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Overlay

우본사용설명서 | 우본의 “왓(วั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19호 2019.10

왓 파 나나찻(Wat Pah Nanachat), 출처: watpahnanachat.org

어떤 물건이든 그것을 사용하려면 ‘사용설명서’라는 것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물론 인생을 살아온 경륜과 유사한 물건을 많이 접해본 경험으로 그런 사용설명서 따위 없이도 어렵잖게 그 물건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물건을 목적과 기능에 맞게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할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새 스마트폰을 사고도 풀 버전의 사용설명서는커녕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한 ‘간단 사용설명서’조차 열어보지 않고 바로 이미 익숙한 대로 스마트폰을 쓰는 것과 같다. 그래서 100만원 넘는 스마트폰 기능의 약 20%도 채 활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선교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선교지에 대한 사전 리서치를 하기도 하지만, 역시 현행 선교 풍토상 그 이해와 탐구의 과정이 충분하지 않거나, 실제 사역은 그와는 별개로 적응하고 사역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우본 라차타니의 들녁

필자는 이번 태국 우본 선교현장 리서치 과정에서 우리가 선교현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또 어떠한 관점으로까지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이슈를 만났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본에서 만난 세 곳의 ‘왓(วัด)’들이었다.

‘왓(วัด)’은 태국어로 ‘절, 사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왓 포’, ‘왓 프라깨우’ 등에서처럼 태국 불교 사원 이름 앞에는 항상 이 ‘왓(วัด)’이 붙는다. 지난 수년간 태국 전역을 다니며 방문한 40여개 도시들에서 만나고 스쳐간 ‘왓(วัด)’들이 아마 수백 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만큼 불교국가 태국에 이 ‘왓(วัด)’은 셀 수 없이 많고 대체로 유사하기까지 해서 사실 처음 몇 번 이후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번 태국 동북부 이산 남부의 거점도시 ‘우본 라차타니(이하 ‘우본’)’에서 만난 ‘왓(วัด)’들은 매우 특별했다. ‘선교 저널에서 무슨 불교 사원인가?’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는 것에 주목해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이 ‘디스커버리(Discovery)물’의 가치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우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세 사원들의 독특함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니 의외로 서로 연결되는 의미상의 개연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이 세 사원은 시기도 설립자도 서로 다르지만, 공히 이 우본 땅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이들이 이 우본 땅에서 함께 주목하고 향유한 동일한 관점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를 살피는 것은 선교지 어디를 가든 그곳을 기독교적 시각으로 재빨리 판단하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우리가 선교할 이 지역을 이미 앞선 시기에 개척하고 사역한 주류 종교의 관점을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시각과 시사점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 선교 리서치 사역은 그 특성상 제한된 시간과 재정의 압박 때문에 대상 지역의 흔하디 흔한 주류 종교사원들은 더 중요한(?) 선교 이슈들을 위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일종의 랜드 마크(Land Mark)로서 그 증거사진(?) 찍는 것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가는 곳은 일반적으로 비관심 지역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전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상세 지역자료들도 턱없이 부족하여 이런 숨겨진 의미들까지 발견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이번 경우도 역시 그렇게 자칫 지나쳐 버려 그 의미가 사장되고 말았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우본에 계신 박선진 선교사님께서 이 사원들이 중요하다고 소개해 주시고, 이처럼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핵심 통찰들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글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박선진 선교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왓 수 파타나람 워라위한(Wat Su Pattanaram Worawihan)

이제 이 세 ‘왓(วัด)’들 각각의 특이점들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왓(วัด)’은 ‘왓 수 파타나람 워라위한(วัดสุปัฏนารามวรวิหาร, Wat Su Pattanaram Worawihan, 이하 왓 수파타나람)’이다. 우본 라차타니를 가로지르는 문(Mun) 강 유역에 위치한 이 사원은 영화 “왕과 나(Anna and King)”로 유명한 태국 라마 4세(Ramah IV) 몽꿋 왕(King Mongkut)이 세운 왕실 사원(Worawihan)이다.

