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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삶으로 복음이 전해지길 소망하는 박다니엘 선교사

업마가 만난 사람
D·I·G·I·T·A·L JOURNAL 21 2020. 4

Q.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A. 박다니엘, 아내는 권사라 선교사이다. 아이들은 4세부터 17세까지 4남매를 두고 있다. 2000년 초부터 O국에서 일하다가 평신도 선교사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파송 받았다.

Q. 처음 O국으로 들어갔던 2000년대 초의 상황과 이후 선교 상황은 어떻게 변화되었나?
A. 2000년에는 대사관 파악 교민 수가 80여명이었다. 대사관 직원, 선교사 몇 사람만 빼고는 대부분이 경제사범이었는데, 당시 O국과 한국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던 상황이라 잡히더라도 돈만 주면 풀려나니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O국으로 야반도주해왔다. O국은 그 당시에도 기독교 박해지수 상위권 국가로, 선교사님들이 많이 추방당했고 북쪽과 남쪽에서는 교역자들이 살해를 당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교회는 O국에서 인정받은 현지교회 3곳과 외국인교회 1곳, 허가받지 않고 NGO사무실 한쪽을 사용하던 한인교회 1곳이 있었다. 그중 언어훈련이 끝나고 갔던 외국인교회에서는 어느 싱가포르인 선교사님이 추방당하시는 것을 보기도 했다. ‘24시간 내 추방 명령’을 받고 다른 국가로 넘어가시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무슨 나라냐’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시아권에서 온 선교사는 조금 여유를 두고 보는 반면, 특별히 서구권에서 온 분들의 경우 제자훈련을 한다 싶으면 내란음모나 스파이죄로 몰려 추방 1순위가 되었다. 2002년에도 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독일 의사분과 결혼한 한국여자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한밤중에 경찰들이 찾아와서 마룻바닥까지 뜯어보며 독일어든 한국어든 성경책만 나오면 바로 추방한다며 떠나라고 했다고 한다. 기아대책도 지금은 다시 들어가 있지만 99년도에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1년도 채 안되어 추방당했는데 그때 상황은 정말 살얼음판이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 상황도 여전하다. 호주 남편분과 학원을 하시는 한국분이 계시는데 경찰이 두 번 왔다갔다고 하신다. 경찰이 왔다는 건 이미 조사가 다 끝나고 대질신문하러 온 것이기에 상황이 조금 어려울 것 같다. 매년 한 분 정도 추방 당하는데 꼭 선교를 해서라기보다는 O국과의 관계성 때문인 것도 있다.

Q. 변화된 점이나, 반대로 개방된 것 같지만 동일한 것은 무엇인가?
A. 지금까지는 한국 선교사들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선교사들이야 O국 정부 관점에는 민족 간 내전에 미국의 개입이 컸고 그 다리 역할을 미국 선교사들이 했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화 된 소수종족은 미국에 세뇌된 사람들이고 그들의 지도자는 미국 선교사들이라고 간주했다. 선교사로 인해 그들이 다 적군이 되어 자기들의 등을 찌른 사람들이다보니 그들과 다시 만나는 서양 선교사들은 추방 1순위였던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관망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우선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 생활비나 사역비로 적지 않은 자금이 들어오고, 자국에 유익한 사업들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O국은 주류종족에 대한 선교는 매우 경계하는 반면 소수종족에 대해서는 비교적 느슨한 편인데, 한국 선교사들은 주로 소수종족 사역을 하고 있고, 이러한 소수종족들은 체제 전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인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재작년까지 단기팀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분위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작년부터 한국 사람이 사역을 시작하면 한국어 잘하는 O국 사람이 와서 두 가지를 물어본다고 한다. 첫째로 선교사인지, 둘째로 앞으로 선교활동을 할 마음이 있는지. 대답한 것을 자료로 남겨놓고 거기서 ‘예’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나중에 정부 각처로 서류가 들어가서 불이익도 있게 된다.

겉으로만 봤을 때는 O국이 많이 열렸다고 하지만 통제는 훨씬 더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한 번 추방되어도 전산 시스템이 잘 안되어 있어서 다른 루트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IT 지원 사업을 하면서, 얼굴인식 시스템 구축에 도움을 주어서 그 덕에 이제 선교사들이 한 번 추방당하면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Q. 그럼 선교사들은 O국 정부에 다 감시대상에 들어가 계신가?
A. 그렇다. 2000년에 들어왔을 때 혼자 살았는데, 2주에 한 번씩 동네에 반상회가 열렸다. 그래서 집주인 아저씨에게 어디 가는지, 왜 이렇게 반상회를 자주 하는지 물어봤는데 “응 네 얘기하는 거야.”라고 해서, 농담인줄 알았는데 마을 안에 외국인이 들어오면 그렇게 모여서 한마디씩 하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안하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그 체제가 유지는 되는 것 같다.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시내에서도 O국 사람들이 항상 보고 다닌다. 2년 동안 O국 회사에서 일했을 때도 처음 한 달 동안 출근을 못했다. 직원들이 나를 감시해야하는데 출장과 집안일로 바쁘니까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파송 받아 와서는 NGO사역을 하며 무료 교육 센터를 열었는데 항상 경찰이 와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필기하기에 열심히 수업을 듣는 줄 알았는데, 시험을 보면 점수가 안 나왔다. 1년 쯤 지나서야 그렇게 다 감시해서, 예수의 ‘예’자도 말을 못하게끔 만드는 시스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어려웠다.

