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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키워드로 본 서남아 무슬림 선교 : 선교사, 종교와 정치, 기독교이미지, 미전도종족

이슈 인사이드
D·I·G·I·T·A·L JOURNAL 22호 2020. 6

들어가는 말
이 글에서 4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서남아무슬림권이라 일컫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세 나라를 다루어 보려 한다. 곧 선교사, 종교와 정치, 기독교이미지, 미전도종족이다.

다른 권역에 너무나 복잡해서였을까? 역사적 경험, 종족 구성, 현재적 상황, 사회, 문화 등 전부가  오랜 시간 동안 씨줄과 날줄로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그 속내와 핵심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1). 결국 서남아무슬림권을 파악하려고 고민하던 중 키워드 중심으로 필자의 정리부터 하기로 했다.

앞의 두 키워드, ‘선교사’, ‘종교와 정치’는 서남아무슬림권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것이고, 뒤의 기독교 이미지와 미전도종족은 기독교 전도와 선교 결과 그리고 현재적 과제를 상정시켜 본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좀 더 서남아무슬림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번째 키워드_1: 서양선교사로 본 서남아무슬림권역 선교
서남아무슬림권역이라 일컬어지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기독교 복음전파 역사는 AD 25년 경 사도도마부터 시작한다. 그 후 1498년 포르투갈 사람인 바스코 다가마가 남인도에 카톨릭을 전했다. 개신교 선교는 18세기 1700년대 중반에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윌리엄 케리가 세람포르(serampore) 지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동인도 중심으로 다스리던 영국이 선교사들의 복음전파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벵골주의 세람포르 지역은 네덜란드 영역이었기에 네덜란드 왕이 복음을 전해도 된다고 허락하여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콜카타, 델리, 무수리, 심라 등 영국인들이 머물던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인을 위한 교회가 세워지게 되면서 이들과 관계된 현지인들이 기독교인이 된다. 서남아권의 근대 선교는 케리가 북인도 콜카타 지역인 세람포르에 정착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 을 기점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서남아무슬림권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누가 어떤 활동을 했을까? 레슬리 뉴비긴, 외스콘 피켓, 스탠리 존스 외에도 도날드 맥가브란, 폴 히버트, 필 파샬을 우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현대선교의 거장들이다. 그러나 선교역사가 본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3명의 대표적 서양선교사들만 살펴보겠다. 이유는 이들이 선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슈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1) 도날드 맥가브란, 폴 히버트, 필 파샬
서남아무슬림권역인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은 현대선교의 세 거장이라 거론되는 도날드 맥가브란, 폴 히버트 그리고 필 파샬이 선교사로 사역한 곳이다. 우선 인도는 현대 세계선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두 인물을 배출한다.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과 폴 히버트다.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1897~1990)은 3대째 인도 선교사로 태어나 인도 문화와 언어에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는 동질집단원리를 통한 교회성장전략으로 유명하다. ‘개인’(person)보다는 ‘집단’(unit)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개인적 회심보다는 종족별 회심을 강조하였다. 이것을 종족운동(peoplemovement)이라고 부른다(2). 도날드 맥가브란은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닌‘종족(people)’ 중심의 인도 사회에는 개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서구식 회심은 인도 문화에 맞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폴 히버트(Paul Hiebert, 1932-2007)는 문화인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탁월한 선교학자다. 역시 인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훗날 6년간 인도선교사로 사역을 하기도 했다. 히버트 박사는 선교와 문화인류학, 토착화, 세계관의 영역에서 큰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많은 제자를 양육하기도 했다. 한국어로 출간된 저서로는 「성육신적 선교사역」,「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선교와 문화인류학」, 「문화속의 선교」, 「21세기 선교와 세계관의 변화」등이 있다.

필 파샬(Phil Parshall, 1938~현재)은 SIM선교회 소속으로, 지난 50여 년간 아시아 무슬림들 가운데서 사역해 온 복음적인 노선의 현장 사역자요 선교학자다. 상황화(3)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교사다. 그는 1962년부터 26년 동안은 방글라데시에서 무슬림대상 사역을 하다가 후일 필리핀에서 사역했다. 필 파샬은 1989년에 한국해외선교회(GMF) 무슬림선교세미나에 주강사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으며, 지난 2004년에도 사랑의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 대상으로 한 무슬림세미나에 참석한 바 있다.

그의 다양한 현지 선교의 경험은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영성(靈性)에 관하여’를 부제로 하는 「십자가와 초승달」집필을 위해 37개 선교단체의 소속 32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기독교 선교사 390명을 대상으로 하는 폭넓은 설문조사의 시도로 더욱 풍성하게 빛을 발한다. 이슬람에 관한 저술로 국내 출간된것으로는 「십자가와 초승달」, 「무슬림 전도의 새로운 방향」,「 무슬림의 생활지침서 하디스를 읽다」등이 있고, 개인 회고록 「화폭을 짜시는 거룩한 손」이 있다.

인도 무슬림_러크나우(Lucknow),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2) 의미와 통찰
앞장에서 서남아무슬림권역에서 활동한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 중 현대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 인물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과 통찰을 제공하는가? 맥가브란은 서구 선교사들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선교전략을 비판했다. 바로 ‘선교기지(mission station)’접근법이다.

