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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의 자생적 복음화(1)

이슈 인사이드
Web Journal  25호 2020. 12

들어가는 말
유대교와 기독교처럼 같은 근원을 가졌으나 끝이 다른 이슬람교는 하나님이 인간구원 계획을 계시해준 성경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변질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후 계시인 코란과 전통문서인 하디스를 따르는 무슬림들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모든 무슬림들에게 가르쳐 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최후 종교인 이슬람에서 이전 종교로 돌아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배교라고 주장하면서 무슬림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다 막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슬람 선교는 안 된다’는 선입견이 여전히 많은 한국인 선교사와 교회들에 팽배해 있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의 일반은총차원에서, 번창하고 있는 이슬람권 산하에 태어나는 20억이 넘는 무슬림들을 복음으로 인도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한국선교를 냉철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또한 서남아시아의 효율적인 선교전략의 방향성을 겸손히 제시하고자 한다.

1. B국 이슬람권 대상의 기존 선교전략 대한 고찰
간단히 설명해서 두 가지 방식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무슬림들을 기존의 기독교 사회 안으로 옮겨놓느냐 아니면 그들을 원래 출신 종교권인 이슬람 안에 남게 하느냐로 나뉜다. 무슬림들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외부자 방식’이냐 아니면 ‘내부자 방식’이냐를 말한다.

200년전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선교를 시작한 윌리엄 캐리(영국 침례교 파송)조차도 그가 만난 무슬림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 힌두교인들을 상대로 주로 사역을 했다. 그래서 벵골어로 처음으로 번역된 성경은 힌두교식의 종교용어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1).

이런 사역의 방식을 목격한 이곳의 무슬림들은 더욱 기독교의 외부자 방식에 대해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동의 이슬람이 탄생한 배경을 보면, 이슬람이 탄생하기 이전에 그 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신교 종교를 정리하기 위해서 단일신을 주장하는 이슬람이 일어난 것인데 힌두교에게 먼저 다가간 기독교와 그들의 종교용어로 번역된 성경을 무슬림들이 환영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은 주로 힌두교 중 하층민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해서 열매를 거두었고 나머지는 이 지역에서 거주하는 소수종족들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구성한 현지교회들은 서구의 침례교단, 장로교단, 루터교단, 하나님의 성회, 감리교 등으로 설립되는 모습을 보였다.