Q. 그러한 O국 상황 속에서 부르신 삶에 대해 어떻게 직면하셨는지.
A. 2005년쯤에 옆집 사는 아줌마가 우리 모습이 보기 좋다며 자기도 교회에 가고 싶다고 찾아와서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O국 기독교 박해율이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전도는 못하기 때문에 접촉점을 찾기 위한 한 방편으로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딸과 함께 온 엄마가 우리 집에 있던 현지어 성경책을 읽다가 기회가 되어서 예수님을 전하고 영접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두 명씩 모여 8명 정도가 매주 현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유리 상자 안에 있는 것 같은 갑갑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우리를 통로로 쓰시고 계시구나.’라고 생각하며 감사했다. 그러면서 NGO사역도 잘 진행되고, O국 선교사 협의회에서의 역할도 잘 감당하면서 모든 것들이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평신도였기 때문에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잘 세워가는 충성스러운 장로, 권사, 집사를 세우는 것이 최고의 사역이고 큰 열매라고 생각했다. 직업훈련 사업도 계획하고 있었는데, 시내에는 인쇄소, 미용실,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고 외지에는 직업훈련원을 세워서 산학 협력으로 현지인을 세워나가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온 여선지자라는 분이 현지교회를 돌아다니며 레위기 말씀을 전하는데 거기서 장풍을 쏘면 사람들이 다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니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넘어가는 것이었다.

같이 예배를 드리던 현지인이 그것을 보고 “이것이 옳은 거냐?”라는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그 말에 무엇인가 정확한 답을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일주일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집에 가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선교는 무엇인가? 그 나라에 제대로 된 성경을 해석해줘서 그들이 바른 진리를 갖고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진짜 선교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해석해 주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팀 사역을 하면서 새벽예배 설교도 해보긴 했지만 내 안에 어떤 기준이 없어서 이게 옳은지 되묻곤 했다. 다른 선교사들과 이런 고민을 나눴더니 그게 바로 ‘신학’이라고 하시면서, ‘합신(편집자주:합동신학대학원)’을 추천해주셨다. 그때 O국에 진짜 필요한 것은 바른 신학을 공부해서 제자훈련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함께 교회를 다녔던 8명 중에는 8살 아이부터 60살 할머니까지 다양한 형편과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이게 교회더라. 교회는 사역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가 크리스천의 삶으로 살아내도록 가르쳐줘야 하는데, 당시 저는 그렇게 할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정말 목회가 무엇인지,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서 5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사실 5년 후에는 성경이 막 꿰뚫어지고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5년이 훨씬 지나도 아무 것도 모르겠더라.^^

그렇게 신학을 배우고 시간이 흘러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님과 함께 청년들을 데리고 O국으로 단기선교를 갔고, 다시 그로부터 5년 후에 O국으로 파송 받아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담임목사님께서 한사람이라도 꾸준하게 만나서 그 삶을 잘 세워가라고, 1년에 한 사람 만난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잘 살기만 하라고 하셨다. 당신께서 보신 O국은 내실을 기하려면 조용히, 선교사인 것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우리 가정이 O국으로 돌아와서는 이미 많은 현지인이 우리에 대해 알고 우리가 무엇인가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서 처음에는 조용히 언어공부만 했다.

Q. 그렇게 신학하고, 다시 O국으로 돌아가서의 사역은 어떻게 변화되었나?
A. 합신에서 신학하기 전 사역은 내 중심이었다. 내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하고, 현지인은 그 일을 위한 직원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만나도 일로서만 만나게 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는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여러 사역에 대한 요청이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이전에는 굉장히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는데, 다시 와서는 집에만 있으니까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예전에 했던 무료 교육 센터에 가봤는데, 폐건물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을 보는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건물이나 일이 사람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시며, 다시 한 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임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O국으로 다시 들어갈 때 출구전략에 대해 생각했었다. 내가 진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현지인을 세워서 동역의 관계로 나가며 현지인의 사역이 되도록 세워주는 사역. 먼저 앞장서게끔 해주고 본인이 결정하게 하지 않으면, 내 출구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계속 기도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 언어공부를 하고 있을 때 언어교사로 소개받은 형제가 마침 크리스천이었다. 이 형제는 기도하며 사역을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이 형제와 성경용어 공부를 계속 하고 있다.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지게 될 때쯤, 이 형제네 마을에서 한 여자아이가 담장이 없는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다가 죽는 일이 있었다. 부모는 그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 일로 학교 담장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학교에 돈을 보냈지만 금액이 충분치 않아서 진행이 안 되고 있었다.

