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Overlay

태국의 무슬림 복음화를 위한 도전

CAS 디스커버리
D·I·G·I·T·A·L JOURNAL 21호 2020. 4

필자는 태국의 무슬림사역자로 지난 2006년 3월에 태국에 입국했다. 이 글은 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복음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의 태국 내 무슬림들을 향한 선교적 도전이 일어나기 원하는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보편적으로 무슬림 사역자들은 보안을 문제로 자신의 사역을 가능한 오픈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타 단체나 사역자들의 이야기 보다는 필자의 소망과 사역을 나누는 것에 더 집중하였다.

1. 태국 무슬림의 유래
A. 태국에 이슬람이 전래된 것은 11세기 또는 13세기라고 보는데, 전쟁시 용병 혹은 재력가, 종교 지도자로 들어오거나 무역하는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특히 상인들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다양한 경로가 이용되었는데, 아랍의 부유한 상인들은 주로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일부는 지역의 여성들과 결혼하여 아랍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역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자연히 이들의 영향을 받아 무슬림이 전파되었다.

이렇게 무슬림이 된 이들은 주로 힌두교나 불교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던 사람들이거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이러한 이슬람의 수용은 지속적으로 진행 되었다.(1)  이미 수코타이 왕조 람캄행 대왕시대에 수코타이 시내에 이슬람 시장이 여러 곳에 세워져 상인들과 머물 집들이 있었다.(2)

B. 태국이 최초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곳은 주로 최남단 국경지역의 빠따니 지역이다.(3) 그 시기는 일반적으로 불기 약 1,800년(서기 약 1,200년) 수코타이가 세워지기 전으로 주요 이슬람 전파 경로인 말레이 반도나 인도네시아에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었기 때문에,(4) 중국 남부에서 태국인이 이주하기 전에 이미 이 지역에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태국의 무슬림은 이주가 아니라, 기존 토착민이 외부에서 전래된 이슬람을 수용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수코타이 왕국 당시에 빠따니는 나콘 시 탐마랏의(5) 관할 하에 있어서 3년 마다 조공을 바쳐야 했고, 만약 이를 어기면 군대에 의해 징벌을 당했다.

14세기 후반에는 말라카 지역의 무슬림들이 빠따니 지역으로 이주했고, 이후 이들은 태국 내 다른 여러 짱왓(도)들에 지속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여 16세기에는 나콘 시 탐마랏까지 이르게 되었다.(6) 빠따니 지역은 불기 2449년(서기 1906년) 라마 5세 때 짱왓을 7개에서 4개로 개편하고, 불기 2476년(서기1933년) 3개의 짱왓으로 나누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코타이 역사 공원, 출처 wikipedia

2. 태국 내 무슬림의 종족별 분류 및 지역별 분류(7)
A. 현재 태국 무슬림은 여러 종족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주해 왔다.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첫 째는 바닷길이다. 아랍 상인들이 인도양을 거쳐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을 통해 말레이 반도로 태국 남부에 들어온 경로이고, 둘째는 육로를 이용하여 중국 서남쪽을 통해 태국으로 유입된 경로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태국에 들어온 무슬림들은 다양한 여러 종족들이 있었다. 첫 번째 가장 큰 그룹은 앞서 언급했던 말레이 반도 내의 말라유 혹은 말레이족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페르시아계이고, 세 번째는 자바족이고 네 번째는 크메르 짬족이고, 다섯 번째는 남아시아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카니스탄 등)이고, 마지막으로는 중국계 무슬림들이다.

말라카(Malacca City), 출처 wikipedia

B. 말라유 혹은 말레이족
태국 내 무슬림들 중 가장 큰 종족그룹인 말라유 혹은 말레이족은 주로 남부국경 지역 빠따니, 나라티왓, 얄라, 그리고 사뚠과 송클라지역에 살고 있다. 또 적지 않은 수가 끄라비와 팡아 그리고 푸켓에도 살고 있는데 오래전 고대 무역경로를 따라 얄라 인접의 현 말레이시아 지역 싸이부리(케다)에서 푸켓의 탈랑지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특히 아유타야 지역에는 라마 5세 때 이후 많은 말레이족들이 살고 있다. 그 외 나콘나욕, 차층싸오 지역에도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수도 방콕 내 톤부리, 씨옉반켁, 퉁카루, 프라쁘라뎅, 방커렘, 마하낙, 프라카농, 크렁딴, 민부리, 넝쩍 등지에 살고 있다.

C. 아랍계 페르시안, 이란족
수코타이 시대부터 태국에서 살게 된 아랍계 페르시안과 이란족 사람들은 상인으로 아유타야 시대, 라따나꼬씬시대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와서 남쪽에까지 퍼져 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시아파 사람들로 페르시아 사람들이라는 뜻의 무어인들 혹은 켁무어라 불렸다.

