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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무슬림 사역과 러크나우를 중심으로 본 북인도 무슬림 여성 사역

업마가 만난 사람
Web JOURNAL  24 2020. 11

세계에서 언어, 인종학적으로 가장 다양한 국가인 인도는 12억 7천의 인구와 2,256종족 집단이 존재하며 전 세계 7,064개의 미전도종족 중 약 28%인 2,033개의 미전도종족이 거주하는 미전도종족 집중 거주 국가이다(1). 총 인구의 80.5%가 힌두교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도는 힌두교 국가로 인식되고 있지만 인구의 약 13.4%인 1억 7천만 명(2)정도의 많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 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무슬림 선교 국가로도 알려져 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었을 때 많은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인도에 많은 무슬림들이 남아 있어서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다음으로 무슬림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인도 대륙에 무슬림이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무슬림 왕조들의 흥망성쇠에 관한 고찰은 이 책의 다른 저자들이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얼마 전까지는 보통 인도 선교를 생각할 때 힌두교 대상의 선교를 생각했기 때문에 인도 무슬림들은 힌두교 속에 가려진 복음의 사각지대로 극소수의 사역자들만이 이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인도 무슬림 선교사역의 중요성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무슬림 인구가 많은 북인도 무슬림들을 위해 사역하는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다.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부(3)는 1999년부터 북인도 무슬림을 타겟으로 북인도 무슬림 사역을 시작했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는 KFMB의 북인도무슬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인도 사역을 소개하고 후반부에서는 KFMB 사역의 일부분으로 북인도 UP주의 러크나우 무슬림 사역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뉴델리(New Delhi), 인도 무슬림, 출처: unsplash.com

인도 무슬림의 특성
세계 각국에 퍼져 사는 무슬림의 문화가 모두 다르듯이 인도 무슬림에게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적인 특성이 있다. 무슬림이 가지고 들어온 문화가 인도 고유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반면 정복자였던 무슬림들도 인도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인도 무슬림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인도 무슬림들은 세계 다른 지역의 무슬림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교는 인도에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방법, 즉 교역과 정복, 그리고 수피즘에 의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인도 무슬림 문화가 발전 되어 왔다.

이러한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평등정신과는 달리 세습적 지위 또는 계급을 유지, 강조하고 있는 카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힌두교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이 들어왔을 때 힌두교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자신의 카스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무슬림들에게 카스트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 정복자로서 또는 무슬림 궁정에 봉사하기 위해 인도로 이주했던 사람과 그 자손들을 ‘귀한 손님’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아슈라프(Ashraf)’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무슬림 고급문화의 표본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힌두 귀족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보다 상위 카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 카스트를 ‘아즈라프 자트(Ajlaf Jat)’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원래 힌두교도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농업이나, 옷감 만들기, 가구 만들기, 이발사, 세탁업 공장 근로자, 소규모 상인, 행상인, 기술공, 운전사, 재단사, 인력거꾼, 염색공, 일일 노동자이나 또는 힌두교도들이 불가촉천민으로 여기는 가죽세공(4)의 일을 하고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었을 때 인도에 살고 있던 상위 무슬림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고 현재 인도에 거주하고 있는 무슬림들은 대부분 하위 카스트에 속하는 무슬림들로서 소수 공동체로서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농촌과 도시 저소득층, 빈민으로 거주하며 힌두 카스트들처럼 세습 직업과 동족결혼을 지키고 있다.

인도 무슬림의 또 다른 특징은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무슬림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잠무-카슈미르 지역의 무슬림들은 카슈미르어를 사용하고, 아쌈지역의 무슬림는 아쌈어를, 웨스트 벵골의 무슬림은 벵골어를, 그리고 UP주의 무슬림은 우르두어를 사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이들의 문화와 관습도 조금씩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벵골어를 사용하는 동인도에서는 수피 신도들이 힌두 신화를 수피 신앙에 접합하여 원래와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만들어졌다. 아랍 무역상들로부터 이슬람교를 도입했던 케렐라(Kerala)주에서는 아직도 아랍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인도 무슬림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우르두어로 화려하고 훌륭한 문학 작품들을 만들었고 이것은 힌디어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카스트와 다른 언어, 그리고 지역에 따른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도 무슬림들은 샤리아라는 공통적인 종교 관습과 일상생활의 안내서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 샤리아는 이슬람교의 기본적인 틀로서 인도 무슬림들의 사회적, 개인적 생활의 많은 측면들에 명시적, 암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유일신 사상과 마호메드가 최후의 예언자라는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교리와 전 세계 무슬림들이 공통적으로 지키는 원칙, 즉 매일 다섯 차례의 경배(나마즈, Namaz), 금요일과 이드(Id)의 기도, 자카트(Zakat), 라마단 금식(로자, Roza), 그리고 성지 순례(Haj)를 지켜야 할 것으로 권장되어 있다.

인도 무슬림들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도 지역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북인도와 남인도의 차이가 있다. 무슬림 인구 증가율은 1971년 이후 국가 전체 평균 인구 증가율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런 인구 증가는 인도의 무슬림 인구 1억7천만명 가운데 80%가 살고 있는 북인도 무슬림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으로 남인도와는 사정은 다르다.

