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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태국의 의미와 중요성(2)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16호 2019. 3

남부 타이를 지배했던 세 왕국: 랑카수카, 스리비자야, 말라카

AD 2세기 경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에 랑카수카(Langkasuka) 왕국(2~15세기)이 세워졌다. 이 왕국을 중국에서는 ‘랑야시우(狼牙修)’ 혹은 ‘랑시지아(狼西加)’라고 음역하여 불렀는데, 남부 태국과 말레이반도 일대 지역사(地域史)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이들은 말레이 반도 서쪽 해안의 케다(Kedah)~빠따니(Pattani) 횡단로를 장악하는 한편 동쪽 해안의 빠따니를 중심으로 서해안의 뜨랑(Trang) 일대 영토를 지배하였다. 랑카수카 왕국은 현재의 말레이시아 케다 주, 클란탄 주, 트렝가누 주 및 태국의 빠따니 주, 얄라 주, 송클라 주, 사뚠 주를 다 포함한다. 랑카수카 왕국은 인도인들이 이주해와 세운 왕조로 힌두교 사원을 비롯해 주변국에 인도의 영향력을 심화, 확대시켰다고 평가된다.

그 후 7~13세기에는 말레이 반도 남부 해안 일대에서 시작해 전역에 걸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을 수도로 한 스리비자야(Srivijaya, 말레이어, 자바어로는 스리위자야, Sriwijaya 라고도 부름)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이 남부 태국과 말레이의 두 번째 지역 강자였다. 스리비자야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 한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에 위치한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8세기가 되면서 해상무역국가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마침 서쪽의 이슬람 제국에서 무역상선(商船)들이 자주 이 지역을 통해 동쪽으로 교역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중국 당나라도 풍부한 시장성을 파악하고 진출하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에 스리비자야는 중계무역지로 번성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불교가 융성했던 불교 왕국으로 10세기가 최전성기였으며, 그 후 점점 쇠락하다 14세기에 몰락하게 된다.

15세기 초에 이르면 스리비자야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가 마자파힛 왕국의 침략을 피해서 말라카 해협에 말라카 왕국(1402~1511)을 창건하여 말레이 반도에서 첫 독립 국가를 성립하게 된다. 말라카 왕국은 1402년 건국 할 때까지는 힌두 국가였지만, 1409년 필리핀 파사이의 공주와 결혼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면서 위로부터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그 후 무자파르 샤 시기에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을 물리쳐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 섬 동해안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점차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무자파르 샤 사후 1459년 만수르 시대부터 자기를 술탄으로 자칭하면서, 이때부터 말라카 술탄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만수르는 당대 아유타야의 속국인 파항(오늘날 말레이시아 파항 주)을 함락하기도 했다.

향신료를 얻기 위해 이슬람 상인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슬람교가 확산 되었다.

당시 말라카는 향신료 무역의 중계항으로서 인도, 중동에서 많은 이슬람 상선이 이곳을 찾아왔으며,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 이슬람 포교의 거점이 된 지역이다. 또한 중국 명(明)나라의 영락제가 파견한 해상 왕 정화(鄭和)의 함대가 남중국해와 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하여 말라카를 근거지로 하여 기반을 닦은 곳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말라카는 명(明)의 충실한 조공국이 되었다. 중국어로 말라카는 ‘완러지아(滿剌加)’로 표기한다.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이 이름을 계승한 말라카 주가 있다. 말라카 술탄국은 16세기 1511년 동방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포르투갈에 대패하면서 함락되고, 남쪽으로 피신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우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의 영향권 아래 긴 서구 식민주의 시대를 겪게 된다.

 

남부 태국 빠따니(말레이)의 등장과 변천

1511년에 말라카 해협 무역을 주도하던 말라카 술탄국이 멸망당하고 나서, 말레이 무역의 중심은 현재 태국의 빠따니 주를 중심으로 하는 빠따니 왕국(Kerajaan Patani The Sultanate of Patani Darul Makrif, 빠따니 술탄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빠따니 왕국은 말라카 왕국이 망한 후 5년이 지나서 1516년에 건국된다.

당시 16~17세기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면서 지난 과거부터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강자였던 중국, 인도 이외에도 서구의 해상강국으로 등장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무역 사무소(商館)를 빠따니에 설립했으며, 일본 상선들도 드나들면서 일본인 거리도 형성되어 있었다.

