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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무슬림의 이해와 선교현황 및 전략 제안(1)

이슈 인사이드
Web JOURNAL  24호 2020. 11

들어가는 말
인도는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간직한 나라일 뿐 아니라 세계 4대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생지이다. 이뿐 아니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12억 인구(2011)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경제적으로는 BRICs 중 한 멤버로서 막강한 경제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단 한 번의 시도로 화성 탐사선을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할 정도로 과학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부하고 있다.

인도는 전 세계에서 8번째로 기독교인이 많은 국가이다. 2001년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2.3%인 2천4백만 명이 있었는데, 2010년 개정된 세계기도정보(OperationWorld)는 인도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8%인 7천백만 명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는 연 성장률이 4%에 이르는 빠른 성장이다. 선교역사 또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1793년 인도에 도착한 날로부터 계산하면 약 221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인도에는 아직도 2,033개의 미전도종족(Joshua Project, 2014. 10)이 있다. 이중 371개 종족 약 2억 명이 무슬림이다. 이들은 인도 내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 되어있을 뿐 아니라, 세계 이슬람 선교의 대상에서도 여전히 소외되어 있다(1).

인도의 무슬림은 한때 무굴제국을 통하여 인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주도적인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현대 인도가 자랑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아그라 요새, 타지마할, 꾸틉 미나르, 후마윤의 묘지, 붉은 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들의 산물이며 특히 그들의 문학과 예술은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하였다. 인도 무슬림은 인도적 특수 상황에서 타 지역의 무슬림과는 다른 성격을 갖추어 왔다. 그들은 다원 복합적인 인도 사회에서 힌두 중심의 정치 사회적 환경과 변화를 수용하며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과 대립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2억의 인구를 가진 무슬림은 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소수자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면서도 힌두 우익 세력의 정치적 압박과 사회경제적으로 낙오된 열악한 환경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형성 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 인도의 종교집단 간 갈등에서 비롯되는 사회정치적 소요와 논란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그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도 사회를 힌두 중심에서 벗어난 보다 균형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2).

선교적 측면에서 인도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세계 무슬림 인구의 ⅓ 이상이 동일 이슬람 문화를 가진 서남아권(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에 살고 있고, 인도에는 약 2억 명에 달아는 무슬림이 살고 있다. 인도를 제외하고 이슬람권 선교를 논할 수는 없다. 둘째, 인도 무슬림은 선교적으로 소외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 Group)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이다. 여호수아 프로젝트(2014년 10월, joshua.project.net)에 의하면 인도 내에 총 2,256 종족 그룹이 있고, 이 중 2,033종족이 미전도종족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중 371개의 미전도종족(159,250,170 명)이 무슬림들이다.

FTT(Finishing The Task, UUPG.com, 한국어 FTT.kr) 2014년 8월 배포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 659 종족(400,814,500명)이 미개척 미전도종족(Unengaged Unreached People Group)이 있고, 그 중 182종족(275,158,500명)이 인도에 있으며, 그 중 이슬람교를 믿는 35종족(104,983,000)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3). 셋째로 한국 선교사들이 가지는 강점(언어, 제자훈련, 교회개척(4)을 활용하여 인도 교회와 선교단체를 도와 무슬림 선교를 감당해야 한다.

인도 무슬림 선교를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무슬림과는 다른 독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드러나는 현상들만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를 통해서 그들의 정체성과 흔적을 발견하고, 근현대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인도 내 무슬림들의 삶을 올바로 이해할 뿐 아니라 바르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인도 무슬림을 위한 선교사역의 현황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도 사역자들의 현황, 서구 단체들의 사역 현황,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 현황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선교 단체와 교회, 개인 차원에서의 선교 전략에 대해서 제안한다.

본 자료는 인도 무슬림의 역사적 관계를 서술함에 있어서 인도 연구소(구남아시아연구소, www.isas.co.kr)를 통해서 발표된 자료들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5). 이 글에서 무슬림 종파 및 신앙적 특징 그리고 카스트에 대한 주제는 다루지 않았는데, 무슬림 종파별 성격은 이슬람 세계에서 공통으로 다뤄야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고, 인도 무슬림 카스트에 대한 부분은 실제 무슬림 선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6).

인도 무슬림을 위한 선교 현황의 정리는 필자가 선교 현장에서 리서치와 네트워크 사역(7)을 하면서 습득한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생생한 살아있는 자료들이지만 동시에 인식의 한계와 보안을 중시하는 사역의 특성상 정보 수집의 한계가 있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다양한 선교 현장의 자료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기를 기대한다.

출처: wikipedia

1. 인도 무슬림 이해
인도 무슬림의 정체성은 종교, 혈통, 지역, 언어, 카스트, 직업 등 다양한 요소로 형성되어 있어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무슬림 공동체이자, 인도 내 15% 이상의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 제일 거대한 마이너리티이면서도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지 못한 약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인도 역사 속에서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 무슬림의 과거(무굴제국, 영국 식민지, 인도-파키스탄 분리)와 현재 인도 내 무슬림으로 나눠서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1) 인도 무슬림의 과거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는 무슬림들이 인도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영국 식민지화가 되면서 무슬림들의 입지는 변화가 생기게 되었고, 인도가 독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힌두와 무슬림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1) 인도의 지배자-무굴(Mughal) 제국(8)
인도에 이슬람이 소개된 시기는 약 7세기 경 아랍 상인들이 남인도를 중심으로 진출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8세기 초부터 무슬림들이 침입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서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범위하게 인도 전역을 지배했던 세력은 아랍 계통이 아닌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계통의 무슬림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무굴제국(1526-1857)이다. 무굴제국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의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무굴황제 중 악바르(Akbar,1556-1605)는 모든 백성에 공평한 조세를 부과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힌두 성지의 수례세도 폐지했다. 그는 남부 데칸 지역을 제외한 북인도 전역을 정복하면서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뤘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했다.

악바르는 무슬림뿐 아니라 힌두들도 관료로 기용하여 계급과 신앙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9). 또한 혼인 동맹(10)과 타 종교인에 대한 인두세(지즈야)도 폐지하는 등 타협과 공존의 시도를 계속했다. 그는 다른 종교들-힌두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심지어 기독교와도 접촉(11)을 시도했다.

자항기르(Jahangir, 1605-1627)는 악바르와 라지푸트 족 공주인 조다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다. 그는 악바르에 이어 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이 시기 시크가 자항기르의 장남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제국 역사 내내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제5대 황제인 샤자한(Shah Jahan, 1627-1657)은 오늘날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지 타지마할(12)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일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고 국력도 쇠퇴하게 되어서 신임을 잃게 된다. 그의 아들인 아우랑 제부에 의해서 폐위 되고 유배가 되었다.

