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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무슬림이 살고 있었다.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18호 2019. 8

태국 남부 얄라(Yala) 철도역

태 국 남부 지역 전체적으로도 선교사들이 잘 오지 않지만, 그 중 특정 지역은 공식적으로 아예 선교사가 상주하지 않고 있고, 사역조차 거의 시도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이제 다루려고 하는 ‘빠따니 말레이’ 지역이다. 지도상 태국 남부 중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Deep south’라고도 불리는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 사뚠’ 등 4개주가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구분은 지리적인 이유보다 이 지역의 민족구성과 종교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불교를 숭상하는 태국 주류 종족과는 달리 말레이족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지역이다. 또 편의상 함께 분류되지만, 엄밀히 ‘빠따니 말레이’라고 하면 사뚠은 다른 3개주와는 역사적 뿌리가 다르다.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은 지금은 말레이시아에 속한 클란탄, 트랭가누 등과 함께 다소 강성 이슬람의 빠따니 왕국의 후예들이고, 사뚠은 역시 현재 말레이시아에 속한 케다와 함께 온건 이슬람의 케다 왕국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태국 남부의 분리주의 무장운동과 테러들은 대체로 이 빠따니 말레이 3개주를 중심으로 발생해 왔고, 사뚠은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와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상당히 ‘태국화’된 경향을 보인다.

태국 남부 빠따니(pattani)풍경

13세기 경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 지역의 왕국들은 본래 독립 왕국이었으나, 17세기부터 사실상 태국 영향 하에 들어갔고, 1902년에 강제 합병 당했다. 그러다가 1909년에 당시 말레이시아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압력으로 방콕조약을 맺으면서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분할 합병되었고, 독립을 약속했던 영국이 이 지역에서 물러나면서 현재와 같이 분리된 채로 남아있다.

말레이시아로 편입된 지역들은 동일한 이슬람권이자, 여러 이슬람 술탄왕국의 연합체로 시작된 말레이시아에 무난하게 편입되었다. 하지만 태국에 속한 빠따니 말레이 지역은 종족은 물론, 언어(Jawi어)와 종교, 관습이 다른 태국 지배 하에서 쉽사리 동화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독립을 요구하며 투쟁해 왔다.

태국 중앙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태국화 정책’과 불교도 태국인의 이주 정책 등을 시행하자, 1960년 이후 PULO(Pattani United Liberation Organization), BRN(Barisan Revolusi Nasional) 등의 분리주의 무장단체들이 조직되면서 폭력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강경파 탁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압박이 강화되는 만큼 테러의 수위도 높아졌고, 2004년 발생한 대규모 테러 이후 계엄 상태가 지속되며 10여 년간 수 천 명이 사망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외부인들에게 태국 남부는 ‘이슬람 테러’로 더 유명해졌고, 접근 제한 지역으로 분류되어 이 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도 대거 철수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앞서 이 지역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상주하지 않고 있다고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태국 남부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검문소

남부의 테러는 2012년 얄라와 핫야이에서 발생한 대규모 연쇄 폭탄테러 등으로 긴장이 극에 달했으나, 이후 태국의 정치 상황이 변화하면서 빠따니 말레이 지역에 대한 정책들도 상당히 완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변화와 함께 그 양상이 종교와 정치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이며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현지에서는 보고 있다.

실제로 본 선교회는 2018년 현장 리서치 당시 빠따니 말레이 3개 주에 4일간 체류하며 렌트 차량으로 여러 지역을 두루 리서치하였다. 처음에는 남부 타 지역의 현장 선교사들도 위험성 때문에 만류하기도 하였으나, 최대한  안전에 주의하여 들어가 보니 비록 체류 기간이 짧았으나 당초 우려했던 것만큼의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전히 계엄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빠따니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무장 군인들과 검문초소, 바리케이트들이 계속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여느 지방 도시의 일상과 다를 바 없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얄라침례교회

