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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불상의 도시, 루앙프라방(1)

도시와 사람들
D·I·G·I·T·A·L JOURNAL  2018. 12

새벽에 시작되는 딱밧(탁발공양 행렬)

루앙프라방의 12월 새벽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거리는 새벽 5시 반부터 시작되는 딱밧(탁발공양, 라오스에서는 Sai Bat이라고 불린다.)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마다 손에 찹쌀밥 바구니와 각종 공양할 음식들을 나누어 들고 자세를 가다듬고 스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딱밧 행렬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관광객들은 분주해진다. 이 특별한 의식에 참여하는 자신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려는 관광객들의 분주한 셔터소리와 플래시 세례는 경건한 새벽 딱밧 풍경을 상상했던 나를 적잖이 실망시켰다(의식에 참여할 때는 카메라 플래시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구경을 하려는 사람은 스님들의 행렬로부터 3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지금은 상당히 상품화 되었지만 이것만을 위해 루앙프라방을 방문하는 불교도들이 많다는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가까운 불교 나라 태국에서도 스스로 세속화되었다고 생각해서 주말이면 이곳에 와서 공덕을 쌓으려는 불교도의 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니, 루앙프라방은 불교도들의 성지순례 필수 코스인 셈이다.

정신없이 관광객과 뒤섞인 스님들의 딱밧이 끝나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둠속에 가려졌던 도시 풍경이 아침 태양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가봐야 할 여행지(2008년) 1위’ 혹은 해외 다수 매체에서 ‘최고의 여행지’로 손꼽았다는 루앙프라방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푸시(Phousi)에서 바라 본 루앙프라방 전경

라오스의 북쪽 중앙에 위치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혹은 루앙파방)은 북동쪽으로 칸강(Nam Khan)과 서쪽의 메콩강(Mekong Rivers)이 만나는 지점에 정착한 도시이다. 라오스 북부 산악지역에 자리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와지붕의 사원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 지배 당시에 건설된 건물까지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문화도시이다. 파 음(Fa Ngum)왕에 의해 란쌍(Lan Xang)왕국이 건립된 1354년부터 비엔티안으로 천도한 1563년까지 란쌍왕국의 수도였으며, 오랜 동안 라오스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루앙프라방의 ‘루앙(Luang)’은 거대한, 프라방(Prbang)은 ‘성스러운 상(불상)’이라는 뜻으로, ‘큰 불상의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이름이 말해 주고 있듯이 곳곳마다 왕궁과 황금사원들이 골목을 돌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루앙프라방은 인구가 약 6만에 불과하지만 라오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199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현재 라오스에서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곳이 되었다. 최근 인구가 급증하고 각종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건축물을 3층 이내로만 지어야 하는 규정이 있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4세기에 건국된 란쌍왕국 이후 라오스의 국교로 자리 잡은 불교(남방계 소승불교, Theravada Buddhism)는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활원리로 자리하고 있다. 모든 마을은 사원이 구심점이 되어 도시지역을 벗어나면 사원이 마을의 가장 큰 건물일 가능성이 높아 종교활동 장소뿐 아니라 노인정, 학교, 놀이터 등의 지역 커뮤니티 활동의 장의로서의 기능도 한다. 

새벽에 시작되는 딱밧(탁발공양 행렬)

아침마다 행해지는 딱밧은 신도들의 선업을 쌓는 행위이자 지역민의 부를 분배하는 일이다. 라오스 남성은 일생에 한 번은 일정 기간 동안 승려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불교적 문화가 사회 전반에 유지되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라오스의 축제들은 불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 중 ‘카오판싸’는 불교용어로 ‘하안거(夏安居)’에 해당하는 참선기간을 일컫는데, 우기철 외부에서의 수행에 어려움이 있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초목과 벌레를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어 되도록 외출을 삼가는 이유에서 시작됐다. 카오판싸 기간에 사원에서는 각종 축제와 함께 스님들이 참선기간이 끝나는 ‘억판싸’까지 바깥활동을 최소화하며 좌선과 수행에 전념한다. 이 때 일반인들은 전통적으로 혼례나 계약, 구매 같은 상업적인 행위는 가급적 하지 않으며 음주가무 역시 자제한다. 

사원 안 신에게 바쳐진 쌀밥

이는 일정한 곳에 머무는 관습과 주식인 쌀 수확이 없는 농번기에 유흥을 줄여 궁핍함을 막고, 농사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종교적 행사로서 라오스뿐만 아니라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 불교국가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다. 현재도 국민의 70%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라오스에서 쌀은 단순히 식량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온 생명을 부여받고, 신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매개로 간주되어 신성시되어 모든 유형의 종교의식에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루앙프라방 왕궁박물관

문득 ‘사회주의 국가에서 종교와의 공존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라오스는 현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정부가 종교국을 따로 두고 승려들을 통제해 불교의 가르침과 공산주의 원칙이 일치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과거 1947년 제정된 헌법에 의해 불교는 라오스의 정식 국교로 채택되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왕 다음으로 높았다. 그러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전쟁기간 중 불교는 정치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라오 왕국과 공산권 양 진영이 그들의 선전과 선동을 위해 불교를 이용하려 했다.

1968년 라오애국전선은 정강의 일부로서 “불교를 숭상하고 보전하며 경배의 자유와 승려의 설교를 존중하고 각기 다른 종파의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 사이의 상호단합과 원조를 증진”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라오애국전선은 종교분야에서의 선동전에서 승리하고 많은 승려의 지지를 받았지만, 1975년의 공산화 이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불교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제외되었고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승려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신도들의 불만이 커지자 정부는 1976년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금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오로지 쌀만 공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은 쌀 제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또한 승려들도 땅을 경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불만이었다. 결국 정부는 1976년 말 전면적인 봉양을 허용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종교의 지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까지나 정부의 통제아래에서만 가능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CAS15호 도시와 사람들: 큰 불상의 도시, 루앙프라방(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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