아우랑 제부는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남인도를 정복하여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이룩했을 뿐 아니라 독실한 이슬람교의 신자로서 ‘살아 있는 성자’라고 불렸다. 그는 지금까지 종교 융화책으로 폐지했던 인두세를 다시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힌두교도 및 시크교도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사용했다(힌두교 사원 파괴 및 비 이슬람교도 차별).

이는 제국의 심각한 분열을 가져왔고, 데칸 고원에서 힌두교도들이 ‘마라타 동맹’을 체결해 저항했고, 펀잡 지역의 시크교들도 저항했다. 이로 인해 무굴제국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고 동시에 지방 토호 세력들이 강해졌다. 무굴제국은 19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의 델리 침공으로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사실상 폐망했다. 이 틈을 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지배가 시작된다.

무굴 제국 시기에 형성된 문화는 인도 역사에서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건축(타지마할, 붉은 성, 아그라 포트), 문학(우르두 시), 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 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도 무슬림에게 있어서 무굴제국의 유산은 자신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주도 세력인 힌두 교도들에게 있어서 무굴제국의 역사 속에 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것을 발견할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악바르와 그의 재상 비르발의 이야기와 악바르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 융화 정책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 인도는 하나의 국가 아래 있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국민으로서의 역할 강조하는데, 이에 걸맞은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악바르를 재조명하고 있다(13).

특별히 오늘날 인도 무슬림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닌 원래 인도에 살고 있던 힌두교나 다른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었다. 주로 무굴제국 하에서 상업에 종사했던 상공업 계급(예, 안사리 종족)과 농노 계층을 중심으로 한 하층 민중이 세금 감면 혜택을 위해서 무슬림으로 개종했다(14).

무굴제국 시대를 보여주는 러크나우(Lucknow) 바라 이맘바라(Bara Imambara), 출처: unsplash.com

2) 저항하는 무슬림-영국 식민지
영국은 16세기 이후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인도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을 시작하였고, 이후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였다. 18세기 초 무굴제국은 대항하는 여러 지방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분열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시기 인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가다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찌르고 벵골과 오리사, 비하르를 지배하게 된다. 이후 동인도 회사는 인도인으로 구성된 유럽식 군인 용병인 세포이를 양성하면서 인도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후 1799년에 마이소르를, 1805년에 마라타 동맹을 해체하고, 1843년에 신드(파키스탄의 신드 주)를 합병하고, 1849년에 펀잡을 병합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면서 무굴 제국의 황제는 실제적인 지배력이 없는 상태로 약화되었다. 세포이 대폭동(15)이후 영국이 무굴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서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1858년 영국은 직접 통치를 위해 빅토리아여왕을 인도의 황제로 즉위시켜 영국령 인도 제국을 선포한다. 그 이후 인도를 발판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과 미얀마를 인도 제국에 합병했다.

이 시기 인도 무슬림들은 울라마(Ulama, 이슬람 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사회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세기 초의 대표적인 운동으로는 파라이지(Faraizi)(16)와 와하비(Wahabi)(17)운동을 들 수 있다(18). 이 운동들은 기본적으로 비이슬람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이슬람 정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지주와 영국인 인디고 농장주들로부터 소작인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영국에 저항하는 정치적 세력으로서 발전하였으나 영국의 통치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결국 정치적 현실을 극복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무슬림들에 대한 영국의 견제와 차별을 불러왔다.

이 시기 힌두교도 들은 영국의 통치를 다만 통치자의 교체로 받아들였기에 영국식 영어 교육을 비롯한 새로운 시대 조류에 부합하여 성장 하였고 지배세력으로 성장한다(19). 하지만 무슬림들은 우르두어(Urdu) 사용을 금지 당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굴욕으로 생각하였다. 식민 지배 하에서 영어교육의 확대는 무굴 제국 하에서 지니고 있던 사회 신분 계층의 큰 변화를 가져 왔는데, 이전에는 무슬림 귀족이나 브라만들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이 폭넓은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침체된 무슬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데오반드 학교(Deoband, 1867)(20)와 알리가르(Aligarh, 1877)학교(21)가 설립된다. 데오반드 학교의 목표는 울라마(이슬람 법학자)와 일반 무슬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무슬림 집단에게 본래의 문화 및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저항하는 것과 근대화 교육을 수용하지 못한 점은 식민지하에서 무슬림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오반디(Deobandi, www.deoband.org 참조)는 인도-파키스탄 독립 이후 파키스탄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고 그 영향력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국, 그리고 영국까지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리가르 학교는 사이드 아흐메드 칸(Sayyid Ahmed Khan, 1817-1898)(22)이 설립했으며, 무슬림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위해서 중산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서양학문과 이슬람 사상을 가르쳤으며, 영어와 우르두어(Urdu)를 둘 다 사용했다. 이후에 알리가르 학교는 이슬람 부흥운동인 알리가르 운동을 전개하는 구심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파키스탄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3) 갈등의 표출-인도 독립과 파키스탄 분리
1885년 뭄바이에서 인도 국민회의가 출범했는데 초기72명 중 힌두가 54명, 무슬림은 2명뿐이었다. 주로 고위층과 지식층 중심으로 영구의 인도 통치에 협력하기 위한 조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1905년 영국이 벵골 지역의 힌두교도(비하르, 오리사)와 이슬람교도(동벵골, 아쌈)를 분리시킬 때부터 영국 제품불매운동을 주동하며 보다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 전인도 이슬람 연맹이 설립되고, 1916년 러크나우에서 열린 양측의 연례 총회에서 국민회의-이슬람의 동맹 계획이 각각 승인되었다. 이 시기에 간디가 합류하여 인도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무슬림들의 사상적 지도자로서는 이크발(Muhammad Iqbal, 1877-1938)과 아자드(Maulana Abul Kalam Azad,1888-1958)를 들 수 있다. 이크발은 영국에서 공부한 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중세 수피즘의 부정적이고 비아랍적인 형태와 서양의 기술문명에 눌려버린 이슬람의 영적 이미지를 예언자 무함마드와 코란을 통해 복원하고자 했고, 독립된 이슬람 국가를 건설을 원했다. 파키스탄이 독립함으로써 그의 소망은 실현되었다.

아자드는 범이슬람적 신념과 인도 민족주의를 결부시켜 킬라파트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운동이 실패한 후 간디와 더불어 인도 민족주의의 대표자로 활동하였다. 독립 이후 인도에 남게 된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면에서 아자드의 메시지와 인격에 의존하였다.

영국에서 독립할 때 간디는 분할되지 않는 한 나라를 원했지만 그의 소원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미 영국의 벵골 분할 이후 무슬림과 힌두는 별개의 집단이라는 인식이 증폭 되다가 결국 독립과정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독립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이후 1937년의 선거 참패로 인해 무슬림들의 정치적 힘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한 진나는 결국 무슬림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23). 다른 지도자들 역시 인도와 파키스탄의 두 국가로 분할하는 것에 대해서 지지했다.