이와 같이 북인도 무슬림들은 남인도 무슬림보다 인구 증가율이 높으면서 사회 경제적으로는 낙후 되어 있다. 남인도(안드라 푸라데시, 케렐라, 따밀나두)에서는 1990년대부터 무슬림 인구가 꾸준히 감소해서 20%이하의 인구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북인도의 잠무-카슈미르주는 67%, 아쌈 30%, 웨스트 벵골은 25%, 그리고 UP주는18.5%의 높은 무슬림 거주율을 보이고 있다(5).

또한 북인도 무슬림의 열악한 경제 상황과는 달리 남인도의 뭄바이 같은 곳은 도시 상권의 70% 이상을 무슬림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북인도 무슬림 공동체가 사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인구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북인도 무슬림들은 더 가난하게 되며 힌두교와의 갈등과 정치적인 문제, 인도정부의 차별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에 허덕이고 있다. 이들은 또한 교육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전문직이나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하므로 가난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뭄바이(Mumbai), 출처: unsplash.com

북인도 무슬림들은 대부분 함께 모여서 주거지를 이루는 게토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힌두교도들의 공격이나 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년 8-10%의 경제성장은 인도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즉 소득 증가로 인해 중산층이 확대되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무슬림 중산층도 늘고 있다. 2006년 인도무슬림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던 경제전문가 아부 살레 샤리프는 “무슬림 커뮤니티 사이에서 중산층이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6).

중산층의 증가에 따른 더 나은 주거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지만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모두 적절한 오락시설이나 위생시설이 열악한 게토에서 살고 있다. 인도는 법적으로 주거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도의 각 도시에서 주거에 대한 차별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현 총리인 나렌드라 모드가 주지사로 재직한 구자라트주에서 199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힌두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부동산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 지역법(Disturbed Areas Act)’와 같은 제재가 있기도 하다(7).

이와 같이 북인도 무슬림의 문화적 독특성과 그들이 현재 처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종합해보면 전 세계 무슬림 가운데 북인도 무슬림은 복음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종족인 것이 분명하다.

KFMB 북인도 무슬림 사역의 시작
KFMB는 복음이 희박하고 선교사가 거의 없었던 북인도 지역의 무슬림을 대상으로 1999년부터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9년 당시 미 남침례교 국제선교부(IMB) 소속 북인도 무슬림 사역자인 톰 다니엘 선교사는 KFMB에 북인도 선교를 제안하였고 KFMB는 이 초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고 북인도 무슬림선교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1999년 1월 선교훈련생들이 정탐을 위하여 북인도 땅을 밟았고 같은 해 4월 침례교단과 KFMB 지도자들, 그리고 파송을 준비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톰 다니엘 선교사의 안내로 북인도 지역을 정탐하게 되었다.

이들은 콜카타로부터 델리에 이르기까지 북인도 주요지역을 방문하면서 무슬림 사역자들을 만났다. 개신교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가 사역했던 세람포르에서 아쌈족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사, 콜카타에서 벵골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사, 자이푸르에서 200만의 미나 종족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만나서 그들의 사역 이야기를 듣고 사역 현장을 방문하며 북인도 무슬림 사역과 상황을 살펴보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KFMB 선교사들에게 주신 북인도 무슬림들을 향한 비전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들을 갖고 돌아왔다(8).

이후 KFMB는 1999년 4월 단기선교사로 윤사무엘/이리브가 선교사 가정(단기사역 후 장기선교사로 사역)을 파송함으로 북인도 무슬림선교에 첫 발을 디뎠고 2000년에 세 가정의 장기선교사를 델리로 파송함으로써 북인도 무슬림 선교의 초기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지역에 사역을 시작할 때 팀으로 파송한다는 선교본부의 팀사역 정책에 따라 김바울/이루디아, 곽야곱/오수산나, 이여호수아/정헵시바 장기선교사 세 가정이 2000년 인도의 수도인 델리에 도착했다. 사역에 대한 안전 및 효율성을 위해 선교사들이 델리의 남쪽(뉴 델리)과 북쪽 지역(올드 델리)으로 두 가정씩 나누어져 언어 및 인도에서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선교본부의 정책대로 초기 2년간은 전적으로 언어훈련을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도 무슬림이 사용하는 우르두를 공부하려고 모두가 우르두 학원에 등록했는데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 힌디어로 우르두어를 가르쳐서 모두 깜짝 놀랐다는 에피소드도 있다(9).

사역의 전개
언어 훈련 및 인도의 전반적인 문화 이해를 습득한 후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다양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KFMB 선교사들의 사역이 전개되기 시작되었다. 선교본부는 북인도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전략적으로 북인도 무슬림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나가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가면서 무슬림 대상만이 아닌 다양한 사역이 다양한 주요 관문 도시에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이루어졌던 전반적인 인도 사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10).

이여호수아/정헵시바 선교사(2000년 파송)는 델리에서 사역을 한 후 2003년 남인도 벵갈로르로 이동하여 제자훈련 및 교회개척을 진행한 후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했다.

