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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란나왕국의 관문도시 세 곳의 “치앙”(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샌)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017. 6

태국 하면 ‘푸켓’, ‘파타야’ 등의 휴양지가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만, 나름 태국을 안다는 사람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손꼽는 도시 들이 바로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Chiang Mai)’, ‘치앙라이(Chiang Rai)’, ‘치앙샌(Chiang Saen)’ 등의 ‘치앙 OO’ 도시들이다.

“치앙”은 태국어로 “도시”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도시들은 모두 태국의 고도(古都)들이었다. 추측컨대, 우리나라의 ‘경주(慶州)’, ‘공주 (公州)’ 등 역사가 오랜 도시들에 의례 州(고을 주)자가 붙듯이 태국의 ‘치앙“도 그런 유사성에서 이해해봄직 할 것 같다. 이렇게 이름 에 대한 궁금증을 갖다보니 자연스레 “치앙” 뒤에 오는 “마이”, “라이”, “샌”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풀어가다보니 이 도시들이 갖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어렵잖게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란나(Lanna)”라는 태국 역사 속의 한 왕국이었다.

란나스타일 의 체디 루앙 사원

“란나 왕국(Lanna Kingdom)”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현재 태국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옛 왕국이다. 종족 면에서는 현재 태국의 차크리 왕조(Chakri Dynasty)와 동일한 타이(Thai) 족 계열이지만 이 태국 중남부의 주류 역사와 경쟁하며 독자 적으로 형성된 태국의 ‘또 다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란나”라는 말은 태국어로 “수백만 평의 논”이라는 뜻이다. 버스를 타고 치앙 마이와 치앙 라이를 오가며 바라 본 차창 밖 굽이쳐 흐르는 강과 드넓은 평야를 생각하면 그 이름이 쉽게 납득이 되었다. 란나 왕국은 1292년 오늘날 치앙샌 지역에 자리 잡은 토호(土豪) 중 하나였던 언양(Ngoenyang)국의 25대 왕 멩라이(Mengrai) 왕이 태국 북부 지역의 다른 12개 지방 토호들과 몬(Mon) 왕국을 정복 (1281년)하고 통합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 정복과 통합의 과정에서 멩라이 왕은 도읍을 여러 차례 옮겼는데, 그 첫 번째 도읍 지가 바로 “치앙라이(Chiang Rai)”(1262년)였다. 여기서 “라이”가 멩라이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멩라이 왕이 직접 도시를 건설 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붙였으니, 치앙라이는 “멩라이 왕의 도시”인 셈이다. 당시 란나 왕국은 지금의 미얀마와 라오스 일부 지역까지 판도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 확장을 위해 관문도시 성격의 치앙라이의 입지는 최적의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강성했던 버마와 크메르 왕국에 의해 더 이상 북방으로의 진출이 용이하지 않자, 멩라이 왕은 세력 확장을 위해 남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람푼(Lamphun, 1281년), 위앙쿤캄(Wiang Kum Kam, 1287년) 등의 도시를 차례로 도읍으로 삼게 된다. 하지만 잦은 홍수로 도시가 물 에 잠기는 등 이들은 란나 왕국의 항구적 도읍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듯싶다. 특히 란나 왕국 건국 당시 도읍이었던 위앙쿤캄은 1294년 핑강(Ping River)의 대범람으로 침수되고 이후 버마의 침공까지 더해지면서 완전히 파괴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가 700년 만인 1984년에야 된다.

이곳은 이후 지금까지 란나 왕국의 유적과 사원들을 발굴 중에 있다. 거듭되는 정복전쟁과 대내적 부침 속에서도, 멩라이 왕은 1292년 비로소 새 왕 국을 창건하게 된다. 이와 함께 또 한 번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건설(1296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치앙마이”였던 것이다. 태국어로 “새로운”이 라는 뜻의 “마이”를 붙이면서, 멩라이 왕은 치앙마이가 자신이 이룩한 새 왕국 란나의 “새 도읍”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란나 왕국의 치세가 안정되면서, 멩라이에 이어 왕이 된 그의 손자 샌푸(Saen Phu) 왕은 모든 왕조가 그러하 듯 승자 중심의 역사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란나 건 국사를 조부와 자신의 뿌리인 언양국에 의한 통합의 역사로 정리 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계속되는 전쟁과 천도 로 인해 방치되다시피 했던 왕국의 뿌리 “언양”을 재건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왕이 그러했듯, 도시의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딴 “치앙 샌”이라고 개칭하면서 후대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다. 즉 치 앙샌은 란나의 역사를 재건한 “샌푸의 도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자칫 오늘날 매콩 강을 사이에 둔 태국-미얀마-라오 스 3국 접경지역으로서의 지정학적 특이성이나 한 때 세계 최대 아편 생산지로서의 암울했던 “골든 트라이앵글”의 오명으로만 각인될 뻔 했던 치앙샌을 란나 왕국의 뿌리인 역사적인 도시 “치 앙샌”으로 기억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비록 란나왕국은 수많은 침략과 지배의 부침 속에 1774년 주류 태국왕조인 톤부리 왕조에 의해 멸망하 고, 19세기 말에 현 태국 왕조인 시암왕국 차크리 왕조에 의해 완전히 복속되게 되지만,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샌은 7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태국의 또 다른 역사 “란나 왕국”의 “치앙(도시)”으로서의 유산과 맥 을 이어오고 있다.

란나 왕국 건설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새롭게 재편되는 권력과 통치의 흐름과 함께 매우 중요한 지정학 적 관문도시로서 세워지고 성장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있는 도시로 모여들어 그들 의 삶과 문화, 신앙을 발전시키고, 확산시키며 살아갔다. 비록 영원할 것 같던 찬란한 란나 왕국은 이제 낡은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지만, 란나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직접 경험한 이 “치앙”도시들은 오늘날까지도 태 국 북부지역은 물론 인접 미얀마와 라오스, 더 나아가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중심 관문도시로서의 위용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13세기 란나 왕국의 관문도시,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샌” 이 세 도시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물결의 또 다른 관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글 | 강호석(SIReNer)

참고문헌 • Patit Paban Mishra, 『the History of Thailand』(ABC-CLIO, 2010) • Wikipedia; History of Lanna • 두산백과; 란나 왕국, 치앙 마이, 치앙 라이, 치앙 샌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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