선교기지 중심 선교는 성육신적 선교에 위배되며 현지인들을 키우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서양처럼 개인주의가 아닌 종족중심으로 된 문화권에서 공동체, 종족중심으로 접근해야 할 것 을 강조한다. 맥가브란은 선교지에서 회심의 가장 큰 장애물은 어떤 신학적 요소가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요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닌 ‘종족(people)’중심의 인도 사회에는 개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서구의 ‘빼내기식 회심’이 인도 문화에 맞지 않음을 발견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70년대 도날드 맥가브란이 주창한 집단개종 운동은 미국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해왔던 북인도 동북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 즉 나갈랜드, 미조람, 마니푸르 중심의 몽골계 사람들과 미얀마의 버마인, 이미 부흥을 경험한 인근 카렌족과 이와 연관된 부족들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인도 선교 전체 그림에서 보면 힌두와 이슬람교를 믿는 주류 인도-아리안족 선교에 적용되지 못했다. 물론 불가촉천민들은 예외이다. 이들은 실제로 인도사회에서 신분의 상승과 카스트 계급 차별이 없는 신 앞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로의 개종에 보다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후 등장한 필 파샬이 서구선교 역사의 시행착오와 교훈을 통해 무슬림 상황화 사역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다음 수순인 것 같다. 그는 서구 선교사로 무슬림권역에서의 50년간 경험을 통해 이슬람 문화이해와 실제 삶의 정황 속에서 무슬림들의 이해와 실천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필 파샬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선교사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상황화 문제는 현재 한국교회와 선교계에 뜨거운 감자로 쉽게 다룰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교사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그들의 삶과 언어’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이 인식하는세계관과 사유 체계 속에서 자신의 구세주 됨을 증거 하셨던 바로 그 대화와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든 자들에게 모든 모양이 되기를 바랐던’ 사도바울의 고백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적용(Application)될 것인지 하는 고민도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첫 번째 키워드_2: 한국선교사로 본 서남아무슬림선교
이제는 이 권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한국 선교사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다. 여기 언급된 모든 분들이 대표성이 있는 선교사인지에 대한 이견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들 중 이 서남아무슬림권역에서 선교사역을 먼저 시작한 선교사들과 그 사역의 의미를 중심으로 고찰해보겠다.

(1) 한국선교사로는 누가 처음이었을까?
23세에 파송된 故전재옥선교사(1938~2016년)가 있다. 그녀는 1961년에 이화여대 선교부와 한국 감리교회로부터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파키스탄으로 파송된다. 후에「파키스탄, 나의 사랑」책을 통해 현장 경험과 신앙 고백적 간증을 나누기도 했다. 주로 남부지역의 신드주(Sindh)를 중심으로 하이드라바드(Hyderabad), 카라치(Karachi)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활동을 하였다. 1974년까지 파키스탄 선교사로 있으면서 그녀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안식년을 통해 영국 런던 바이블칼리지에서 신학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1977년 풀러신학교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임용되면서 현재까지 ‘한국 선교계의 대모’, ‘이슬람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1992년에는 한국이슬람연구소를 세워 이슬람권선교이해, 인재 훈련 및 배출 등의 많은 공헌을 하였다.

다음으로 故정성균선교사(1944~1984)다. 정성균선교사는 여수중앙교회 중고등부 출신으로 장신대를 졸업한 후 30세 나이인 1974년 방글라데시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주로 학교와 교회개척 사역을 했다. 1976년에는다카에 한인교회도 설립한다. 그러던 중 1984년에 방글라데시 재입국 거절로 파키스탄으로 옮겨 카라치에서 선교하다1984년 40세의 나이에 급성간염으로 라왈핀디(Rawalpindi) 육군통합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남대에 다녔던 정성균 선교사를 기념하고 본받기 위해 지난 2014년 9월 17일 정성균선교사관이 한남대에 건립 개관되었다. 1974년 정성균선교사를 후원하고 기도하기 위해 통합측 교단을 중심으로 방파선교회가 조직되어 현재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장순호선교사(1955~현재) 역시 거론해야 한다. 그는 29세의 나이로 1984년에 방글라데시에 들어가 1987년 한국·방글라데시개발협회(KDAB, 약칭 방개협)를 창립했다. 이후 장선교사와 방개협은 한국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면서 방글라데시의 선교 대부 역할을 하게 된다. 방개협은 1990년에 방글라데시 정식 국제 NGO 등록을 하게 되며, 2001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회원단체, 2006년에는 국제개발협력민간단체협의회(KCOC)에 등록한다. 방개협은 수도 다카, 북서부 찔마리, 울리뿔 등지에서 초중고등학교, 농촌개발사업, 봉제기술학교, 음악학교, 보건소, 나환자재활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30년간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해 온 장선교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의 봉사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언더우드 선교상’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故권병희선교사(1961~2014)도 방글라데시와 콜카타의 선교사로 소개할 만한 분이다. 그는 서울대 농대(농학)·대학원(육종학)을 마친 뒤 1989년 28세의 나이에 방글라데시로 건너와 찔마리에 가나안농군학교의 분교를 개척하면서 농촌개발 사역을 하였다. 이후 농업회사 (주)세하 방글라데시를 설립하였으며, 신용협동조합 제도를 도입하여 농업문화를 바르게 정착, 발전시키는데 힘썼다. 10년 사역 후 2000년부터는 같은 벵골어권 인도 콜카타(Kolkata)로 옮겼다. 그는 문화교류를 통한 복음전파의 가능성을 찾아 콜카타에 최초로 ’한국문화원‘을 세웠다. 또한 콜카타대학에서 한국어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가 집필한저서로는 「벵골어의 문법과 회화,「한국어-벵골어 포켓 사전,「친구나라, 방글라데시」,「우리의 뿌리는 인도에 있는가」,「후진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숨은 이유들」,「나귀의 순종」등이있다.

한편 북인도의 경우는 한국 침례교단이 지난 15년간 전략적으로 선택과 집중한 곳이어서 몇 분의 침례교단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1999년 미국 남침례교 국제선교부(IMB) 소속의 북인도 무슬림사역자 탐 다니엘 선교사는 한국침례교단(FMB)에 북인도무슬림선교의 중요성을 알리고 한국선교사를 파송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미 2O여 년 이상의 인도선교사로서 노하우를 지녔던 탐 다니엘 선교사는 초기 한국 침례교 선교사들에게 좋은 통찰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해 1999년 윤사무엘 선교사가 단기로 북인도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2000년에 김바울 선교사, 곽야곱 선교사, 이여호수아 선교사 세 가정을 팀으로 파송하면서 침례교단의 북인도 무슬림선교의 초기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윤사무엘 선교사는 델리에서의 단기선교 사역을 마치고,국내 교회에서 파키스탄 이주민 사역을 진행한 후, 북인도 데라둔(Dehradun)과 우타르프라데시주(UP주) 사하란푸르(Saharanpur) 지역으로 이동하여 무슬림 대상으로 제자훈련 및 교회개척, 학교사역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그는2013년 한국미전도종족선교 20년 포럼에서 북인도 선교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4).