(1) 현지 기독교 교단들의 이슬람 선교 참여
물론 이런 기존의 기독교단들의 외부자 지향적인 전도방식을 통해서 소수의 무슬림들이 복음에 반응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출신인 이슬람과 이슬람사회를 완전히 버리고 심지어 이름까지 개명하면서 기존 교단에서 이전해 생존하였다.(일부는 핍박을 받아서 서양으로 떠난 이도 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침례교인 BBF(Bangladesh Baptist Fellowship)와 나사렛 미션 등과 같은 교단을 통해서 몇 개의 이슬람 부락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례도 있다. 몇차례의 순교를 무릅쓰고 전국에 다니면서 예수영화를 상영했던 기독교 선교단체의 활동도 무슬림들을 향한 무시할 수 없는 접근방식이었다(2).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성회 교단의 한 리더의 주창(자신이 무슬림에서 개종한 현지 목사임, 아사 케인 목사)으로 교단차원에서 무슬림들을 위한 별도의 선교전략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전도와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한 교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서 개종한 무슬림들은 개종 이후 기존의 이슬람사회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두려움으로 접근하지 못했고 기독교 교단으로 집단개종해서 세워진 교회들은 이웃 무슬림들에 의해서 무참하게도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기존 교단을 통해서 복음을 받은 1세대 개종자들은 기존의 기독교계에 속해서 자기출신인 이슬람교에 더 이상 복음을 확장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2) B국의 서양 선교사들의 이슬람 선교의 변화 시도
1980년도 말에 이런 기존의 무슬림 선교전략에 회의를 느낀 일부 서구의 선교사들은 외부자 방식이 아닌 내부자 중심의 선교전략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 전략은 사실 개종한 현지 개종자들이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 끝에 자기의 종교권인 이슬람 안에 남아 있으려는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독교는 기존의 서구문화가 많이 입혀져 있고, 힌두교와 소수 종족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선교전략으로는 무슬림들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없다는 반성에 기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먼저 밀튼쿡(Milton Cook)(3)이라는 미국 선교사가 이런 내부자 사역을 시작한 현지 개종자들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 무슬림들을 기존의 기독교 안이 아닌 이슬람 사회 안에 남게 하는 내부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슬람식의 예배방식(손을 들고 기도하거나 바닥에 맨발로 앉아서 예배 드리거나 성경을 받침대 위에 놓고 낭송하거나 성경을 읽는 방식도 이슬람식 영창을하는 방식으로 변경해서 기도했다. 즉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예배양식은 서양의 방식은 거부함)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 필 파살(Phil Pharshal)(4)이라는 미국 선교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슬람 상황화 선교전략을 이론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런 내부자 중심의 상황화 전략에 대해서 서구 기존 교회의 반발은 적지 않았다. 후원을 철회하거나 신학적 이단 시비를 거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런 내부자 중심의 사역방식은 현지인 회심자 리더들을 중심으로 더욱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코란을 더욱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성경을 믿지 않는 무슬림들을 향해서 왜 무슬림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 구절들을 찾아내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일부 현지 개종자 리더들이 이런 상황화 전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이슬람 선교사역에 참여하는 현지인 사역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분리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화 전략의 영향력으로 성경을 무슬림들이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종교용어로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고, 결국 새롭게 번역된 성경을 1991년에 성서공회에서 발간하여 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내부자운동 회심자들은 핍박을 피하고자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실제로 자체 셀 모임보다는 기존의 이슬람 사원인 마스지드(5)에 가서 예배드리는 일도 공인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상황화 전략에도 불구하고 내부자 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부분 그룹들이 외국의 기존 교단과 교회의 후원에 의존하는 paid evangelism(6)을 벗어나지 못해서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상황화와 복음화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부자 운동을 가장 크게 일으켰던 한 그룹(밀튼 쿡이 주도했고 현지인 T. Mannan이 인도했던)은 서구에서 후원이 중단되자 대부분의 리더들은(12명중 10명) 수천 명에 가까운 회심자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포기하고 급여를 주는 다른 기존 교단으로 이동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아무리 상황화 전략으로 복음을 무슬림들에게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이슬람 사회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리더들이 외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는 한 자생적인 성장과 확산을 유도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사례가 되었다.

(3) 한국 선교사들의 무슬림들을 향한 움직임
현재 B국에 100여 명의 한국 선교사가 나와 있다. 그런데 그중 B국의 90%를 넘게 차지하는 무슬림을 전임적으로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는 10%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슬람에 집중하는 소수 한국 선교사들도 아래와 같은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 물질지원 주도 사역
이마저도 이슬람에 대한 치밀한 연구에 근거한 사역이라기보다는 NGO식의 구호개발에 기초한 퍼주기식 사역을 하고 있고 그런 혜택을 받기 위해서 온 무슬림들을 그들의 사역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주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 온 가난한 무슬림들은 언제든지 자기의 종교나 신앙을 가식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실제로 B국에 들어온 한 한국 선교사가 복음을 들으러 오는 무슬림들에게 빵과 쌀을 주기 시작하자 수많은 가난한 무슬림들이 몰려왔고 그는 자기가 수만 명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했노라고 한국에 홍보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국 선교사가 세운 현지교회들의 현지 목회자나 전도자들은 한국 선교사의 후원이 중단될 경우 사역도 중단하는, 여전히 외국인 의존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 선교사들이 갖고 있는 교회관에 대한 성경적인 수정을 요청받는 것이다. 이런 방식도 여전히 물질에 의존한 paid evangelism인데 사실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어렵다. 오히려 이런 물질 혜택을 받으려는 현지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요한복음 10장 12절에 예수님은 이미 삯군은 목자도 아니라고 하셨고 이들은 양들을 공격하는 이리를 보면 도망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물질주의식의 사역 방식에 익숙한 현지 지도자들은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서 항상 물질적인 지원만을 기대한다. 결국 후원이 없으면 사역도 없는 물질 위에 세워진 열매나 교회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음을 경험하게 된다.

2) 이슬람권 내의 기존 기독교인을 이용하는 사역 방식의 한계
나머지 90%는 0.5%도 안 되는 이땅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신학교나 교육 기관, 호스텔 등을 운영하면서 사역하고 있다. 근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땅의 기독교인조차도 사실 몇 %가 진정 구원받은 기독교인인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어서 태생적으로 기독교인이 된 이들이지 자기들의 선택이나 결정으로 기독교인이 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1:12-13).

