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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겸손” 우본 라차타니의 박선진 선교사

업마가 만난 사람
D·I·G·I·T·A·L JOURNAL 19호 2019. 10

태라캄(태국,라오스,캄보디아) 선교현장 리서치 여정 중 ‘우본(Ubon)’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역을 리서치하고 반드시 돌아오게 되는 도시가 되었다. 라오스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여정 중에도 예약된 직항 비행기가 갑자기 취소되는 바람에 다시 우본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자연스레 우본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주신 박선진 선교사님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여행에서 돌아온 자녀를 품어주는 아버지처럼 넉넉한 품을 내어 주셨던 선교사님의 미소가 그립다. 인터뷰 내내 태국에서 이미 누구나 존경하는 베테랑 선교사이심에도 벌써 10년이나 된 우본에서는 아직 새내기에 불과하다는 그 겸손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많은 인터뷰 내용이 있지만, 지면의 한계상 내용을 요약 또는 발췌하여 싣게 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정화, 박선진 선교사

Q. 태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지 만 34년이 되셨다. 소개를 부탁드린다.
A. 1985년 9월 태국에 파송되어 15개월 방콕에서 언어공부를 하고, 북부 우따라딧에서 6개월 정도 사역을 하다가 1987부터 2002년 까지는 방콕 랑캄햄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했다. 방콕에 있을 때는 방콕 사역만이 아니라 인근 주변나라(V국, N국, M국, B국)의 지역 책임자로 사역했다.

당시 랑캄햄 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아서다. 당시에 대학사역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직접 전도와 기숙사를 통한 전도를 하면서 방콕 프라까루나 교회가 시작되었다.

사역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랑캄행 대학에서 한 7년 정도 사역할 즈음, 타싸니라는 교수가 부임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교수님은 원래 컨캔 대학교 출신인데, 기차 안에서 자기 앞에서 앉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던 서양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으신 분이다.

2000년 타싸니교수(여자)와 람캉행 대학교 동문 선배들

람캄행대학교 안에 기독학생회가 있었지만 동아리를 많으신 교수님은 조용한 성품을 가지셔서 자신의 일인 교회의 반주자로 활동은 하셨지만 학생들을 돌아보는 일은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 한 분은 기독교인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교회를 안 다니는 분이셨다. 그런데 이 교수님은 태국 사람 같지 않게 굉장히 신앙이 뜨거워서 강의시간에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곤 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여전히 예수밖에 모르는 분이셨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는 우리 교회 학생들 다 불러서 총장실에 교수님들 앞에서 크리스마스 특송을 부르게 할 정도로 아주 열정적인 분이셨다.

그 분과 함께 호흡을 맞춰 사역하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 분이 환경공학과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환경에 대한 특강을 하고 라용에 있는 석유 화학기지가 있는 공단지역에 가서 청소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태국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방송국에 제보를 한 것이다. 그래서 방송 덕에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협력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이 많이 찾아 왔다.

 

1999년 11월 라용공단 원유찌꺼기와 쓰레기 청소를 위해 해변에 모인 랑캄행 학생들

그리고 그 교수님과 함께 새벽기도 시간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랑캄행을 복음화시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주 수요일 아침 5시에 기독학생들이 모여 랑캄행 대학교를 위해서 공대 옥상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교회대로, 랑캄행 대학은 랑캄행 대학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9년 랑캄행대학교 공대 옥상에서 새벽 5시에 가지는 정기 수요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당시 람캄행대학사역을 하면서 신학교 동창 목사님과 함께 한 교회를 개척했는데,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해발 1,400미터에 있는 동쌈믄 마을에 세운 프라까루나동쌈믄교회이다. 당시 학생들을 제자훈련하고 있었는데 훈련이 선교까지 나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학생들에게 해외로 나가는 선교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국내 타종족, 소수민족 가운데서 복음을 듣지 못한 그런 마을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몽족 기독교 협의회를 찾아가서 교회 개척 장소를 소개해 달라 부탁을 드렸다. 그 후 4개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그 중 가장 가난하고 먼 지역을 택했다. 그 때가 1996년이었는데 수도시설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그곳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마을의 가장 어른들을 찾아뵙는 일이었다. 어른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그 마을을 개척한 사람, 또 한사람은 그 마을 이장 같은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었다. 이들에게 교회를 허락받기 위해서 2~3달에 한 번씩 방문했다.