결국 1947년 7월 17일 영국 의회에서 인도 독립법안이 통과되어 영국령 인도는 두 개의 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24). 분리 독립을 하면서 파키스탄 지역에 있던 힌두들은 인도 지역으로, 또 인도 지역에 있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지금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합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아픔을 겪게 된다(25). 또한 땅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인 잠무 카슈미르(Jammuand Kashmir) 왕(힌두)이 인도에 합병을 선언하면서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인도에 남겨진 무슬림의 입지는 더 고립되었다.

1940년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 진나는 중앙에 자리 잡고있다, 출처: wikpedia

(2) 인도 무슬림의 현재
인도 무슬림은 인도 내에서 바다에있는 외딴 섬 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하기에는 거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현실이다. 더구나 같은 이슬람 안에서 형제라고 생각하는 파키스탄과의 관계 때문에 힌두들로부터 의심스러운 눈으로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 현실에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닌 절실한 삶의 필요들이다.

힌두 카스트 중 낮은 계층과 같은 수준의 삶과 대접을 받고 살고 있지만 정작 사회 속에서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무슬림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실속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갈등의 역사 속에서 안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뭉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게토화(ghettoization)가 이제는 인도에서 가난과 고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인도 무슬림과 주 세력인 힌두들과의 긴장관계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인도 무슬림은 생존 자체를 위해서 이같은 어려운 난제를 풀어야만 한다.

1) 마이너리티(26) & 미니 파키스탄
인도-파키스탄 분리 당시 약 800만 명의 무슬림들이 고향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이들 대부분은 상층의 무슬림들이었다. 결국 인도에 남게 된10% 정도의 무슬림들은 대부분은 힌두에서 개종한 사회 하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인도 무슬림의 90%)은 소규모의 농부, 장인, 그리고 노무자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와 교육에서 낙오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27)독립 전 당시 정치는 국민회의와 전인도 이슬람 연맹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전인도 이슬람연맹에서 활동했고, 극히 소수의 무슬림들만 국민회의에 참여했었다. 인도·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전인도 이슬람 연맹에 소속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키스탄으로 떠나버리고 극소수의 무슬림 정치인들만 국민회의당(INC)에 남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인도 첫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아자드(Maulana Abdul Kalani Azad)를 들 수 있다. 국민회의당(INC)은 세속주의적 정책을 견지하여 정부 고위직에 무슬림들을 임명했고, 힌두 국수주의자들은 국민회의당(INC)을 ‘친 무슬림 정당’으로 규정하여 더욱 공격적인 종파 감정을 선동하였다. 하지만 인도 내 국수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89년부터는 국민회의당(INC)도 점차 종파주의를 정치에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무슬림들 자신들이 정상적인 상황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공권력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28).

힌두 심벌‘卍’이 교과서나 대중매체의 상징물로 자주 등장하고, 무슬림들도 힌두 관습을 용인해야 한다는 힌두 국수주의자들의 위협, 그리고 우르두(Urdu)어의 몰락(29)등의 각종 사회현상에서 무슬림의 공포심이 시작되었다(30)이러한 국수주의의 흐름에 맞춰 등장한 민족지원병군단(Rashtriya Swayamsevak Sangh, 이하 RSS)은 무슬림과 소수자를 옹호하는 간디를 반 힌두주의자로 생각하여 암살하였고, 이후 해체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현재 인도의 정권을 지배한 인도인민당(BJP)의 배후 세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힌두협회(Vishva Hindu Parishad: VHP)는 일종의 힌두 종파단체의 연합세력이며 현재로서는 최강의 단체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힌두 뜨바(Hindutva) 운동(31)을 확산시키면서 힌두·무슬림 간의 갈등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들로 인해서 발생된 야요다(Ayodhya, 1992) 사태나 구자라트 폭동(2012) 사태는 그렇잖아도 위축되고 있는 무슬림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힌두 국수주의자들에게 대항한 무슬림 종파단체도 공개적이고 대규모는 아니지만 무슬림 거주 지역에 산재해 있다. 경제적 후진성 그리고 사회 진출기회에서의 불평등에 대한 무슬림들의 일반적인 불만을 기반으로 새로운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경제 발전의 이익은 모두 다수 힌두들에게 돌아가고 무슬림들은 힌두들의 ‘무슬림 말살 정책’에 의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박해받고 있으며 결국 무슬림은 ‘인도의 2등 시민’으로 전략해 버렸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32). 하지만 정작 대다수의 무슬림들의 고민은 그들의 실제적 삶과 더 연관이 있어 보인다.

2014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무슬림들은 구자라트에서 발생했던 무슬림 학살에서 무슬림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던 인도인민당(BJP)의 나렌드라 모디(Narandra Modi)를 지지했다. 이는 지금까지 국민회의당(INC)을 적극 지지했던 태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여전히 딜레마가 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더 줄 수 있는 정당을 택한 것이다(33).

무슬림에 대한 대다수 힌두들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힌두 국수주의자들이 심어 놓은 부정적인 인식들은 진실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무슬림은 인도·파키스탄의 대립 관계 속에서 인도 내 ‘미니 파키스탄’ 또는 ‘간첩’으로 인식된다. 또한 대부분의 힌두들은 무슬림들과 관계를 형성하기를 꺼린다(34). 현실적으로 인도 무슬림은 약 90% 정도가 일차산업에 종사하고, 교육에 소외되어있어서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35). 대부분 힌두에서 개종한 인도 기독교인들도 힌두들과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인도 무슬림을 위한 선교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다(36).

2) Mandal(직업할당제, Other Backward Caste)과 이슬람 전사(Mujahidin)
인도는 헌법상으로는 카스트의 차별을 금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 간극이 존재하기에 사회 약자를 위한 특례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이 제도를 만달(Mandal) 정책이라고 한다. 1979년 자나따(Janata)당 정권은 낙후 카스트들의 사회적·정치적 지위 신장을 도모하여 위하여 만달(B. Mandal)을 위원장으로 한정부위원회를 구성했고, 1981년 만달 보고서(Mandal Report)를 제출한다. 하지만 이후 국민회의 당이 집권하면서 처리되지 못하다가 1990년에 이르러 자나따 달(Janata Dal) 정부의 수상인 쁘라탑 싱(Vishwanath Pratap Singh)에 의해 정책화되었다.

기본적으로 할당제도 적용의 대상에는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s), 지정 부족(Scheduled Tribes) 그리고 기타 후진계층(Other Backward Classes)이 포함된다. 지정 카스트는 단지 힌두교와 관련이 있으며(37) 지정 부족은 문화와 공간적으로 격리된 특정 부족들을, 그리고 기타 후진계층은 천민은 아니지만 사회와 교육의 측면에서 하층에 속하는 계층이나 공동체를 포함한다.