왓 수 파타나람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라 절의 대웅전 개념인 ‘우보솟(อุโบสถ, Ubosot)’의 건축양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 지붕은 태국식, 몸통은 서양식, 기초는 크메르식으로 되어 있으며, 사원 곳곳에 중국 사원 양식도 가미되어 있다. 게다가 이 우보솟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건물 전체가 온통 백색으로 되어 있고, 입구 천장에 커다란 서양식 샹들리에까지 있어 ‘과연 여기가 불교사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이색적이다.

왓 수 파타나람 워라위한(Wat Su Pattanaram Worawihan)의 우보솟(Ubosot)

이렇게 이목을 끄는 우보솟을 품은 왓 수 파타나람, 필자의 첫 번째 질문은 ‘왜 몽꿋 왕은 이 변방 우본 땅에 이처럼 독특한 사원을 세웠을까?’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답하자면 당연히 몽꿋 왕에 대해 알아야 한다. 몽꿋(1)은 왕이 되기 전 무려 27년간(1824-1851) “바지라얀(Vajirayan)”이라는 법명의 승려로 불교에 귀의해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태국 전역을 여행하며 태국의 전통 불교가 그 불법(佛法, dharma)을 벗어나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으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정통 불법에 입각한 태국 불교 개혁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서양 문물들이 태국에 빠르게 침투하는 변화의 상황에서 불교가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입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탐마윳(Thammayut 또는 Dhammayut)(2)’ 운동은 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개혁 운동을 넘어서, 비록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Dhammayuttika Nikaya(정법파 또는 정통파)’라는 하나의 종파로 성장해서 ‘Maha Nikaya(대사파 또는 대중파, 약 97%)’와 함께 태국 불교의 주요 종단으로 자리 잡았다. 소수파이지만, 태국 왕실과의 연관성 때문인지 태국 불교의 주요 요직은 오히려 탐마윳 종단에서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몽꿋은 승려 시절 이미 서구 선교사들을 통해 라틴어와 영어는 물론 기독교와 서양의 근대 과학과 지리에 대해 배우고 연구했다고 한다. 심지어 1930년대에 선교사를 왓(วัด)으로 초대해 기독교 설교를 청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는 “당신들이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하지만, (태국)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3)

그렇게 그는 투철한 불교 정체성의 바탕 위에 서구 문물을 실용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승려이자 왕이었는데, 당시 불교 국가 태국이 기독교 선교에 대해 관용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라마 4세(Ramah IV) 몽꿋 왕(King Mongkut), 출처: wikipedia

이러한 몽꿋 왕이 탐마윳 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 우본 지역에 처음으로 세운 탐마윳 사원이 바로 이 왓 수 파타나람이다. 그런데 이곳이 몽꿋이 왕위에 오르고 바로 다음 해(1853년)에 세워진데다,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우보솟 건축에 이렇게 파격적인 양식을 채용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몽꿋의 성향을 고려할 때, 그는 이 왓 수 파타나람의 시각적 파격을 통해 그 시대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도전하고 알리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몽꿋은 이 서양식을 포함한 동시대 공존하는 문화 요소들의 융합을 선보이면서, 탐마윳의 정신, 곧 불교 개혁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웅변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변화를 직시하고 수용하되, 본질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불교에서 건축양식은 매우 중요하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때로는 파격에 가까운 유연한 변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왓 수 파타나람 워라위한 우보솟 입구의 샹들리에는 다양한 역사, 문화와의 융합을 보여준다.

이는 태국과 그 시대의 통치자였던 몽꿋 왕이 주변국들이 모두 서구 열강에 국권을 침탈당하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나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역사적 결과와 맥을 함께 한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 우본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몽꿋의 탐마윳은 태국의 중심 방콕에서 시작해 자리를 잡았고, 이미 태국 전역으로 그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시작인 몽꿋이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미 태국은 몽꿋을 왕위에 올리면서 탐마윳의 정신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몽꿋은 마치 최우선 선결과제를 수행하듯 국왕 즉위 바로 이듬해에, 이 변방 우본 땅에 탐마윳 사원을 세웠다. 그것도 이러한 파격을 통한 강한 웅변적 시도와 함께.