김바울 선교사는 인도 수도 델리에서 이슬람 집중거주지 니자무딘을 중심으로 유치원, 슬럼가, 학교, 교회개척, 기아대책의 어린이개발사역 등을 하다가점차 북인도 카슈미르, 펀잡(Punjab), 마드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 등 다양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 지도자 훈련에도 힘쓰고 있다. 곽야곱 선교사의 경우는 인도 델리에서 언어와 팀사역 훈련 후 바라나시(Varanasi)라는 힌두교 성지 관문도시로 이동하여 현재까지 교회개척 및 제자훈련, 문맹퇴치, 방과 후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2014년에는 선교한국대회의 선교현장 부분 주 강사로 초대되어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윤에스더 선교사의 경우는 2006년부터 UP주 주도인 러크나우에서 팀들과 함께 교육, 무슬림 여성, 교회개척사역을 하다 현재는 본국에서 침례교단 선교동원 사역을 하고 있다. 김바울 선교사와 윤에스더 선교사의 사역은 이번 전략회의 단행본 자료집에 본인들이 쓴 원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인도 델리,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Delhi)

(2) 의미와 통찰
1950년 6.25전쟁을 겪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한국교회가 1956년 태국으로 최찬영 선교사 파송, 1958년 대만으로 김영진 선교사를 파송한후, 1961년 이슬람권 파키스탄으로 23세인 최초의 여성 교육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경을 기준으로 했을 때 76년 되던 해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적 상황에서 파키스탄 이슬람권에 최초로 다음세대를 가르치는 교육사역에 젊은 싱글 여성을 파송한 것이다. 남녀차별이 심한 유교 숭상 국가에서 서양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통해 양육된 인재가 이슬람교 남녀차별 국가에서 필요에 부응한 전문인선교로 섬겼던 모범을 현대 한국교회와 선교계는 다시 배워야한다. 그 가치와 정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서남아무슬림권역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한 故정성균선교사는 1974년에 파송될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 후 십년 뒤 장순호 선교사가1984년 29세의 나이에 방글라데시로 나갔다. 故권병희 선교사는 1989년 28세 나이에 방개협(KDAB)과 협력사역으로 농촌개발사역을 위해 방글라데시 서북단 무슬림지역 찔마리에 정착했다. 이들은 20대 후반에 신생된 지 얼마 안 된 가난하고, 덥고, 더러울 뿐 아니라 종교 문화적으로도 대단히 이질적인 국가에서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사역했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은 선교후원체계, 위기관리, 멤버케어 시스템도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역을 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몸을 돌보지 못하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역을 하던 중 두 분의 선교사들은 육적, 영적 탈진과 악화로소천했다. 선배 선교사들이 가졌던 복음의 가치와 영혼에 대한 열정, 헌신과 대가가 오늘에도 계속 계승되어지길 바란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협력과 동역, 팀사역 부분에서는 많은 과제가 있다. 우선 방글라데시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방개협과 이후 굿네이버스, 굿피플, 좋은 이웃들 등을 비롯한 후발 NGO들, 한국 선교사들이 필요에 의해 계속 개인적으로 설립하는 NGO들, 수많은 학교사역, 개종된 가로 종족, 나마수드라 카스트 힌두, 샤오딸(산탈)족, 카시족, 친족 등 소수부족 사역의 중복, 무분별한 교회건축 등으로 인한 갈등 고조 현상이다.

또한 심각한 것은 현지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사역이 아닌 NGO사역자로 사무행정직화 되는 현상은 방글라데시 교회에 양질의 목회자 양성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한국선교사들의 여러 사역에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재정과 인적자원의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선교부분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 향후 이 문제에 대한 공동의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

방글라데시개발협회, 울리뿔 초등학교

한편 북인도에선 탐 다니엘이란 국제단체 사역자와 한국 침례교단, 지구촌교회의 지난 15년간 인적, 물적 지원과 연합 동역사역을 배워야 한다. 이번 업마(UPMA)팀이 현장리서치를 하면서 북인도 델리, 바라나시, 러크나우 등 전략적인 거점도시들에서 사역하고 있는 침례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이들은 현지 언어와 문화를 잘 익힌 후 교회개척운동 관점에서 적절한 학교사역, 방과 후 교실, 제자양육과 현지 지도자훈련 등을 주로 하고 있었다. 단기선교팀이 올 경우에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배울 수 있도록 팀들을 도시마다 서로 받아주고, 케어해주는 것도 배울 점이다. 그러나 또 한편 침례교단과 지구촌교회의 관문도시, 관문종족사역이 다시 재정비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북인도 침례교단 사역을 평가하고, 향후 전체 북인도를 대상으로 한 사역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다시 필요하다. 우리가 만난 이미 15년 이상의 선교사들의 경우는 주로 지구촌교회가 주파송교회였는데, 다른 교회들과의 협력, 선교동원과 단기선교사 지원이 더 필요해 보인다.