만달보고서는 정부와 교육의 좌석 중 27%를 기타 후진계층을 위해 할당할 것을 권고 하였으며, 80여 개의 무슬림 자띠(Jati)를 후진계층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오랜 논의 끝에 실행 안에서는 무슬림 공동체들이 기타 후진계층에 포함되지 않았다.

지정 카스트 할당 제도에서 배제된 무슬림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90년대에 하층 무슬림의 이익에 부응하는 일련의 조직들이 형성되었으며 대표적으로 전인도무슬림 기구 OBC(All India Muslim OBC Organization)와 전인도 후진계층 무슬림 전선 등이 무슬림들의(All IndiaBackward Muslim Morcha) 지정 카스트 편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를 계기로 무슬림들 중에서 하층의 무슬림만을 포함하는 달리트 무슬림의 정체성이 부각되었으며 이는 무슬림 전체를 동질적 단일집단으로 보던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엘리트 무슬림조직이 전체 무슬림을 위한 할당지분을 위해 노력한데 반해, 달리트 무슬림운동은 종교적 구분을 떠나 천민 또는 하층계급을 위한 혜택을 추구하였다. 이는 무슬림 차별에 대해 도전하는 동시에 기존의 무슬림 지도부와 그들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온 무슬림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층의 힌두가 차별을 피하기 위해 개종을 모색한 데 반해 하층의 무슬림은 직업 할당제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종교와 달리트(Dalit) 신분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입장에 선 것이다.

현재 인도 무슬림들이 당면한 현실은 무척 냉혹하다. 최대의 세속 정당인 국민회의당도 더 이상 그들의 안전과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없고, 무슬림의 권익을 대변하는 전국 규모의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수 집단인 힌두들을 의지하거나 아니면 이슬람 전사(Mujahidin)가 되어 힌두에 대항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38).

현재 인도 무슬림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처해 있다. 문맹률도 높을 뿐 아니라 자녀들의 취학률도 전국평균에 훨씬 못 미친다. 특이한 점은 자영업의 경우 전국 평균 및 힌두보다 높다(39). 이는 상대적으로 무슬림 중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또 취업이 힘든 무슬림의 현실을 대변해준다고 볼 수 있다. 정부 공무원의 경우도 힌두는 92%이지만 무슬림은3%밖에 되지 않는다(2004)(40).

이처럼 힌두에 비해 많은 면에서 열악한 환경에 있는 하층 무슬림들은 종교의 고매한 이론보다는 현실적 결핍에 반응하고 있고, 전통적인 교리에 어긋나더라도 다수 힌두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60여 년의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다.

인도 무슬림, 출처: unsplash.com

3) 다산을 통한 세력 확장과 강화되는 게토화(ghettoization)
인도·파키스탄 분립 이전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24%를 차지하는 9,200만명에 달했지만 분리된 후에는 인도 인구의 10%에 불과한 약 4,000만 명만이 무슬림이었다. 그들은 독립 전보다 훨씬 불리한 소수종파 세력이 되었고 정치, 경제, 교육 분야의 무슬림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으므로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성할 능력조차도 없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출산을 장려하여 이 같은 어려움을 만회하려 하고있다. 하지만 이는 인도 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힌두·무슬림 불화의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41).

2001년 인구조사 발표 당시 힌두교 80.5%, 무슬림 13.4%, 기독교 2.3%, 시크교 1.9% 등이었다. 힌두 종파주의자들은 힌두교가 80% 이상인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인도 정부는 2001년 이후부터 각 종교별 인구의 수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인도 내 힌두교인의 인구 비율이 80% 이하로 감소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를 한다. 2011년 인구조사 결과 인도의 전체 인구는 12억 명이 넘는다. 인도 내 힌두들의 인구 증가율은 5%정도인데 반해 무슬림들의 인구 증가율은 10%이다. 따라서 최소한 현재 무슬림 인구는 14.5% 이상인 1억 7천만 이상, 최대 22% 이하인 2억 6천만 명 이상으로 볼 수 있다(42).

인도의 지역별 전체 인구 대비 무슬림 인구 비율은 잠무 카슈미르 67%, 아쌈 30.9%, 서벵골 25.2%, 케렐라24.7%, 우따르 쁘라데시 18.5%, 비하르 16.5%, 자르칸드 13.8%, 까르나따까12.2%, 우타란짤 11.9%, 델리 11.7%, 그리고 마하라슈뜨라가 10.6%를 차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북인도에 거주하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접한 펀잡, 북부의 산악지역인 시킴, 나갈랜드, 히마찰 프라데시 그리고 동부의 오리사 등은 2% 미만의 무슬림 희소 지역이다(Mistry, 2005: 403).

그리고 인도 무슬림들은 대체적으로 도시에 더 많이 거주하는데, 무슬림 인구가 적은 지역일수록 도시에 더 집중된다. 이는 이들 대부분이 기능 중심의 직업군(상인, 기능공,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수 힌두 사회 속에서 안전 때문이다(43). 인도의 전체 인구 중 24세이하의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인도 경제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무슬림들은 저임금을 받는 단순 직업군에 많이 속해 있다.

인도에서 무슬림을 찾는 것은 쉽다. 어느 지역을 가든지 힌두가 사는 지역과 무슬림이 사는 지역은 분명하게 구분이 된다(44). 인도에 남겨진 무슬림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분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군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무슬림의 게토화(ghettoization)는 심각한 현실적 문제 중 하나이다.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 세계힌두평의회(Vishwa Hindu Parishad)등의 힌두 극우단체와 조직들은 다수자의 우위를 과시해 왔으며 인도인민당(BJP) 정부를 세우는 등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는 공격들이 이들의 주도와 주정부와 경찰 그리고 정치권의 묵인 하에 저질러졌고 대다수의 희생자들은 힌두 거주지에 살던 무슬림들이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무슬림들은 다수의 무슬림이 거주하는 안전한 특정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상층의 힌두 거주지에 살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중산층 무슬림들조차도 주거 환경이 열악한 무슬림 집중지역에 거주를 선호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힌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무슬림들에게 임대하지도 매매하지도 않는다(45).

만약 누군가가 집을 임대하거나 매매하려면 해당 콜로니의 대표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해야 한다. 사실상 인도 내에서 무슬림이 힌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집을 임대하거나 매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자라트주에는 힌두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부동산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지역법’(Disturbed Areas Act)이 1991년부터 발효되었다. 현재 이 법에 따라 구자라트의 주도 아흐메다바드(Ahmedabad)의 40%에 달하는 면적이 무슬림의 부동산 매입 금지 대상이 되고있다. 뭄바이시의 경우 채식주의자만 매매가 허용되는 지역이 따로 있다. 채식주의자만 허용된다는 것은 힌두교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 상에서 상위 계층 혹은 극소수 자이나교 부유층만 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무슬림들이 거주할 경우 집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특별히 2002년에 폭동이 발생했던 구자라트의 도시지역에서 더욱심하게 나타난다.

