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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시의 좡족 크리스천 이야기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016. 10

광시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 이하 광시)에서 현지인 그리스도인, 한국 선교사들 여럿을 만났다. 그 중 이번 카스(CAS) 4호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도자들의 교회개척 명령에 순종하여, 아무 기반이 없는 중소도시에 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 좡(壮)족 두 젊은이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우리의 중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안 관계상 도시 지명을 밝힐 수 없음과 이들의 성(姓)씨가 가명(假名)인 것을 양해 바라며, 함께 기도의 동역을 요청한다

1. 쫑형제 이야기
9형제 중에서 아들로는 막내이자 8째로 태어난 쫑형제. 2015년에 만난 쫑형제는 40대 중반의 사업가로 성공한 좡(壮)족 크리스천이었다. 주요 4개 도시에 의료기 전시, 판매 매장을 운영하는 바쁘고 활력있게 살고 있었다. 판매 의료기들은 세라믹 팔찌부터 몇 천 만원에 달하는 전신안마기까지 다양하다. 보아하니 쫑형제는 특별히 젊은 좡(壮)족들에게 닮고 싶은 역할모델로 선망의 대상이자,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하려는 시골 청년들에겐 부러움을 넘어 존경까지 받고 있었다.

이런 쫑형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병환 때문이었다. 86년 쫑형제가 15세 되던 해에 집안 분위기가 매우 우울했다. 3년 동안이나 병원과 약물 치료를 해도 어머니 병세의 차도가 없어서 무당까지 불러 굿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복음을 전해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내 여동생을 교회에서 만난 것이다. 알고 보니 여동생은 가족들의 반대가 두려워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운데, 바로 위 여덟째 오빠가 예수를 믿고 같은 교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여동생은 기도 후 담대하게 전체 가족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여 현재 둘째 형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 가정으로 다음세대 자녀들까지 믿음의 가문이 되었다.

신앙의 입문 후 믿음이 성장하던 중 하나님은 한국인사역자 강 선생님을 만나게 하셨다. 강 선생님은 쫑형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쫑형제는 이분으로부터 크리스천으로서의 삶과 영성 등 체계적인 양육과 훈련을 받게 된다. 하나님과 복음을 알게 되면서 후에 중국의 다른 대도시로 가서 현지 사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에 강 선생님이 무(無)교회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권유하셔서 기도하던 중 2007년 현재 살고 있는 이 도시로 이사를 왔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처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경제적 어려움은 어떻게 돌파할지, 교회는 어떻게 개척할지 두려웠다. 오직 믿음과 기도 외에 할 수 없던 때에 주님은 또 다른 만남과 모험, 도전을 예비하셨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의료기 사업으로의 인도하심이었다. 대도시 난닝에서 의료기 사업을 하시던 한 한국 장로님이 마침 의료기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철수하려던 중 현지인 좡(壮)족에게 사업 노하우와 의료기기등을 싼 가격에 인수하면서 오늘날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초석을 제공했다.

15명에서 20명 정도 모이고 있는 가정교회를 방문했다. 바로 쫑형제가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가정교회로 세운 곳이다. 현재 설교는 쫑형제와 베이징에서 대학원 공부를 한 한족 꾸어자매가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이 주일이 아니라 예배광경과 성도들을 보지는 못했다. 교회의 리더인 쫑형제와 꾸어자매를 만나면서 꾸어자매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은 지 3년이 된 자매로, 이 자매 역시 아버지의 병 때문에 힘들어 하던 중, 친구의 전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된 경우였다.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얼마 후 돌아가시게 되면서 천국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이후 홍콩, 대만계 중국인 크리스천들과 만나게 되면서 영상자료를 통해 성경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었다.

광시에 온지는 아직 2년이 안된다고 했다. 남편의 직업 때문에 광시좡족자치구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광시의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 정착하여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던 차에 쫑형제의 가정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예배를 드리면서 동역자가 된 케이스이다.

쫑형제와 꾸어 자매의 동역으로 교회가 더 건강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사실 쫑형제는 사업이 확장되면서 교회 목양사역에 어려움이 많아지던 차에, 꾸어자매의 동역으로 힘을 얻고 있었다. 쫑형제에게 기도제목이 있다. 더 많은 도시들, 더 많은 현(县)과 진(鎮)-한국의 읍과 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중요 중소도시의 의료기기 매장과 예수 믿는 점장, 직원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고 싶어 한다.