또한 한국교회 후발선교후보생과 현지인들의 동역부분이 강화되어야 하고, 사역의 연속성 측면에서 정체 혹은 단절및 탈진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또한 한국 침례교단이 지난 15년간 북인도선교를 하면서 경험한 것을 지구촌교회, 교단, 선교현장 선교사들이 함께 정리하고 문서화하여, 이제 막 북인도를 주목하기 시작한 다른 교단들과 선교단체에 제공해준다면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두번째 키워드: ‘종교와 정치’로 본 서남아무슬림권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라는 3개의 나라로 분리된다. 이번 서남아무슬림권역을 연구조사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로 이 권역의 특징을 꼽자면, ‘종교와 정치’,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전쟁과 분리’ 현상을 들 수 있다. 서남아무슬림 권역의 정치, 종교, 전쟁과 분리 문제는 21세기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국지전이나, 내전의 양태가 아니었다. 보다 큰 정황적 이해를 요한다. 왜냐하면 이 권역에서 현상적이고 개별적인 많은 선교사역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맥락적인 상황을 간파해야만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분별있게 필요한 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20세기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5)과 제2차 세계대전(6)부터 고찰해야 한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상황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되고,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식민지 경험이 한국과 유사할 뿐 아니라, 독립 후 바로 국가가 두 개의 체제로 분리되는 상황도 비슷하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남북한이 분리되어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아래 있다.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가 함께 지배한다. 바로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표방하는 두 국가의 탄생이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종교가 얽혀있다. ‘종교와 정치’의 이질성, ‘종교와 경제’적 차별이 가져온 오랜 불평등과 불만, 갈등 분리현상이야말로 서남아무슬림권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 때문에 이 문제부터 고찰해야했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발생한 3차례에 걸친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도 다루어보겠다. 서남아무슬림권 각 국가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슈미르, 발루치스탄 등에서는 여전히 분리주의 위험이 존속하고 있다. 이 권역에는 지금 전 세계의 가장 큰 무슬림 약 5억이 종교,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에 지배를 받으며, 진정한 구원과 해방의 복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1)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과 인도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주도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과 연합국(주도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이며 1917년부터 미국도 가담)이 맞서 싸워 동맹국의 패배로 끝난다. 이 전쟁은 결국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터키)의 몰락과 새로운 전쟁을 양태하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유럽의 불안정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7).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은 승전국이 되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로 인해 대영제국 해체의 발단이 되면서 더 강경책으로 인도를 다스려 인도 내 독립운동이 가속화되는 사태를 맞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 1945년간 6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국, 미국 등 연합국과 일본, 독일 등 추축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전면적이고 확산된 세계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세계는 유럽 식민지로부터 본격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세계는 유럽적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양대 제국이 등장하여 이들의 영향과 지배를 받게 되는데 바로 민주주의 진영의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이다. 20세기 후반 50년간 각 국가들은 거대하게 양분화된 패권적 냉전체제의 영향을 받으며,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되는 세계체제로 재편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 무슬림들(8)은 실질적으로 인도를 지배해오던 영국과 자신들의 정신적 칼리프 국가였던 오스만 터키와의 적대적 관계(9)로 인해 대혼란을 겪게 된다. 자기들의 입장에서 연합국이 그들의 칼리프 국가에 억압을 가했을 때, 인도 무슬림은 영국인의 총독 정부를 마비시키든지, 그렇지 못하면 인도를 떠나 이슬람 국가로 이주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동지로 여겼던 아프간과의 갈등도 불거지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본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2,000km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양국은 종교적·인종적·역사적·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47년 이후, 파키스탄 서북변경에 거주하는 파슈톤(Pashtun 혹은 Pathan)족이 자치권을 주장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병합운동을 전개하면서 양국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파슈톤족은 총 1800만명으로, 800만 명은 파키스탄에, 1000만명은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고 있다(10)이와 같은 혼란과 정신적 공황상태 속에서 인도 무슬림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안은 파키스탄 독립국가를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2) 영국이 인도, 파키스탄 분리에 큰 역할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에는 영국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1945년 진나(Muhammad Ali Jinnah)의 무슬림연맹과 간디의 국민회의로 인도 내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영국정부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 제안을 내놓는다.

첫째, 맨 위에 있는 영국령 인도와 토후국을 포함하는 인도 연방이 대외문제, 국방 및 통신을 관리한다.

둘째, 밑에는 주(州)와 토후국(11)이있어 연방의 과제 이외의 모든 문제와 모든 잔여 권력은 여기 에 부여한다.

셋째, 인도 내 많은 토후국은 연방에 양도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민과 그 권한을 보유한다(12).

당시 영국은 인도의 여러 주들을 3개 구(區)로 배열하였다. A구: 마드라스, 봄베이(현재의 뭄바이), UP, CP, 비하르 및 오리사 주(힌두 다수의 구), B구: 펀잡, 서북변경주, 신드 및 발루치스탄 주(무슬림 우세 구), C구: 벵골 및 아쌈(힌두 무슬림 박빙 구).

결국 영국은 식민지 인도문제를 처리하는데 그동안 영국 정부에 장기적, 지속적으로 일관된 충성을 보인 진나(13)의 이슬람연맹 편을 들어준다. 영국은 1947년 6월, 인도 파키스탄 분립 계획을 발표하여 이로 인해 힌두와 무슬림간 폭동이 발생하고 수천 명이 학살당하게 된다.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 피난민을 태운 열차가 폭파되고, 마을이 불태워지고 대대적 약탈이 발생한다. 당시 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다. 파키스탄으로부터 600 만명, 인도로부터 580만 명이 자신의 종교를 찾아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14).

(3) 3차에 걸친 인도 파키스탄 전쟁
1차(1947년~1948년)(15), 2차(1965년)(16), 3차(1971년)(17)에 걸쳐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전쟁을 촉진시킨 구조적 요인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18).

첫째, 인도 아대륙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전부터 역사적으로 상이한 종교에 근거하여 힌두 다수의 인도와 무슬림 다수의 파키스탄으로 분립, 대립과 반목의 요소를 원래부터 크게 안고 있었다.

둘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첨예하게 나타난 영토통합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두 나라에게 카슈미르를 자신의 영토에 병합해야만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했다. 파키스탄에게 카슈미르는 주민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이었기에 이 논리에 근거하여 분명한 영토병합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인도로서는 신앙에 관계없이 종교적 소수자들도 하나의 세속적 탈종교적 국가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슬림 다수의 카슈미르가 인도에 병합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셋째,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에게 경제적, 전략적,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생국 파키스탄의 생명선인 인더스 강 그 원류들이 대개 카슈미르에 있다. 곧 체납(Chenab)과 젤럼(Jhelum)의 두 강을 따라 파키스탄 내부의 교역 시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카슈미르 경제 생활은 파키스탄과 분리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밀접하다.

카슈미르의 세수의 ⅓을 제공해주고 있는 목재, 농산물과 생산품들 식량과 연료 등 모든 교역과 시장이 카슈미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인도 입장에서 카슈미르는 세 나라 소련, 중국,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의 안보문제, 국제적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19).

인도 잠무 카슈미르(Jammu and Kashmir) 주의 주도 스리나가르(srinagar)

(4)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의 분리(20)
인도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으로 이슬람 국가 건립을 맞는다. 그러나 이슬람교 외 동서(東西) 파키스탄은 같은 점이 전혀 없다. 정작 무슬림이면서도 사실 서파키스탄 무슬림들은 동파키스탄 벵골 무슬림을 힌두교에 의해 오염된 것으로 여겨서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21).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달리 민족의 약 98%가 벵골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동일한 언어와 문화적 집단이다(22). 오직 소수만이 산악 지방의 다양한 원주민과 비하르(Bihar)어를 말하는 이주민으로 구성되었을 뿐이었다. 벵골 민족과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차에-특히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에 의해 벵골어의 우수성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마당에-파키스탄 정부는 공용어인 우르두어를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의도적인 벵골어의 기피, 말살정책으로 벵골 민족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과 원인을 제공한다.