곽야곱/오수산나 선교사(2000년파송)는 델리에서 제자 훈련 사역을 한후 2002년 7월 인도인 리더들에게 모임을 이양했는데 이 모임은 인도 자치 학생교회로 독립되었다. 이후 힌두교의 성지인 UP주의 바라나시로 이동하여 교회개척 및 제자훈련, 문맹퇴치 및 방과 후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이필립/전소피아 선교사(2002년파송)는 피지에서 사역 한 후 델리로 들어와 델리에서 언어 습득 후 2004년 데라둔으로 이동하여 제자훈련 및 교회개척, 언어훈련원 및 고아원 사역을 진행하였으며 이후 데라둔 사역을 인도인 사역자에게 이양하고 현재 델리 인근 하리야나주의 구루가온에서 언어훈련원과 제자훈련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임스/문클레어 선교사(2003년 파송)는 남인도 카르나타카주의 벵갈로르에 들어가 IMB와 협력하며 기독문화 사역 및 MK 학교, 문서번역 및 교회개척 사역을 진행하였으며 2010년 교회를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 후 인도 사역을 마감하고 현재는 국내에서 교회 담임사역을 하고 있다.

이요셉/고루스 선교사(2008년 파송)는 인도 선교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웨스트 벵골주의 콜카타로 들어와 셀모임과 청소년 및 교회개척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파울로스/쏘니야 선교사(2009년파송)는 인도의 경제적 수도인 뭄바이에서 비즈니스 선교(BAM)를 통한 자립선교 모델로서 자립형 교회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이재천/유영숙 선교사(2010년 파송)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사역한 후 인도로 들어와 데라둔에서 언어습득을 마친 후 2012년 하리야나주의 파리다바드 지역으로 이동하여 어린이 사역 및 교회개척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김기태/이문희 선교사(2011년 파송)는 카자흐스탄에서 사역한 후 인도에 들어와 구루가온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김규진/안춘옥 선교사(2014년)는 인도 북동부 지역의 나갈랜드로 들어가서 현재 언어 훈련 중에 있다.

한편 KFMB 소속 선교사로 북인도 무슬림가운데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1999년 북인도 무슬림 사역을 시작한 윤사무엘/이리브가 선교사는 델리에서 단기선교 사역을 마치고 국내 교회에서 외국인 사역을 진행한 후 장기 선교사로 파송 받아 인도의 데라둔 지역으로 이동하여 무슬림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UP주의 사하란푸르 지역으로 이동하여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제자훈련 및 교회개척, 학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사하란푸르는 20만 명가량의 무슬림이 모여 사는 일명 작은 파키스탄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이곳에 2005년 무료병원을 개원하면서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후 살람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년 후 40여명의 무슬림들이 예배에 나오는 은혜가 있었지만 모임에 숨어 있던 사람이 성도들의 신분을 노출시켜서 사역이 패쇄 되었다. 그 후 다시 비밀리에 사역이 시작되었고 매년 10명 이상의 무슬림들이 침례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무슬림 어린이를 위한 학교를 설립해서 학교 사역도 진행되고 있다(11).

김바울/이루디아 선교사(2000년파송)는 델리의 수피 무슬림 성지이면서 동시에 무슬림 집중거주지역인 니자무딘에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이후 제자훈련 및 교회 개척, 슬럼가 학교 설립 등 을 통하여 사역이 확대되었다. 여러 단기선교사들의 합류와 어린이 개발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사역이 확장되었으며 점차 북인도 카슈미르, 마디아 프라데시, 펀잡 주 및 델리 인근의 노이다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으며 현지인 지도자 훈련에도 집중하고 있다(12).

이성규/정은주 선교사(2002년 파송 )는 델리에서 2년간 언어 습득 후 2004년 잠무-카슈미르주의 스리나가르로 이동하여 무슬림을 대상으로 교회개척 사역 및 제자 훈련 사역을 실시하는 중 사역지가 무슬림들에게 노출되어 인도를 떠나 중동의 오만으로 사역지를 이동했다.

윤에스더 선교사(2006년 파송)는 델리로 들어와 언어훈련 기간 중 김바울/이루디아 선교사와 팀으로 사역한 후 2008년 UP주의 러크나우로 이동하여 무슬림을 대상으로 교회개척 및 여성사역,여성 직업학교, 학교 사역을 진행한 후 2014년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했다.

오글로리아 선교사(2008년 파송)는 2008년 단기선교사로 러크나우로 들어와 윤에스더 선교사와 팀사역을 하고 단기사역을 마친 후 장기 훈련을 받고 2011년에 다시 러크나우로 들어와 러크나우팀과 함께 무슬림을 대상으로 어린이 사역과 학교사역을 진행한 후 2014년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했다.

북인도 무슬림사역을 진행했던 5Units의 선교사 가운데 이성규/정은주 선교사 가정이 잠무-카슈미르에서 사역했고, 다른 4Units은 UP주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역 했다.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의논하고 사역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UP주 안에서도 무슬림이 많이 사는 세 개의 도시를 북부(사하란푸르), 중부(델리), 그리고 남부(러크나우)로 나누어서 거점도시로 삼게 되었다.