그동안 형제와 함께 마을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형제가 마을에 대한 소망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제가 섬기는 현지교회를 통해 담장 세우는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형제가 직접 학교를 찾아가고 필요한 물품들도 구매하며 준비했고, 나는 한국의 단기팀을 통해 필요한 재정을 마련했다.

단기팀이 와서도 현지교회에서 하는 일을 박수쳐주는 역할만 하고 같이 복음을 전하는 활동만 했다. 그 일로 이 형제가 동네에서 나름 유명해지게 되었고 후에는 마약하거나 학교를 중퇴한 애들을 데리고 축구교실을 진행하면서 더욱 마을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이 형제가 한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을 더러 만났는데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다른 선교사들은 본인이 뭔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필요한 현지인들 데려다가 일을 시키는데 너는 처음부터 내 등을 떠 밀어서 내가 스스로 사역을 하게 했다. 이제 나는 이 일이 내 사역이라고 믿는다. 당신이 없더라도 나는 이 사역을 계속 할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당장 추방당하거나 죽어도 내가 만난 사람이 자기 사역을 해 나가는 것. 3년 동안 이렇게 너 한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라고 그 친구에게 고백했다. 지금 이 형제는 자기 마을을 포함한 3개 마을의 중심이 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전에는 어려운 가운데 예수 믿고 사는게 귀하고 대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형제를 통해 현지교회의 내부 사정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더 기도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Q. 외국인이 O국에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
A. 사업이나 NGO 비자가 있다면 거주 할 수 있다. 혹은 학교나 정부의 정식 비자를 발급받으면 된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서 거주가 가능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감시 체제가 작동된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현재 연결된 학교에서 비자가 나오는데 만약 다른 지방으로 갈 경우, 학교의 분교처럼 독립해서 나갈 수 있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은 가능하지만 거주를 옮기는 경우에는 바로 비자를 확인하게 되어 있고, 만약 행정적인 서류 처리가 안 되어 있으면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Q. 여행객이 방문해서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은가?
A. 한 두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지만 5-6명 이상이 다니면 사복경찰이 와서 비자 검사를 하게 된다. 만약 차를 렌트할 경우, 반드시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 가이드 자격증이 없는 사람과 다닐 경우에는 위법이다. 단체관광하시는 분들은 여행사에서 정부에게 여행계획서를 허가 받고 하는 것이다.

Q. O국 교단은 지역적으로 구분이 되어 있나 아니면 종족별로 되어 있나?
A. 정부에서 인정하는 교단은 단 하나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 된 O국, 하나 된 기독교’로서 O국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 인접국에 걸쳐 있는 일부 소수종족 교회가 있지만, 정부에서는 공식 교단만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도 이 교단에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요즘은 북쪽의 감리교가 거의 분리된 상태가 되어 가고 있다. 대체로 감리교는 더 독립적인 느낌이지만 마찬가지로 중심 되는 교회들은 이 교단에 대부분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Q. 기독교는 O국내에서 어떤 종교인가?
A. O국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여전히 외국 종교이고, 자신들이 결국 마지막에 돌아갈 곳은 불교라고 생각한다. 현지 교회 목사도 선교사들이 세웠기 때문에 선교사의 직원이라고 생각해서 성도들이 목사에게 사례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의 단면이 얼마 전 O국에서 가장 큰 교회에 화재가 난 적이 있는데, 재건비로 50%를 선교사들이 부담하고 나머지 50%를 현지교회와 성도들이 부담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불교 절에서도 화재가 났는데 O국 사람들이 스스로 100% 돈을 부담해 이전보다 훨씬 더 웅장한 절을 지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니, 절은 자기와 가족들이 묻힐 곳이니 대출을 받아서라도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도 공동묘지가 있지만 그 역시도 ‘외국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Q. 기도제목이 있다면?
(1) 매일의 삶 속에 예배자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과 현지인들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셔서, 만난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데(골1:26)에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2) 계속되는 언어공부, 컴퓨터 교육, 성가대 조직, 찬양집 제작, O어 성경공부, 교사 예배를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을 세워가도록
(3) S형제와 가족들이 지속적으로 NK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예배당이 세워지게 하시고, S형제가 사역자로 잘 세워져서 NK마을 교회를 세워서 인근 3개 마을을 전도하고 사람들을 세워가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4) 찬양영상 제작을 위한 장비들이 준비되게 하시고, 이 일을 통해 O국 전역에 동일한 찬양을 부르는 은혜를 보도록
(5) 어려움 속에서도 후원하는 교회와 가정과 동역자들을 안전하게 지키시며 피차간에 은혜의 소식을 나누도록
(6) 첫째(18), 둘째(15), 셋째(11), 넷째(5) 자녀들이 있는데, 첫째가 한국 나이로 고3이 되어 대학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둘째가 사춘기가 되어서 자기가 형제들 사이에서 피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한다. 양보가 없고 자기 것을 얻으려고 끝까지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 다뤄지도록, 자녀들과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고 안전할 수 있도록  인터뷰 정리 | 황혜진

※ O국은 선교 보안지역으로 지명 등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박다니엘, 권사라 선교사 가정을 후원, 동역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저희 UPMA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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