이뿐 아니라 동서 두 집단을 분리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 불균형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1948년부터 1969년까지 260억 달러 규모의 재화가 동파키스탄으로부터 서쪽으로 넘어갔다(23). 엄청난 재화가 가난한 지역으로부터 유출되어 더 발달한 지역으로 옮겨 간 것이다. 더욱이 1960~1965년간, 1965~1970년간에 파키스탄은 각각 23억 5100만 달러와 32억 3100만 달러의 외국 원조를 받았는데, 전체적으로 동파키스탄에는 20%만 지원되었다고 알려졌다(24). 1961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동파키스탄 주민가운데 94%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농촌 거주민의 85%가 농사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파키스탄은 단 59%가 토지에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었다(25).

여기에 1970년 8월 15일 발생한 대홍수와 11월 12일 태풍이 강타하여 약 50만 명이 사망하게 되는데, 재난과 위기 대비에 무능력한 정부의 대응으로 사망자가 약 100만 명까지 발생하면서 폭동이 일어나고(26), 1971년 3월 25일 부터 동파키스탄에 대한 군사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서파키스탄군은 대학교에 침입하여 기숙사 학생들과 교수들까지 살해한 이 진압작전은 단 이틀 동안에 사망자수가 700명 혹은 5만 명까지 추산한다(27).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직접적 결과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가져왔다. 이때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적극 지원하면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도왔다(28).

서뱅콜의 주도인 켈커타의 힌두교 사원(Dakshineswar Kali Temple), 출처: wikipedia

세 번째 키워드: 서남아무슬림권역에서의 기독교 이미지
(1) 인도에서 기독교 이미지
인도에서 기독교는 남인도와 북인도, 동인도가 다르다. 남인도는 처음 상류층 대상으로 접근했고, 힌두인들의 소를 숭상하는 문화를 수용하여 소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현지인들의 신뢰와 존경을 얻었다. 현재 남인도는 7%이상 복음화되어 있다. 그러면 인도 아리안이라는 정통 자부심을 가진 북인도는 어떨까. 특별히 북인도는 영국 정부에서 일하던 관료들과 영국성공회 신자들의 신앙생활 유지를 위해 모이는 교회와 이들이 접촉하는 현지인 하인 위주의 소극적 전도, 달리트 중심 하층민의 기독교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29).

영국 식민지 당시 수도였던 콜카타, 델리, 뭄바이를 중심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당시 현지인 곧 힌두인, 무슬림들에게 기독교는 부정한 최하층 천민들의 종교, 매국노의 종교로 여겨졌다.

더욱 선교기지 접근법으로 긴 시간 프로젝트성, 의존성이 강한 선교방식 때문에 외국의 수혈 없이는 절대 혼자 설 수 없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 현재 남인도에서 2만 명의 사역자들이 북인도에 와서 사역을 하고 있다(30). 그러나 이 숫자에 비해 효과가 미약하다. 이유는 대다수가 북인도에 와서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기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NGO단체, 신학교에 관계된 단체 등을 만들어 단체를 위한 단체, 자기들의 생존을 위한 단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31).

힌두교 지도자들은 심지어 ‘외국에서 들어오는 원조만 없앤다면 인도의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다 망할 것이다’라고이야기들을 하곤 한다(32). 한편 미국선교사들은 주로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 지역은 인도 주류 종족이 아니라 몽골리안 계열이다. 주로 나가랜드, 미조람, 마니푸르, 아쌈 일대이다. 사실 종족집단 개종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인도 아리안족과 복음, 인도 아리안족과 교회 개척이 관건이다.

인도 러크나우(Lucknow)에 서의 어린이 사역

(2) 파키스탄의 기독교 이미지
파키스탄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파키스탄은 독립하기 전까지 인도였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가장 큰 교단은 Church of Pakistan이다. 이 교단은 현재 8개 지역(33)에 비숍(Bishop)이 있으며, 영국 지배 당시부터 있었던 성공회 교회 형태이다. 문제는 영국철수 후 학교, 병원, 교회 재산 부지 등을 둘러싼 엄청난 재산 싸움으로 목회, 전도와 선교에 매우 소극적이다. 심지어 친인척 중심으로 교인들이 구성되어, 전도를 하면 오히려 재산 갈등 문제가 더 심각해져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다(34).

여기에 미국 북장로교가 남기고 간 유산도 적지 않다. 과거 북장로교 선교사만 1천 여 명 이상이었던 적도 있다. 이들이 남기고 간 병원, 학교, 교회 컴파운드로 파키스탄 장로교 역시 재산 갈등과 순수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교사들은 파키스탄 교단이 소수의 순수한 교단, 독립교단이 그나마 순전하다며 파키스탄 기성교단들은 나쁜 점들을 배워 “미션이 비즈니스”가 된 지 오래되었다고 비판한다(35). 최근에 파키스탄교회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 해외 교회들과 더 무분별한 연결로 교회, 학교, 마을을 보여주면서 물질적 도움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2012년에는 한국 이단 만민중앙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하기도 하였다(36). 라호르, 시알콧, 파이살라바드 등 7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목회자 세미나 7회, 권능의 손수건 집회 10회를 개최했으며 라호르 FGA운동장에서는 1만 명이 모여 대형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현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각집회를 진행하여, 그 결과 56개 교회를 만민교회의 지‧협력교회로, 88개 교회가 소속된 감리교단을 협력교단으로 가입시켜 향후 파키스탄 선교의 행보를 강화하고 있어 우려된다. 특히, 파키스탄 총회장 및 교단 대표자협의회(80여 개 교단 총회장 및 교단 대표자들로 구성)에서는 한국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를 ‘국제 이사장’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37).