이들은 아유타야 왕조의 나레이수안 왕 때 시아파 이슬람 전파를 위해 처음 태국에 들어왔다. 쏭탐 왕 때는 정부의 조언자로, 기관의 수장으로, 또 수출입 관세담당으로, 해외무역선의 보호관찰 등으로 일하면서 태국 내에 이슬람을 전파했다. 이들은 주로 톤부리 지역 짜런팟에 거주하고 있다.

말레이족 커플, 출처 wikipedia

D. 자바족
인도네시아 자바지역은 수코타이 시대와 아유타야시대에도 태국과 교류가 있었던 지역이다. 라마 5세 때부터 태국의 노동비가 자바지역보다 3배나 비싸 자연스럽게 타이 반도에 흘러들어와 살게 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시에는 일본군에 잡혀와 철도건설에 동원되었다.

일본패전 후에도 이들은 고향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수도권지역(프라라차왕, 차나쏭크람, 방쿤펀홈, 쌈센, 두싯, 낭릉, 쁘라쩨찐, 반타와이, 싸톤, 방락, 파후랏, 쌈란랏 등)에는 말레이족 사람들에 비길 만큼 많은 수의 자바족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인도네시아 자바족 문화, 출처: wikipedia

E. 짬-크메르족
과거 짬족은 단일국가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종족적 분류로만 이해된다. 아유타야 왕조 카톳롯왕 때 베트남이 짬족 지역을 침공하면서 이슬람을 신앙하는 짬족 중 일부가 태국으로 피난오면서 자진하여 태국의 용병이 되었다. 그리고 아유타야가 미얀마(옛 버마)에 2번째 패했을 때 태국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라마 5세 때 그들의 고향을 떠나 짜런폰이라 불리는 클렁쎈쎕을 건설하기 위해 들어왔고, 같은 시대에 현재 싸문프라이로 유명한 당시 캄보디아(크메르)의 관리를 지낸 짜오프라야아파이푸벳 일족이 들어왔다. 이들은 라차테위반크루아 지역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국경지역인 뜨랏과 태국 남부의 수랏타니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F. 남아시아계
아유타야 시대에 인도계 상인들이 태국에 들어와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따나꼬신 라마 4세 때 서구열강에 개화하면서, 원활한 무역 목적의 영어 학습을 위해 인도,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의 무슬림들을 태국으로 초청했다.

그래서 방콕과 텝방락, 마하낫, 라차옹, 쌈쎈, 야와랏, 와라짝, 씰롬, 그리고 일부는 천을 팔기위해 지방으로 이주해 갔다. 태국 여인들과 결혼하여 주요 상인들이 되었고, 현재는 태국경제의 주요 요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핫야이 파키스탄 모스크의 파카스탄 무슬림

G. 중국 회족
주로 라마 5세 때부터 태국 북쪽국경을 통해 들어온 이들은 치앙라이, 람푼, 메홍손과 치앙마이 등지에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이 공산화될 때 순응하지 않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태국에 들어와 오랜 시간 살면서도 종교적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꾸란을 가르치며 이슬람 문화와 생활양식을 이어가고 있다.

이슬람 신앙의 종교적 관습 외에도 의복착용, 장례나 결혼풍습, 음식과 관련된 풍습, 대가족제도,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 부모가 없을 경우 가장 가까운 이가 돌보는 모습 등 일반 생활 관습에서도 그들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3. 방콕과 수도권 무슬림들의 (강제) 이주 역사(8)
A. 일명 말라유 꾸룽텝 혹은 무슬림 방콕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남부 출신의 선조들이 이주한 경우로서 아유타야, 톤부리, 라따나꼬씬시대를 거쳐 살게 되었다.

라마 1세 때(불기 2329년, 서기 1786년) 남부의 빠따니 지역에서 짜오프라야강 주변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리고 톤부리시대에 또 한 번 이주되었는데 이들은 켁까오(오랜 손님)라고 불렸다.

아유타야 왓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출처 wikipedia

B. 아유타야가 미얀마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빠따니 영주는 불기 2310년(서기 1767년) 말레이반도 내의 영주들과 나콘 시 탐마랏, 쏭클라, 파탈룽지역 영주들과 함께 톤부리왕조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다가 라마 1세 때 정벌당하여 중앙 정부는 빠따니지역 주민들을 사로잡아 수도권의 민부리지역과 넝쩍지역에 강제 이주시켰고, 라마 3세 때는 7개 지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당해서 톤부리 지역과 반쏨뎃, 수안파루, 끄라이키앙지역으로 강제이주 되었다.(9)

C. 예전부터 왕의 연대기에는 수도권 이외의 광범위한 지역을 쎈쎕이라 불렀으며 혹은 방콕의 오른쪽 지역을 퉁이라 불렀다.

농사를 짓기 위한 땅 프라메루와 싸남루앙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을 퉁파야타이라고 불렀고, 이외의 지역들은 퉁쌈센, 퉁방까삐, 퉁마하멕이라고 불렀다.