사하란푸르(Mumbai), 인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신학교 마자히르 울름(Mazahr_iUloom), 출처: wikipedpa

인도는 총 28개주(state)와 6개의 연방 자치지구(union territory), 그리고 1개의 수도권으로 이루어 있는데 그 가운데 UP주는 북인도 무슬림 선교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UP(Uttar Pradesh)주는 인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2억 2천 2백 5십만명)이다.

세계인구의 ⅙이 인도에 살고 있으며 인도 인구의 ⅙이 UP주에 살고있다. 동시에 UP주는 무슬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주(18.5%, 4천 1백 1십만 1천 5백 명)이다(13). UP주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주로 우르드어를 사용하는 강성 무슬림들이다.

사하란푸르, 델리, 러크나우는 UP내에서도 대표적인 무슬림 도시들이다. 사하란푸르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작은 파키스탄이라고 불릴 만큼 근본 이슬람 주의자들이 많으며 근처에 이슬람 신학교가 있어서 북인도 무슬림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다.

델리는 인도의 수도답게 무슬림 지식층이 살고 있는 곳이다. 특히 올드 델리는 무굴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살았던 ‘붉은 성’(Red Fort)을 중심으로 전 인도의 무슬림들이 예배하러 오는 ‘자마 마스지드’, 무슬림 시장, 서점 등 무슬림집단 거주지가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어 왔다.

뉴델리에는 알리가르의 무슬림 대학과 버금가는 ‘자미아 이슬라미아’ 무슬림 대학이 있어서 무슬림 지성들의 요람이 되고 있다. 러크나우는 순니 이슬람이 많은 인도에서 유일하게 대표적인 시아 무슬림 도시이다. 무굴 왕조 시대에 이란의 귀족들이 러크나우로 이주해서 지배하면서 시아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시아 무슬림들이 성지로 여겨서 까르발라 전투에서 전사한 후세인을 기념하는 무하람 기간에는 전 인도에서 시아 무슬림들이 방문하며 이 시기에 특히 수니와 시아 무슬림의 충돌로 러크나우시 전체가 긴장하기도 한다.

사하란푸르, 델리, 러크나우를 중심으로 북인도 무슬림사역은 주로 NGO를 설립해서 사역이 진행되고 있으며 교회개척, 제자훈련, 학교/어린이 사역, 빈민가 사역, 어린이 개발사역, 여성사역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장기선교사들과 함께 여러 단기선교사들이 팀을 이루어 교회개척, 제자훈련, 어린이, 청소년 사역, 방과후 교실, 문서번역, MK 사역, 비즈니스 선교, 디아스포라 한인 사역 등에 헌신한 결과 KFMB 소속 인도선교사들의 헌신이 이제는 조금씩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현재는 델리의 지경을 넘어 구루가온, 사하란푸르, 파리다바드, 데라둔, 러크나우, 바라나시, 콜카타, 뭄바이, 나가랜드 등 북인도와 북동부, 중부 인도, 동인도로 사역의 범위가 확장되었고, 점차로 인도사역자에게 사역을 이양하는 단계로 접어든 선교사들도 생겨나고 있다.

러크나우(Lucknow) 기차역, 출처: wikipedia

러크나우 사역을 중심으로 살펴본 북인도 무슬림 여성 사역

1. 러크나우 현황
러크나우는 UP주의 주도로 북인도 무슬림 선교의 중요한 관문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러크나우의 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시골에서 계속해서 도시로 유입되는 도시화 현상을 감안한다면 현재는 500만 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인도의 유명한 우르두시인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문화, 예술, 교육의 도시로서 5개의 종합대학과 20여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최근 경제성장도 빠르게 진행되어서 인도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10개 중소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시골 지역에서 유입되는 인구증가로 인해 도시 빈민 문제와 주택문제가 심각하며 경제 성장으로 인해 늘어나는 차량과 예전에 건설된 좁은 도로 때문에 교통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러크나우의 종교분포는 힌두교 74.9%, 무슬림 19%, 기독교 0.3%, 기타6.4%이다. 러크나우의 약 100만 명의 무슬림 가운데 30%는 시아 무슬림이다. 구 시가지에는 아직도 작은 시아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과거 무굴왕조 시대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지배계층의 대부분이 이란에서 온 시아 무슬림들이었으며 현재는 그 후손들이 러크나우를 인도시아 무슬림의 성지로 만들고 있다.

러크나우에서 가까운 아요디야에서 일어났던 힌두-무슬림 폭력사태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힌두-무슬림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은 거의 없지만 수니 무슬림과 시아 무슬림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편이라고 하겠다.

러크나우에는 Moghal종족, Pathan종족(Khan), 그리고 Sayyid종족이 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북인도 무슬림 사역에서 이러한 종족 별로 사역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이들이 종족 별로 모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전 인도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같은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북인도 무슬림을 하나의 커다란 미전도종족으로 보고 사역을 하고 있다.

러크나우 무슬림들은 우르두어와 함께 힌디와 힌두스타니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무슬림 집중 거주 지역은 러크나우시의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지만 역시 가장 규모가 큰 거주지역은 구시가지에 있으며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자신들만의 게토를 형성하고 있다.