이는 비단 특정 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기존의 파키스탄 교회와 교단들과 협력할 때에는 각별히 여러 경로를 걸쳐 검증하고 현지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 있는 교회

(3) 방글라데시에서의 기독교 이미지
그렇다면 방글라데시는 어떤가? 방글라데시는 아프리카처럼 NGO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38). 현재 해외 NGO가 2,400개 정도 된다(39). 1971년도 독립 후 국가 재건과 열악한 환경으로 수많은 서양 NGO들이 먼저 파키스탄 교회를 통해서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교회와 지도자의 부정 부패로 큰 문제가 생겨, 서양단체들이 직접 들어와 현지인들을 NGO 직원, 스탭으로 고용하여 사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은 국제단체들의 뒤를 이어 들어와 굿네이버스, 굿피플, 국제기아대책기구 등 크고 작은 NGO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일찍 시작한 NGO는 방개협(KDAB)이다.

NGO의 장점은 현지인의 필요에 부응하여 총체적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안정적인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은 현지인 교회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목회를 배우고, 제자로 양성되기 보다는 손쉽게 NGO에 속한 직원으로 고용되어 사무 행정 직업인으로 전환이 되어 현지교회가 성장, 성숙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40).

또한 NGO를 통해서는 종교활동이나 복음전파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무분별한 교회건축의 피해 또한 적지 않다. 현지 문화, 정서, 삶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우리 중심의 교회당 건축과 신학교 시절부터 무료로 돈을 대주며 공부시켜서 교회당을 건축해주고 생활비, 사역비를 지급해주는 선교사에 종속된 관계로 말미암아 자립하지 못하는 방글라데시 교회와 성도를 양산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다.

네 번째 키워드: 미전도종족 관점에서 본 서남아무슬림권선교
(1) 북인도의 미전도종족
현재 인도의 우선순위 선교대상은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으로 이들은 인도 아리안족으로 불린다. 그런데 인도내 한국선교사들은 대다수 인도의 남은 과업으로서 선교의 우선순위 대상을 향해 사역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로 지역적으로는 남인도에 거주하면서 이미 예수를 믿거나 주변에 현지 교회가 전도할 수 있는 드라비다인을 대상으로 사역하거나, 북동부에서 몽골, 미얀마, 네팔계 등의 민족들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인도 현장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2014년 현재 한국선교사 숫자는 약 1,5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41), 이중 약 50여명의 선교사만이 무슬림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래도 이미 하고 있는 사역에 집중하여 동원하다 보니, 무슬림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가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가 서남아무슬림권 전략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힌두주류 민족 사회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집단으로 존재하는 2억의 인도 무슬림들을 주목해야한다. 이들은 그 필요에 있어서 우선순위 대상이다. 인도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안전문제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지역별, 도시별로 함께 뭉쳐서 살수 밖에 없다. 파키스탄 독립 이후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욱 심해져 살기 위해 모여들었던 인도 무슬림들의 게토화(ghettoization)현상은 이제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화된 상징이되어버렸다. 육체적, 영적, 사회적, 경제적 필요가 매우 크다. 이제부터 한국선교사들이 인도에서의 선교대상은 인도의 무슬림, 특히 북인도에 많이 밀집된 무슬림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인도는 대부분의 도시와 그 주변에서 무슬림사역이 가능한 열린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 무슬림을 찾는 것은 쉽다. 어느 지역을 가던지 힌두가 사는 지역과 무슬림이 사는 지역은 분명하게 구분이 되며, 인도 대부분의 도시에서 이들은 쉽게 발견된다. 다만 인도 무슬림을 사역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인도 무슬림 문화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와 준비가 필요하다.

인도 바라나시(Varanasi)에 사는 무슬림, 안사리족(Ansari people)

(2) 파키스탄의 미전도종족
파키스탄 선교사였던 전재옥 교수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경계를 넘어 만난 이슬람」이란 책에서 현재 파키스탄 교회의 80% 이상을 구성하고 있는 종족은 1890년~1930년 사이에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있는 펀잡지방의 쭈르하(Churha) 종족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라고 말한다(42). 문제는 문화적 걸림돌이다. 이들이 파키스탄의 기독교이미지를 최하층 천민의 종교로 상징화시켜, 복음 자체에 걸림돌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화적 장벽 때문에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들에게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43). 곧 파키스탄 현지교회를 통한 주류 우르두 선교가 마치 인도에서 동북부 나가랜드 몽골계 기독교인들이 주류 인도아리안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따르는 제한과 같은 문제다. 이들은 주류 우르두 언어를 사용하는 파키스탄 무슬림들에게 문화적으로 다가가기가 어렵다.

현재 파키스탄은 그 사역적 중요성이 대단히 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사역을 할 수 있는 정보 자료가 대단히 부족하다. 특별히 미전도종족의 경우 매우 간략하거나 조잡한 정도의 ‘종족 소개’정도 수준이어서, 각 지역별, 종족별, 도시별로 한국교회가 전략적으로 기도하고 실제 사역에 적용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없다. 우선적으론 파키스탄이란 이름에(44)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다섯 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 조사해야 한다. 곧 펀잡(Punjab), 아프간(Afghan)(45),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이다. 파키스탄에 가서 보니 지역별로 종족 구분이 뚜렷하고 지역성이 강하므로, 이들을 5대 미전도종족으로 각각 우선 사역을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민족은 펀잡인 44.15%, 파슈톤족 15.42%, 신드족 14.1%, 세라이키족 7.57%, 발루치족 3.57%, 기타 4.66%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민족별로도 타겟을 정해야 한다(46). 현재 파키스탄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있는데, 그 중에서 수니파가 75%, 시아파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외에 기독교인은 2.5%로 가장 많으며, 그 밖에도 소수의 힌두교도, 불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시크교도 등이 있다(47).

파키스탄 발루치족(Baloch people), 출처: wikipedia

(3) 방글라데시의 미전도종족
인도, 파키스탄과 비교해 미전도종족 관점에서 방글라데시를 보면, 가장 큰 문제는 방글라데시 미전도종족 사역이 마치 방글라데시 오지에 살고 있는 소수부족을 사역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현상이다. 선교사들이 주류 98%의 벵골족이 아닌 2% 인구에 속하는 쩌끄마족, 하종, 무롱 등 미얀마계 소수부족들, 힌두계 소수부족들을 이들이 사는 원거주지 혹은 오지로 찾아가서 선교하고 있다. 특히 가로족, 산탈(샤오딸)족, 힌두민족 등 벵골족이 아닌 사람들과 현지 파트너십을 이루며 사역하면서 이로 말미암은 한계와 문제가 발생한다. 위에서 언급한 북인도에서의 몽골계 파트너와 파키스탄에서의 쭈르하 종족이란 힌두개종자 파트너와 같은 문화적 걸림돌이다. 벵골계 MBB(Muslim BackgroundBeliever)들이 파트너가 되어야 주류 민족인 벵골 무슬림들을 정조준하여 사역할 수 있다.