이 마을은 치앙마이에서 130km 떨어진 곳으로 당시만 해도 차로 5시간 걸렸고 비만 오면 못 올라가는 지역이었다. 미얀마에서 이주해 오신 이 어른과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태국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피해서 오게 된 치앙라이 출신 아내분이 만나면서 이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소통이 시작된 이후에는 주일학교 사역부터 시작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학생을 키웠다. 그래서 신학과정을 4년을 했는데 4년 동안 공부시키는 동안에 그 신학생이 방학 때 올라와서 교회를 지키도록 하면서 사역하게 했고, 그때 태국어 더빙 예수영화도 상영하면서 사역에 좋은 효과를 얻었다.

2001년 치앙마이 동쌈믄 교회 소수종족(몽족) 교회

지금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이던 전도사님으로 교회를 책임지고 있다. 교회가 잘 성장해서 어른 80여명, 아이들 40명 정도 교회에 출석한다. 예전에 교회로 사용하던 집이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주변에 교회를 방해하는 이들의 방화사건도 있고 해서 교회를 새로 건축하기로 했다. 그런데 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자재의 비용을 한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감당하기로 하고 자신들의 차량을 이용하여 시냇가의 모래를 퍼 올리고 예배당을 지으면서 성도들이 노력봉사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에배당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은 것이다. 130Km 떨어진 치앙마이로부터 자재를 사고 그 높은 곳까지 운반하는 노력을 하므로 그들 스스로가 너무 아끼는 교회가 되었다. 자신들이 직접 교회를 짓는 노력과 이로 인해 생겨나는 교회에 대한 애정, 이것이 교회개척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사역이 그렇게 잘 되고 있었는데 우본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A. 2002년 GP(Global Partners)선교회 대표 사역을 위해 대학생 사역을 내려놓고 후배 선교사에게 위임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국내 본부에서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사역을 했고, 2006년도부터는 R&D 전략 책임자로 있었다. 국내에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항상 랑캄행 대학교에 있었다. 아울러 그 기간이 차기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 있으면서 임기를 1년 남겨두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했었다. 그 때 대학 사역을 맡아 주었던 김동건 선교사가 교회를 체크해 보니 90%이상 자립이 된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 그들이 다 알아서 운영하는 상황이니 내가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태국 남부로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본부 사역을 마칠 때 즈음 태국 남부에서 테러사건이 많이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의 만류로 남부로는 가지 못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R&D 전략 책임자로 있을 때 다시 한 번 태국의 여러 지역을 리서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본에 대학생 사역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대학생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안 맞았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때 내 나이가 학생들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던 것이다. 내가 젊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만남은 되지만 생각만큼 관계가 형성되질 않았다.

두 번째는 방콕에서는 학생들이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생활비를 보내주는데 우본의 학생들은 고향집이 멀지 않으니 용돈을 주 단위로 받아 오는 패턴이었다.

10년 전 우본의 생활 수준은 태국 전체 77개 짱왓 가운데 66위였고, 씨싸껫은 75위였다. 그러니 가정 형편들이 대체로 넉넉하지를 못해서 학생들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우본에서 공부하고 주말이 되면 집에 가서 그때그때 필요한 돈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결국 주일에 우본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 것이 사소하지만 문제가 되었다.