러크나우는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사역을 했던 곳으로 선교사가 설립한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여자 대학교인 Isabella Thoburn College와 Christian College가 있다. 기독교 신자 수는 약 8,000~9,000명(비공식 집계)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30~35개의 감리교, 장로교, AOG, 침례교, 독립교회가 있다.

대부분의 현지 교회는 무슬림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다만 선교단체 OM India가 전략적으로 무슬림 사역을 하고 있고 2012년에는 전인도의 무슬림 사역자를 위한 “Lucknow Summit”이 OM 주관으로 열리기도 했다.

2. 러크나우 사역
2006년 인도에 도착한 후 2년 동안 델리의 김바울 선교사 팀에 합류해서 언어, 문화 습득 훈련을 받은 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2008년 3월 북인도 시아 무슬림의 성지로 알려진 러크나우에서 사역이 시작되었다. 처음 이 지역에 들어왔을 때 무슬림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IMB 소속 M선교사한 가정이 있었다. M선교사에게서 러크나우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은 후 지도를 가지고 다니며 무슬림 집중 거주지역을 찾아서 땅밟기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 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2008년 4월에서 6월까지 3개월 동안 뜨거운 러크나우의 태양 아래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구하며 이곳저곳 무슬림 동네를 기도하며 다니다가 C지역이라는 무슬림 동네와 힌두 동네의 경계지역으로 인도하심을 받고 이곳에서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 인도하심이 아닐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Siddiqui 종족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무슬림 집단거주 지역의 윗동네와 아랫동네인 힌두교도 거주 지역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윗동네인 무슬림 지역은 좁은 골목이 이리 저리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형적인 무슬림 게토이기 때문에 이곳 깊숙이 들어갈 경우 장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역초기의 보안과 안전문제가 부담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센터를 구하고 기도하며 사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북인도에서 무슬림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은 다양하다. 우리 팀은 전략적으로 무슬림 어머니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접촉점으로 학교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방과 후 교실부터 시작한이 사역은 후에 학교 사역과 주일학교 사역, 여성 재봉 교실 그리고 가정교회 사역으로 연결이 되었다. 방과 후 교실을 시작하기 위해서 무슬림 동네를 다니며 광고 전단지를 배부하며 그들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하면서 사역이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검은 차도르로 두 눈을 제외한 전신을 다 가린 무슬림 여성들을 보면서 그들이 매우 차갑게 느껴지고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 막막함이 있었다. 그러나 차갑고 멀게만 느껴지던 무슬림 여성들과 개인적으로 교제를 하게 되면서 그들의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정도 많고 의외로 속마음을 쉽게 털어 놓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인종과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 관심사인 가족들의 건강과 안위, 자녀의 미래, 부부 관계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접촉점이 되었다.

무슬림 어머니들은 가족 중심이기에 가족을 중요시하고 내 가족, 남의 가족 상관없이 가족 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 하고 대화를 나누기 원한다. 북인도 무슬림 여성들 대부분은 두려움과 걱정이 많다. 남편에게 이혼(14)당하지 않을까, 불임,가족들의 질병, 자녀 교육, 결혼 문제, 또는 어려운 재정 문제 때문에 늘 두려움과 염려가 그치지 않는다.

러크나우(Lucknow) 사람들

무슬림 여성들을 접촉하기 위한 접촉점으로 Grace Community Center와 초등학교인 Grace Academy를 세웠다. Grace Community Center에서는 1학년~중학생을 위한 방과 후 교실을 열었는데 이것이 후에 Grace Academy의 전신이 되었다. 학교가 세워지자 가난해서 정규학교를 보내지 못하고 모스크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인 마드라사에 다니던 무슬림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 학교를 열었을 때 학부모들에게 이곳이 기독교 학교이며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을 찬양하는노래를 가르칠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와 서명을 받았다. 기독교 학교가 양질의 교육을 시키며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준다고 생각했는지 부모들이 동의하며 입학원서에 서명을 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리고 그들 자녀들도 기독교 교육(15)을 시키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사역할 수 있는 것이 북인도무슬림 사역이 중동의 무슬림 사역과 다른 점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북인도 무슬림 사역이 열린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은 Siddiqui 종족들의 집성촌으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비록 행상이나 작은 구멍가게, 오토릭샤 운전자, 일용 근로자 등의 일을 하며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지만 자신들이 지배계층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따라서 타지에서 이주해온 Ansari종족 가족을 매우 무시하며 Siddiqui의 아들과 Ansari의 딸이 서로 연애결혼을 했을 때 Ansari 딸을 죽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닐 정도이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무슬림이 Siddiqui 종족의 혈연관계인 친인척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학교에 관한 소문이 빨리 퍼졌다. 첫 날 2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가 1년 후에는 100명 정도의 학생 수가 되었다.