퉁쎈쎕과 퉁방까삐는 라따나꼬신 연대기 초기(10) 에 나타나는데, 프라밧쏨뎃 프라낭끄라오짜오유후아 시대(라마3세) 때인 불기 2369년(서기 1826년)에 싸라부리의 짜오아누위앙짠의 반역으로 인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군사들을 데려와서 퉁우와람펑에서부터 퉁방까삐까지 방어진을 치게 하였다.

이들은 짬족 무슬림들로 이후에 클렁방까비, 쎈쎕지역에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기르며 머물러 살게 하였다.(11)

이 지역은 농사짓는 것 외에는 어느 것에도 적당치 않는 황폐한 땅이었다. 라마 1세 때 쎈쎕은 반크루아를 지나 굽어졌다가 자연스레 넓어지는 클렁딴지역 후아막까지의 모양을 따라 북 쎈쎕과 남 쎈쎕으로 구분해서 명명했다. 왕의 연대기에 라마 3세는 쭐라싹까랏 1199년(불기 2380년 12월)에 클렁 쎈쎕을 남 쎈쎕과 북 쎈쎕으로 나누었고, 남 쎈쎕은 언제 마쳤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라마 1세 때 자원 용병인 짬족과 빠따니 말라유 사람들을 통해 남 쎈쎕을 팠다고 기록되어 있다.(12) 

D. 북 쎈쎕은 후아막에서부터 미부리, 넝쩍, 방카낙을 지나 방빠꽁으로 흘러가는데 하천 공사를 중국 사람들에게 맡기려 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라마 1세 때와 라마 3세 때에 북 쎈쎕 구간을 빠따니 말라유 농부들을 이주시켜 강제노역을 시켰다. 클렁 마하낙에서부터 남 쎈쎕, 북 쎈쎕을 지나 방빠꽁 강에 이르는 73.8km의 구간을 크메르 족과 말라유 빠따니 사람들이 전쟁포로 신분으로 변변한 작업 도구도 없이 하천을 파는 노역을 하였다.

비록 북 쎈쎕 구간을 중국 사람들에게 하청으로 주었지만 이들 무슬림들은 무임금으로 가장 일하기 힘든 강 밑바닥에서 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그들 중 하천 공사를 다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착한 이들이 그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게 된 것이다.(13)

방콕 근교 민부리지역

E. 라마 3세 때에 말레유 말레이 무슬림족 수천, 수만 지역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에 차층싸오, 나컨나욕 외의 지역에도 무슬림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크루아 지역과 클렁마하낙에서 북 쎈쎕으로도 강제이주가 이루어졌고, 이들은 오랜 기간 야생 숲 지대를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고 마스지드(이슬람 사원)와 묘지, 학교 등을 세우며 지역사회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노력 후에 개간한 지역 내에서 땅과 많은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 이들은 논타부리(반타잍, 땀본빡끄렛, 땀본방부아등)와 빠툼타니(클렁, 클렁루앙, 반수안프릭타이) 그리고 싸뭇쁘라깐(퉁쿠루, 방못, 빡끄랏, 방콕 내 프라쁘라뎅 등) 등지로도 강제이주 되었고, 일부 말라유 말레이족 무슬림들은 살길을 찾아 촌부리와 라영, 짠타부리, 뜨랏 등지로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짜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출처 wikipedia

F. 태국 전체 인구 약 6,900만 명 중 약 10%(14)는 무슬림들은 이제 거의 태국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아유타야 시대나 라마 1세, 라마 3세 때 강제노역으로 이주된 무슬림들도 많지만, 이제는 시대변화에 따라 수도권 지역이 발전되면서 더 좋은 학업과 직장을 얻고자 이주하는 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현재 태국 내 마스지드와 종교학교 뽄독(말라유)은 4,400개(마스지드 3,658개소, 종교학교 742개소)이며, 방콕(175, 30)과 빠툼타니(30, 21), 논타부리(19, 21), 싸뭇쁘라깐(12, 15), 차층싸오(65, 25)등 수도권의 마스지드과 종교학교 뽄독은 전체 413(301, 112)개소이다.(15)

G. 수도권 지역 무슬림 급증의 또 다른 요인은 불안정한 남부의 상황을 뒤로하고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온건한 무슬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남부지역의 무장봉기 사건은 무슬림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고, 이로 인해 태국 남부는 무장군인들의 감시 속에서도 여전히 폭탄테러와 총기테러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수도권으로 이주가 왕성하게 되었다.(16)

H. 이들을 향한 복음전도의 노력은 근래 조금씩 눈에 띄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무슬림이 75% 이상 거주하는 C지역에 주요 교단의 교회들이 개척되고, 사역하는 것을 보고 있으나 실제 이들의 주된 사역대상은 여전히 불교도들이다.