전체적으로 소수의 교회이지만 중요 중소도시마다 삼자교회나 가정교회를 막론하고 찾아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사업을 할 만한 적합한 크리스천을 찾고 노하우를 나눠주며, 광시 좡족 전체적으로 아세안(ASEAN) 10개국과의 경제 무역을 위해 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이때에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

광시좡족자치구의 도시형 가정교회

2. 송 형제 이야기
송 형제는 이제 막 30세가 된 좡(壮)족 크리스천이다. 광시 농촌출신으로 중학교까지 공부를 하고 더 배우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부모님의 농사를 돕다가 잘사는 이웃 광둥성(广东省)의 가구 공장에 3년간 다니기도 했다. 가구공장에서 3년 정도 근무했을 때 받은 임금은 인민폐 1천원 정도였다. 그러던 중 2008년 지금의 도시로 와서 삼자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 담임목사가 무(無)교회 지역에 대한 교회개척 비전과 선교 열정이 많은 분이어서 이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송 형제는 그 교회에서 실시하는 2년간의 전도와 선교훈련을 제2기생으로 수료하고 이후 사역자의 길에 들어섰다. 졸업하면서 광시의 무교회 지역 중 교회개척 예정지로 선정된 곳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라는 담임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고 있었다.

송형제가 교회를 세운 곳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한 현(县)이다. 처음에는 교회 개척 리더 3명에 신자가 한명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중국의 이단인 동방번개와 또 세 번 속죄 받아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이 소란을 일으켜서 문제가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단의 영향을 받은 한 학교 선생님이 세례를 준다며 추운 겨울 자신의 어머니를 강가로 데려가 차가운 물속에 집어넣은 후 얼마 안 되어 건강악화로 돌아가신 일이 발생하여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 예수님을 비방하고 핍박이 심해졌다. 이런 어려움 속에도 지속적으로 섬기고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지난 2014년부터 30, 40대들이 복음을 믿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20명까지 점차 성장하고 있다.

2014년에 쫑 형제가 송 형제 리더팀이 있는 현(县)에 의료기매장 센터를 개장하면서 부흥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송 형제는 현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주파송 삼자교회가 위치한 중소도시에 의료기 매장을 오픈해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토요일에는 기차를 타고 왕복 10시간 거리의 교회가 있는 현(县)에 가서 주일까지 섬기고 다시 돌아오는 순회사역을 해오고 있었다.

한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뿐 아니라 재정의 부족에서 오는 경제적 고난도 갓 파송된 신임 사역자를 힘들게 하였다. 파송교회에서 송 형제에게 주는 사역비는 처음엔 인민폐 300원이었다. 이는 한 달 왕복 기차비에 불과한 금액이다. 지금은 인민페 700원을 교회로부터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송 형제를 만났을 땐 아내가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더 중해진 데다, 의료기 판매업은 이제 막 시작한 터라 경험이 없는데 잘 팔리진 않고 매장의 위치도 좋지 않아 이중 삼중의 심적인 부담이 많은 시기였다. 글을 쓰면서 송 형제와의 첫 만남이 다시 떠오르며 맘이 아릿해진다.

그날 우리는 의료기 매장 문을 닫고 퇴근 후에 맥도날드와 KFC를 모방한 한 중국식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작은 도시까지 와준 손님. 그것도 한국 크리스천 손님이 왔는데, 지금의 형편상 커피 접대도 부담스러워 계속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송 형제의 맘을 배려하기로 했다.

그래서 저녁으로 먹은 중국음식의 느끼함을 달래줄 커피가 먹고 싶은 욕구를 참고 후식으로 그의 아이스크림까지 5개를 샀는데, 결국 끝까지 자기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며 왜 샀냐며 아깝다고 하는 그의 말에서 가난하지만 고지식한 예수님을 처절하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한 중국인! 한 좡(壮)족! 그리스도인 청년의 모습이 보여 안쓰러웠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님의 사명자는 고난과 어려움도 견뎌내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순종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대견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선택적인 순종, 편리한 데 길들여진 내 불편함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송 형제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부터 부모님을 거쳐 자기 세대까지 3대째 예수님을 믿는 독실한 신앙의 가정이었다. 아! 미전도종족이라던 1,700만의 좡(壮)족에게 이런 그루터기를 남기신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감사했다.

그날 송 형제는 선배인 쫑 형제가 자기의 역할 모델이라 힘주어 말했다. 도시에서의 좌충우돌 비즈니스, 결혼과 가장으로서의 무게, 사역자로서의 여정, 모두다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작고 여린 몸을 지닌 송 형제에게 너무 무거워보이는 건 그 특별한 날의 내게 남긴 인상 때문만은 아니리라!

글을 쓰는 지금 이미 아이를 출산했을 송 형제의 안부가 궁금하다. 오늘은 어떤 믿음의 여정가운데 분투하며 살고 있을지… 주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기도를 더 절실하게 하게 되는 날이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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