보다 위험성이 높다는 얄라와 나라티왓은 현장 선교사들의 조언에 따라 체류하지는 않고 주간에 주요 장소들만 방문하였는데, 그럼에도 그곳에서 평화로운 공원 분위기 속에 현지인을 만나고, 얄라 침례교회를 방문해 목회자와 만나 간단한 인터뷰도 하고, 모스크 예배도 참관하고, 거리 식당에서 식사도 하는 등 충분한 참여관찰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직 간헐적으로 테러가 발생하고 있고, 여전히 계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선교사의 상주나 사역의 가능성은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는 점차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지나간 세월 동안 테러의 위험 때문에 이 지역에 선교사가 상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서양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무슬림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빠따니 말레이를 중심으로 한 태국 남부 무슬림 선교 역사를 살피는 것은 향후 태국 남부의 무슬림 선교를 전망하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태국 선교역사가 190년이나 되는데 반해 태국 무슬림 선교의 역사는 66년밖에 되지 않았다. 초창기 이곳의 선교는 중국으로부터 철수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시작은 1953년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소속 선교사, 라우리에 우드(Laurie Wood)와 고든 알디스(Gordon Aldis)가 얄라 지역에서 무슬림들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발견’이라는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무슬림들의 존재를 알아서 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위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태국인과 태국 중국인 대상 사역을 위해 갔다가 뜻하지 않게 무슬림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만큼 태국 남부 무슬림들은 그 존재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다.

나라티왓(Narathat ) 센트럴 모스크

처음 얄라에 들어간 우드와 알디스는 1955년 사이부리(Saiburi) 지역에 작은 기독교 진료소를 개원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의료사역을 진행하게 된다. 1958년을 전후로 여러 개종자들이 생겨났으며, 1959년에는 나라티왓에서 최초로 세례 받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의 압력으로 다시 무슬림으로 재개종되고 만다.

그러나 1963년에는 나환자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를 통해 나환자들에게 장기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8년 몇 명의 나환자들이 개종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72년에 태국 남부 최초의 말레이인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 5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무슬림 선교사들이 늘어나 1980년을 전후로 나환자 중심의 소규모 교회들이 사이부리와 빠따니 지역에 개척되었다. 그러나 나환자 중심의 사역은 보편적인 지역 사회로 확산되는데 한계가 있었다.

1976년 데이비드 스트라찬(David Strachan)과 밥 조이스(Bob Joyce)는 집중적인 선교를 위해 5개 마을을 선정하여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설교와 간증, 영화상영 등으로 대중 전도집회를 열기도 하였으나, 기대했던 열매는 없었다. 다른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1989년, 나라티왓에서 나환자가 아닌 일반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멤버 중 1명이 살해당하면서 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무슬림 선교 방식에 대한 여러 이견들로 사역자들 간의 갈등이 생기고, 핵심 사역자들이 여러 가지 사유로 현장을 떠나면서, 빠따니 말레이 무슬림 선교의 동력은 점점 약화되어 갔다.

방문했을 때 성도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얄라의 acts교회

그러던 1991년 OMF는 피터 코터렐 박사(Dr. Peter Cotterell)를 강사로 사이부리 지역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태국 무슬림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사명을 재확인하고, 신구(新舊)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모임을 통해 선교사들은 태국 남부 무슬림 선교를 위해 남부 지역의 현지 교회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음전도를 위한 상황화된 접근 방법과 사랑의 행위로서의 사회적 활동의 필요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후 OMF 뿐만 아니라 YWAM(Youth With A Mission)에서 미국인 제시(Jesse)와 영국인 스티븐(Steven) 선교사 두 가정이 나콘에서 사역 하게 되었고, 미국의 남침례교단, 말레이시아 감리교단, Frontiers, Pioneers, 필리핀 교회 등 세계 여러 선교 단체와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태국 남부 무슬림들을 위해 사역하였다.