그러나 특기할 것은 지역의 특성상 무슬림들이 ¾ 이상 되는 지역이므로 자연히 크리스천 주위에 있는 무슬림 이웃들의 어려움을 이웃과 친구로서 함께 기도하고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믿음이 전해지게 되는 일들이 목격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4. 필자의 사역 현장이야기
A. 현재 태국에서 무슬림을 섬기는 한인 선교단체는 필자가 속한 단체를 포함하여 3개 단체의 약 8개 가정 정도 일하고 있지만 지역적으로는 수도권에 2가정 외에 모두 남부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 중 2가정은 필자가 속한 단체 소속이다.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대부분 일반적인 무슬림 사역자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과 절차를 따르고 있다. 가령, 비즈니스사역, 언어센터, 지역개발사역, 친구관계를 통한 우정전도, 매스컴 사용 등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태국 무슬림 선교사님 한 분은 언어교육을 통해 사역의 발판을 마련하고 우정관계를 바탕으로 꾸란과 성경의 비교 공부를 통한 정확한 복음 전달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B. 태국 중부 무슬림 사역은 지난 1995년 이들을 섬기기 위해 입국한 임스데반 선교사를 통해 처음 사역이 시작되었고, 스포츠, 언어, 발마사지, 지역주민 돕기 등 다양한 관계형성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태국 교회내의 R선교사(국제단체에 소속하여 15년 선교사역 경험으로 태국교회의 선교를 주도함)와 협력하여 성경번역과 태국교회를 무슬림사역에 동역하도록 돕는 귀한 사역을 진행했다.

같은 사역을 위해 2006년 3월에 입국한 필자의 가정도 역시 언어과정을 마친 후 무슬림 마을에 집을 얻고, 회심자 T자매와 함께 생활하기도 했고, 개인 전방개척사역으로 집으로 초대하거나 함께 놀이를 가거나 음식을 나누는 등 다양하게 친구관계로 발전시켜 복음을 전하였고(N과 그의 친구들 E, A, F와 친구, S가정 등) 스포츠 교사와 관련 물품판매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역 청소년들에게 복음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SI, ME, SA, BA, MA, BE, VI, PI, TO, IS, IN 등).

스포츠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신분과 정체성은 어디에서든 자연스럽게 무슬림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사역이 가능한 지역이라면 스스럼없이 저들의 회당에 찾아가 신분을 소개하고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주변의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거나, 혹은 언어가 부족하니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SR이라는 친구는 스포츠 사역하는 마을의 회당에 가서 언어 도움을 위한 언어교사로 만나게 된 쏭클라 지역 출신 형제이다. 근 3년 가까이 만나며 SR형제는 필자와 함께 외부에서 주 2회씩, SR의 부인 T자매는 저희 가정의 아이들 태국어 지도를 명목으로 매주 한 차례씩 집으로 오게 하였다.

T자매에게는 특별히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웠지만, SR형제 가정과 좋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고, SR형제에게는 깊은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록 복음에 반응하지는 않았고, 재정 문제가 얽히면서 관계가 소원해져서 다른 평화의 사람을 찾게 되었다.

C. 지난 2010년 첫 안식년 기간 동안 지난 사역을 점검해 보면서 다음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1) 스포츠를 매개로한 방법보다는 개인 전방개척사역으로 복음을 전한 사례가 더 많았고 더 깊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2) 수도권의 무슬림들은 이미 250여년을 다수 불교도들과 함께 수도권에 살고 있으므로 태국 문화적인 특성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불교권의 전도방식이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다른 선교사님들을 통해 주변의 불교도들 역시 복음을 접했던 이전 경험 속에 현재의 회심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D. 그래서 이후로는 스포츠사역의 비중을 낮추고 무슬림들에게 적극적인 복음 전파에 집중하게 되었다. 방법을 고심하던 중에 최근 몇 년간 무슬림 인구 유입이 가장 많은 지역인 C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하신 W단체 Y선교사님과 함께 C지역 내 마을과 마을을 다니면서 약 1년 6개월 이상 전도지를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비즈니스 사역 선교사님과 협력하여 성경공부를 의무사항으로 하는 4개의 미니 소그룹을 만들어 매주 1, 2차례 만나게 되었다(TY, RN, RY, SB, GR, DA 등).

