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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국 이야기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19호 2019. 10

란쌍왕국 때 세워진 왓 프라 탓 파놈(Wat Phra That Phanom), 출처: wikipedia

지난 8~9월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이하 태라캄) 리서치는 이 지역 패권을 다투던 세 왕국 란쌍, 앙코르, 참파 왕국의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로 그 ‘세 왕국 이야기’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란쌍 왕국은 이미 앞서 CAS 14호와 15호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번 호에서는 ‘두 왕국 이야기’로 범위를 좁혀 앙코르 왕국과 참파 왕국을 통하여 인도차이나를 더 깊게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업마(UPMA) 홈페이지에서 카스(CAS) 14호 ‘인도차이나의 슬픈 진주 라오스’와 15호 ‘큰 불상의 도시 루앙프라방(1), (2)’를 읽으면 라오스의 과거와 현재 속에 있는 란쌍 왕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꺼(吳哥)’=‘앙코르(Angkor)’
개인적으로 캄보디아는 13년 만에 다시 방문을 한 것이어서 기대와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먼저 시엠립 시내를 참여관찰하고 사진도 찍고 있을 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발생 했다. 바로 ‘앙코르(Angkor)’라는 단어와 관련된 것이었다. 도착 첫 날 숙소를 정하고 난 뒤, 산책 겸 해서 시내를 걷는데 유난히 ‘우꺼(吳哥)’라는 중국어 한자(漢字)가 많이 눈에 보였다. ‘우꺼(吳哥)’라는 한자 바로 옆이나 혹은 밑에는 앙코르(Angkor)라는 영어 단어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앙코르에 해당하는 중국어임을 알 수 있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아! 캄보디아 시엠립에는 오(吳)라는 성씨(姓氏)를 가진 사람들 천지인가 보네’ 라고 같이 간 동료들에게 농담을 하면서 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인들이 관광을 많이 오다 보니, 여관, 호텔도 ‘우꺼 호텔(Angkor Hotel)’이라는 이름이 참 많았으며, 이곳저곳 서있는 최신식 대형 관광버스에도 ‘미소 우꺼(Smile Angkor)’라는 여행사 브랜드가 새겨진 버스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심지어 식당 이름도 모두 ‘우꺼 식당(Angkor Restaurant)’이었다.

시엠립 시내에서 본 ‘우꺼(吳哥, 앙코르)’라는 이름의 병원

우리가 묵는 숙소가 앙코르 호텔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자칫 몇 번지, 어디의 앙코르 호텔, 앙코르 식당인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앙코르 시내에서 앙코르를 찾아 헤매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 캄보디아, 특히 과거 크메르대제국 앙코르 왕국의 수도였던 시엠립에는 21세기 2019년에도 여전히 ‘앙코르’가 그 중심부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엡립의 현재를 이끌어가는 관광, 상업 활동은 과거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 등 위대한 앙코르 왕국에 깊이 뿌리를 두고 그 자양분과 영향력을 더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지난 13년 전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치밀해졌다.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관광, 공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캄보디아인에게만이 아니라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해외 여행객들에게 ‘앙코르(Angkor)는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재현하면서 캄보디아의 정체성을 하나로 결집시켜 구현해내고 있었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 내부 전경 일부, 출처: https://unsplash.com

원래 앙코르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 〉노코르 〉옹코르 >앙코르로 음원이 변한 것이다. 신들이 사는 마을, 혹은 신들의 도시를 뜻하는 말이다.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권역 중 인도문화 특히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힌두교인들은 세계의 중심에 거대한 산이 있고, 이 세상은 그 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각각 세계의 중심 산을 산스크리트어로는 수메루(Sumeru), 불교에서는 수미산(須彌山), 힌두 비쉬누파에서는 메루 산, 힌두 시바파에서는 카일라사(Kailasa)산이라고도 부른다.

중요한 것은 캄보디아 앙코르 제국이야 말로 이 세계의 중심에 신들의 성전 곧 중앙 성전 앙코르 와트를 건설하고, 신들이 사는 도시 앙코르 톰을 세운 ‘신과 신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캄보디아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앙코르왕국을 살펴보기로 하자.

앙코르 톰(angkor thom)의 사면상, 출처: https://unsplash.com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 세상의 중심 신들의 도시
지난 2011년 한국 EBS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송을 했다. 전체 제목은 ‘신들의 땅 앙코르’이며, 1부 ‘앙코르와트’, 2부 앙코르 톰‘, 마지막 3부는 ’신들의 땅 앙코르 ­ 그 숨겨진 이야기‘이다.

