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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마 2:6, 23; 눅 3:6)

성경이 말하는 CAS
Web Journal  25호 2020. 12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선교훈련 교재인 ‘Mission Perspectives’의 1과 제목은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성경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를 고려할 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이를 실행하시는, 곧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요, 그 근본 본체가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연히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선교하는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성장에 관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로 예수님이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곧 선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탄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단순히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강생(降生)(1)또는 성육신(成肉身)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시점
먼저 예수님의 탄생 시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의 탄생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 탄생의 선교적 목적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 2군데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예수님의 출생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출생지에 대한 예언이 이미 구약 성경에 나와 있었던 것이죠. 4절에 헤롯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5절에서 그들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면서, 6절에서 그 근거로 미가 5장 2절 이하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이미 다윗의 고향이었던 베들레헴을 지목하시면서 그곳에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나심을 예언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와 같은 마굿간, 출처: unsplash.com

그런데 마태복음 2장에서는 메시아의 출생지와 그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출생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베들레헴에서 날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헤롯이 자기 왕권의 위협을 느껴 그를 제거할 심산으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날지에 대해서만 궁금했지 정작 그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는 그리스도의 출생지뿐 아니라,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또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지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 5장의 다른 내용은 마태복음 2장 6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런데 미가 5장 2절 말미에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 개역한글 성경에는 이 대목을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고에”라는 말은 ‘아주 오래 전에’라는 뜻이고, 이를 부연하면서 “태초에” 또는 “영원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왕)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영원성)

미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전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권위와 영광)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목자)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통치의 영역) 5a 이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통치의 성격; 평화)


이 중 어느 쪽을 택하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상정한 표현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지요. 우리가 창조 기사를 통해 태초에 계셨던 이는 하나님뿐이심을 생각한다면, 또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범주에서 존재를 논할 수 있는 분 역시 하나님뿐이심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예언의 말씀에서 가리키는 분이 누구인지 금방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가 5장 4절 말미와 5절 첫 부분에서는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에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왕이 되실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말씀하는 대목인데, “땅 끝에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죠. 게다가 그의 통치는 “평강”이라고 말씀합니다. 힘으로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통치가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평강으로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헤롯이 기껏 자신의 작은 분봉지의 권력을 지켜보겠다고 전전긍긍하며 어찌 해보려 했던 그리스도는 그냥 왕이 되기로 예언된 어떤 운명의 사람이 아니라,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온 세상 땅 끝까지 지으신, 그래서 무력으로 빼앗을 필요 없이 당연한 주권으로서 평강으로 다스리시는 존재, 바로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만약 헤롯이 이 같은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 통치에 대한 이야기까지 제대로 다 들었다면, 어쩌면 그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헤롯의 잔인무도함에 희생당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알되 전체의 맥락에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온 열방과 세계를 평강으로 회복시키시고 다스리실 왕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예언의 실체였습니다. 결국 이 예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열방을 향한 선교의 목적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2장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합니다. 정확하게는 1절에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 땅으로부터 동쪽, 일반적으로 바벨론이나 아라비아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온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보였고, 그들은 그 별의 주인공,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말만으로는 그들이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를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시절에 그 먼 곳에서부터 기이한 별 하나만 보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에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라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그 기이한 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유대인의 왕이 장차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열방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단순히 타국 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외교사절 같은 개념이 아니라, 모든 나라 열방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궁극적 백성으로서 그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별(1887~1891) 에드워드 번-존스 경, 출처: unsplash.com

누가복음 2장에는 당시 아무도 몰랐지만, 특별한 계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고 축하한 사람들이 또 있었는데, 그들은 “목자들”(눅 2:8)이었습니다.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때 아닌 천군천사의 하나님 찬양이 시작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4절입니다. “땅에서는”이라는 표현은 그저 유대인의 땅, 이스라엘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다 포함하는 앞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과 대별되는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즉 이 구절 전체적으로는 모든 땅, 모든 나라, 열방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고, 여기는 당연히 선교의 대상인 이방인들도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고린도후서 5장 18절 말씀처럼 그러한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화목케 하실 평화의 아들로서 오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9장 10절에 시온의 왕이 임하실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서 그가 모든 전쟁을 폐하고,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목자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열방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선교적인 목적이 선명한 구절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열방,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과의, 또 세상 속에서의 참된 화평을 주러 오신 선교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예루살렘의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고,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눅 2:26)”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고, 유대 정결예식을 위해 그 육신의 부모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이 시므온도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자신의 소명과도 같은 오신 메시아,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그때, 그는 30절 이하에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라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도 놀랄 말씀을 선포합니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시므온의 이 
소명의 선포를 통해 예수님은 곧 구원이시며, 이는 단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고, 하나님 없이 어두움 가운데 죽어가는 이방에 비추는 빛으로서 그들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는 것은 열방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오셨기 때문에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세상 어떤 민족보다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이 순간이 오기까지 죽지않고 결국 이 말씀을 선포한 것, 그리고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바로 시므온의 인생에 주어진 소명이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아기 예수 탄생의 참된 의미를 온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교하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2. 예수님의 성장 시점
다음은 예수님의 성장기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의 성장기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예수님의 가족은 세월이 지나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데,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갑니다. 이 또한 23절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요,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사렛”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 רצרת ’, ‘네차레트’인데, 이는 이사야 11장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에서 “가지”, 히브리어로 ‘ נצר ’, ‘네체르’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런데 이 ‘네체르’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어 마태복음 2장 23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한 싹은 다윗이고, 그 뿌리에서 나는 한 가지가 곧 예수이시며, 여기 예수님을 상징하는 한 ‘가지’와 ‘나사렛 예수’라 불리시는 ‘나사렛’이 의미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 음가로 연결되면서 이사야 11장의 메시아와 그 구원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11장 9절에 메시아에 관해 예언하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는데, 그를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아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라고 말씀하면서, 그가 만민의 기치, 영어로는 ‘a banner’ 또는 ‘a signal’ ‘for the peoples’인데, 우리가 어떤 큰 행사를 할 때 세우는 큰 광고판 또는 큰 깃발처럼 예수가 그와 같이 온 세상 가운데 다 보이도록 세워져서 모든 영방이 다 그를 보게 되고, 그 구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바울이 로마서 15장 12절에서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해석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이스라엘 다윗 왕의 가문에서 나시는 메시아 예수는 결코 태생부터 이스라엘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고, 예언된바 처음 계획하심부터 온 세상과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한 선교적 목적으로 오신 분이심을 확실히 확인하게 됩니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롬 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3.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마지막으로 그 예수님의 오심에 앞서 이를 준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이사야서나 말라기서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할 자로 예언된, 어떤 의미에서는 메시아 이전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한 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3장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사40:3-5)을 인용하는데, 그 말씀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바로 자신의 사명과 사역에 대한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중 6절인데요. 여기서 그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인용 출처인 이사야 40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5의 인용, 누가복음 3:6
• 이사야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누가복음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all mankind will see God’s salvation)