우본은 태국 관점에서는 변방이지만, 태국을 넘어서 생각해 보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접하고 있는 접경 지역으로서 태국 너머 세계를 향한 일종의 전진 기지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나눔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왓 수 파타나람 워라위한 신도들

어쩌면 몽꿋은 확장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탐마윳 불교의 창시자로서 그 개혁정신이 동일한 불교 국가인 라오스나 캄보디아 중생들에게 전파되고, 그 땅의 사람들도 온전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탐마윳 운동은 인근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주요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 그는 이 불심과 함께 언제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태국의 국왕으로서 아직 세력 아래 두지 못한 라오스 남부와 당시 베트남의 영향 아래 있던 캄보디아로의 세력 확장도 바랐을 것이다.

왓 수 파타나람 우보솟의 지붕 모양이 일반 사원들의 지붕들에 비해 유난히 수직으로 날카롭게 솟아있는데, 이를 군사적 ‘요새’와 같은 이미지로 설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4)

어쨌든 몽꿋은 그것이 종교의 확장이든 국력의 확장이든 이 우본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이 왓 수 파타나람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을 것이다. 즉 몽꿋에게 우본은 태국 너머 세계로의 확장을 위한 ‘전진기지’이자, ‘전략적 거점’이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가져본다.

왓 파 나나찻(Wat Pah Nanachat)

두 번째 ‘왓(วัด)’은 왓 파 나나찻(ถนนวาริน-ศรีสะเกษ, Wat Pah Nanachat)이다. 우본 중심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시외곽에 위치했지만, 시사켓으로 향하는 226번 국도변에 있어서 접근도가 좋은 편인 이 사원은 1975년, ‘명상 마스터’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Ajahn(5)Chah’에 의해 세워졌다.

왓 파 나나찻은 외국인을 위한 불교 수련을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설립자 Ajahn Chah가 추구하는 명상 수도원이기도 하다. 원래 우본은 ‘마을 거주’ 불교 전통과 함께 태국 불교의 두 흐름 중 하나인 ‘삼림 거주’ 수도원 불교 전통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Ajahn Chah 역시 이곳 우본 출신(1918-1992)이다.

Ajahn Cha(6)는 1939년 본격적인 출가 후, 1946년부터 정착된 수도원 생활을 떠나 방랑하며 태국 삼림 수도 전통(Forest monastic tradition)을 따르는 명상의 대가, Ajahn Mun을 비롯한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전통은 붓다(Buddha)의 계율(Vinaya)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수도 규칙으로 삼는 특징이 있다. 방랑 수업을 마친 Ajahn Chah는 1954년 자신의 고향, 우본에서 자신의 간단하고 실용적인 명상법을 전수하기 위해 ‘왓 농 파 퐁(Wat Nong Pah Pong)’(7)을 설립한다.

왓 파 나나찻의 설립자, 아짠 차(Ajahn Chah)

그는 이 수도원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이후 태국 전역에 약 250여개 지원(branch)들과 전 세계적으로 15개의 명상 센터들로 확장되었다. 특히 그의 명상법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에 알려져 이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과 심지어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1966년, 서양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수도승이 배출되었는데, 그가 Ajahn Sumedho이고, Ajahn Chah는 그와 함께 1977년, 영어권 서양인 제자들을 수도원 계율 안에서 훈련하기 위해 특화된 태국 최초의 수도원, 왓 파 나나찻을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기본 언어가 영어로 되어 있는 세련된 홈페이지(8)도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 보면 이곳을 “국제적인 삼림 수도원(International forest monastery)”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홈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고, 국제적이라는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왓 파 나나찻은 불교 승려가 되기 원하는 태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훈련하기 위한 불교 수도 사원이다.

주로 서양인 대상이고, 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이면 가능하다. 요즘 서양인들도 불교에 관심이 많고, 승려가 되기 원하는 서양인들도 더러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곳처럼 전적으로 외국인을 위한 수도 사원이 있다는 것은 처음이었고, 적잖은 충격이었다.

Ajahn Chah가 자신의 실용적인 명상법을 전수하기 위해 설립한 ‘왓 농 파 퐁(Wat Nong Pah Pong)’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왓 파 나나찻의 설립 목적은 ‘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불교 승려로서의 견고한 훈련을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수련과정은 전적으로 영어로 진행된다. 실제로 이곳에 방문해 보니 상당히 넓은 대지에 수련과 수행을 위한 여러 건물들이 있었고, 모든 표지판과 안내문들은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곳곳에 있는 명상을 위한 Ajahn Chah의 글귀들도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다.