일부 한국 선교사들은 인구가 한 부족에 많으면 20~30만 명도, 적으면 수천 명도 되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사역하고 있다. 그 중 소수가 9%에 육박하는 힌두교를 상대로 전도하면서 사역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 선교사들이 사역 대상국가의 다수 미전도 그룹인 무슬림들에게 사역하지 못하고 소수종족들에게만 접근하는 이유는 한국 선교사가 현지의 태생적 기독교인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오해하고 있고, 이들을 통해서 다수 무슬림들에게 복음전파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나 사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일단 소수 기독교인은 다수 무슬림들보다는 사회적 위상이 현저히 낮고 현지 기독교인들의 마음에는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어서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무슬림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무슬림 쪽에서도 현지 기독교인들의 말을 들을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 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이집트의 콥틱교회나 터키의 아르메니아인교회, 시리아의 시리아 정교회 등) 한때 이슬람이 들어왔을 때 이슬람으로 개종의 위협을 거부하고 핍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기로 했던 위대한 결정을 했지만, 현재 기독교 정체성을 띄고 있는 그들은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도 버겁고 이들에 대해서 승리했다고 자부하는 영적인 우위에 있는 무슬림 다수가 이들을 통해서 전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미비하다. 실제로 정치 사회적으로 무슬림으로 남아 있는 것이 보다 더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기독교로 넘어오기 어렵다.

3) ‘땅 밟기’ 전도와 선교
오순절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단과 선교단체들이 이슬람지역에 ‘땅 밟기’식의 전도와 선교를 하다가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대부분 추방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이들로 인해 기존에 장기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타 한국선교사들까지 함께 경찰조사를 받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심지어 일부 선교사들조차도 이런 식의 사역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먼저 ‘땅 밟기’식의 전도방식은 성경적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릴 때 ‘땅 밟기’에 대한 명령은 없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들의 전도사역에 ‘땅 밟기’식의 사역 방식은 한 번도 언급이 된 적이 없다. 장신대 구약학 부교수인 김철홍 교수는 ‘땅 밟기’ 전략에 대해서 첫째, 정령신학에 기초한 세계관이며, 둘째, 영적 존재는 공간적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기본적 영적 상식을 무시하며, 셋째,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성도들을 눈감게 한다며 신학적 오류를 지적을 하였다.

그러나 ‘땅 밟기’ 신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겸손하게 낮아져서 성육신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셔서 그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셨고,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단지 죄와 사단에 무기력한 인간을 해방시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셨음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셨지 귀신을 쫒아내는 자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사단이 들어간 그의 제자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인간의 구속에 대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식이었다. 그러나 ‘땅 밟기’식의 사역에는 이런 형태의 성육신 사역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위로부터의 명령식의 선교자세만을 보일 뿐이다. 이런 영적 전쟁은 핍박 시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담대함을 갖도록 해달라는 우리 내부 무장에 사용함이 오히려 더 성경적이다(행 4:24-31).

4) 무분별한 한국식 전도와 교회개척의 폐해
몇 년 전에 들어온 어떤 한국 선교사가 무슬림 부락에 소수 성도들을 위해서 건물을 세워 교회개척을 했다가 이웃 무슬림들에 의해서 교회 건물이 부서지고 그 이후 모임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이런 식으로 이슬람 선교는 안 되는구나’를 깨닫고 힌두교인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건축이나 조직이 아닌 성도들이 모이는 셀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는 매년 이슬람국가인 B국에 대규모 전도팀을 보내는데, 현지어로 된 전도지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걸려 홍역을 치렀고, 억울하게도 전도지를 배부한 지역에서 그 전도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 선교사도 경찰에 조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서 배운 전도방법과 교회개척방식, 예배, 제자훈련방식, 한국식 신학교 등 한국에서 사용한 많은 영적 훈련 교재를 현지어로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한다. 게다가 한국에 기반을 둔 몇 분의 목회자들과 방문팀들은 가끔 선교지를 방문하여 자기식의 선교방식을 전달하고자 애쓴다.