제작진들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인 인식과 무지를 바꾸고자 이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면서 11~13세기에 가장 찬란했던 동남아 문명을 보여주려고 앙코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신들의 땅 앙코르‘는 태양의 수호자로 일컬어지면서 오늘날 태국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1177년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와 이후 앙코르 톰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 이야기를 토대로 제작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총 제작 기간이 15개월이나 걸렸는데, 당시 세계 최초의 3D 입체 영상을 통해 앙코르와트의 넓이가 현대 축구장 20개 정도의 크기이며 높이 약 65m 탑이 빼곡한 전경을 통하여 왜 앙코르와트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큐멘터리 는 당시 지상 최고 신전으로 손꼽히는 앙코르와트의 건국 과정을 상세하게 재현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앙코르와트의 색상과 구조를 복원하여 본래의 화려함과 위용이 로마 제국에 견줄 만큼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앙코르 왓(Angkor Wat) 전경, 출처: https://unsplash.com

앙코르와트를 간단히 설명하면 앙코르와트는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웅장한 국가 사원으로, 약 2만 5,0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장장 37년 동안 건설했다. 앙코르와트의 특징중 하나는 겹겹의 성곽이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가장 바깥쪽의 성곽은 다시 폭 190m의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앙코르와트 사원을 제대로 보려면 3생(전생, 현생, 내생)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건물은 세 겹으로 된 회랑과 이 세 겹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앙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 탑, 중앙 사당은 천상의 신의 영역에 속하는 곳인데 높이 65m로 그 경사가 70도가 넘어 웬만한 담력이 없는 사람은 오르기를 포기할 정도의 급경사로 되어 있다. 아주 능숙한 등산가라 할지라도 두 손, 두 발을 다 사용하여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들은 이를 신에게 다다르기 위한 예의라고 말한다. 모서리에는 4개의 탑이 서있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데, 중앙탑은 앙코르와트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물이다.

앙코르와트는 신의 세계를 구현한 사당으로 중앙탑은 힌두교 외 불교에서도 세계의 중심으로 받드는 수미산을 나타내고 참배 길은 세계의 기축(基軸) 도로를 모방 상징하여 형상화 시킨 도로이며, 둘레를 에워싼 벽은 히말라야산맥을, 해자는 세계의 끝인 깊은 바다를 상징한다. 또한 앙코르와트 사원 안의 곳곳에는 비슈누에 관한 신화가 조각되어 있고 국왕들의 모습을 비롯하여 코브라, 무희 등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앙코르 톰(Angkor Thom) 남문, 출처:Wikipedia

한편 앙코르 톰은 12세기, 인구 100만 명이 살았던 거대 도시였음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졌다.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북쪽에 세워진 앙코르 왕국의 수도 앙코르 톰은 한 변의 길이가 3Km, 총 길이 13.2Km, 높이 7~8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지은 거대한 성벽 도시로 북서쪽은 왕궁과 왕을 위한 구역, 북동쪽은 왕실 광장과 작은 사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은 주거시설과 상업시설, 군사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앙코르 톰에는 모두 5개의 문이 있는데, 곧 동서남북 그리고, 승리의 문이다. 

모든 문 양 편에는 유명한 힌두 신화 ‘우유(milk)의 바다 휘젓기’ 곧 산스크리트어로 ‘사무트라 만탄(Samudra manthan)’이라는 신화 내용을 조각해 놓았다.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신화 중 하나인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는 선한 신 디바(Deva)들과 악한 신 아수라(Asura)들이 우유바다에 강력한 약초를 넣고 메루산 동쪽에 있는 만다라차라산을 중심으로 나가(Nagas)의 왕인 용왕 바스키(Vaski)를 잡고 양쪽으로 줄다리기를 하는 것으로 바다를 이렇게 휘저으면,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불로장생의 감로수 암리타(Amrita)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우유(milk)의 바다 휘젖기, 출처: Wikipedia

이런 ‘우유바다 휘젓기’모습의 벽화는 앙코르 와트 1층 회랑 벽에도 거대한 전경으로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캄보디아 거의 대부분의 사원들 마다 눈에 띄는데 영생불멸에 대한 인간의 갈구와 염원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내고 있다. 