E. C지역의 SM 아주머니는 처음엔 거리에서 만나다가 라마단 기간을 계기로 아주머니 댁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무슬림용 전도책자인 ‘낙타 전도법’과 무슬림용 ‘누가복음’(현재 태국 무슬림용으로 완역된 성경이 없이 쪽 복음만 몇 권 있는 상황이다.)을 브리스길라 선생과 매 주일 정량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등 복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통해 복음에 반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상복부 위암의 병세로 암 판정을 받고 불과 두 달여 만에 소천 하였다. 소천 하시기 얼마 전에 SM 아주머니가 간병을 받고 있는 그녀의 오빠 집에 찾아가 저희가 미리 준비한 MP4 플레이어에 누가복음 음성화일과 이싸(예수)의 하나님의 꾸르반(희생제물)되심을 영상화한 무슬림용 전도영상을 전해주며 SM 아주머니에게 평안을 주시도록 그리고 전해주는 플레이어가 온 집안에 계속 보여 지고 들려져서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도록 기도해 드렸다.

집안 식구들 모두가 외국인이 자기 집을 방문한 것에 놀라며 지켜보는 가운데 저희 부부가 함께 손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 드릴 때 조용히 함께 기도하며 아멘으로 받는 SM 아주머니의 복음에 대한 반응과 수용을 통해 우리는 SM 아주머니께서는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믿는다.

아주머니의 소천 후 잠시 소원해졌었으나 최근에 휴대와 설치가 간편한 정수기를 공급받아 MI 아저씨 댁에 설치하고, 올 해부터 교육센터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아저씨 댁에 큰 손주에게도 혜택을 주면서 MI아저씨와 마을 내 종교지도자와 주민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며 안부와 근황을 나누며 복음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중이다.

F.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그룹 사역을 진행하던 중 비즈니스사역 선교사님이 사업을 포기하고 더 이상 미니 소그룹을 운영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전도하던 C지역에 적합한 장소를 주셔서 교육센터를 오픈하여 약 4년여 동안 진행하고 있다.

C지역 내 교육센터는 초기에 같은 단체소속 2분 선교사님 가정과 함께 연합하여 언어사역에 집중하였고, 이후 마침 태국 무슬림사역에 헌신한 미국인 D선교사와 연합할 수 있어서 현재는 영어, 한국어, 기타, 피아노, 스포츠 등 다양한 교육의 창구를 통해 이웃 무슬림들을 만나고 각자 자기반에서 만나는 무슬림학생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려 노력하고 있다.

한류 열풍을 힘입어 센터 내에서 ‘한국의 문화와 풍속을 소개하고 경험하게 하는’ 행사도 진행하면서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있다. 초기엔 무슬림들의 참여율이 낮았으나 만 3년을 지나면서 전체 약 7~80여명의 청소년 학생들 중 50% 이상의 무슬림 청소년들의 참여율이 나타나고 있다.

G. 그간의 사역을 돌아보면, 초기사역 5~6년간을 보안사역, 이른바 친구관계를 통한 우정 전도형식으로 사역자 신분을 숨기고 친구 되기에 주력하는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히 사역자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스포츠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간 4일 이상을 스포츠 사역과 이후 주말과 휴일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사역의 형태로는 복음을 전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렇지만 좋은 장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스포츠와 관련 한 물품판매업과 스포츠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신분의 안정된 정체성으로 개인적인 만남을 통한 복음전도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두 번째 사역을 시작할 때는 좀 더 적극적인 사역의 방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그즈음 무슬림이 75%이상 되는 C지역에 막 교회를 개척한 W단체의 Y선교사님을 만나고 협력하며 직접 전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그룹으로 인도함을 받았고 소그룹을 통해 SM 아주머니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한 영혼이 돌아오는 기쁨도 맛보게 되었다.

H. 현재 C지역의 센터 안에서는 모든 기독교인의 절기 때 그에 적당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가령 부활주일에는 성구를 적은 계란을 나누어 주며 한국 기독교인의 문화라고 하며 복음을 전하고 성탄주일에도 마찬가지로 선물을 나누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와 왜 오셔야만 하는지에 대한 복음을 나누고 있다. 물론 교과를 진행하면서도 기회를 보아 복음을 전한다.

I. 짧은 필자의 경험으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고, 사용하는 죄 사함의 복음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지금의 가장 간절한 기도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제시를 배우는 것이다.