이런 몇 가지 방식이 여전히 작동하는듯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까에 대해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교지는, 특별히 이슬람 선교지는 한국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전도전략이나 제자훈련방식, 목회전략이 이슬람권에도 잘 작동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몇년 만이라도 이슬람권에 나와서 사역해보면 결단코 그럴 수 없음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실수는 한국교회가 한국 땅에 들어와 있는 무슬림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데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국식으로 교회에 초대하고 예배드리고 심지어 신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지만 그들 중 모국으로 돌아가 사역하는 이는 소수이고 대다수가 한국교회의 물질적 지원만을 기대하며, 심지어 모국에 돌아가서 그들을 기다리는 이슬람 지도자들의 재활훈련 프로그램(7)에 투입되어 다시 이슬람으로 돌아간 사례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식의 선교사역 방식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반성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성경적인 교회란 무엇인가를 재고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한국식 교회의 조직과 건물이 아닌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성도들의 소수 모임인 셀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개척과 운영을 전문 목회자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훈련받아서 전도하고 셀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하는 총체적인 전도 개척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5) 우정전도
이슬람권에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취하고 있는 방식이다. 먼저 친구로 삼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인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열매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무슬림들이 외국인과 우정을 쌓고자 하는 종교적인 이유는 그들 스스로 선행을 쌓기 위한 것인데 외국인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과 우정을 만들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다른 평행선을 연결시킬 방식이 없는 한 우정전도는 선교사들을 매우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할 수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우정전도 방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 보인다. 진정한 우정은 자기가 전도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현지인들이나 아니면 현지 동역자와의 관계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우정전도는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현 무슬림들과의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도전을 선교사에게 던지기도 한다. 어떤 선교사들은 이슬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정관계 속에서 그들과 교제하며 더 파악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정전도가 성공하려면 먼저 주님으로부터 주님이 준비한 영혼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가 필요하며 주님의 세밀한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의 삶의 탁월함을 도덕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나의 삶과 가정을 개방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성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가 된다면 우정전도를 통해서도 열매를 주님이 주실 것이다.

6) 서양식 선교방식의 무분별한 채택과 비판
이슬람권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나름 고민하여 정리하고 적용해서 보급하고 있는 수많은 전도전략들이 있다. 상황화 전도전략, 낙타 전도법(8), 내부자 운동(9)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연구하고 직접 필드에서 사용해 본 필자로서는 그 한계와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들을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서양인들의 선교전략은 이슬람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선(先)지식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만 해서 회심의 과정이 없는 무슬림 회심자들을 양산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그들은 여전히 도덕적인 문제에 쉽게 빠지게 되었고 여전히 외국인에게 의존적인 리더만을 양성했다.

게다가 서양 선교사들이 내부자 운동, 신학적인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성경적인 근거로 판단하지 않고 현상적인 상황만을 강조하다 이슬람 사역권내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부자운동을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선교학자들이나 선교사들도 대부분 서양 보수주의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가 비판하는 주장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선교가 선교정보, 지식, 훈련, 전략 등 모든 분야에서 여전히 서양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어서 이슬람권을 향한 한국 선교사들의 독특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서양선교의 이슬람 선교전략의 변화는 유심히 연구하고 살펴볼 필요는 있다. 단순히 그들을 비판하기 이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왜 그런 전략을 세워야 했는가라는 근본 동기에 대해서는 한번 심각하게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 특별히 상황화의 스펙트럼을 만든 존 트라비스에 대해서 “당신이 만든 이론으로 이슬람 사역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국 선교학자의 비판도 있지만 동시에 더 많은 무슬림들에게, 심지어 근본주의 무슬림들에게까지 다가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략이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양에서 개발한 선교전략과 방식을 무분별하게 채택할 것이 아니라 그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우리의 고유한 특성과 은사가 잘 드러나는 한도 내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그러면서 가능한 서양 선교사들과도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서로 배워 나가는 파트너십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나가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슬람을 위해서 어떤 선교전략을 제안할 수 있을까?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어떤 복음을 전하기 원했는지를 자세히 살펴봐야 할 때가 왔다. 먼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인간은 예수님의 복음을 그저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전 인류를 위한’ 복음은 그냥 일부 인류만을 위한 종교로 전략하고 말았고, 종교와 종교 사이의 갈등구조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어려움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시초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다. 이 메시지는 전 인류를 향한 메시지이며 전 인류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요청이었다. 오늘날 이슬람을 위해서도 이런 하나님의 나라 중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제안해본다.

동시에 한국 교회에 팽배해있는 이슬람 포비아(Isram phobia)의 영향력은 이슬람을 사단의 도구로 여기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 이슬람권에 들어오면 사실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결과로 한국 교회가 여전히 불교 사원이나 이슬람 사원에 찾아가서 교만하게 땅밟기나 귀신을 쫒아내는 선언을 집단적으로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은 그냥 이슬람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전부이고 그들에게 어떻게 성경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흡하다.
(CAS 25호 이슈인사이드 : 이슬람권의 자생적 복음화(2)로 이어집니다.)

