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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8) 복음과 사도, 그 열정과 고난 사이 (사도행전 20:24)

성경이 말하는 CAS
Web JOURNAL   24호 2020. 11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함께 총독 벨릭스의 법정 앞에 사도 바울을 고소합니다. 변호사 더둘로의 고소 첫 대목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5절입니다. 그는 바울을 가리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작부터 우리가 존경해마지않는 사도 바울 선생님을 향해 너무 원색적이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심기가 불편하신가요? 그러나 표현이 거칠기는 하지만, 이 고소 내용은 결코 터무니없는 말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한 번 보시죠. 이 더둘로는 변호사입니다. 유대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고소를 위해 고용한 법률 전문가인 것이죠. 이 유대 땅에서 아나니아 같은 거물급 인사가 아무나 변호사로 선임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당대 손꼽히는 실력있는 변호사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법정은 지역 최상위 법정인 로마 총독 벨릭스가 주재하는 법정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나 장로들은 바울에게 워낙 종교적인 분노가 쌓여있으니, 감정적인 말이나 근거 없는 비난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금 서있는 이 법정에서는 그러 한 말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법정에서는 법정에서 통하는 객관적 근거에 입각한 사실관계와 논리적인 진술방법이 필요한 것이죠. 변호사 더둘로는 이들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세운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지금 이 법정에서의 변론 첫 대목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다시 이성적으로 살펴보면, 사뭇 다른 관점에서 보이는 면들이 있습니다. 더둘로의 진술에 담긴 의도에 대한 해석은 달리 하더라도, 이 진술은 적어도 사도 바울과 그 선교팀들이 행한 선교 활동들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이고 신빙성 있는 진술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말이 “전염병 같은”이라는 말입니다. 이 전염병 같다는 말은 더둘로가 법률가로서 바울에게서 객관적으로 고소할만한 혐의를 찾으려고 그의 행적을 살펴보다가 그 특징을 파악하고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 달리, 이 표현은 마침 복음이 갖는 아주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잘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과 선교를 병에 비유하자면 세상을 정복할 만큼 강력하지만, 암과는 다릅니다. 암은 혼자 아픈 병인데, 이 더둘로가 바울의 선교를 가리켜 말한 전염병은 어떻습니까? 혼자 앓고 마는 병이 아니고 근처에 있는 사람을 다 전염시켜 다 똑같이 그 병에 걸리게 만드는 것이 전염병입니다. 더둘로는 최고 수준의 변호사답게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정확히 본 것입니다.

바울과 그 선교팀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듣는 자들 중 상당수가 주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예수를 믿은 자들이다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들도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복음을 전했고, 또 똑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것이죠.

물론 더둘로는 아나니야와 장로들처럼 그 일이 반 유대교적이고, 유대 종교 사회에 매우 위협적인 이단 행위라고 해석했겠지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가장 공포스럽고 꺼려하는 전염병이라는 키워드를 꺼낸 것이겠지만,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법률가답게 그 본질을 아주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과 선교가 본질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전염병에 비견될 만한 엄청난 전파력이고 확산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으로 ‘우리는 전염병 같은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반대자들이 공격하느라 한 말이 공교롭게도 우리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듣고 예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누린 분이시라면, 여러분은 이미 그 전염병 보균자들입니다. 특히 오늘 이 복음의 좋은 균과 열이 많이 담긴 이 선교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선교 전염병 보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줄 모르고 있는 분들이라도 아직 잠복기라서 모르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선교, 선교’ 하고, 성경을 열면 이제 선교만 보이고 그렇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그렇게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증거’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복음을 소유한자였기 때문에 그 복음의 본질대로 가는 곳마다 그렇게 전염병처럼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말년에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처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기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눈에 박히듯, 귀에 박히듯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사명”이고, 다음이 “증언(증거)”이고, 마지막이 “생명”입니다. 사실 문맥상 생명은 ‘죽음’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도로서 바울의 삶을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였습니다. 오늘은 이 전염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사명 곧 복음 증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도의 삶과 사역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출처: unsplash.com

1. 사도적 열정
오늘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사도적 열정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성경적으로 초대교회 이후 종료된 직분이지만, 우리는 바울과 같은 이러한 사도적 삶과 사역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전염성을 가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사도적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이 헬라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에서 온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그래서 사도적 열정을 가졌다는 것은 자신의 열정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열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만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즘 우리가 쓰는 선교사(Missionary)라는 말도 사도와 동일한 의미의 라틴어 ‘미토(Mitto)’, 즉 ‘보내다’라는 의미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선교사는 이 사도적 열정을 가진 사람, 즉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세계 비전입니다. 이것을 합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세계를 품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은 비전과 열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신 다윗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에 합한’이라는 말은 ‘마음에 맞는’, ‘그 뜻에 합당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다윗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양 똥이나 치우던 목동을 불러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 또 왕의 사위로, 결국 왕으로까지 세우시고, 더욱 영광된 것은 그를 하나님 나라, 오실 메시아의 예표가 되는 인물로 세워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셨고 좋아하셨는지 아십니까? 시편 108편 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여기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온 땅에서, ‘on whole world’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비전은 세계적이고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열정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세계를 품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인데, 다윗만 그렇게 되라는 법 있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 번 따라 해 보면 좋겠습니다. 맨 끝에 다윗 대신에 자기 이름으로 바꿔서 한번 해봅시다. “하나님의(하나님의), 영광에 대한(영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열정에 사로잡힌), 세계를 품은(세계를 품은), OOO.”