이사야 40장,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임하실 것인데,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임하시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것이고, 그러면 모든 육체, 영어 번역에는 all mankind 즉, 모든 인류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이 ‘여호와의 영광’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라고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세례 요한이 임의적으로 말씀을 바꿔 버린 것이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친절하게 잘 풀어 설명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은 풀어서 설교했는데 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중요한 대목만 발췌해서 기록한 것인지 모르나, 주어진 본문만으로는 왜 두 말씀이 다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말씀의 행간의 의미를 잘 따져보면 여기 아주 중요한 구속사적 관점, 특히 이 구약 예언과 예수님을 연결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세례 요한의 엄청난 신학적 이해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 지금 세례 요한은 구약예언과 누가복음의 맥락상 누구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이사야 40장 5절과 누가복음 3장 6절 사이에 예수님을 놓고 보면 그 관계가 풀리게 됩니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영광’이 무엇입니까?

더 정확하게, 이 영광이 무엇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바로 말씀대로 하나님이 오셔서 임재하시는 결과, 사람들이 보게 되는 하나님의 반영인 것이죠. 다만 그것이 사람으로서는 설명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다소 추상적 표현으로 갈음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은 이 ‘영광’을 ‘구원하심’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죠. 세례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 나타나는 그 ‘영광’을 곧장 ‘구원하심’으로 연결할 수 있었을까요?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지요. 여기서 이사야 40장 말씀대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인간의 몸, 즉 ‘예수님’이라는 사람 수준에서도 인지할 수 있는 가시적 실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그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로 보이는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 역사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나타나야 했는데, 그 ‘영광’이라는 말에 걸맞게 화려하거나 웅장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동일한 인간의 몸으로 전혀 영광스럽지 않게, 심지어 말구유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죠. 이사야 53장 2절의 예언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오시는 그 임재의 결과가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나타나심이 어떤 의미인지 이사야 40장을 통해 통찰합니다. 이사야 40장은 후반부 말씀의 맥락을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 포로되었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적 구원 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까지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임재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지요. 결국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장 예언대로 자기 시대에 실제로 오신 예수님의 강생, 성육신의 목적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 실행하시고, 그 결과 온 세상이 누리게 될 그 구원하심, 바로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영광’의 진정한 실체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통찰의 결과가 바로 누가복음 3장 6절,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로 선포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임재(구약 예언) = 예수님의 성육신(신약 성취)

여호와의 영광(사40:5) =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하심(눅3:6)


그러니까 이러한 통찰의 과정을 통해, 세례 요한의 누가복음 3장 6절은 이사야 40장 5절과 같은 말을 다르게 한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그
가 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를 그 시점에 세례 요한의 이 통찰과 선포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구약의 모든 메시아 예언이 이 말씀을 관통하며 역사적으로 성취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이 곧 구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는 것 자체가 곧 모든 인류의 구원하심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그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모든 육체”, “all mankind”, 즉 모든 인류와 열방을 향한 구원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선교’인 것이죠.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까지 다 아우르는 그야말로 모든 인류, 열방을 향한 선교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선교하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를 위해 오신 하나님이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 탄생부터 과거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소망하였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언된 메시아 예수는 그저 그가 나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 민족만을 위해 오신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그 예언의 구절구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온 땅과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선교하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심으로 온 땅과 열방까지 이르는 선교가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 부르신 충성된 종들을 통해 선교의 남은 과업이 완수될 때까지 선교의 주인으로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다시 한 번 굳건히 예수 복음, 예수선교를 분명히 하여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각주]
(1) (영)incarnation, (라)incarnatio;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시어 신성(神性)을 지닌 채 인성(人性)을 취하신 사건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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