또한 주류 벵골족을 선교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선 자립적·토착적·자생적 교회개척과, 지역사회 개발, 교육, 의료, 직업, 비즈니스 선교 등 총체적 사역이 어떻게 상호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한국선교사들이 시니어와 신임 선교사 모두 큰 그림에서 연합하여 사역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서로 공유하는 장(場)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유는 북인도 무슬림, 파키스탄 무슬림사역에 비해 이미 방글라데시는 세 나라 중 한국선교사들의 많은 NGO사역과 교회개척, 신학교 사역이 전개되면서 문제가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이 기독교인이건 무슬림들이건 봉급을 받으며 함께 동역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립하지 못하고 한국선교사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와 관련하여 그 문화 토양에서 자립·자생적 교회가 개척되고 현지 지도자들이 선교적 교회로 세워지는 것에 부합하지 못하다.

방글라데시 뱅골족(Bengali people)

나가는 말
지금까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4개의 키워드에 비추어 고찰해보았다. 첫 번째 키워드 선교사 부분에선 종족, 공동체 중심의 선교, 문화적 맥락에 적합한 선교, 선교기지 접근법의 한계, 한국교회와 선교에 있어 서남아무슬림권이 갖는 의미적 중요성을 몇몇 인물들과 활동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어 두 번째 종교와 정치관계 키워드로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둘러싼 정치, 경제, 종교적 상호작용이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어떻게 얽히고설켜 오늘을 형성시켜 왔는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인도 파키스탄간의 3차에 걸친 전쟁을 중심으로 다루어보았다. 이 권역에서 가장 필요한것은 종교, 정치적 분쟁과 경제적 불평 등 문제의 해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구원과 해방의 복음, 참된 복음적 평화가 필요한 권역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기독교이미지 키워드로는 이 권역에서 기독교 전도와 선교의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이미지 구축과 변화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 향후 서남아무슬림권역의 선교 방향과 관련해서는 네 번째 미전도종족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대안과 비판적 모색을 다루려 한 것이다. 이 권역의 기독교 선교역사, 일반 역사, 미전도종족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조사가 선교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5억의 무슬림들이 이 공간에 ‘미전도종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자료 취합과 추가정보 획득의 시간적인 부족으로 다음 심화 연구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글 | 정보애(SIReNer)