J. 올해부터 교육센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자치회’를 구성하여 교육센터의 전반적인 일을 공유하고 함께 의견을 모아 진행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들이 공공기관으로서의 교육센터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길 기도하고 있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복음을 수용할 수 있도록 기도와 복음 전도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진행할 계획도 가지고 있으며 매년 2회씩 학기 초에 총 14명에게 장학지원을 시작하였다. 직간접으로 복음을 전하되 매달 정기모임에는 자치회 멤버들과 깊은 교제 속에 기독교 세계관으로 비형식적인 교육,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K. 그리고 다른 무슬림 지역인 S지역에서는 지난 3년 동안 단기팀과 더불어 정기적인 방문으로 지역 내의 두 곳 학교에서 직접 전도를 진행하고 있다. 점차적으로 아직 복음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수도권의 다른 무슬림 지역들에도 인근 지역의 지역교회들과 연합하여 무슬림 마을에서의 노방전도와 축호전도 등을 진행기 위해 지역연구를 진행 중이다.

5. 태국의 무슬림 복음화를 위한 도전
A. 최근에 접한 한 논문의 글은 그간 사역을 진행해오면서 경험하고 기도하고 이어 실천하게 되었던 과정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아 참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논문의 저자는 단지 이슬람이기 때문에 복음전파가 힘든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거나 세속주의가 강한 곳에는 어디든 어렵지만, 그는 논문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무슬림들의 간증과 사례연구에서 그들을 회심으로 이끈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다음 몇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B. 효과적인 무슬림 전도를 위한 기본 원리(17)
(1) 사역자들의 경건한 삶과 태도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전도의 방법을 사용하시고, 전도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데, 무슬림들의 문화와 신앙을 존중하면서 그들과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 살아가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하지만 많은 사역자들은 자민족,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진리에 대한 논쟁을 피할 수는 없으나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서 논쟁을 이기려하기보다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때 사역자가 설명하는 복음에도 귀를 기울여 주게 된다고 말한다.

(2) 상황화된 전도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각각의 상황은 다르지만 복음을 접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가치들이 복음 전달의 수단들과 중대하게 조화되는 것에서 더 많은 회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황화된 전도는 무슬림 전도에 있어서 문화적인 장애가 제거되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내용 그리고 형식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무슬림들이 자신의 문화 내에서 회심을 하고 주님을 따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다.(18)

김요한 선교사님이 전해주는 상황화의 목적은(19) “이슬람이라는 문화/사회적 상황 가운데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자급, 자전하는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를 죤 와일더와 찰스 크래프트는 ‘이슬람 내부로부터의 대중운동'(People movement from within the Islam)이라고 표현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다.

C. 앞서 언급한 김요한 선교사는 미전도종족을 향한 전방개척에는 전방개척적인 스피릿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랄프 윈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미전도종족 가운데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이러한 전방개척적인 스피릿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그들이 기도와 말씀 전파에 전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회학적 돌봄에 그 주 관점을 두었던 사도들이건, 교회에서 구제와 돌봄을 위하여 마치 보조적인 역할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집사들이건-실제적으로 실천하여야 했던 것으로서 지금의 전방개척 선교지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적인 경험이나 목회를 위한 준비와는 전혀 다른 “전방개척적인 스피릿을 요구한다.”(20)

D. 말레이 무슬림사역, 특히 태국 내 무슬림 사역에는 전방개척적인 스피릿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영역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수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쉽다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국가에서 혹은 무슬림반군 활동지에서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좋은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복음전도의 스펙트럼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필자는 얼마 전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사역자 모임에 다녀왔다. 동남아시아(21)의 최대 무슬림국가이면서도 넓은 나라인데 필자가 방문한 지역은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20%쯤 되는 지역이었다.

모임을 통해 나누는 사역현장의 이야기는 참 도전이 되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는 나눔 속에서 필자가 섬기는 태국 내에서도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야 하겠다는 도전을 받았다.

(1) 일반적으로 무슬림 사역자들은 친구 관계를 통한 우정전도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가까이 서 지켜보면서 접하게 되는 것은 지역교회 내에서 직접전도를 통한 회심도 가능하다는 것을 지난 짧은 사역기간을 통해 경험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태국 내 무슬림 사역에 있어서 친구관계를 통한 우정전도를 사역방법으로 채택하던지 혹은 신분을 어느 정도 오픈하여 직접 전도의 방법을 택하던지 필자가 중점을 두는 것은 신분과 정체성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정기적인 만남이 진행되는 것이다.

(2) 분명한 정체성, 그리고 정기적인 만남은 이전의 비즈니스 성격을 띠었던 미니 소그룹에서도 기독교인 회사의 하청을 받은 자로서의 신분과 현재 진행되는 스포츠 교사와 물품 판매 그리고 교육센터에서도 기독교인 사회봉사자로서 정기 만남 등이 그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무슬림 사역의 넓은 스펙트럼의 반대쪽은 기독교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정기적인 방문을 통해 공개적인 직접전도를 진행하고 있다.

