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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6) 바울과 선교사의 소명 (사도행전 13:2-3, 44-48)

성경이 말하는 CAS
D·I·G·I·T·A·L JOURNAL 22호 2020. 6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의 행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그야말로 땅 끝까지 뻗어나갔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불모지였던 19세기 말 우리 조선 땅에도 이 복음이 전해져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와 신앙 선진들의 희생 위에 이제는 전국 방방곡곡 교회가 없는 곳이 없고, 누구든지 원하면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복음이 편만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과거에는 선교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170여 개국에 28,000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진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주님 재림의 마지막 때의 조건, 마태복음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한국교회가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해왔지만, 전 세계에 아직도 복음이 필요한 미전도종족의 비율이 41.6%(17,307개 중 7,375개 종족)나 되는 현실은 우리가 더욱 무엇에 초점을 두고 선교사를 선발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바울을 통해 어떤 사람이 선교사가 되어야 하며, 선교사가 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핵심적으로 ‘선교사의 소명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1. 선교사의 소명
선교사라면, 우선 말씀에 순종하여 소명을 받고 선교사로 나서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이 그러한 말씀에 따른 소명의식이 없이 나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지만, 롯은 직접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은 아브람을 따라 갔다는 말입니다.

또 사도행전 13장 5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 요한인데, 그도 나름의 결심이 있었겠지만, 성경 말씀만을 놓고 보면 그가 말씀을 받고 나선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롯이나 마가 요한이나 하나님의 일에 계속해서 동참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일, 특별히 선교사로 나서는 사람에게는 말씀에 순종하여 소명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만큼 이 일이 결코 만만치 않으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동기는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불러서 맡기신 일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신과 그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견해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명령하셨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하셨으므로 이 말씀을 받는 모든 기독교인은 모두 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로서 특별한 소명이 없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선교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물론 성경 말씀이 주시는 일반적인 명령에 근거하지만, 개인적인 특별한 요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부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나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 사건’과 같은 특별한 부르심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견해 모두 성경적인 근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을 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모두가 직업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모두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는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과 직업에서 선교사와 같은 삶을 살라는 선교사‘적’ 삶을 촉구하는데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적 삶을 산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 삶을 전적으로 헌신하여 복음이 필요한 열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사람들은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선교사’가 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물리적 헌신의 정도와 직간접성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두 자신이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복음과 선교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디든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소명을 받고 직접 가서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여 복음과 선교 사역에 매진할 풀타임(full time) 현장 ‘선교사’들은 오늘도 필요합니다.