또 한 가지는 신앙적인 면에서도 이들은 불교문화 속에 있지만 절에 가는 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정기적으로 가는 강제성은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매주 정기적으로 교회에 와야 하니 귀찮은 것이다. 나라 이름이 자유라는 뜻을 의미하듯 태국이라는 나라가 무엇인가에 매이기를 싫어하는데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싫어하는 것이다. 또한 태국은 듣는 문화인데 성경책을 읽으라고 하니 그것도 어려워했다.

2001년 프라까루나 방콕 교회

내가 처음 동부에 들어갈 때는 지금과 같지 않고 -지금은 비행기도 다니지만- 10년 전에는 버스로 가는데 논스톱으로 8시간 30분 걸렸다. 지금도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아직도 씨족 사회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예수 믿으면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 문화가 변화하면서 그런 측면이 많이 약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지금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대학생 사역보다는 교회개척에 집중하게 되었다. 우본에는 2006년 12월에 왔고 2007년 3월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 때 방콕에서 일하시던 찐다전도사님(북부지방 출신)이 교회개척에 동참하시겠다고 하시면서 함께 오게 되었고, 찐다전도사님이 양육하던 ‘픙’자매(중부지방 출신)와 함께 와서 우리 부부와 4명으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프라까루나(긍휼이라는 의미의 태국어) 우본교회다.

2013년에 이원석 선교사(내수동교회 출신)가 와서 함께 사역하다가 2014년에 새로 와린 프라까루나 교회를 개척했다. 남쪽의 와린 참랍이라는 지역에서 3년 사역하시다가 재배치로 방콕으로 사역지가 바뀌면서 우리 가정은 찐다전도사님에게 맡기고, 와린 프라까루나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우본 프라팃낏쿤 교회(1929년설립)

Q. 태국의 중부, 남부, 동북부(이산) 지역이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것 같다. 선교적 측면에서 각각의 특징을 설명해 달라.
A. 태국교회가 시작될 때 당시 선교사들이 가장 가고 싶은 선교지는 중국이었다. 당시 싱가폴, 말레이시아, 태국은 선교 실습장 같은 지역이었다. 태국에 처음 들어 온 선교사 구출라프도 중국선교사로서 태국에 3년을 머물다 중국으로 갔다.

태국의 북부와 남부는 부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태국에 서양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와 같이 지역이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내지선교회는 명칭을 OMF로 변경하고 북부지역을 감당하고, 남침례교회는 태국의 동부(파타야, 촌부리 등)지역에 진출을 했다. 본래 OMF선교사들이 사역하던 곳이 중국 운남이었는데, 1949년도에 공산화되면서 중국을 떠날 때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역지를 찾던 중에 중국인들이 사는 태국의 북부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 외 선교사들이 화교들이 많은 남부지역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부 나콘시탐마랏 근교에 나환자촌이 있었는데 초창기에 이들이 예수를 많이 믿게 되었다.

태국의 남부가 지금과 같이 견고하게 된 이유는 중국 사람인 존 성(John Sung)이라는 전도자가 태국에 3,4차례 방문해서 방콕의 중국인교회, 남부의 중국인교회를 대상으로 부흥회를 하면서 교회를 견고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태국교회가 부흥하는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 태국인 교회는 자기 건물도 없었다. 건물이 없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 헌금으로 지어진 예배당이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국인들이 태국인의 힘으로 예배당을 세운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의 중국인 교회들이 건물을 가지고 있었고 많이 모였다. 그러다가 7,80년도에 태국인교회가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WEC선교부는 딱(Tak),수코타이등 북부의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 전통적으로 미전도종족에 관심이 많은 단체로 카렌족등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많이 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접에 들면서 서양선교사들은 지역분할의 개념을 없애고 자유롭게 사역하는 것을 방향을 잡았다.

1828년에 개신교가 들어왔는데 선교사도 동북부(이산)지역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버려진 땅이 되었다. 이산 지역이 원래 라오스의 땅이었다가 이후 태국 땅이 된 이후에는 태국인을 조금씩 이주 시키고, 태국식 교육을 시키면서 왕을 섬기게 하고, 정치적으로 라오스인들은 그 지역에서만 살게 하니 결과적으로는 사회 계층에서 더 낮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산지역이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 되었다. 지금은 그들이 한국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방콕에서는 뚝뚝이 운전기사, 공장 노동자로, 가정부로 험한 일들을 하고 있다.

