210주년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버마족 선교 를 시작했지만, 미얀마 정부의 강력한 불교유일정책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5년만인 1812년에 사역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내디딘 첫 발은 결코 헛되지 않아서 곧 이어 1813년 하나님께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아도니람 저드슨을 양곤 땅에 도착하게 하셨다.

1820년 6월, 버마(現 미얀마)의 황제를 만나 종교 의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하는 아도니람 저드슨

회중교회 선교사? 침례교 선교사?
1812년 아도니람 저드슨은 처음에는 미국 회중교회의 선교사로 파 송 받아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인도로 가는 4개월간의 여정 중 성 경에 관한 연구와 토론 끝에 세례에 관한 침례교의 교리가 정확하 다고 결론을 내리고, 인도에 도착하여 윌리엄 캐리 선교팀의 워드 (Ward)에게 침례를 받고 회중교회 선교사를 포기하고, 침례교 선교 사가 되었고, 미얀마는 침례교단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윌리엄 캐리와의 아이러니 한 인연
아도니람 저드슨이 선교에 헌신한 것은 오늘날 근대 선교의 아버지 라 불리는 윌리암 캐리의 선교사역 보고서를 읽고 감동을 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교지를 정하기 위해 우선 인도로 향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윌리엄 캐리를 만나 교제를 나누게 된다. 당 시 저드슨은 자신이 사역할 선교지로 버마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윌리엄 캐리의 아들 펠릭스 캐리가 버마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다가 너무나도 거센 불교도의 저항을 버티지 못하고 사역을 포기하고 철수하려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캐리는 저드슨에게 진심어린 조언으로 미얀마 선교를 피할 것을 권유한다. 저드슨은 다 른 사람도 아닌 윌리엄 캐리의 조언이었기에 고심 끝에 말레이 반도 의 페낭을 선교지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인도에 체류 중인 미국 국적자들에 대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추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저드슨은 급히 인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어 무조건 가장 빨리 떠 나는 배를 타고 떠나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배가 버마로 향 하는 배였던 것이다. 저드슨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양곤 에 정착하여 미얀마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1819년 6월, 버마(現 미얀마)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6년만에 처음으로 ‘마웅 나우’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함

짜얏(zayat)과 첫 회심자 마웅나우(Maung Naw)
아도니람 저드슨의 선교팀은 다음과 같은 사역 목표를 설정하였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버마제국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 성경의 번역과 인쇄, 보급을 힘쓴다.
  • 복음을 전한다.
  • 전도지와 복음 소책자를 계속 배포한다.
  • 현지 어린이를 지원하고 양육한다.

위와 같은 선교 목표를 가지고 사역을 시작한 그는 1819년 4월 4일 버마인들과 가까이 살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전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의 정자와 유사한 형태의 ‘짜얏(zayat)’을 만들어 그들 과 어울리게 된다. 짜얏을 만든 지 한 달 후에 마웅나우(Maung Naw)라는 청년이 복음을 듣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얼마 후 아도니람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 첫 회심자이자, 첫 세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아도니람 저드슨이 번역한 로마서의 일부, 출처: 아도니람 저드슨의 생애(좋은씨앗 출판), 본문

안타까운 가정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미얀마에 남긴 선교적 유산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영국-버마(Anglo-Burmese) 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외국인을 간첩으로 의심한 미얀마 정부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고된 선교사역 속에 가족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그는 첫 번째 아내 앤(Ann) 저드슨과 생후 9개월 된 어린 딸 마리아를 1826년 말라리아로 잃었으며, 1834년 카렌족 선교사 미망인인 사라 보드만(Sarah Hall Boardman)과 재혼하였으나 그녀도 1845년 출산 후 병을 얻어 치료차 미 국으로 가던 중 사망하게 되고 얼마지 않아 그 아기도 사망한다. 이후 미 국에서 순회선교보고 중 만난 20세의 작가 에밀리(Emily Chubbuck)와 1846년 수많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아도니람 저드슨이 남긴 선교 유산
아도니람 저드슨은 팔리어(Pali, 불교 언어)-버마어 사전을 편찬하고, 1817년까지 기독교 소책자와 마태복음을, 1823년 신약성경, 1834년 버마어 성경 전체를 완역하여 출판했고, 1848년에 영어-미얀마 사전을 완성했 다. 또한 수많은 병원과 학교, 특히 양곤에 아도니람 저드슨 대학(훗날 네 윈 정부에 의해 국유화 되어 양곤대학으로 개칭)을 세우기도 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이 1813년부터 1850년까지 37년간 사역하는 동안 그가 닦아 놓은 선교의 터 위에 사역한 개신교 선교사는 48명이었고 그들에 의해 74 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7,904명의 기독교인이 보고되었다. 아도니람 저드 슨은 마지막까지 버마족 선교의 허락을 얻기 위해 미얀마 국왕에게 건의 하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부의 불교 이외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글 | 강호석(SIReNer)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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