그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이나 생활 안내 뿐 아니라 불교교리나 수련에 관한 모든 내용을 영어로 설명하고 소통한다는 의미이다. 불교의 본질을 그대로 하되, 그 수련 과정을 완전히 수요자 중심으로 변형하여 전달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또 한 번 충격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앞선 왓 수파타나람과 그 독특한 우보솟이 떠올랐다. ‘아, 여기 뭔가 통하는 것이 있구나.’

왓 파 나나찻에서는 명상 마스터인 Ajahn Chah의 가르침을 영문번역판으로 게시하고 있다.

왓 파 나나찻 역시 그 안의 모든 가르침과 계율(본질)은 그들의 삼림 전통을 통해 철저하게 지키면서 그것을 배우러 온 색목(色目)의 서양인들을 위해 모든 수련 과정을 영어화시킨 파격적인 시도는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맥이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본에서 시작된 변형은 영어권 수련자들에 의해 그 본질을 세계 각지에서 더욱 통용되고, 해석되고, 확장되게 하고 있다.

산티 아속(Santi Asoke) 입구

세 번째 ‘왓(วัด)’은 산티 아속(สันติอโศก, Santi Asoke)이다. 우본 중심에서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티아속은 거대한 코끼리 상 인공 폭포, 곳곳에 방주 모양의 건축물들이 인상적이다. 코끼리 상 인공폭포 주변에 물놀이를 즐기는 가족들과 어린 아이들이 많아 언뜻 보기에는 유원지나 놀이공원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 안에는 여기저기 가사를 입고 노동과 명상 중인 승려들이 있어 엄연한 불교 사원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산티 아속은 단순히 지역에 있는 하나의 왓(วัด)으로 보기보다 그 이면의 ‘산티 아속(9)’이라는 거대한 불교 공동체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우본의 산티 아속 사원은 그 공동체 가운데 하나이다. 산티 아속은 한때 TV 연예인(가수, 작곡가)이었던 보티락(Phothirak)에 의해 1975년 창설되었다.

원래 ‘산티’는 평화, ‘아속’은 환희를 의미하는데, 보티락이 처음 ‘아소카 람’ 사원에서 승려가 되었고, 이후 ‘란 아속’이라는 지역에서 설법을 자주 했는데, 이 보티락을 따르며 불교 계율(Dhamma)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승려, 비구니, 불자들로 구성된 헌신적 추종자 그룹을 ‘아속 사람들(Asokans)’라고 부르게 되면서 이 이름이 통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우본 산티 아속(Santi Asoke)

오늘의 산티 아속이 있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보티락은 처음에 탐마윳 종단(Dhammayuttika Nikaya)에서 정식 승려(Bhikkhu)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존 태국 불교질서를 에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 탐마윳에서 거부되었고, 그후 다시 다수 교파인 마하 종단(Maha Nikaya)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가 비판적 입장을 계속 고수하면서 결국 승가(Sangah, 최고 승려회의)에서 그에 대한 시정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보티락은 이를 거부하고 이미 방콕을 시작으로 1972년부터 시작된 4개 수도원과 함께 태국 승가 탈퇴를 선포했다. 공식적으로 이 1975년 승가 탈퇴를 산티 아속의 창설로 본다.

산티 아속(Santi Asoke)에서 운영하는 채식주의 식당 부니욤(Boonniyom)

그들은 이후에도 ‘아속 추종자들을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동일한 불교 절차를 따라 승려들을 출가시키는 등 자체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수십 년에 걸친 소송이 이어졌으나, 그의 실천적 사상과 불교 개혁 운동에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고, 특히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잠롱 스리무앙(จำลอง ศรีเมือง, Chamlong Srimuang) 전 방콕 시장이 산티아속 출신으로 시장직을 잘 수행했을 뿐아니라 산티 아속의 정신을 반영한 많은 정책과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히려 더 좋은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잠롱 시장과 관련해서 산티 아속은 우리나라의 기독교 공동체인 ‘가나안 농군 학교’의 농법 사업과 공동체 구조 등을 벤치마킹(Bench Marking)해서 산티아속 공동체에 접목 시키는 등 종교와 교파를 가리지 않고 개혁적인 행보를 지속하며 대내외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태국 불교계의 비주류인 산티 아속이 존속할 뿐 아니라 오히려 종교 영역에서 뿐 아니라, 산티아속 공동체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공익사업 영역에서도 확장되고 있는 것은 태국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며 독특한 현상으로 보인다.