무슬림의 게토화는 경제와 교육의 환경뿐 아니라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적기반 시설들(학교, 도로, 하수 시설)이 취약하다. 또한 다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고립이 심화되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견해와 관심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적극성을 보이지 못한다.

델리의 무슬림 거주자들의 상당수가 10년 이내에 정착한 사람들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이주했다. 거주지를 10년 이내에 이주한 사람의 비율이 델리의 경우보다 2002년 폭동이 있었던 구자라트(Gujarat) 주도 아흐메다바드(Ahmedabad)가 훨씬 더 높았다. 힌두·무슬림 간의 폭동이 있었던 도시일수록 서로 관계하기를 꺼려한다(46).

이러한 무슬림의 게토화는 선교적 측면에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장점으로는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미전도종족인 무슬림을 찾기가 쉽고, 다른 집단과의 교류가 없기에 그들을 위한 활동들-
교육, 보건, 환경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받아준다(47). 하지만 동시에 단점도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감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자의 활동을 철저하게 감시하다가 개종의 증거가 포착되면 협박과 회유를 통해 복음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한다(48).

4) 진행 중인 갈등
힌두와 무슬림 간의 갈등은 인도 내 무슬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정치·종교적 세력들은 갈등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납득시킨다. 이전에 아무리 평화적으로 서로를 상대하다가도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피해를 준 상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힌두 세력을 힘에 업은 미디어의 역할 또한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일상의 평범한 무슬림들은 더 이상의 갈등을 원치 않고 평화롭게 안정된 삶을 원한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어려운 환경은 같은 약자인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도-파키스탄 전쟁
인도와 파키스탄은 지금까지 세 번의 전쟁(1948, 1965, 1971)을 치렀다. 처음 1, 2차 전쟁은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는 카슈미르 분쟁 문제로 인한 것이다. 카슈미르에는 지금도 여전히 작은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다(2014.10. 교전으로 9명 사망). 1차 전쟁은 분립 직후에 발생했고, 3분의 1은 파키스탄이 점령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인도가 점령한 채로 휴전되었다. 이후 16년이 지난 1965년, 2차 전쟁이 발생했다. 마지막 3차 전쟁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독립문제에 인도가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카슈미르는 단순한 영토의 문제가 아니다. 카슈미르의 북쪽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구소련, 중국과 공유하고 있었다. 또한 인도가 카슈미르를 장악하면서 파키스탄의 경제를 불구로 만들고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것이 가능했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가 없이는 영토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완전할 수 없었다(49).

이 전쟁들은 인도 내 무슬림들의 입지를 더욱더 좁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1989년 이후의 카슈미르에서 발생한 사태들은 원주민들의 주도에 의한 저항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넘어 인도의 통치 정책이 원주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0). 지금도 저항의 강력한 표현으로서 테러가 발생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국경지대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잔혹한 침입 행위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무슬림들의 행동은 스스로를 형제라 부르는 인도 전체 무슬림들의 삶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후로 인도의 뉴스 미디어, 영화에서는 무슬림은 곧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를 고착시킨다(51).

아요디아(Ayodhya) 바브리 사원 파괴
아요디아(Ayodhya)는 UP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1527년 바브르(Babur)가 건축한 바브리(Babri) 마스지드(Masjid)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힌두 종파주의자들은 이 사원의 터가 ‘람의 탄생지(Ram Jammabhoomi)’라고 주장 하며 사원의 파괴를 요구했다. 1980년대에 이후 인도에서는 선거 전략으로 종파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989년 9대 총선거 유세기간 중 라지브 간디는 인도에 ‘람의 정치(Ram Rajya)’(52)를 재현하겠다고 약속을 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논쟁의 중심이었던 아요디아(Ayodhya)의 흙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였다. 결국 그 당시 선거에서 강력한 종파주의를 표방한 BJP가 전국정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힌두교의 부흥을 꾀해온 인도인민당(BJP)당과 비슈와 힌두 파리샤드(VHP, 세계힌두협회)당은 그해 바브리사원 옆에 람을 섬기는 사원을 건립키로하고 1986년 11월 전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에 들어갔다. 마침내 1992년 약 30만 명의 힌두교도가 바브리 사원이 위치한 아요디아를 방문하여, 바브리 마스지드를 파괴하고 그 위에 람(Ram) 사원을 건설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UP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인도인민당(BJP)과 연방정부인 국민회의당(INC)이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사무엘 헌팅 턴(Huntington)은 ‘문명의 충돌(1993)’에서 과연 ‘이 나라가 세속적인 민주국가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힌두교 국가로 바뀌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전면에 제기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이슬람 사원이 파괴되었다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의 정신이 현실적으로 무력화되었고, 정부 및 어떤 정당들도 더 이상 헌법의 정신을 수호하여 무슬림을 보호할 의지가 없음을 나타내는 전환기적 사건이었다(53).

이것이 비극의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비극은 집회 이후 인도에 복수의 연쇄 테러와 또 다른 복수의 학살이 줄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힌두 근본주의자 행동대원이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는 장면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고, 신문에 보도되면서 인도 전역에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종교 공동체 충돌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가장 피해가 큰 지역은 뭄바이가 속해 있는 서부지역의 마하라슈트라주와 구자라트주, 그리고 북부의 우타르프라데시(UP)주였다.

아요디아(Ayodhya)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 출처: wikipedia

구자라트(Gujarat) 폭동
2002년 2월 27일 구자라트(Gujarat)주의 고드라(Godhra)역에서 발생한 열차 화재사건으로 인해 또다시힌두와 무슬림 간 폭동이 일어났다. 기차에는 세계힌두협회(VHP) 소속의 까르 쎄와끄(Kar Sevak)(54)들로 불리는 힌두 순례객이 타고 있었다. 고드라역의 행상들과 짐꾼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고, 이들은 까르 세와끄들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소녀가 까르 세와끄들에게 납치되었단 소문이 퍼졌고, 흥분한 무슬림 행상인들과 짐꾼들이 열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뒤 6번 차량에서 불이 붙어서 58명이 죽었다. 이 사건을 두고 구자라트 주 경찰은 무슬림의 방화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연방철도부는 기차 내부에서 조리하던 사람들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인도의 수상인 당시 집권당 인도국민당(BJP)의 주 수상 모디(Narendra Modi)는 “모든 운동은 같은 크기의 힘을 반대 방향으로부터 받는다.”라는 뉴턴의 제3법칙을 말하며 보복을 선동했다. 그 당시 RSS의 대변인 바이디아(M. G. Vaidya)는 ‘무슬림들에게 그들의 안전은 다수 집단의 선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2002년 2월 28일부터 구자라트 주의 151개 도시와 993개 촌락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1개월 동안 790명의 무슬림과 254명의 힌두가 사망했고, 223명이 실종되었고, 10만 명의 무슬림과 4만 명의 힌두들이 집을 잃었다.