1929년도에 C&MA가 CCT의 허락을 받고 사역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도로가 없어서 초기 선교사들이 엄청 고생했다. 그리고 이산은 불교가 제일 강한 지역이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쫄라롱꼰 왕(라마 5세)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배경 중에는 그의 아버지 몽꿋 왕(라마 4세)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가 기초를 많이 다져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몽꿋 왕은 태국의 불교를 상당히 개혁했다. 보통 태국의 절에 가면 도깨비, 귀신 등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당시 몽꿋 왕은 이런 불교가 지금 정부를 지켜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종단이 있는데 탐마윳, 쉽게 얘기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살자’는 종단이 등장하게 되었다. 몽꿋 왕 때부터 개혁이 시작되어 불교와 왕실이 네트워크가 강화된 시스템으로 간 것이다. 그것을 안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국인들에게는 왕이 하나님이다. 이 일도 아마 몽꿋이 했을 것이다.

태국의 북부지역에 맥길버리 선교사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선교사 숫자가 많지 않았다. 태국 북부에 부흥이 일어나니 학교를 세우는 정책이 나왔을 것이다. 태국 북부에 가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기독교 학교가 많았었다.

학교를 세우려면 교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학교를 세우면 그 학교 일꾼이 교회에서 와야 하는데 거기에 걸 맞는 배운 사람들이 없었다. 내가 방콕에 있을 때 잘 아는 기독교학교 교목이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교장을 세우려니 하니 크리스천 중에는 교육대학을 나오고 교사 경험을 한 교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교장에 걸 맞는 지식을 갖춘 현지인이 없다는 이야기다. 방콕 크리스천 칼리지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학교 교사 가운데 크리스천 교사가 절반 이하인 것이다. 학교 명칭은 기독교 학교인데 교사는 불교인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의 문제이다.

건물은 있는데 불교도나 혹은 우리가 세속화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실력인 것이다. 그런데 운영은 해야 하니까 거기에 누굴 앉히겠나? 운영자들은 학교가 문 닫으면 안 되니까 실력 없는 크리스천 보다는 운영 잘하는 사람을 앉힌다. 크리스천 학교라서 조회 시간에 불경 외우기 등 같은 행위는 안하지만 교사들을 통해 아이들이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불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 외에는 길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태국 사람들은 예수 외에도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본 시티 필러(city pillar)

Q. 우본이 가지는 특징을 설명해 주신다면?
A. ‘우본’은 ‘수련, 연꽃’이라는 뜻이다. 즉 물위에 핀 꽃이라는 뜻이다. ‘라차타니’는 왕궁이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굉장히 이름난 도시, 고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50년도에 몽꿋 왕이 여기에다가 라오스의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사원을 세웠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또 예로부터 워낙 사원이 많은 도시이고 특히 산림 명상원들이 곳곳에 많다. 왓 빠 나나찻에 가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잘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가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본은 태국에서 10위 도시였다. 이산에서 제일 큰 도시는 코랏이다. 이곳은 한 때 군사도시였으며 지금도 코랏은 경제적으로 대단한 도시이다. 그 다음으로 우본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경제 상황이 우위니까 컨캔이 앞선다고 볼 수 있겠다. 도로가 라오스의 비엔티안으로 먼저 뚫려서 빨리 발전한다. 지금은 우돈타니보다 순위가 뒤로 밀렸다.