2. 선교사로 부름 받는 바울의 소명의식(행22:21, 롬1:5)
이러한 풀타임 현장 선교사의 소명을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모델은 아무래도 바울일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이 이방 선교의 소명을 받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먼저 그를 도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바울이 바로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교회의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먼저 바울의 회심과 변화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바울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그를 보호하고 온전한 사역자로 준비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사자인 바울에게도 그의 소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1절에, “…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바울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와 같은 부르심의 말씀에 대해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자신은 물론 공동체 가운데 그 소명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간혹 목사나 선교사가 되시는 분들 중에 “저희 부모님이 제가 어려서 저를 목사 혹은 선교사로 만들겠다고 서원을 하셨습니다.”라든가, “저희 담임 목사님이 저에게 목사 혹은 선교사가 될 자질이 보인다.”라고 하셔서 그 말이 동기가 되어서 헌신하게 되었다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바울에게 아나니야와 같은 소명의 안내자가 있었던 것처럼 그분들의 조언이 동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헌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그만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만의 교제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관점에서 확실한 부르심을 받았고,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예언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는 바울의 태도- 이방의 빛(행13:46-47, 사49:6)
바울은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도 명령으로 받아 순종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곳 사람들이 반박하고 비방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그 유대인들을 향해 담대하게 46절,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말씀하는데, 47절에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49장 6절 말씀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를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이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이 이사야 말씀은 1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당시 이사야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이었는데, 실제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질 일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문을 활짝 여셨지요. 그래서 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자신들에게도 적용하여 그들 역시 순종하여 따라야 할 명령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알려졌다면, 그것은 부르심 받은 우리에게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순종과 성실로 노력하라는 하나님의 지침 또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그 자체로는 “~ 되리라”하신 예언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대로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즉, 부르심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나?’ 지켜만 보는 ‘관망자’가 아니라, 그 말씀 그대로 성취되게 하는 ‘실행자’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4. 소명을 이루려는 바울의 선교 열정(행 17:6, 24:5)
이방선교의 소명을 받은 바울은 참으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사도행전 17장 6절에 바울과 실라를 두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는 영어로 “men who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을 번역한 것인데, 직역하면 ‘세상의 윗면을 아래로 바꾸었다.’, 즉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했다손 치더라도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앞선 예와 비슷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라고 하며, “전염병 같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염병 자체는 나쁜 것이지만, 당시 반대파들이 보기에는 그만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전파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바울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또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5.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바울의 태도(행9:16, 11:23-27, 20:24, 21:13)
바울의 소명의식은 그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9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가라고 하시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것은 보통 고난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고난을 가장 상세하게 언급하는 구절이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3-27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에 참으로 엄청난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난의 삶 앞에서도 바울의 태도는 확고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1:13
…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예수님께 받은 자신의 소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그 숱한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것도 각오하였다고,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그 개인이 굳은 의지를 갖는다거나, 특별히 용감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요. 이는 정말 소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소명의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소명은 스스로 생각해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생의 주인,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맡기시고, 능력 주신 소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생애와 사역의 순간뿐만 아니라, 순교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소명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고난과 죽임 당함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6. 바울의 소명과 사역지 결정 원칙(롬 15:20-21)
바울은 어느 한 지역에서 평생을 사역한 지역 선교사가 아닌 순회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3차례의 걸친 선교여행에서 수없이 많은 사역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상황이 되는대로 사역지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성경의 원리에 따라 그 소명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바울은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는 자신의 원칙을 밝힙니다.

즉, 다른 사람이 이미 복음을 전해 믿는 자들이 있는 곳, 그래서 그들에 의해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곳에서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21절에서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이사야 52장 15절 말씀을 그 원칙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되, ‘이미 복음이 있는 곳은 피하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곳을 우선하여 전도한다.’는 분명한 원칙과 우선순위를 가지고 사역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전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새벽에 따로 다른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데, 전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놀란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8절에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하시면서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시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의 주된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우선순위(priority)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불러 소명을 부여하신 사도 바울 역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원리와 우선순위를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그러했듯 이후의 모든 사역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이며, 특별히 오늘날 선교사들 역시 여전히 따라야 할 원리입니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의 선교상황이 어떠합니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전 세계 17,307개 종족 중 7,375개 종족(41.6%)은 아직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거나, 아직 종족 스스로 자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미전도종족들입니다. 그곳까지 갈만큼의 선교사가 아직 부족해서일 수 있지만, 다른 나라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한국 선교사만 하더라도 이미 3만 명의 가까운 선교사가 세계 여러 곳에서 선교사역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자, 단순 산술적으로 3만 명이면 현재 남은 7,375개 미전도종족에 4명 이상씩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수이고, 전 세계 17,307종족마다 1명 내지는 2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수치입니다.