폭동 9개월 후인 2002년 12월에 실시된 구자라트 주 의회 선거에서 인도 인민당(BJP)은 ⅔를 획득하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기간 중 모디는 유세 연설에서 구자라트의 무슬림들을 내부의 적을 의미하는 ‘제 5열’이라고 부르며 파키스탄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2002년 4월 고아(Goa) 인도인민당(BJP) 전국회의에서는 ‘무슬림들은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곳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지 못한다. 그들은 테러로 위협하여 그들의 신앙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55).

구자라트(Gujarat)주의 고드라(Godhra)역에서 발생한 열차 화재사건, 출처 newstof.com

무자파르 나가르 충돌
무자파르 나가르(Muzaffar Nagar)는 인도 UP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사건은 2013년 8월경부터 시작되었는데, 경찰에 의하면 처음에는 가벼운 교통사고가 났는데 무슬림 청년과 힌두 두 형제와 다툼 중에 그들의 사촌 여동생이 연관되었고 무슬림 청년이 그들의 사촌 여동생에게 폭언을 했다. 이에 화가난 두 사촌 오빠가 성희롱한 그 무슬림 청년을 찾아가서 죽였다.

하지만 탈출하는 과정에서 두 오빠는 무슬림 군중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 일 후에 그 지역 인도인민당(BJP) 리더가 힌두 농부들을 모아놓고 무슬림을 대상으로 폭력을 선동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일을 알게 된 무슬림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했다. 이 일로 인해 힌두와 무슬림 간 폭동이 일어나 62명(무슬림 40명)이 숨지고, 백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만여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별히 이곳의 사태가 심각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에 사제 총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요 기간 중 상당수의 사제 총이 수거되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군대가 투입되었다. 이 일은 단순히 젊은 사람들의 혈기에 의해 발생한 충돌이 아니라 힌두와 무슬림 간의 해묵은 감정의 골이 폭발한 것이다.
(CAS24호 이슈인사이드 : 인도 무슬림의 이해와 선교현황 및 전략 제안(2)로 이어집니다.)