빠따니 왕국은 4명의 여왕 라투 히자우(Ratu Hijau), 라투 비루(Ratu Biru), 라투 웅우(Ratu Ungu), 라투 쿠닝(Ratu Kuning)시기에 최전성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복건(福建), 광동(廣東)에서 중국 이주민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이슬람 화하여 관리로 근무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 때 빠따니 왕국은 같은 시기 무역으로 번성했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 아체 술탄국과 경쟁 상대였다.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인쭐라로께 대왕 라마1세(1737~1809)

한편 빠따니 왕국은 정치적으로는 14세기, 15세기를 거치면서 중부 타이족 중심의 태국 수코타이 왕국, 아유타야 왕국의 남하 정책과 팽창, 무역항 확보와 통치 아래에서 절반의 독립 상태로 존속해 오고 있었다. 술탄 무자파르 샤 시기에는 무력을 동원하여 태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아유타야 왕조가 1767년 강력한 버마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빠따니 왕국은 잠시 완전한 자립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방콕에 짜끄리 왕조가 들어섰고, 개조인 라마 1세는 1795~1796년에 걸쳐 다시 빠따니를 정복하여 빠따니를 얄라, 나라티왓 등 더 작은 지역들로 분할하여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태국의 근대화를 이끈 쭐라롱꼰 대왕(Chulalongkorn)왕 라마5세(1853~1910)

20세기 1902년에는 라마 5세였던 쭐라롱꼰 왕에 의해 개혁의 일환으로 빠따니 지역을 방콕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 아래 편입시켰으나, 주민들의 이슬람 의식 각성과 정부의 냉탕과 온탕사이의 일관되지 못한 임시변통적인 정책적 착오로 지금까지도 폭력 시위와 반란이 계속되는 지역이 되고 말았다.

직접적으로는 1909년 영국과 시암(태국)간 체결된 방콕 조약으로 인하여 빠따니 령의 일부인 태국 남부의 3개 주(州)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이 각각 독립된 행정 주(州)로 완전히 분리 분할되었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케다(Kedah)주의 한 지역이었던 사뚠이 태국의 한 영토로 복속되었다. 사뚠은 그 후 푸껫에 편입되었다가, 1933년에 정식으로 남부 태국의 한 주(州)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태국의 무슬림이 다수인 3개 주(州)하면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을 가리킨다. 이유는 세 지역에서 무슬림 인구가 무려 80~88%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슬림이 68%를 차지하는 사뚠 주(州)까지 포함시켜서 태국의 4대 무슬림 지역으로 부르기도 한다.

태국 남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원래 종족적으로 타이족이 아니라, 말레이족이다. 언어도 말레이어의 한 종류인 자위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슬람 문화와 풍습, 전통을 과거부터 대대로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근대 태국시기인 1910년 라마 5세 쭐라롱꼰 대왕의 행정 개혁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동안 자치권을 인정받아 고유의 문화와 종교, 언어를 고수해왔는데, 방콕 중앙정부가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태국인 관료들을 무슬림 지역의 영주로 대치시키는 개혁을 시행하면서 남부 태국 무슬림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빠따니 말레이 주민들의 태국 정부에 대한 반발과 찬란했던 과거 빠따니 왕국 시절의 기억을 주요동인(動因)으로 하여 빠따니 왕국의 부활을 위한 분리 독립 운동이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다.

특별히 2천 년대 들어 태국 북동부 이산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했던 탁신정부 시절, 태국 총리 탁신이 불교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남부 무슬림들을 인권적으로 탄압하고,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한데다가, 경제적으로도 차별함으로 2004년 빠따니 무슬림 폭동에 불을 지폈다.

2004년 4월 28일 정부군의 추격에 쫓겨 크르세 모스크로 들어가게 된 37명의 무슬림 저항군들이 정부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전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아직도 그 때 의 총탄 자국이 모스크 벽면에 그대로 남아있다.

 

나오면서
지금까지 주로 빠따니 말레이 무슬림에 초점을 맞추어 남부 태국의 의미와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역사적인 전개와 지역 변천사를 위주로 남부의 특징과 개략적인 이해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유는 현재 미전도종족의 실제에서 17억 제 1위 거대 미전도종족군인 이슬람권 사람들 중 복음전파가 자유로운 비교우위 국가 태국 남부에 빠따니 말레이족이 미전도종족으로 200만 명 이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에게 시리아의 ISIS로 촉발된 이슬람 테러로 인한 중동 이슬람선교에 대한 두려움과 안전 문제, 선교사 비자 문제 등에 있어 상대적으로 대단히 자유롭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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