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 선교사들도 태국 남부 무슬림 사역을 위해 왔다. 빠따니 말레이 지역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는 1995년 얄라에 들어온 OMF 소속의 유홍태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OMF가 이 지역에서 태국인을 위한 사역과 무슬림을 위한 사역을 분리하면서, 전자인 태국인을 위한 사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무슬림을 위한 선교사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상 이 지역의 무슬림을 위한 최초의 선교사는 1996년 OMF 소속의 정상엽 선교사였다(단, 개인사정상 1년 만에 철수). 다음으로 1999년 양덕훈 선교사(KGAM)가 얄라에서, 2000년 유다니엘 선교사(YWAM)가 핫야이에서 사역하였다. 그 외에도 보안 사역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현지 교회와 연합하여 사역하기도 하고, 주로 지역 대학교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나콘 시 탐마랏 모닝 마켓

그러나 이러한 여러 선교사들의 빠따니 말레이에서의 태국 남부 무슬림들을 위한 선교사역은 다른 지역의 이슬람 선교와 마찬가지로 쏟은 열심에 비해 얻어지는 열매는 적었다. 더욱이 2004년부터 분리주의 무장반군의 도발과 테러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결국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안전을 위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태국을 떠나기도 했으나, 대부분 같은 남부의 핫야이나 송클라, 나콘 등으로 철수하여 무슬림 사역을 이어가거나, 무슬림들이 많은 방콕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도 하였고, 소수는 철저한 보안사역을 계속해 나가는 경우도 있다.

현재 태국 남부 무슬림 선교의 전선이 빠따니 말레이 지역에서 핫야이나 나콘까지 후퇴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도 다시 봄날이 찾아오면 새로운 돌파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본 선교회의 2018년 현장 리서치에서 파악한 빠따니 말레이 지역은 최소한 과거의 테러의 위협으로 인한 안전 문제는 상당 부분 완화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장기적으로 상주하면서도 사역이 가능한지는 보다 면밀하게 변화되는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전쟁에서도 한번 후퇴하여 철수한 지역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서는 방어하고 지키는 것의 3배의 전력이 투입된다고 하는데, 선교사역 역시 영적 전쟁이므로 일맥상통하리라고 본다.

햣야이 센트럴 페스티벌 내의 맥도날드

태국 무슬림의 심장이자, 본산인 빠따니 말레이 지역은 이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시 도전되어야 할 곳이다. 이 지역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주효한 것은 가장 근접한 도시인 송클라 주의 핫야이를 베이스로 우선은 비거주로 오가면서 상황을 살피면서 단계적으로 사역을 시도해 보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면서 길을 여시면 다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빠따니 말레이 지역이나 남부의 이슬람과 관련해서 급속한 ‘무슬림 확산’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태국 전역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주로 태국 남부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본 선교회 리서치 팀이 방문한 남부 주요 13개 도시의 거의 모든 동리마다 모스크와 아잔 소리, 히잡 쓴 무슬림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심지어 불교 전통 도시 나콘도 여전히 전통적인 태국 불교 본산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 속에 곳곳에 침투해 섞여 생활하는 이슬람 확산의 영향 또한 확연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핫야이 한 마트에 있는 Uniq** 매장

즉, 오랜 기간 계속된 태국 중앙정부의 강경노선과 테러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은 빠따니 말레이 지역의 경제 악화로 이어졌고, 그로인해 이 지역 주민들(무슬림)이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니 무슬림으로서 그들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이슬람 신앙을 위한 종교적 요소들도 자연스럽게 동반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로 인해 이슬람 거점들이 생겨나면서 결과적으로 태국 남부 전역에서 빠르게 이슬람 확산이 일어나고 있고, 현지 이슬람에서도 이를 전략적으로 포교에 활용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푸껫 같은 관광산업이 성행한 도시들은 일자리가 많아 무슬림 이주가 타 지역에 비해 짧은 기간에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푸껫의 거리에서는 마치 우리나라 도심에 교회들이 그러하듯, 거리마다 크고 작은 모스크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빠따니 말레이 지역으로부터 남부 전역으로의 무슬림 이주는 혹자들의 우려처럼 이슬람 테러 등의 위험의 확산 징후는 상당히 약해 보이고, 오히려 불교 토양의 주류 종족들과 말레이 무슬림들이 서로 영향을 주되 그렇다고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는 서로 다른 ‘태국인’으로서의 어색한 공존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태국 전역 쇼핑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슬림 기도처