[각주]
(1) IMA의 전 사무총장 쑤싼따 꾸마르(Susanta Kumar)는 인도 내 무슬림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람의 수는 내외국인을 합쳐서 300명 이내라고 했다.(2011)
(2) “인도 무슬림의 특성” 최종찬 [남아시아연구 제15권2호. 2009] pp.82-83.
(3) 대부분의 통계 자료에서 2001년 인도 인구조사 결과를 기본으로 응용하고 있다.
(4) 힌디(Hindi)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따라서 서구 선교사들보다 언어를 훨씬 더 빨리 습득한다. 무슬림들이 주로 사용하는 우르두(Urdu)어는 힌디어와 유사하다. 한국 교회는 사역자 훈련에 대한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 개척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5) 보다 심층적 연구가 필요한 사람들은 다른 자료들을 참조할 수 있다. “Muslims in Indian Cities” Laurent Gayer and Christophe Jaffrelot 저, “북인도행 열차-인도 무슬림을 찾아서” MVP 선교회, 인도연구소(www.isas.co.kr), “인도를 읽는다: 사회학자가 본 오늘날의 인도” 오창균, 김현혁 공저, “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공영수 저. 인터넷 사이트: http://indianmuslims.in 2006년부터 인도 무슬림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6) (남아시아연구)에 실린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수피즘에 대해서는 “수피즘의 힌두화 과정과 인도 무슬림들의 종교 사상적 딜레마”, 시아파에 대해서는 “러크나우 무슬림의 정치·사회적 딜레마”. 더불어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서 “Islam in India”로 검색하면 보다 많은 자료들에 접근이 가능하다.
(7) 필자가 빠른 기간 안에 인도 선교 지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선임 선교사들이 이러한 관계들을 잘 형성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8) “북인도행 열차-북인도 무슬림을 찾아서” MVP선교회, “인도 무슬림의 특성” 최종찬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83-85.
(9) 악바르와 비르발 재상(힌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10) 그의 왕비인 조다(Jodhaa)는 가장 강력한 힌두세력인 라지뿌 뜨족(Rajput)의 공주였다.
(11) Jessuit 선교사들(로버트 아쿠아비바, 안토니오 몬세라떼, 프랑코 헨루기스)과 교류했다. 특히 몬세라떼는 악바르의 둘째 아들인 무아드의 가정교사까지 지냈다. 악바르에 이은 자항기르도 기독교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졌다.
(12) 샤 자한이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녀를 위해서 지은 무덤이 타지마할이다.
(13) 근현대를 중심으로 한 영화들의 상당수는 하나의 인도 아래 다양한 종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예로서 랑그 데 바산티(Rang De Basanti, 2006), 조다 악바르(Jodhaa Akbar, 2008)를 들 수 있다.
(14) “힌두와 무슬림의 역사적 관계” 박금표 [남아시아연구 제8권 2호. 2003] p. 8. 현재 인도 무슬림은 네 개의 주요 집단으로 구분 된다. ① 아슈라프(Ashraf): 외부에서 들어온 무슬림의 후예로서 사이 예드(Sayyed), 셰이크(Sheikh), 무굴(Mughal), 빠탄(Pathan) 등. ② 상층의 힌두였던 개종자로서 무슬림 라즈뿌뜨(Muslim Rajput) 등. ③ 깨끗한 직업에 종사하는 개종자로서 직조공(Julaha), 재단사 (Darzi), 백정(Qassab), 이발사(Nai, Hajjam), 고물상(Kabariya), 야채장수(Kunjra), 기름 장수(Teli), 세탁부(Dhobi) 등. ④ 천민 출신의 개종자로서 청소부(Bangi), 무두장이(Camar) 등.
(15) 영국군에 고용된 인도인 병사 즉 세포이들은 영토 확장정책이 끝남으로써 처우가 나빠지자 불만이 증대되었다. 1857년에 들어서면서 새 탄약통에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하는 돼지기름과 힌두 교도들이 신성시하는 소기름을 발라서 세포이들에게 사용하게 한다는 소문의 확산이 기폭제가 되어 폭동이 발생했다. 1857년 5월 10일 미루트(Meerut)의 세포이 3개 연대가 봉기, 델리로 진군하며 정치범을 석방하고 무굴 황제를 옹립하였다. 옹립된 무굴 황제는 무굴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힌두 · 이슬람이 단결하여 영국인을 축출하라고 호소했다. 반란은 곧 서북의 펀잡(Punjab)과 오우드(Oudh), 라지푸타나(Rajputana), 봄베이(Bombay), 하이데라바드(Hyderabad)까지 확산되어 전 인도에 폭동이 물결이 일어났으나, 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군이 구르카(Gurkha)족과 시크교도 그리고 일부의 번왕 그리고 대지주의 후
원을 받아 무자비한 반격에 나서자 1859년 진압되고 말았다. “힌두와 무슬림의 역사적 관계” 박금표 [남아시아연구 제8권 2호 2003]. p. 15.
(16) 파라이지 운동(Faraizi Movement)은 1818년 하지 샤리아툴라흐(Haji Shariatullah, 1781-1840)를 중심으로 한 벵갈((Bangl)지역의 무슬림들이 시작한 운동이다. 여기서 ‘farz’는 의무(duty)의 의미로서 알라에 의해서 정해진 종교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하지 샤리아툴라흐는 지금의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799년 아라비아로 순례를 떠나 19년간 그곳에 머물면서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를 공부했다. 그는 와하비파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벵갈로 돌아온 후 힌두 사상에 물들어 있는 벵갈의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이슬람의 기본 원칙을 강조하는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17) 와하비 운동은 엄격한 율법을 강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18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지원을 받은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Muhammad ibn Abdal-Wahhab, 1703-1792)가 이슬람 사회의 타락상을 개탄한 뒤 무함마드(Muhammad, 570?-632) 시대의 규점으로 되돌아가자며 와하비즘을 제창했다. 이들은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어떤 형태의 신비주의도 배격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가 리야드로 된 것은 이 운동이 리야드에서 일어난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는 사회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 등의 지원으로 성장했으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시에는 와하비즘으로 무장된 탈레반을 미국이 지원했다. 사우디아리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1957-2011)은 와하비즘의 군사 극단주의를 대표한다. <2004년판 현대시사용어사전> 동아일보사.
(18) 두 운동 모두 살라피야 운동(Salafiya Movement)에 해당한다. 살라피야 운동은 근대 이슬람의 개혁 사상·운동의 주요 조류이다. 샬라프(Salaf)가 일반적으로는 선조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유(사하바), 또는 성립기 움마를 지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초기 이슬람의 원칙과 정신의 회복을 지향한다.
(19) “힌두와 무슬림의 역사적 관계” 박금표 [남아시아연구 제8권 2호 2003]. p. 2.
(20) 데오반 학교: 인도 이슬람 개혁가인 왈리 왈라(Shah Wali Allah, 1702-1762)의 전통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데오반 학교는 지금의 Darul Uloom Deoband(www.darululoom-deoband.com)로서 인도 북부 중앙의 데오반(Deoband)라는 도시에 있다. 현재 전체 학생 수는 약 4,000여 명에 이르며, 7년 학제로 운영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중동, 아시아 지역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러 온다. 북 인도 지역에 활동하는 상당수의 이맘들이 데오반 출신이다.
(21) 알리가르무슬림대학(Aligarh Muslim University): 사이드 아흐메드 칸(Syed Ahmad Khan)이 1875년 Mohammedan Anglo-Oriental College를 설립했고, 1920년 이름을 알리가르무슬림대학으로 변경하였다. 현재 약 3만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전체 학생 중 45% 이상이 무슬림이다.
(22) 사이드 아흐메드 칸은 무함마드의 자손이면서도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는 유럽의 과학 도서를 우르두어(Urdu)로 번역하고자 과학학회를 조직했다. 알리가르 학교에서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과학 분야를 가르칠 교수진 상당수가 유럽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변증의 목적으로 ‘복음서’에 대한 독특한 주해서(Tabyin al-Kalam, 1862)를 썼다. “코란 이펙트” “아흐메드 칸” 브루스 로런스, 배철현 역(세종서적: 2013). 그는 무슬림들에게 “교육의 메시아”라고 불린다.
(23) “인도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과 힌두-무슬림 갈등의 동태화” 박금표 [남아시아연구 제10권 1호 2004]
(24) “인도 무슬림의 특성” 최종찬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95. ‘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193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무슬림 유학생들이 “New or Never”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25) “인도 무슬림의 특성” 최종찬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95. ‘파키스탄’이라는 용어는 193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무슬림 유학생들이 “New or Never”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26) 마이너리티라는 표현은 무슬림 상류층과 하류층에게 전혀 다른 의미이다. 상류층의 경우 삶에 질에 대한 불만은 없으며 다만 자신들이 대우받지 못하는 부분이다. 하류층에게 있어서 마이너리티는 소외와 가난을 의미한다. 하류층은 정치·종교적 이슈보다는 경제적 이슈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다.
(27) “인도 무슬림의 특성”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p.92-94. 2012년에 사회 고위직에 있는 무슬림들과의 인터뷰를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단체가 없는 것과 진실을 알려줄 미디어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실제로 이들 인구 수에 비례한 범죄자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28) 국민회의당(INC)은 무슬림들의 문화적 특성을 보호 해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장악한 주에서 암소의 도살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제정하는 등 힌두 종파주의적 성향을 강화시켰다. 이들의 태도는 힌두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약간 성공했지만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무슬림들에게는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5.