캄보디아의 세종대왕, 자야바르만 7세
이제 앙코르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자야바르만 7세를 통해 앙코르왕국을 들여다보자.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 여론 조사 때 마다 매번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모든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은 왕이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세종대왕에 해당하는 인물로 캄보디아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며 존경받는 왕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을 때 크메르는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 점차 쇠퇴하던 시기로, 자야바르만은 그의 형(야소바르만 2세)이 아버지를 이어 왕으로 재위하던 시절에 베트남 남부에 있는 참파족 정벌 사령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내부 쿠테타로 왕인 형이 죽임을 당하고 1177년에 참파왕국의 참파족이 메콩강을 통해 수도 앙코르를 기습 공격하여 수도를 중심한 앙코르왕국이 참파족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당시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앙코르에 머물고 있던 시절 그가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보면 제국의 수도 앙코르의 도탄에 빠진 모습을 “길을 가다가 크메르인이 보이면 붙잡고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고 1천 개가 모이면 참파왕에게 보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자야바르만 7세 동상

자야바르만은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캄퐁 스바이에서 병력을 모아 힘을 기른 후 톤레삽 해전을 통해 참파족 왕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면서 1181년에 앙코르왕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이후 30년간 크메르 앙코르왕국을 태평치세로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가 크메르 제국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재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7세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대규모 건축을 하게 되는데 바로 앙코르 톰과 바이욘 사원 등을 건설한다.

거대 도시 앙코르 톰은 약 20만 명이 동원되어 건설되었는데,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12세기 앙코르 톰에는 약 70만~100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3세기 파리 인구가 10만 명, 고려 수도 개경 인구가 10만 명, 당시 전 세계 1등 국가 송나라 수도 개봉의 인구가 80만 명 살았던 것으로 볼 때, 이는 엄청난 규모이다. 그 당시 앙코르제국은 로마의 도로처럼 1,200Km가 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민생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대규모 민간 시설 확충, 100개 이상의 병원 건설, 100개 이상의 숙박 시설 건설을 통해 크메르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자야바르만7세 때 앙코르 톰 건설 모습

자야바르만 7세는 원래 다른 크메르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힌두교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던 아내 불교도 자야라자데비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불교로 개종하면서 자기 통치기간 동안 모든 힌두교 사원에 석가모니 부처상을 모셔두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앙코르 왓도 불교 사원이 된다.

그의 사후 힌두교가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자야바르만 7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그의 불교개종이 힌두교의 데바라자 신의 통치와 강력한 중앙집권을 강조하는 왕조 체제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참파 왕국과 참족의 역사
이제제부터는 두 왕국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 참파왕국에 대해 역사와 현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참족 리서치는 이번 우리 여정의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위의 앙코르왕국에 비해 현장에서 참여관찰 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위키피디아 등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던 중 잘 정리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전호진 교수의 ‘캄보디아 짬(참) 이슬람’과 ‘NGO 캄보디아 교육문화 선교기구’를 설립하여 현재 ‘시엠립 기독교 문화원(DEMSTAR)’사역을 하는 이상호 선교사의 블로그이다. 참파왕국에 대한 내용은 주로 이 두 자료를 참고로 하여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캄보디아는 불교국가이다. 하지만 프놈펜, 깜뽕짬, 시엡립 호수 주변 등지에 가보면 이슬람 터번이나 히잡을 쓴 남성과 여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띤다. 캄보디아의 현재 이슬람교 인구 통계를 보면 약 4%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한 때 베트남 중남부와 캄보디아 남부 일대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던 참파왕국의 후손들이다.

시엠립 참족마을

참파왕국은 기원전 190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계인 ‘참족’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종적으로는 아리안 인종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고대 산스크리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안남(지금의 베트남) 중부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거주하게 된다.

초기에는 주로 해적으로부터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소극성을 보이다 전성기 때에 이르러서는 당시 동남아의 맹주였던 크메르 앙코르 왕국을 침략하며 크메르와의 뺏고 뺏기는 전쟁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참파 왕국이 크메르 왕국을 점령 통치한 기간은 4년인데 비해, 크메르 왕국이 참파 왕국을 다스린 시기는 37년에 달한다.

현재 캄보디아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물 축제는 1181년 참파 왕국과의 전쟁을 이끌었던 크메르 왕국의 자야바르만 7세의 승리를 기뻐하고 기원하는 동시에 당시의 번영을 회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파 왕국의 초기는 인도 문화권의 힌두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10세기 경 중국과 교역하던 아랍 상인들이 당시 참파 왕국을 거쳐 왕래를 하면서 점점 이슬람 문화가 확산되었다. 17세기 초인 참파 왕국 말기에는 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참파 왕국을 이슬람화하였다.

그러던 중, 세력이 약해진 참파 왕국은 북쪽에 위치한 베트남과의 전쟁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1471년 수도가 함락당하며 망하면서 250만 명의 참족들이 베트남의 대량학살을 피해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당시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침략으로 인해 방비가 허술해진 캄보디아로 이주해 온 짬족은 약 60만명으로 추산된다(1822년).