[각주]
(1) 필자와 업마 팀이 현장에서 인터뷰한 자료만 해도 500페이지가 넘는다. 여기에 관련된 단행본, 인터넷 자료 등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정리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2) 도날드 A.맥가브란, 전재옥 역, 「교회성장 이해」,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1987.
(3)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쉽게 말해서 복음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나 나라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그것을 전하고 토착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4) UPMA(미전도종족선교연대), 「미전도종족: 한국 미전도종족선교 성과· 과제·미래협력」, 업마·넷, 2014년 6월. 참조.
(5)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전쟁.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의 숫자만으로도 35개국이 관련됨으로서 이전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전장이 확대된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세계대전(世界對戰)이란 이름이 붙었다. https://mirror.enhakr/wiki
(6)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인한 독일의 붕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적 혼란,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 대한 불안 등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세계 대공황에 따른 경제 위기로 부상한 파시즘과 이에 따른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독일의 반발 및 일본 제국의 보상심리등을 원인으로 본다. https://mirror.enhakr/wik
(7) 조한욱, 「중학교 역사 하」, “현대 세계의 전개 제1 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세계” 서울: 비상교육, 2012.
(8) 1914년 1차 세계대전과 1947년 독립 전후 당시 인도 내에서 무슬림 분포가 많은 주는 다음과 같다. 1) 펀잡주(50%), 2) 벵골주(40%), 3) UP주(30%), 4) 비하르 주(25%), 5) CP주와 마드라스주(각각 15%), 6) 마하라슈트라주 주(뭄바이, 14%)
(9) 당시 발칸지역에서 오스트리아, 터키, 세르비아, 러시아가 미묘한 갈등과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터키는 독일과 동맹하여 연합국과 싸우게 된다.
(10)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 파키스탄 개황, 2011, 외교부 자료 참고.
(11) 당시 영국령 인도에는 565개나 되는 토후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영국의 통치권이 종식되면서 영국은 인도 혹은 파키스탄 중 선택하여 병합되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런 와중에 독립일이 되었지만, 세 개 국가 즉 주나가드(Junagadh), 하이데라바드(Hyderabad), 카슈미르(Kashmir)가 아직 두 나라 중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가드와 하이데라바드는 힌두 다수 주민에 무슬림 지배자 형태였고, 반대로 카슈미르는 무슬림 다수 주민에 힌두 지배자인 마하라자 하리 싱이 다스리던 상황이었다. 결국 마하라자 하리 싱이 인도를 선택하면서 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분쟁이 시작되게 된다. 당시 카슈미르는 약 400만 주민의 77%가 무슬림 상황이었으며, 세 개의 특징적인 문화를 가진 지역 즉 카슈미르 계곡, 잠무 및 라다크로 나뉘어져 있었다. 힌두는 대략 20%, 나머지가 시크교도와 불교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힌두는 대체로 잠무에 몰려 살고 있으며, 체납강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218~309.
(12)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180.
(13) 무하마드 알리 진나(우르두어: ,حانج یلع د محمMuhammad Ali Jinnah, 1876년 12월 25일 ~ 1948년 9월 11일)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인도 이슬람교 정치인,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도한 정치인이며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이다.
(14)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180.
(15) 1947년 8월 카슈미르 지방의 귀속문제가 결정되지 않은 채 파키스탄이 8월 14일 인도보다 하루 먼저 독립하였다. 1947년 10월 인도가 이 지역을 강제 점령함으로써 1948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제1차 전면전이 발발하였다. 1949년 7월 두 나라는 카라치협정을 체결하여 인도가 카슈미르 지방의 2/3, 파키스탄이 나머지 ⅓을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16) 제1차 인파전쟁 때 해결하지 못하고 지속되어 온 복잡한 카슈미르 문제가 16년 만에 다시 폭발해서 제2차 인파전쟁이 발발한다. 1965년 8월 국경지대인 쿠츠에서 양국의 국경수비대 간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제2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 일어났다. 1965년 9월 두 나라가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결의를 수락함으로써 휴전이 성립되었다.
(17) 벵골 지방의 무슬림에 의해 동파키스탄이 세워졌지만, 정치적 실권을 모두 서파키스탄(현재 파키스탄)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1970년 사이클론에 의해 동파키스탄 국토의 대부분이 수몰되어 30만에서 5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기록하자, 서파키스탄에 위치해 있던 중앙 정부의 태만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때문에 동파키스탄에서 독립 운동이 벌어졌고, 그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군이 진압을 시작했다. 그러자 동파키스탄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여, 인도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인도에 대량의 난민을 떠안을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도는 동파키스탄 독립을 위해 개입하였고, 1971년에 세 번째 전면전이 발발했다. 이것을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인도는 압도적인 인원으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주요 전선에서 멀었던 파키스탄은 패배를 하면서 동파키스탄은 1971년 12월,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다.
(18)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77~310.
(19)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223~225
(20) 동서 파키스탄은 “다만 한 가지, 즉 힌두지배에 대한 공포 외에는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파키스탄이 존재하는 것, 하나의 국가로서 생존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두려움 때문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서파키스탄은 본질적으로 중동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동벵골보다는 이란이나 이라크와 공통점이 더 많다. “라고 지적했다.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 360.
(21)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 362.
(22) 동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인도에 속한 콜카타, 서벵골까지 포함하면 벵골어 사용자는 3억 정도가 된다.
(23)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360~362
(24)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360~362
(25)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368
(26)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362~384
(27) 조길태 저, 「인도와 파키스탄」, pp. 394
(28) 당초 벵골인의 서파키스탄에 대한 불만을 민족주의운동으로 유도했던 것이 인도였다. 서파키스탄의 동파키스탄(동벵골)에 대한 압박으로 인하여 엄청난 숫자의 벵골인 피난민들이 인도 국경을 넘어 들어오자 가난한 인도로서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인도로서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통해 동벵골 지방을 분리 독립시키는 것이 신속하고 경제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약 1000만 명에 육박하는 피난민을 인도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파키스탄 문제를 놓고 인도를 비롯한 강대국의 서로 다른 미묘한 입장이 표출되기도 했다. 중국만 파키스탄의 편을 들었으며, 이후 계속적인 우방관계를 형성해오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탄생은 인도의 치밀한 구도 아래서 전개된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결과였다.
(29) 2014년 3월 업마 현장리서치 현장선교사 인터뷰정리 자료집, 미간행.
(30) 위와 같음.
(31) 위와 같음.
(32) 파이슬라마바드(Faisalabad), 하이드라바드(Hyderabad), 카라치(Karachi), 라호르(Lahore), 물탄(Multan), 페샤와르(Peshawar), 라이윈드(Raiwind), 시알콧(Sialkot). 시알콧만 해도 4만명 성도, 45개 교회를 갖고 있다.
(33) 파이슬라마바드(Faisalabad), 하이드라바드(Hyderabad), 카라치(Karachi), 라호르(Lahore), 물탄(Multan), 페샤와르(Peshawar), 라이윈드(Raiwind), 시알콧(Sialkot). 시알콧만 해도 4만명 성도, 45개 교회를 갖고 있다.
(34) 2014년 3월 업마 현장리서치 현장선교사 인터뷰정리 자료집, 미간행
(35) 위와 같음.
(36) 만민중앙교회만민뉴스, blog.naver.com/sys0691/20155678901
(37) 만민뉴스 보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제되었다. “당회장 이재록 목사는 ‘2000 파키스탄 연합대성회’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참된 구세주 되심을 선포해 많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성회는 회교권 기독교 역사상 전무한 초교파 대규모 집회로 기록됐다.” “이후 파키스탄에서 지속적으로 목회자 세미나 및 손수건 집회가 열렸는데, 길 목사는 파키스탄을 13차례 방문해 11개 도시에서 세미나 및 집회를 인도했다.” “더불어 GCN(세계기독방송네트워크) 방송과 당회장 이재록 목사의 신앙 서적, 우르두어 만민뉴스, MIS(만민국제신학교) 강좌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하게 선교가 이뤄지고 있다. 그 중 성결 복음과 권능의 역사가 담긴 GCN 방송 프로그램은 파키스탄 위성방송인 이삭 TV(사장 안와 파잘 목사) 및 이와 연결된 253개 케이블 방송을 통해 73개 도시에 전파되고 있다. 이에 많은 회교도가 개종함은 물론 인근 국가에도 선교가 이뤄지고 있다.” blog.naver.com/sys0691/20155678901
(38) 2014년 3월 업마 현장리서치 현장선교사 인터뷰정리 자료집, 미간행
(39) 위와 같음.
(40) 2014년 3월 업마 현장리서치 현장선교사 인터뷰정리 자료집, 미간행
(41) 2012년 제1회 인도선교전략포럼에서 공식적으로 약 천명의 선교사가 있다고 보고되었다. 당시 30년차 인도 선교 사가 4명, 29∼20년차 선교사가 7명, 19∼15년차 선교사 30명, 14년차 미만의 선교사가 950명 이었고, 200명 정도는 7년차 이상이며, 750명이 7년차 미만이다. 2012년 이후 증가한 수와 소속이 없이 나온 선교사의 수를 합하면 약 1,5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한다. 업마, 「IMPAC_서남아무슬림권역」, “인도 무슬림의 이해와 선교현황 및 전략 제안”, 2014. 11월
(42) 전재옥,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경계를 넘어 만난 이슬람」,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 211.
(43) 전재옥,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경계를 넘어 만난 이슬람」, p. 214.
(44) 파키스탄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처음 만들었다.
(45) 아프칸족은 다르게 파슈톤, 파슈톤 파탄족으로 불린다.
(46) 위키백과
(47) 위키백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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