E. 현재 무슬림 지역의 지역교회에서, 또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무슬림 이웃과 좋은 관계를 통해 회심하는 경우가 자주 발견되고 있어서 태국은 분명 이웃 다른 나라의 무슬림 사역과 비교하여 조금 더 기회가 많은 사역지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마저도 우정전도의 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사역자의 신분을 숨기고 우정 전도에 집중하는 저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는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6. 글을 마치며
A. 필자의 궁극적인 사역의 목표는 태국 무슬림들 가운데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하는 신앙공동체가 생기는 것이다. 곧 교회가 개척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무슬림 사역을 위한 정체성이나 정기적인 만남은 그저 무슬림들을 안정적으로 만나는 도구에 지나지 않다. 어떤 사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대상이 되는 이들의 역사와 문화와 고민과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대상자들 마음 가운데 사역자들의 사랑과 섬김이 깊이 자리 잡기 시작할 때 이 비전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가운데 가장 먼저 선교사로 오셨던 예수님처럼 온전한 성육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교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는 사역자들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역자들이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에 그치는 복음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 되는 복음 전달자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저들의 눈높이로 낮아져서 저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여 분명한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각 개인을 향한, 그리고 이 시대를 향한 비전이 성취될 것이다.

B. 한국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던 때인 1970년대 초 이 땅에는 이미 순교의 피가 흘려졌다. 1953년 중국에서 철수한 OMF 선교사들이 태국의 무슬림사역을 시작하여 남부 싸이부리지역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역을 시작했고 전문병원을 세워 사역했다.

선교사역이 활발히 진행되어 말레이 종족 사람 5명이 세례를 받는 등 약 100여 명 정도 개종자가 생길 즈음인 1974년 지역 테러리스트들이 사역하던 간호 선교사 두 분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했고, 선교정책에 따라 불응하자 1975년 4월 두 분은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22)

하나님께서는 순교의 피를 그냥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지난 선교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귀한 순교로 말미암은 복음의 씨앗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싹이 틔고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를 불러 사역자로 사명과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혹 이때, 이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심이 아닌가? 불같은 열정이 주께로부터 임하시길 소망한다.

C. 몇 가지 기도제목
(1) 한국교회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전도 종족사역인 태국 무슬림 선교에 한국교회의 뜨거운 기도와 더 많은 헌신자, 물적, 영적 지원이 일어나도록

(2) 근래 태국교회의 무슬림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면서, 몇몇 교회들을 중심으로 회심자 수련회와 모임이 일어나고 있지만 공명심이 앞서고 있어서 안타까운 상황인데, 정말 자신의 종족을 향한 열정과 비전에 사로잡힌 사역자들의 활동이 효과적으로 일어나도록

D. 바라기는 이글을 접한 모든 이가 태국의 무슬림사역이 동남아 무슬림사역의 열쇠로 작용하도록 기도하는기도의 동역으로 성장하길 소원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은 전진합니다.(빌1:12)’    글 | 박 아굴라 선교사