어쨌든 태국인들도 이슬람과 무슬림 문화들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고, 딥 사우스로 내려갈수록 ‘태국 주류(Majority) 사회 안에서 비주류(minority)로서 살아가는 다수의 무슬림’이라는 독특한 사회현상이자 구조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지금과 앞으로 태국 남부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통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빠따니 말레이 이외의 지역으로의 무슬림 확산은 태국 무슬림 사역을 위한 좋은 기회로 보인다. 특히 태국은 무엇보다 불교 주류의 사회이기 때문에 태국 내의 무슬림들은 비주류 종족들이다. (물론 빠따니 말레이는 사실상 무슬림 주류 사회이므로 별개로 하고) 게다가 태국은 실제로는 주류 타이족들에 대한 선교는 보이지 않는 제한이 있지만, 어쨌든 종교자유가 보장된 나라이기 때문에 비주류인 무슬림들에게는 크게 제약이 없이 선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태국 남부의 주요 도시들에는 이미 상당한 무슬림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정착해 살고 있고, 곳곳에 모스크와 기도처들이 즐비하다. 어디를 가나 무슬림들이 장사를 하고, 무슬림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방콕 이슬람 중앙성원

태국 남부처럼 무슬림이 다수인 사회임에도 무슬림 선교가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세계에 또 어디에 있을까? 현재 전 세계적으로 IS 사태 등으로 인해 과거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자유의 물결 ‘아랍의 봄’ 이전보다 더 이슬람 선교의 문이 닫혀진 상황에서 이슬람 선교의 비전을 가진 선교사들이 한 번쯤은 이 태국 남부 무슬림들을 향해 시선을 옮겨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태국 남부 뿐 아니라 방콕 이슬람 중앙성원 추산 100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다는 방콕 역시 무슬림 선교를 위해서는 최적의 지역이 될 것이다. 방콕의 다른 사역은 이미 중복, 포화 상태이지만, 방콕의 무슬림 사역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므로 무슬림 사역이라면 방콕으로 배치되는 것은 예외적으로 추천한다.(물론 선교사 수급 차원에서 우선은 남부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역은 물론 이슬람 선교 훈련을 위해서도 태국은 그 어느 지역보다 유리한 지역이다. 물론 이슬람도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지만, 기본적인 신앙과 고유문화는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고 할 때, 태국에서 이슬람 문화 훈련과 사역 훈련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이곳에서 훈련받고, 동일 문화권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무슬림 선교를 시도하는 것도 적극 추천한다.

본 선교회가 다녀온 태국 남부 현장은 또 하나의 선교적 기회의 땅이었다. 물론 태국을 품은 선교사들이 선뜻 이곳으로 자원하지 못하는 자녀교육문제나 안전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음도 파악이 된다.그러나 그보다는 태국 남부를 너무 모르고, 이곳의 선교적 필요와 기회들이 너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도 자체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어찌 이 눈앞에 있는 이 선교의 황금어장을 그냥 방치만 해 둘 것인가? 태국 남부와 더 나아가서 빠따니 말레이 지역까지 한국 교회와 선교계가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제한사항과 한계는 돌파하면 된다.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과 구체적인 지원을 위해 조직되고 연합된 한국교회와 선교 동역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이는 비단 태국 남부 뿐 아니라, 필요와 기회가 보이지만 현실적 한계에 직면해 도전하지 못하는 수많은 미전도지역과 종족들에 공통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지금도 보이지 않게 계속해서 고독한 수고를 기울이고 있을 일꾼들의 열매를 보게 될 날을 고대해 본다. .   글 | 강호석(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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