어린이들은 수업시작하기 전 매일 예배를 드리며 각 학년마다 성경시간이 있어서 성경말씀도 연령에 맞게 배우기 시작했다. Grace Academy를 통해서 무슬림 어머니들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학교 교사의 신분으로 우리팀원들은 학생 가정에 가정방문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무슬림 명절에는 이들의 초대를 받고 방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 무슬림은 중동의 무슬림처럼 근본주의는 아니어서 그들을 방문했을때 가정의 여러 가지 힘든 문제나 병자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예수님에 관해서 점차적으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우리 팀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무슬림 여성들과의 교제만이 가능했고 전도도 여성들에게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늘 무슬림 가정의 가장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남성 사역자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성 사역자를 보내 주시는 대신에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하셨다.

무슬림 가정에서 가장이 가정사의 모든 결정권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슬림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가정사의 결정에 무력하고 연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안의 내부 문제 특별히 아직 자녀가 어릴 때는 자녀 교육에 관한 한 어머니의 결정권과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무슬림 가정의 가장이 예수를 믿게 된다고 해서 그 아내가 자동적으로 남편의 종교를 따라 오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와 함께 동역했던 MBB들의 아내가 여전히 이슬람교를 믿으며 남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집 한구석에서 그녀는 알라의 이름으로 나마즈(16)를 읽는 경우도 보았다. 따라서 MBB들의 아내들도 남편과 별개로 복음을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이것은 여성 사역자가 해야 할 사역이다.

MBB 형제들의 아내들과 새로 믿기 시작한 무슬림 여성들과 성경 공부할 때였다. 우리가 그 지역에 처음 갔을 때 우리를 맞아준 ‘평화의 여인’ 나씨마 아줌마의 세 딸도 모임에 참석했다. 다른자매로부터 그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무슬림들이 하는 기도(나마즈)를 한다는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대답을 했는데 나에게는그것이 변명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었으니 구습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그 대화가 계속 생각이 나면서 내가 상황화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들은 우리와 관계를 끊고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그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고 지금은 그들의 신앙도 조금씩 성숙해져가고 있으며 그 중 한 자매는 사역자로 우리와 함께 사역을 하고 있다. 이 일을 통해서 배운 것은 무슬림 사역을 하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랫동안 기다려 주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으로 인내와 관용으로 기다려주는 것이다.

하루 다섯 번씩 무슬림들이 하는 기도(나마즈)

방과 후 교실에서 시작되었던 사역이 학교 사역으로 그리고 교회개척과 주일 학교 사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사는 북인도 지역에서 무슬림 사역을 하려면 매 순간 무슬림을 ‘선택하고 집중’하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지혜가 필요하다. 매일, 매순간 마음속으로 ‘Only Muslim’을 외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범신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힌두교도들이 학교나 교회로 몰려올 것이고 그들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무슬림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어있다. 학교가 처음 열렸을 때 무슬림 어린이들과 함께 많은 힌두교 어린이들도 학교에 입학했다.

무슬림 여성들을 위해 재봉교실을 열었는데 이곳도 역시 정원의 ⅔가 힌두교 여성들로 먼저 채워졌다. 정원의 나머지 ⅓을 무슬림 여성들로 채우기 위해서 바느질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힌두교 여성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도에만 있는 특수한 현상일 것이다.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이나 중동 지역에서 사역을 한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학교의 학생수나 주일학교의 어린이 숫자, 또는 교회의 교인 숫자가 늘어난다고 마냥 좋아 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람 숫자가 늘어나서 사역의 규모가 커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목적은 무슬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힌두교도들로 인해서 확장되는 사역이 반갑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학교나 교회에 오는 힌두교도들을 되돌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슬림 어른들만을 위한 예배를, 상황화한 예배의식으로 주일 오후에 따로 드리기도 했지만 이 예배에도 힌두교 배경의 신자들이 와서 무슬림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니 이것은 북인도 무슬림 사역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매일 아침 학교에서 드려지는 예배나 주일 예배에서 힌두교도들의 언어인 힌디와 무슬림들의 언어인 우르두 단어속 깊이 포함되어 있는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힌두교도들의 언어인 힌디로 번역된 ‘뻐르메쉬와르’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라는 의미로 힌두의 만신관을 드러내며 무슬림들의 언어인 우르두어로 번역된 ‘쿠다’ 하나님은 유일신관을 보여주니 이들의 신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북인도 무슬림 사역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북인도 무슬림 선교를 하려는 선교사들 가운데 사역을 빨리 하고 싶은 조급함에 공용어인 힌디만 배우고 사역을 하려는 분들도 있는데 우르두 읽기와 말하기를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힌디와 우르두어 단어의 30%가 그 의미가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언어가 서로 상통한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이 두 언어에는 두 개의 다른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르두어 습득은 북인도 무슬림 사역에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주일학교로 인도되어서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들 가운데 무슬림 어린이들은 12세 정도가 되면 그 동안 잘 나오던 주일학교를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여자 아이들은 이때부터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혼자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고 의복도 청바지와 티셔츠 같은 것을 입지 않고 그들의 전통복장인 살와르-까미즈를 입고 머리에는 두빠따를 쓰기 시작한다. 남자 아이들도 이때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정식으로 금요일마다 모스크에 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주일예배에 나오지 않고 그렇게 기쁨으로 참여했던 주일학교의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꾼처럼 빙빙 도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깝다. 이 아이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으니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으시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