시사켓 카오 프라 비함(Khao Phara Viham), 출처: 태국정부관광청

경제발전이 더딘 이유 중에 하나가 캄보디아와의 국토분쟁이다. 태국명으로 ‘카오 프라 위한(Khao Phara Viham)’이라는 땅 문제가 해결이 안되어서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되면 많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본은 치강과 문강이 합쳐지는 지역이라 물이 풍성하고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적고, 기차역과 비행장이 있는 곳으로 개인적으로는 캄보디아와의 문제만 해결되면 여기는 관광지로 뜰 확률이 높다. 여기 보면 캄보디아에서부터 이어진 산맥(Dângrêk)이 있는데 수린을 시작으로 우본 라차타니까지 이어진다.

이 산맥을 끼고 태국 쪽에는 국립공원이 있고 캄보디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프레아 비헤이어(Preah Vihear) 사원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 지역을 어떻게든 개발하려고 하고 있다.

2019년 8월 프라까루나 우본 교회

Q. 앞으로 태국 선교가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글쎄, 나도 태국 전체를 못 보고 우본에 있는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다. 태국 선교도 결국은 한국 교회의 선교문제이지 않나. 예를 들어 선교사들이 노령화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적어도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들어오시니까 언어 공부하고 한 텀만 마치면 40, 50대 되버린다. 그러면 지방으로 가기가 힘들어진다. 왜냐면 자녀가 중고등학생 되면 교육 문제가 부모한테 걸리기 때문에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자녀의 문제가 걸리니까 나도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 본부 쪽에서 선교사를 찾아서 보내주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못한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현실에 부딪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태국 선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꾸로 얘기를 해서 내가 일하는 사역장에서 현지인 사역자를 빨리 세워 나가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여기 선교현장의 토양이 한국같이 빨리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여기는 믿는 것은 쉽다. 믿으라고 하면 믿겠다고 하는데 믿는 것에는 온도차이가 있다.

그리고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선교사는 Volunteer 같이 생각하니까 ‘무언가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되도록 그런 인식을 바꿔주려고 노력하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왜냐하면 선교사가 복음으로 살고 이 사람들이 교회개척을 경험해 봐야 되기 때문이다. 예배당을 세워 놓고 와서 앉으라고 하면 이들은 다른 사람이 오더라도 예배당 세워놓은데 가서 일하려고 하고 자기는 자리에 앉아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메시지도 이 사람들에게 맞게 처음부터 어렵지 않고 쉽게 해 주면서 들어가야 되지, 그냥 한국에서 하듯이 어렵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세우는 문제도 맨 처음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1년, 2년 지나 봐야 아는 것처럼 현지 사역자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시간이 걸린다. 때로는 마음에 들던 사람도 떠나고…이런 것들이 현지에서 부딪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프라까루나 와린교회 지난 부활절 예배 후

태국이 200년 가까이 선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립도 안 되고 태국 현지인 사역자들도 헤매고 있는 어려운 현실의 가장 큰 원인은 영적인 감화가 없다는 것이다. 영적인 감화라는 것은 말씀 속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나오는 것인데 현지인 사역자 가운데 부흥이 없다는 것은 곧 말씀의 부흥이 없다는 것이다.

목사든 평신도든지 말씀으로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이 와서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교회든 캠퍼스에서든지 그 가운데에서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들이 또 사람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성이 깊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고민이다. 왜냐하면 이게 영성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국 사역자들도 한국 선교사들에게 본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목회를 잘하는데 선교사들은 여기서는 왜 잘 못하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다. 문제를 진단해서 조언을 하면 선교사들이 한 번 해보고 우리한테 보여 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토양이 다른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선 사람이 한국 사역자 가운데서 있느냐의 문제다. 그게 우리 선교사에게 부딪히는 직접적인 고난이다. 우리가 해보지만 이게 만만치가 않은 일이다. 나도 교회 개척을 하고 있지만 헤매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보면 선배 선교사님들은 훌륭했다. 그분들 때문에 신학교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났다. 그리고 후배들이 그 선배 선교사들의 본을 따라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 된다. 중간 선배로서 나는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본을 보일 것인가 그 문제가 항상 걸리는 문제다.  정리 | 채형림(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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