그들이 지향하는 불교 계율(Dhamma)에 근거한 가르침과 단순한 실천과 검소한 삶은 단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를 통해 실제로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삶의 구조와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들은 공동체를 통해 소규모 자급자족만이 아닌, 그 실천과 유익을 대(對) 사회적인 공익사업을 통해 이웃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티 아속(Santi Asoke)공동체가 생산한 유기농 제품을 판매하는 상점

산티아속은 부니욤(Boonniyom, 태국어, 의미)이라는 이름의 자체 기업을 설립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채식과 유기농 관련 사업 뿐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한 식당, 홍보와 판매를 위한 센터 등을 태국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확장하고 있다. 심지어 ‘부니욤 TV’라는 방송국도 운영하며 적극적으로 산티아속과 그 사업들을 알리고 공유하고 있다. 이를 위한 모든 생산과정은 공동체 내에서 자발적인 봉사로 이루어지고, 특히 식당은 매우 저렴한 가격 또는 무상으로 나누고 있었다.

론 이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이해하고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계율과 그에 따른 단순한 실천, 그리고 그 실천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조직화된 사회적 도모’라는 부분이다. 이것이 그들의 핵심 사상이자 실천의 틀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정 부분 이상 기여한 것이 바로 우본의 삼림 수도 전통이라고 본다. 방콕에서 시작된 산티아속이지만, 그들의 새로운 개혁 불교 공동체와 그들이 추구하는 계율에 따른 단순한 실천 환경을 위해서는 전형적인 ‘마을 거주’ 불교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사회로 환원하더라도 우선은 속세와 분리된 공동체 공간이 필요했고, 이는 ‘삼림 거주’ 전통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산티 아속의 여러 수도원 공동체들은 이 삼림 수도원 형태로 자리를 잡았고, 우본의 산티아속 사원 역시 그 핵심 중 하나인 것이다. 더욱이 우본이 가지고 있는 탐마윳 불교의 개혁적 전통 역시 산티아속과 잘 부합하는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국 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산티아속 탐방을 위해 방콕 본부보다 오히려 이 변방 우본 공동체를 더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본 산티 아속(Santi Asoke) 공동체 작업장

이상으로 우본 지역에 세워진 3개의 독특한 왓(วัด)들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세 사원들은 각각이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면서도 서로 통하고 공유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핵심을 키워드로 나열하자면, ‘불교적 본질, 계율 철저’, ‘이를 바탕으로 한 개혁 추구’, ‘우본의 삼림 수도 전통’, ‘(자기 방식의) 불교의 확장 도모’ 등이 아닐까 한다.

왓 수 파타나람을 통해 본 몽꿋 왕의 탐마윳 역시, 기존 불교의 비 계율적 관습을 비판하며 다시 붓다의 가르침, 계율을 따른 실천을 강조하되 시대의 흐름을 과감히 받아들여 조화로운 실천을 강조했으며, 이를 우본의 삼림 수도 전통과 아울러 접경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이를 전파하고 확장하려 했다.

또 왓 파 나나찻 역시 우본 출신의 Ajahn Chah의 개혁적 성향이 우본의 삼림 수도 전통을 바탕으로 명상을 통한 본질 추구로 발전되면서 이를 태국을 넘어 서양인들에게까지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한 특별한 사원이었다.

마지막 산티아속은 셋 중 가장 실천적이고 현실세계로의 확장성이 큰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불교에 대한 저항도 과감했고,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 실천하는 면에서도 산티아속 공동체를 통한 철저한 실천이 수반되었다. 또 이를 위한 대 사회적 확장성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바 종교 영역을 넘어서 개인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 공유하고 통하는 이 핵심 요소들이 다른 지역이 아닌 이 태국 중에서도 변방인 이 우본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지점이라 생각된다.