(29) 인도 연방정부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힌디어이다. 그 외 각주에는 주별로 공용어가 있다(20여 개). 하지만 우르두어는 잠무와 카쉬미르주 그리고 텔랑가나(Telangana)에서만 주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다수의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UP주와 비하르(Bihar)주에서조차 주 공용어가 아닌 공용인정어이다. 2014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주 수상은 오직 힌디어만을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30) “인도종파주의의 성격”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8권 2호.2003] pp. 18-19.
(31) 힌두뜨바(Hindutva): 1923년 힌두 사상가 비나야크 다모다르 사바르까르(Vinayak Damodar Savarkar, 1883-1966)의 책 ‘Hindutva : Who is a Hindu?’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Hinduness’(힌두스러움)로 설명되며 힌두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사바르까르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리적 단일성, 인종적 특징, 공통 문화의 세 가지 받침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Jaffrelot, 2007: 86). 즉, 힌두뜨바의 핵심 개념은 -인도 반도는 힌두의 고향(homeland)이다. -힌두는 인도를 자신들의 신앙의 땅(holyland)은 물론 아버지의 땅(Fatherland)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무슬림과 기독교와 같은 외부 침략세력에 의해 역사적으로 힌두가 억압받은 사실을 강조하고 그 같은 침략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영향을 극복하는 것이다. -영국의 식민주의와 공산주의는 힌두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비난한다. -힌두를 보호하고 힌두 문화를 부흥하기 위하여 ‘힌두 라시뜨라(Rashtra, 국가)’ 회복을 주창한다. -인도정부가 카슈미르(Kashmir)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의 카슈미르 힌두에 대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인도 정부를 비난하고 잠무 카슈미르 주(州)에 대한 힌두 뜨바의 강경 입장을 옹호한다는 논리 등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뜨바의 행동조직은 ‘Sangh Parivar’라는 집단의 연합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BJP, RSS, 세계힌두협의회(VHP, Vishwa Hindu Parishad), 바즈랑 달(Bajrang Dal, 하누만 군단) 등이 포함되어있다. “인도의 힌두 근본주의 발흥과 방송미디어의 역할: 1990년대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라윤도 [남아시아연구 제14권 1호, 2008] pp. 138-139.
(32) Puranik, S. N. 1989. 203. “인도 종파주의의 성격” 고홍근. p.19. 급진적인 무슬림들이 결성한 단체로는, 까시미르(Kashmir) 의 무장단체들은 제외하더라도, 인도를 이슬람 국가로 바꾸겠다는 ‘인도이슬람학생운동(SIM, Students Islamic Movement of IndiaI)’, 인도 공화국의 파괴와 힌두교와 유대교의 절멸이 창설 목표이면서 2008년 뭄바이 테러를 일으켰던 ‘정의의 군대(Lashkare-Toiba)’, 그리고 인도령 까시미르(Kashmir)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모하메드의 군대(Jaish-e-Mohammed)’,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활동하며 탈레반(Taleban)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슬람 투쟁운동(Harkat-ul-Jihad-al-Islami)’ 등이 있다.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22.
(33) 전통적으로 무슬림의 도시로 인식되는 러크나우(Lucknow, UP주의 주도)에 사는 무슬림들의 경우 70% 이상이 지도자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만, 정당의 선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무슬림의 언어적 정체성인 우르두어의 사용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현실적으로 인도에서 중요한 언어는 영어가 된지 오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같은 무슬림인 순니와 시아의 공존 문제였다. “러크나우 무슬림의 정치·사회적 딜레마” 김찬완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34)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3. 힌두들은 어려서부터 무슬림들은 도둑질을 잘하고, 음란하다고 배운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학교도 다른 경우가 많아서 서로 친구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드물다.
(35) 인도 현대 영화에서 무슬림은 못 배운 하층 계급(기차역의 짐꾼, 농부, 잡다한 기능직)으로 묘사되거나,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폭력적(테러리스트, 불량 조직)인 존재로 묘사된다.
(36) 일부 힌두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기도 한다.
(37) 1956년에 하층의 시크교도와 1990년에 하층의 불교도가 이계층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하층의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제외되었다.
(38)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는 미국 방문 중 CNN과의 인터뷰에서 인도 내 알카에다(al-Qaeda) 활동에 대해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인도를 위해서 살거나 죽을 것이다. 그들은 인도에 어떤 나쁜 행위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http://edition.cnn.com/2014/09/19/world/asia/india-modi-extremists. 이것은 지금까지 모디의 행동을 보았을 때 무슬림에게 무서운 경고로 들려질 수 있다.
(39) 자영업(2004-5) 전체 인구 44%, 힌두 33.4%, 무슬림 57.4%.
(40)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p. 18-19.
(41) “인도 종파주의의 성격”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8권 2호 2003] p. 14.
(42) 어떤 학자들의 경우 최대 30% 이상, 또는 20% 이상이라고 말한다. “Muslim Indians – Struggle for Inclusion” p. 4.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2010 Report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 Guinea-Bissau(17 November 2010)에 의하면 인도 내 무슬림의 비율을 22%로 보고하고 있다.
(43) “인도 무슬림의 특성” 최종찬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87.
(44) 구글맵(maps.google.com)을 이용해서 힌두 사원을 의미하는 ‘Mandir’와 무슬림 사원을 의미하는 ‘Masjid’를 검색해 보면 위치가 파악된다. 가끔씩 힌두와 무슬림이 공존하는 지역도 있다.
(45) 인도에는 한국의 통반 시스템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 콜로니(Colony)라고 부른다. 만약 누군가가 집을 임대하거나 매매하려면 해당 콜로니의 대표에게 허락을 득한 후에 해야 한다. 사실상 인도 내에서 무슬림이 힌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집을 임대하거나 매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자라트 주에는 힌두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부동산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지역법’(Disturbed Areas Act)이 1991년부터 발효되었다. 현재 이 법에 따라 구자라뜨의 주도 아흐메다바드(Ahmedabad)의 40%에 달하는 면적이 무슬림의 부동산 매입 금지 대상이 되고 있다. 뭄바이시의 경우 채식주의자만 매매가 허용되는 지역이 따로 있다. 채식주의자만 허용된다는 것은 힌두교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 상에서 상위 계층 혹은 극소수 자이나교 부유층만 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무슬림들이 거주할 경우 집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기도 한다.
(46) 게토화의 영향으로 힌두·무슬림 어린이들은 서로 간에 친구가 없다. 학교와 주거지가 다르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에 대해서 접하는 정보는 서로를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47) 피로자바드를 정탐하면서 그 지역의 유지에게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학교 사역이 가능한지를 문의했을 때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48)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지역 무슬림들이 고발을 했는데, 그 고소장에 자신들의 사역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기재했다고 한다(2014).
(49)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의 대립관계에 관한 연구:Kashmir 문제를 중심으로” 조길태 [남아시아연구 제14권 제1호,2008] p. 233.
(50)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의 대립관계에 관한 연구:Kashmir 문제를 중심으로” 조길태 [남아시아연구 제14권 제1호,2008] p. 232.
(51) 인도 내 미디어들은 무슬림 관련 범죄에 대해서는 대서특필 한다. 실상 무슬림들의 범죄율을 보면 전체 인구 대비로 힌두들의 범죄율보다 낮다.
(52) ‘라마야마’에 등장하는 람(Ram)은 그 당시의 혼탁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여 외부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치권을 장악한 뒤 성공적으로 왕을 통치했다. 인도에서 람의 통치(Ram Rajya)는 이상적 통치의 상징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도 독립 인도에서 람의 통치(Ram Rajya)를 꿈꿨다.
(53)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 5.
(54) 원래는 종교적 목적으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힌두뜨바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 특별히 람의 탄생지로 알려진 아요디아 사건 현장을 순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55) 라께쉬 샤르마(Rakesh Sharma) 감독은 2003년 구자라뜨 사태를 분석한 다큐멘터리 ‘마지막 해결책(Final Resolution)’을 제작 발표하였다. “인도 정치의 탈세속화와 무슬림의 딜레마” 고홍근 [남아시아연구 제15권 2호. 2009]. pp.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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