참파 유적 중 가장 오래된 포 나가르사원(힌두교 사원), 출처: Wikipedia

계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전통문화 유산을 보존할 수 없었던 참족들에게 있어 민족의 동질성은 그들이 당시 갖고 있었던 언어와 종교를 유지하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이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참어(참파 종족의 고유 언어)를 통합의 중심으로 사용하여 끈끈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캄보디아의 참족은 10세기 경 베트남 중부에 살았던 참파 왕국의 후손들인데 이들은 힌두교를 믿었으나 베트남에게 나라를 잃기 직전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지금까지 캄보디아 무슬림들은 대부분 참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서서히 크메르인들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 사회 안에서의 참족과 이슬람
캄보디아 참족들은 1970년대 중반 ‘폴 포트’의 킬링필드 때 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대학살의 직접적 원인은 당시 폴 포트의 부하 중 ‘르 카심’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참족으로 Fulro Champa라는 저항조직을 결성하여 이후 캄보디아 당국으로부터 엄청난 보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복은 역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및 파키스탄의 이슬람원리주의 와하비파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게 했는데, 그 결과로 캄보디아에 150개 이상의 모스크와 35개의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파키스탄 및 사우디에서 온 종교지도자들이 참족을 방문, 이슬람 교육을 시키고 있다.

현재 매년 약 100명 이상의 참족 학생들이 사우디 및 파키스탄으로 보내져서 이슬람 교육을 받고 있다. 특히 일부 아랍 국가들과 파키스탄 및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NGO들은 매년 2,00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여 캄보디아 안에 공공기관, 모스크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건축하고 있다.

모금을 주도하는 기관은 사마쿰 이슬람 캄푸챠(Samakum Islam Kampuchea)이며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의 이슬람 개발은행(Islamic Development Banks), 이샤크 빈나시르, 무하마드 카심과 같은 두바이 아랍인들도 참족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에서 들어온 다콰 타브리(Dakwa Tabligh)라는 이슬람 전도단체도 참족과 캄보디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슬람 전도 활동을 하고 있다.

작년 2018년 11월 이슬람의 금식기간인 라마단이 끝나는 금요일에 주 캄보디아 미국 대사관은 참족 무슬림 지도자 200명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베풀기도 했다. 목적은 참족 무슬림 공동체에 “제발 이슬람 테러분자들을 숨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시엠립에 위치한 모스크

현재 캄보디아 내 참족은 전체 인구의 4%에 해당하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한다. 13,690개의 마을 중 426개의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중 200개는 약 70~100가정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어떤 마을은 1천명까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참족들은 깜뽕짬 주에 살고 있지만 24개주 중 한 개주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 소수일지라도 짬족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 참족은 매콩강 물줄기 주변이나 톤래삽 호주 주변 등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그러나 여러 환경적인 요인들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직업군으로 점점 변화하며 거주지를 이동, 확산하고 있다. 캄보디아 전역에 약 444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캄보디아의 행정 구역과 유사하게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는데 무슬림 지도자 이맘을 중심으로 23개의 큰 단위와 다시 작은 단위로 조직되어져 모스크를 중심으로 생활하며 그들만의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다.

톤레샵호수 주변 무슬림마을

앙코르 정체성과 이슬람 정체성
두 왕국 이야기를 이제 끝내려 한다. 한 왕국은 앙코르 왕국으로 현재 캄보디아 주류민족 크메르족의 구심점이며, 크메르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들은 단지 과거의 유적, 관광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0세기 말 원조 경제로부터 다시 회복 부상하기 시작한 캄보디아 앙코르는 이제 다시 캄보디아 사람들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으로 앙코르를 중심부에서 재현해내고 있었다.

반면 한 왕국은 베트남(안남)과 캄보디아라는 두 지역 강자 사이에서 대등하게 지역 패권자로 참파왕국으로서 명성을 유지해오다 결국 인도차이나 패권 경쟁에서 패하면서 지금은 베트남의 소수민족이자 캄보디아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름도 주변 이슬람 세계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 약자로서 무슬림 미전도종족 참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특별히 집단 정체성이란 어떻게 형성되면서 어떻게 구현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든다.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기도 하고 타자(他者)가 자기를 규정하기도 하는 정체성. 특별히 민족성(民族性), 종족성(種族性)과 관련된 정체성. 21세기 2019년 현재 ‘신화와 사실 사이’에서 지금 같은 땅에 살고 있는 캄보디아 크메르족과 참족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과연 나와 내가 속한 단체, 조국 대한민국은 어떤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고민이 된다.  글 | 정보애(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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