북인도 무슬림 어린이 사역을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이들이 12세가 되기 전까지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몇 살에 우리에게 왔든지 12세가 되기 전에 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확실하게 인도해야하는 긴박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역이 진행되면서 사역의 초점은 ‘제자훈련’으로 좁혀졌다. 우리 팀은 출구전략을 세우고 사역 기간을 7년으로 정했다. UP주에 사는 무슬림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와 학교가 개척되고 배가 되려면 한 지역에 오래 있을 수 없으며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기간 내에 현지 사역자들을 훈련시켜서 이들에게 사역을 이양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의 계획은 현지사역자들이 제자 훈련을 받은 후 넓고 넓은 UP의 각 지역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해야 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실제로 사역을 시작하고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어서 사역의 필요 때문에 출구시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사역 전략을 수정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여성들로만 구성된 우리 팀은 이슬람 문화의 특성상 여성과 어린이들에게만 접근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남성들에게는 전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99%가 여성이었으며 그것도 러크나우의 폐쇄된 문화에 사는 시골 처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훈련 받은 후 사역을 위해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려운 일 이었다. 그래서 사역을 위해서 이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보다는 사역이 개척되고 정착된 후 이들에게 사역을 이양하고 선교사가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는 출구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7~8년 후에 사역 이양이 완수되고 선교사는 철수한다는 출구 전략을 세웠는데 7~8년의 기간을 정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러크나우(Lucknow) 대학교에 다니는 무슬림 여학생

우선 첫째로 러크나우와 같이 외국인이 많이 살지 않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외국인 등록소(FRRO)에서 외국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현지에서의 특별한 수입 없이(17)오래 머물 경우 의심을 사게 되므로 장기 선교사의 two term사역 기간 동안인 7~8년 안에 사역을 개척, 정착, 이양을 하고 이 지역을 떠나는 것을 고려했다.

두 번째 이유로, 선교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는데 기간을 정해 놓지 않으면 현지인들에게 사역을 이양하지 않고 우리가 계속 사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면서 나중에는 선교라기보다는 목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며, 세 번째 이유로는 미리 떠날 시기를 정해 놓는다면 정해진 기간 동안 계획을 세우고 그 기간 내에 사역을 이양해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시작되기 전 1시간~1시간 30분 동안 힌디와 우르두어 성경을 읽으며 서로 깨달은 말씀을 나누는 참여적 성경공부(Participating Bible Study)를 통해서 사역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자라가며 무슬림에 대한 관심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필요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인도의 HBB(18)들은 그동안 무슬림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힌두교도들뿐만 아니라 HBB들도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꺼려 한다는 것이다. 한 번은 무슬림이 기차에 폭탄을 터뜨린 테러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HBB 사역자가 흥분을 하면서 “인도의 모든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이들 마음 가운데 서로에 대한 미움이 있는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 사역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가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무슬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조금씩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슬림들도 사랑하시고 그들도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HBB들에게는, 설사 자신이 용기를 내서 무슬림에게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과 무력감이 있다.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공부 외에 ‘낙타 전도법‘으로 전도 훈련을 시킨 후 함께 나가서 실습도 하고 두 명씩 짝지어서 하는 전도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전도를 나갈 때는 우리의 연락처가 적힌 우르두어 전도지를 가지고 가서 나누어 준다.

IMB, Call of Hope 등의 서구 선교단체에서 개발한 훌륭한 무슬림을 위한 전도지가 많은데 당시 벵갈로르에서 IMB와 협력사역을 하고 있었던 KFMB 소속 이 제임스 선교사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전도지를 받은 전도 대상자에게 가끔 예수를 더 알고 싶다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사역 이양 시기가 점차 다가오면서 이들에게 학교 사역과 주일학교, 주일 예배사역을 조금씩 맡기기 시작하면서 현지사역자들이 사역의 주도권을 가지고 부족하나마 사역하기 시작했고 2014년 9월 오글로리아 선교사가 사역지를 철수하면서 80%의 사역이 이양이 되었으며 지금은 이곳에서 그들을 재정과 기도로 후원하면서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고 있다.

방과후 길거리 모습, 러크나우(Lucknow)

향후 북인도 무슬림 사역을 위한 제언
선교지에서 7년 사역을 한 선교사라면 햇병아리 선교사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인도 무슬림 사역을 하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을 적어 본다. 현재 북인도 무슬림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몇 명인지 또는 가정 교회를 포함한 자맛 형태의 신자들의 모임이 몇 개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북인도 무슬림 사역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선교사들과 함께 외국의 선교단체들로부터 선교기금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도의 꽤 공신력 있는 현지 선교단체가 무슬림 선교를 한다면서 그들이 개척한 무슬림 자맛의 많은 숫자를 보고했지만 나중에 그 숫자는 허구로 드러났다. 사역 현장에서 실제로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이 숫자를 부풀려서 보고한 것이다.