물론 한 종족을 복음화하기 위해 몇 사람의 선교사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소명을 주셔서 함께 들어가 사역하도록 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일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 선교사들의 파송 현황을 보면, 대부분 각 국가의 수도 또는 대도시 중심으로 지나치게 집중 배치되어 있습니다. 인도차이나의 모 국가에는 약 1천 여명 선교사가 사역 중인데, 수도와 전통적인 선교 중심지인 제 2의 도시에 80% 이상의 선교사가 집중 거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비단 그 국가만의 상황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선교의 주인이시며 시작이 되시는 예수님도, 그 부르심 받아 선교의 기초를 놓은 사도 바울도 이 성경적 원리를 따랐다면, 마땅히 동일하게 주께로부터 선교의 소명을 받은 우리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동일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마다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과 또 나름의 확신이 있어서 그렇게 사역지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도 상당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외적 경우의 비율이 오히려 절대적으로 많은 상황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선교사의 소명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수 있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성경적인 사역의 방향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이 있게 하라’는 선교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7. 안식년에 관한 바울의 실례(행14:26-28, 15:3)
바울 사역 당시는 오늘날처럼 선교사의 안식년 제도가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안식년이라는 개념이 성경에 언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수년간 전도여행을 마치고 파송교회인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 나름의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끝으로 살펴보는 바울의 안식년에 대한 실례는 안식년 그 자체보다 선교사의 소명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한 역할을 다루기 위해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말씀들을 살펴보면,

행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행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행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첫 번째 말씀인 사도행전 14장 28절에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바울은 안디옥에서 그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면서 쉼과 안식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자체로도 사역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바울은 27절에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에 방문한 15장 4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또한 21장 19절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이 쉼과 안식에 앞서 또는 그와 함께 행한 일은, 바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보여준 안식년 시간의 중요한 목적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니 선교사도 쉬어야지, 온전히 안식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충분한 쉼과 안식, 재충전이 다음 사역을 위해서도, 오랫동안 충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 선교보고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선교사로서의 소명에서 매우 중요한 한 영역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선교보고는 곧 선교동원, 선교모금이라는 잘못된 등식이 성립된 듯한데, 사역을 위한 정당한 동원과 모금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선교보고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선교사 자신을 통해 이방 가운데 행하신 그 일들을 모두, 낱낱이 알게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왜 중요하고, 이것이 왜 선교사의 소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선교사는 교회와 한 몸이며, 온 교회가 다 함께 선교지로 날아가서 장기로 사역할 수 없고, 그것은 효율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지역 교회는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그 지역의 복음화와 제자 생산에 매진하고, 특별히 헌신되고, 주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로 하여금 교회를 대신하여, 혹은 교회와 함께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선교사는 그간의 사역의 내용과 열매 심지어는 실수와 과오까지도 “낱낱이” 다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 모든 보고를 그대로 받고, 그 사역의 결과에 대해 잘된 것과 잘못된 것 모두 함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기도 하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사역 중에 수시로 선교편지를 보내서 상황과 기도제목을 나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일정 기간의 사역을 마치고 선교사에게 교회로 돌아와 온 교회가 함께 졌어야 할 사역의 짐을 모두 풀어놓고, 교회와 함께 쉼과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마치 고용주가 사원을 평가하듯 선교사와 그 사역의 잘잘못을 따져, 평가하는 것에만 치우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의 순기능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교회가 선교사와 함께 모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혹 문제가 있어 징계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함께 그 책임을 지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교사의 소명은 그 선교사 개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파송한 교회에 함께 주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다른 모든 인생의 기회들을 포기하고, 오직 전적으로 선교사역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는 것은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소명이지만, 그가 선교사로서 감당해야 하는 선교사역 자체는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몸 된 교회에 주신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교회는 선교사를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라, 함께 해야 할 동역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또 당시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사역을 마치고 그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낱낱이 다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보고까지도 선교사의 소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과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며 그 몸된 교회에 맡기신 유일한 사명, 선교의 사명은 모든 교회와 그에 속한 지체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소명인 줄 믿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헌신된 자들을 택하고 부르시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이 아닌 복음이 없어 복음이 필요한 지역과 종족 가운데 보내시는 소위 “선교사”들이 있고, 그들에게 앞서 나누었던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도록 하신 줄 믿습니다. 그 소명은 하나입니다. 선교의 소명은 교회와 선교사가 함께 이루어야 할 하나의 소명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 한국 교회 가운데 바른 교회와 선교사의 동역이 주님 오실 그 날을 속히 앞당기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 설교편집 | 강 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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