자,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선포했습니다. 모두 다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보십시오,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지금 선포한 이 비전이 여러분의 생각을 항상 지배하도록 합시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서 의식이 돌아올 때, 마치 컴퓨터가 부팅되면서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이 함께 작동이 돼서 안전하게 컴퓨터를 컨트롤하는 것처럼 우리 생각이 이 비전으로 항상 지배되도록 이 비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세계를 품은 OOO’ 매일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내고 동기부여하면, 하나님이 보시고 ‘야,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이고, 복음의 본질 그대로 선교의 전염병이 걸린 사람입니다.

2. 사도적 고난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사도적 고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 즉 사도적 열정에 사로잡힌 세계를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역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겪어야만하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 그것이 바로 사도적 고난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극치가 죽음이라는 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은 결코 그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열매로 반드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회피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꺼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되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략이 무엇일까요? 바로 ‘진리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진리를 말하고, 죽으면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때 사탄은 패배합니다. 여기 핵심 포인트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사랑하면서 그리고 다음, 성경 진리를 말하고, 마지막 사람들이 나를 죽일 때 기꺼이 죽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경우들이 많은데,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리만 말하는 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그 진리로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참된 승리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국경일에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처음으로 전해질 때에 있었던 일을 드라마로 보여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어떤 무슬림이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하다가 핍박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무슬림이 고난을 당하면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 지르면서 저주하고 저항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슬람은 기독교 흉내도 못 내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그런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핍박 받을 때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하나님 저들이 몰라서 그럽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저들을 구원해주세요.’ 당연히이렇게 만들었을 게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도적 고난과 그로 말미암는 승리는 ‘사랑하면서, 진리를 말하고, 기꺼이 복음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죽음, 순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으실 때에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를 보여주는 분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을 보면 24장로와 네 생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기록 되어 있는데,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 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 이들이 누구입니까?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어 성경에 ‘각’이라는 단어는 ‘every’로 표현해서, ‘every tribe’, 즉 ‘전 세계 모든 종족’ 가운데 예수님이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구절에 의하면 아직은 미전도종족이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무려 전 세계 종족 중 42% 가까운 그 종족들 가운데에도 구원받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 사람들이 고스라니 다 구원받고 다 모이도록 되어있고. 7장 9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있을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모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인데 5장 9절에 예수님이 대신 벌 받아 죽어주신 사람들은 그대로 다 구원받고 다 모여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하심이 ○○ 선교사에게 있도다 입니까? 아니지요.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 이 선교를 창세기 12장 1~3절 처음부터 선교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하나님과 그 어린 양, 우리 죄를 위하여 실제로 자기 피 흘려 죽으시면서 구원하신 어린 양. 그 분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지막에 고백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내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6장 9절에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이 구절에서의 “그들이 가진 증거”는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이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은 복음 전하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절에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어느 때까지입니까?

자, 그 전에 성경은 하나님이 언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까? 세상 끝날이 언제 옵니까?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즉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야 끝이 오는데, 지금 이들이 물을 때에 하나님이 11절에 대답하십니다.

11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 때문에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자의 수가 차는 날이 바로 세계복음화가 완성되는 날이고 세상 끝날 날이 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것과 함께, 그로 말미암는 순교자의 수가 차는 일이 필요한데 이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자, 여기 사도행전 1장 8절에 ‘증인’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마르티레스’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의 원형이 ‘마르티스’입니다. 이와 동일한 어원에서 온 영어 단어 ‘martyr’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순교자’입니다. 즉 증인은 자기가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생명까지도 거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세상 끝 날이 온다고 했는데 요한계시록 6장 9절-11절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수가 채워질 때에세상 끝날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즉 세상 끝날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생명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의 수가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람들이 불쌍합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게 되어 있지만, 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 우리들이 유한한 생애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심판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죽는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이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사람들이지 결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불쌍한 사람입니까? 바울이 불쌍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 영원한 상을 위하여 이 유한한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복 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고난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십자가 복음 때문에 그 사랑으로 그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지만, 그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미전도종족, 미전도된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랑과 진리를 증명해내기 위해 기꺼이 죽은 것입니다. 사도적 열정이 자신의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것이었던 것처럼, 사도적 고난 또한 그 보내신 자를 위한 고난이며, 그 보내신 자를 위한 죽음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엄청난 복음의 전염성을 가진 자들만이 갖는 특징입니다.

이를 가장 잘 증거하며 살다가 역시 순교로서 증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적 열정과 사도적 고난으로 복음을 증명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 가운데 열매 맺히게 한 그의 삶, 역시 동일한 복음을 소유한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아닌 줄 믿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복음으로, 동일한 구원의 감격을 누린 자라면, 동일하게 우리의 삶과 죽음 역시 사도적 열정과 사도적 고난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사명으로 살고 죽는 증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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