이처럼 현재 북인도에는 무슬림 사역을 한다는 선교사들과 현지 선교단체는 많은데 그 열매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2012년에 열린 ‘Lucknow Summit’에서 OM의 설립자인 조지 바우어는 “이제 인도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스스로 전도를 할 만큼 크고 강해졌다. 그러나 아직 외국 선교사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슬림 선교이다.”라고 말했다. 전술한 것처럼 인도 현지 사역자가 무슬림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 방법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런 훈련 프로그램에 가보면 훈련이 다 끝난 후 마지막으로 현지 사역자들이 선교사 훈련자에게 “당신은 이 방법을 실제로 사용해 봤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대부분의 경우 선교사가 훈련방법을 직접 실행해 보지 않고 그 전임 훈련자에게 이론으로만 배운 것으로 드러난다.

훈련과 가르침이 다른 이유는 가르침은 배우는 것으로 끝나지만 훈련은 그것을 실제로 행한다는 것이다. 무슬림 선교를 위해 현지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선교사가 실제로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해보지 않았다면 그 훈련은 파워가 약할 것이다. 무슬림과 좋은 관계를 맺는것까지는 쉽게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명확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직접 무슬림들과 복음으로 대면하는 것, 즉 실제적인 encountering Muslim이 필요하다.

북인도 무슬림 사역에서 무슬림만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미 전술했다. 이것은 물론 북인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잠무-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나 사하란푸르 같이 지역이 그리 크지 않으면서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들인 지역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델리, 러크나우, 깐푸르, 알리가르, 미룻, 바라나시처럼 힌두-무슬림이 섞여 사는 곳은 사역의 확장 vs. 무슬림 사역 사이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원(시간, 재정, 에너지, 인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두마리의 토끼를 다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인도 무슬림 사역 선교사들간의 네크워킹이 활성화되어야한다. 무슬림 사역의 성격상 보안문제 때문에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인도 무슬림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함께 큰그림의 전략을 만들면서 협력해야 하는데 아직은 KFMB 소속 선교사들내에도 그런 부분이 미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가는 말
세계 무슬림선교에 있어서 인도 무슬림 선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슬림 인구 측면에서 보더라도 북인도 무슬림과 같은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파키스탄 무슬림과 웨스트 벵골 무슬림과 같은 언어인 벵골어를 사용하는 방글라데시 무슬림들을 포함한다면 세계 최다의 무슬림들이 서남아 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도 무슬림들이 중동의 많은 지역에 노동자로 나가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복음화될 때 중동지방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북인도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KFMB는 비교적 초창기에 시작해서 지금은 사역의 정착기에 접어 들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실제적으로 무슬림 사역을하는 선교사의 숫자는 부족하기 턱이 없다. 북인도 무슬림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기도하며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해야 할 시기이다.

한국 교회가 어렵고 선교사 지망생들이 감소하는 어려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추수하기 위한 필요한 일꾼들을 준비시켜 놓으셨으리라 확신한다 글| 윤 에스더 선교사(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 참고문헌 –
• 곽야곱, “인도, 선교현장의 역사를 말하다” 영광의 25년을 위한 은혜의 25년.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 선교회. 2014.
• ‘북 인도행 열차-인도 무슬림을 찾아서’, MVP선교회, 리서치선교사역개발원, 2012년.
• 유병기, 침례교선교의발자취. 기독교 한국침례회 해외 선교회. 2014
• 헤럴드 경제, 2014년 10월7일자 참조
• www.Joshuaproject.net, 2014 참조
• Operation World, 2010 참조
• World Facts, 2014 참조

[각주]
(1) www.Joshuaproject.net 참조
(2) 본 호에 실린 글마다 필자가 사용한 출처마다 조금씩 통계 수치가 다를 수 있음
(3) 이하 KFMB로 칭함 –Korea Foreign Mission Board
(4) 무슬림이 많이 살고 있는 UP주의 깐푸르는 가죽제품 사업지로 유명하다.
(5) ‘북 인도행 열차-인도 무슬림을 찾아서’, MVP선교회, 리서치 선교사역개발원, 2012년
(6) 헤럴드 경제, 2014년 10월7일자
(7) 헤럴드 경제, 2014년 10월7일자
(8) 유병기, 침례교선교의발자취,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 선교회, 2014
(9) 곽야곱, “인도, 선교현장의 역사를 말하다” 영광의 25년을 위한 은혜의 25년,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2014
(10) 곽야곱, “인도, 선교현장의 역사를 말하다” 영광의 25년을 위한 은혜의 25년,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2014
(11) 유병기, 침례교선교의발자취,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 선교회, 2014
(12) 이 책의 김바울 선교사의 글에 자세한 내용이 실렸다.
(13) Operation World, 2010, 퍼센티지로 보면 잠무-카슈미르가 무슬림 인구비율이 가장 높지만 인구수로 보면 UP에 가장 많은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다.
(14) 무슬림 남편들이 이혼하고 싶을 때는 ‘이혼, 이혼, 이혼’ 이렇게 세 번만 외치면 된다. 요즘은 모바일 전화의 sms로 ‘이혼’이라고 세 번 써서 보내면 된다고도 한다.
(15) 물론 우리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6) 나마즈: 하루에 다섯 번 하는 무슬림들의 기도
(17) 우리는 모두 언어학원의 학생 비자를 갖고 있다.
(18) Hindu Background Believer -힌두배경의 신자들.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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