이 세 집단의 주체들은 공히 우본의 삼림 불교의 전통에 기반하고자 했다. 그것은 삼림 불교의 전통이 갖는 명상과 수도에서 비롯되는 종교성, 특히 불교적 정당성과 대중적인 설득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들은 공히 새로운 불교 분파 또는 개혁적 공동체로서 시작은 태국의 중심 방콕에서 시작했지만, 그곳에서의 성공 이후 확장 특히 태국 외부 세계로의 확장을 위해 변방이지만 우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세 주체들은 우본에서 그들이 기대한 효과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그들의 사상은 여러 모양으로 외부로 확장되었다.

출처: watpahnanachat.org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렇게 우리보다 앞서 우본 땅에 터를 잡고 나름의 목적을 성취한 주체들은 우본을 그렇게 이해했고, 이용했다. 어쩌면 이것은 현재 이 땅에 드러나는 현상 리서치만으로는 발견하기 힘든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본에서 사역할 선교사들을 위한 우본 사용설명서에는 이러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미 이 땅의 주류 종교 불교는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심고, 가꾸려 하는 이 땅을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일했다. 가진 입장이 다를 뿐 이 땅에서 사역하려는 선교 주체들에게는 이것이 요긴한 정보일 뿐 아니라, 사역 접촉점이자 향후 방향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본의 삼림 전통은 우본에 거주하는 태국 불교도들의 신앙 깊숙히 자리 잡은 정서이자 본질일 수 있다. 우본에 터를 잡은 불교 주체들의 개혁적 성향과 그 운동은 우본 사람들이 보아온 대안적 불교의 모습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표방한 개인 삶의 실천과 대 사회적 모범의 실천은 우본 사람들이 보아온 불교 승려들과 그들의 신실한 신도들의 삶의 모습이었고, 그들은 의례 그것이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여길 것이다.

출처: watpahnanachat.org

우리는 그 위에 본질이 다르지만 종교라는 유사성을 가진 복음과 기독교의 씨를 뿌리고 터를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복음과 기독교의 본질을 철저히 지키되, 몽꿋 왕이 왓 수 파타나람의 우보솟에 그리 했듯 몸통은 확 바꾸는 변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언어와 방식에 그들이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철저히 태국어와 태국인의 사고 틀 속에 복음을 녹여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단순히 교회개척과 주일 중심의 한국적 목회 구조, 설교 위주의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질적인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성경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낼 수 있도록 그들의 일상의 삶과 가정과 일터 속에서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그 속에서 어떻게 이 말씀이 실현되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진정한 성육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그저 일반적인 이론으로 접하는 것과 바로 우리가 사역할 그 땅과 그 사람들이 그렇다는 설명을 토대로 이를 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앞선 선교 역사도 이를 반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 더 깊숙히 배어 있는 그 땅 종교의 그 땅 사용법이 첨부되어 있어야 제대로 그 땅을 선교적 목적과 하나님의 뜻대로 기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비단 우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교지에 적용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글 | 강호석(SIReNer)

[각주]
(1) 이하 몽꿋에 대한 내용은 https://en.wikipedia.org/wiki/Mongkut 에서 참조
(2) 이하 탐마윳에 대한 내용은 https://en.wikipedia.org/wiki/Dhammayuttika_Nikaya 에서 참조
(3) Bruce, Robert (1969). “King Mongkut of Siam and His Treaty with Britain”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Hong Kong Branch. The University of Hong Kong Libraries Vol. 9. Retrieved 2011-06-27.
(4) www.travelfish.org, 여행 전문가 David Luekens의 견해 참조
(5) 일반적으로 종교적 스승이나 지도자를 일컫는 태국의 존칭어, 선교사나 목사에게도 이 호칭을 쓴다.
(6) 이하Ajahn Cha에 관한 내용은 https://en.wikipedia.org/wiki/Ajahn_Chah 에서 참조
(7) 226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왓 파 나나찻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8) www.watpahnanachat.org
(9) 이하 산티 아속에 관한 내용은 https://en.wikipedia.org/wiki/Santi_Asoke 에서 참조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디지털 저널
C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