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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2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세계 선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CAS
D·I·G·I·T·A·L JOURNAL  2018. 12

아브라함(2)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세계 선교입니다.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1. 1절 : 명령
1) 떠나라
(1) ‘leave your country’
(2) ‘leave your people.’
(3) ‘leave your father’s household’
위와 같은 지난 14호 ‘아브라함1’에 이어서

2) 가라
창세기 12:1의 두 명령은 ‘떠나라’와 ‘가라’인데, 앞서 살펴본 것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상당히 민감하게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라’는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어떤 지역에 선교사들이 너무 많이 몰려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수도 ‘자카르타’에 약 70가정, 제 2의 도시 ‘반둥’에는 약 50가정, 또 기후와 환경이 좋은 ‘말랑’이라는 도시에 약 40가정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체 한국인 선교사 수가 약 400가정임을 생각할 때, 약 40%의 선교사가 이 세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태국의 경우는 전체 약 1,000가정 정도의 선교사가 있다고 하는데, 수도 방콕과 제 2도시 치앙마이에 약 800가정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으니 특정지역의 과도한 선교사 집중현상이 심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 종족 지역은 어떨까요? 그곳에는 선교사가 없습니다. 나라마다 선교사가 몰려있는 특정 도시들이 있습니다. 자녀교육을 위한 국제학교가 있거나, 국제공항이 가깝거나, 기후가 시원한 열대지방의 고산지대에 선교사들이 몰려 있고, 정작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는 선교사가 없습니다. 물론 저마다 하나님이 그리로 가라고 하셔서 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주제를 쉽게 논할 수는 없지만, 혹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이 구절을 바꾸어 순종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정말 가라고 하시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경을 통해 배우는 하나님의 세계선교비전의 맥락에서 볼 때, 정말 일꾼이 없는 곳, 일꾼이 필요한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이라는 말은 보편적으로, 더 많은 수가 선택하는 것을 의미할 텐데, 성경 가르침의 일반과 실제 선교사들의 일반이 다른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이 이미 선교사들이 많은 곳, 이미 일꾼이 넘쳐나는 곳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편이 이기고 있는 쪽에 가서 거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군목이었지만 군대에서 목봉체조도 하고 유격훈련도 받았습니다. 목봉훈련을 할 때 목봉 한 쪽에만 여러 명이 붙어있고, 다른 한쪽에는 혼자서 낑낑 거리고 있다면, 나는 어느 쪽으로 가야 될까요? 사람들이 많이 붙어있는 쪽으로 가서 하는 척만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가서 실제로 목봉훈련이 되게 할 것인가? 그 상황에서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은 목봉 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전쟁은 전체 전쟁에서 승리해야 되는데 우리 편이 많아 이미 이기고 있는 쪽으로 자꾸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전쟁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편이 열세에 있거나 소강상태인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고, 더 좋은 무기를 투입해야 전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다 선교사가 없는 곳이었으니 그렇게 가는 것만으로도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지만, 오늘날 심화되는 선교사 불균형 현상을 대하면서 오늘 본문 1절의 “가라”라는 말씀을 다시 진지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2. 2-3절 : 약속
창세기 1:1의 ‘떠나라’, ‘가라’의 두 명령은 이어지는 2절~3절 상반부까지 나오는 다섯 가지 약속으로 연결됩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일 뿐 아니라 동일하게 그의 자손들에게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4:16에 “…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함께 적용됨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2:2~3 상반부에 나오는 이 다섯 가지 약속은 그 믿음의 자손인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그 명령에 따라 순종할 때, 그대로 주시는 복인 줄 믿습니다. 더욱이 문자 그대로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선교사들에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1)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은 비단 우리 육신의 자녀들이 많아진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물론 내 혈통을 이어받은 내 육신의 자녀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하나의 민족을 이룰 정도로 잘 된다는 것도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저 잘된 민족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영적인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전도한 분들 중에 세계 각지에서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헌신된 영적인 자녀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선교에 헌신하지는 않았지만, 저의 전도나 양육을 받고 믿음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제게는 영적인 자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약속이 이루어져 그런 분들이 많으실 줄 믿고, 앞으로 더 많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내게 복을 주겠다.
한국어로는 “내가”라는 말이 처음에만 나와 있지만, 히브리어로는 주어의 의미가 각 동사에 붙어 한 단어를 이루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I will bless you”로 “I will”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 복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신데 바로 그 분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복을 준다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은 사기꾼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요즈음 보이스 피싱이 기승을 부리는데, 결국 다 뭔가 ‘유익을 주겠다’, 쉽게 말해 ‘복을 주겠다’ 그렇게 속입니다. 아무리 복이 좋지만 복 준다고 근거도 실력도 없는 사기꾼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증언은 물론,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여 누리듯 우리 좋으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깡통 들고 다니면서 얻어먹는 사람이 내가 당신에게 한 몫 주겠다고 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겨우 밥 한 깡통 기대할 수 있겠지요. 왜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역량이 그것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역량이 어느 정도이십니까? 만물과 만복이 다 우리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짜 복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건강, 자녀교육, 필요한 물질 등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물론, 천국 가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까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그 분이 내가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 셋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겠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니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의 생애가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대하게’라고 하셨으니 그저 어느 한 지역, 한 시대에 인정받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세계, 모든 세대에 그렇게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면’ 그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순종 속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 속의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 그 순종하는 사람의 이름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에서 조금 유명해져도 옛날에는 고향 동네 입구에 큼지막하게 현수막 걸고 자랑스러워했는데, 하나님이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면 얼마나 큰 자랑이요, 영광이겠습니까?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 ‘떠나, 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사실 각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삶에서 ‘떠나, 가라’는 곳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고치고 돌이켜야 할 것들이 있지요. 바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의 길,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 넷째, 너로 복이 되게 해주겠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번역을 잘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도 “you will be a blessing”이라고 ‘너 자신이 복이 되게 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명령에 순종하는 선교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제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저를 만나면 “당신 오늘 복 만났어.”라고 합니다. 왜요? 제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저를 만나지 못했으면 그대로 살다가 지옥 갈 사람인데 저를 만나서 제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천국 가게 되니, 무엇을 만난 것입니까? 바로 “복”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은 어디를 가든지 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은 다 복을 만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저와 여러분을 향해 ‘you will be a blessing’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5) 다섯째,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
3절 상반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라고 했는데, 여기 “너를 축복하는 자”가 우리 말 번역에서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어에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의 “너를 저주하는 자”는 단수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아무래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을 더 좋아하셔서 복 주는 사람들은 많기를 원하시고, 저주하는 사람은 적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반영이 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내가 복을 주겠고, 누가 너를 저주하면 그 사람은 내가 저주하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화 하기는 어렵지만, 선교사로 살다보니 우리를 괴롭혔던 분들은 이상하게 어려움을 당하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선교사로 헌신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가라는 곳으로 가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감히 네가 이 사람을 저주해? 그 저주 네가 받아라.’ 그러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니, 하나님이 선교사들을 축복하는 사람을 복 주시는 것이죠. 비단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약속인 줄 믿습니다.