[각주]
박아굴라 선교사는 태국 무슬림사역자로 1992년 선교한국에서 무슬림 선교에 헌신하여 2005년 GMTC 훈련 후 GMP에 허입, 같은 해 10월 파송되어 2006년 3월 태국에 입국하여 현재까지 사역하고 있다.
(1) มุสลิมในประเทศไทย: ชายขอบหรือเพียงแค่แตกต่างอารี จาปากลาย, ธีรนงค์ สกุลศรี และอาซิส ประสิทธิหิมะ 2012.
(2) วิทยาสาร ปีที่ ๑๔ ฉบับที่ ๔๑ หน้า ๕๒, 같은 곳, 재인용.
(3) 1386년경에 이슬람이 전파 되었던 트랭가누(Trengganu)지역에 힌두 왕국이었던 랑카수카ลังกาสุกะ에 무슬림 상인이 와서 한센병에 걸린 왕을 낫게 하면 이슬람을 신봉하라는 제안에 병이 낫고 무슬림이 되었으나 곧 옛 힌두신앙으로 돌아갔고, 이후 2번 재발되어 같은 약속으로 고침을 받은 후에는 무슬림 왕국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을 술탄이라 하고 현 빠따니 지역으로 천도한 후 빠따니 1457년경 이슬람왕국이 되었다.(KJFM-그날을 기대하며-Y종족이야기 참조).
(4) 학자들은 이미 태국 역사가 시작되기 전 서기 9세기 이전에 말라카มะละกา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었고 중국 운남성ยูนนานใต้ 지역에서 이주해 오기 전에 이미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공통점은 수코타이สุโขทัย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슬람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지역 내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인도네시아 차와ชวา지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지역전체가 무슬림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국과 수마트라 사이의 무역로로 이용되던 빠사이ปาไซ (Pasai), 아쩨อัจเจ (Atje Acheh), 말레이시아มาเลเซีย, 말라카มะละกา 지역이 이슬람화 되었다.
(5) 일반적으로 9대 왕까지 옹립된 수코타이 สุโขทัย 왕조는 서기 1238년 기원한 것으로 3대왕 람캄행 대왕รามคาแหง 통치시에 나콘 시 탐마랏 นครศรีธรรมราช은 굉장히 큰 관할 구역으로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มะละกา, 말라유 มลายู, 싱가포르를 포함하고 있었다.(사이버 태국학 센터 참조)
(6) ประยูรศักดิ์, 2539. มุสลิมในประเทศไทย. กรุงเทพฯ 참조.
(7) 같은 곳. 참조.
(8) 필자가 수도권 무슬림 사역자이므로 어떻게 수도권에서 무슬림들이 번성하게 되었고, 흩어졌는지를 언급하여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슬림들의 이주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www.alisuasaming.com 참조.
(9) ประยูรศักดิ์, 2539. มุสลิมในประเทศไทย. กรุงเทพฯ 참조.
(10) 왕실기록 쫃마이루앙우돔쏨받 제9권에 기록-คลองแสนแสบและบรรพชนมุสลิมเชื้อสายต่างๆ 참조.
(11) ศันสนีย์ วีระศิลป์ชัย, ชื่อบ้านนามเมือง, มติชน (๒๕๔๐) หน้า ๑๗,๑๘. คลองแสนแสบและบรรพชนมุสลิมเชื้อสายต่างๆ 참조.
(12) 같은 곳 คลองแสนแสบและบรรพชนมุสลิมเชื้อสายต่างๆ 참조.
(13) 같은 곳 คลองแสนแสบและบรรพชนมุสลิมเชื้อสายต่างๆ 참조.
(14) 태국 정부통계로는 약약 5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대사관 홈페이지에서는 750만 명으로 말하고 있고 지난 2009년 라마단 기간 중 방콕포스트 영문지는 이미 800만 명으로 보도 한바있다. 이슬람지도자들도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대략700만에서 1,000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태국 내 무슬림 인구는 전체인구의 10%를 넘어 섰다고 볼 수 있다.
(주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대사관: www.thaiembassy.org/riyadh/th/organize/29025-Muslim-in-Thailand.html)
(15) 필자가 2015년 8월 넝쩍 지역에 소재한 이슬람 총 회관 방문 시에 기재된 내용을 사진 찍어 전산화하였다. 이슬람 종교학교는 이후 1961년 중앙 정부 규제로 공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무슬림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16)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OMF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년 내로 수도권의 무슬림인구가 100만에서 400만으로 증가했다고 이야기했다. 앞서 기술한 불안정한 요인들로 인해 수도권 내 무슬림이 10년 사이 약400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의 수적 증가는 회집하는 회당의 증설이 필요한 상황이고 실제로 사역 반경이 넓지 않고 오래지 않은 필자의 사역 반경 내 N지역에도 증설된 회당 2개이며 C지역에도1개가 증설되었다.
(17) 무슬림 전도를 위한 기본 원리에 대한 연구, 김성운, Muslim-Christian Encounter.(필자는 간략하게 요약을 하지만 무슬림 사역에 관심이 있거나 사역자인 경우 기회를 찾아서 정독해 보시길 추천한다.)
(18) 최근 이슬람 선교의 화두는 ‘내부자운동’이다. 이렇게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선교사적 마인드로 속해 있는 이슬람공동체 내에서 복음의 영향을 끼치는 것이 진정한 내부자운동이라 생각한다.
(19) 전방개척선교지(KJFM), 이슬람 상황화와 교회개척운동, 김요한.-무슬림 사역 전문단체인 인사이더스의 국제필드 대표인 그는 말하길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혼합주의(syncretism)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상황화는) 혼합주의를 경계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 복음전도에 있어서 문화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20) 전방개척 선교지, 교회구조와 지도자 양육에 대한 소고-관련된 제반 이슈들과 토의, 김요한. 3장 교회개척과 교회개척운동. 참조
(21) 전체 무슬림 수는 전 세계 인구의 23.2%인 약 16억 명인데, 이중 아시아의 무슬림 숫자는 약 62%에 해당하는 972.5백(9억 7천 2백 5십)만 명으로 아주 많은 수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동남아시아에는 253백만 명, 남아시아에는 484백만 명,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235백만 명 그 외 태평양 연안 지역에 약 5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PEW 센터 Mapping the Global Muslim Population-2009 참조)
(22) OMF Thailand 선교역사참조 https://omf.org/thailand/omf-thailand-history/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디지털 저널
C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