[각주]
(1) William Carey(1761-1834 영국) 윌리엄 케리와 떠나는 여행, 두란노 출판사 참조
(2) 이곳에서 CLB(Christian Life Bangladesh)라고 불리는 단체인데 원래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이 나라 단체이다.
(3) 밀튼 쿡은 1973 년도에 방글라데시 월드비젼 대표로 왔다가 1차 임기를 마치고 현지 개종자들을 데리고 이슬람 상황화 사역을 처음 시작하였다.(4) 필 파살 박사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M.A.), Wheaton Graduate School (M.A.), Fuller Theological Seminary (D. Miss.), and Fellowships at Harvard and Yale Divinity School. 를 마쳤고 지난 44년동안 이슬람국가에서 직접 이슬람사역을 하였다. SIM(Serving In Mission)소속선교사로 1979년 B국으로 왔다가 상황화 사역을 손수 경험하고 그 이론을 처음으로 발행한 선교사이다. 추후1992년도에 추방당하여 필리핀 마닐라에서 이슬람 사역을 지속하였다. 저서로는 ‘무슬림전도의 새로운 방향’(중동선교회 번역). Bridge to Islam, ‘십자가와 초승달’ ‘하디스를 읽다’(이상 조이출판사 번역)
(5) 마스지드(아랍어) 혹은 모스크라고 하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사원을 의미한다.
(6) “급여받는 전도자 혹은 목회자” 딤전 5:18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나 목회자가 급여를 현지에서 받는 것을 바울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지역교회나 지역 교단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현지 리더가 아니라 선교사로부터 고용되어 급여 받는 것을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목회하는 현지 리더들을 의미한다.
(7)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했을 경우 이들을 다시 이슬람교로 돌아오도록 회유, 교육, 협박하는 식의 재활 프로그램을 각 이슬람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다. 만일 이런재활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종교재판을 열어 최종적인 처단을 하기도 한다.
(8) 낙타전도법: Camel Method라고도 하는 데 1995년 미국 남침례선교부의 교회개척운동학자인(Church Planting Movement Specialist) Kevin Creeson이 방글라데시에 와서 기존의 유사한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리더를 통해서 배운 상황화 전도법을 코란수라 알 임란 45-52의 귀절을 이용하여 무슬림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유도하는 전도법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낙타전도법을 만들어서 개종자들과 팀을 만들어서 5년간 전도한 이후 15만명의 무슬림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발표했으나 추후 필 파샬이 들어와서 재조사한 결과 이는 급여를 받고 있었던 현지 리더들이 과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9) Insider movement: 스스로를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로 여기지만 믿음 이후에도 기독교의 사회나 조직안에 들어오지 않고 그들이 태어난 태성적 종교를 떠나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성도들의 무리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이슬람권 선교 역사에서는 1941 Henry H. Riggs 1969년에, 중동권의 무슬림들을 상대로 사역했던 남침례교선교사인 Virginia Cobb가 먼저 전도에서 예수님의 중심적인 전도를 강조하면서 종교 문화 정치 사회 등이 총체적으로 통합된 이슬람중 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후 1970년 중반 서남아시아의 무슬림들에게 사역했던 John Wilder 장로교 선교사는 observed that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예수님에게는 마음이 열려있지만 매우 소수만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슬람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넘어가야 하는 배교행위 즉 이슬람교에서는 배교로 여기고 남은 가족과 가문과 국가에 비수를 꼽는 행위라는 걸림돌이 무슬림 안에 존재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Martin Goldsmith도 이슬람사회에서 종교를 그들의 삶과 분리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 후 영국 선교리더인 John Anderson도 예수를 받아들인 무슬림들로 하여금 이슬람교를 떠나도록 한 것은 선교사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개종자로 하여금 이슬람의 문화를 완전히 떠나도록 설득한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1998년 Evangelical Missions Quarterly선교잡지에서 Phil Parshall과 J. Travis가 그리스도 중심의 예수님의 6가지 공동체 유형을 밝히면서 내부자 운동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리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에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이슬람 내부에 남아서 그들의 종교양식을 성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따르면서도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룹 즉 상황화 스페트럼 중에서 C-5를 채택하는 그룹을 지칭한다.(저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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