3. 명령과 약속의 목적
이제 마지막 3절 하반절을 살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

여기까지 연결해서 전후 문맥을 보면, 이 말씀은 ‘내가 너를 불러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너를 복이 되게 할 것인데, 그 목적은 바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겠다는 약속, 언약을 주신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약과 명령은 다릅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는 아브라함의 순종 여부에 따라서 그 일의 성취가 결정되는 것이지만, 약속은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성취는 아브라함이 아닌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반드시 그 말씀하신 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선교 지도자였던 존 스토트는 1976년 얼바나 컨퍼런스(Urbana Conferance) 성경강의에서 바로 이 구절이 성경 전체의 “주제(main theme)”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중심으로 그 앞부분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우주만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사람이 어떻게 죄에 빠졌고,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죄 가운데 살게 되었는지 본 주제를 선언하시는 배경 설명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배경 하에 이 12장 3절에 와서 결정적으로 ‘세상이 이러이러하니 내가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할 것이다.’라는 것을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장 4절부터 남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지나 모든 구약과 신약,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은 실제로 모든 나라 모든 종족들이 구체적으로 복을 어떻게 받게 되는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에 대한 내용이 성경 전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분깃점이 되는 이 창세기 12장 3절 하반부 구절이 굉장히 중요한 구절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계속 말씀하는 이 “복”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보면, 여기서 바울이 바로 이 창세기 12장 3절 하반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창세기 12장 3절 하반 절 말씀의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궁극적인 대상 집단을 갈라디아서 3장 8절 말씀에서는 “모든 이방인”이라는 보다 목표지향적인 범주로 명확하게 하면서, 그 복에 대한 전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 원래 죄인이라서 영원히 형벌 받아야 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를 의롭다 칭하겠다는 그 복음, 신학적으로 ‘이신칭의’, ‘이신득의’의 그 복음 그 자체입니다. 곧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이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이방인들에게 주실 그 복과 동일한 것이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십자가 죄사함과 구속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창 12:1-3 말씀의 명령과 언약을 순종하는 자들임과 동시에 그 언약의 결과로서의 복을 누리며, 또한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 복 자체가 되는 참으로 복이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앞으로도 또한 계속해서 이 복의 역사에 수종드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글 | 김병선(現 인도네시아 선교사)  편집 | 강호석(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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