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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Asa M. Kain 목사!

도시와 사람들
Web Journal  25호 2020. 12

내가 Asa M. Kain 목사(이하 Kain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3월 27일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후이다. 그는 당시 내가 속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이하 기하성)와 같은 방글라데시의 Assembly of God(하나님의 성회, 이하 AOG) 총회장이었으며, 다카 AOG 교회의 담임목사였기 때문에 인사차 들린 것이 첫 만남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나를 상냥하게 대하기는커녕 매우 냉담하게 대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때 왜! 그가 나를 냉정하게 대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가을, 한국 선교사회 모임에 초청 강사로 온 그는 한국 선교에 대해서 매우 가혹할 정도로 비판하였다. 현지인 목회자인 그가 말하는 한국 선교는, ‘너무나 단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현지 사정을 무시하면서, 서둘러 선교를 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조급함과 현지 사정을 무시하는 일들은 많은 문제를 일으킴을 지적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지 못하는 한국 선교는 결코 현지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당시에는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나도 방글라데시에 정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저 사람과 내가 서로 도우며 일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생각이 이해되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한국 선교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고 난 후였다. 아마도 그는 나와의 첫 만남에서 나도 다른 한국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한국 선교사가 현지에서 이단을 전하다 문제가 되자 한국으로 돌아가 정통 교단에서 편목이 되어 다시 파송되어 온 것을 그는 매우 안 좋게 보았던 것 같았다.

Kain 목사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외모 때문에 그가 나보다 연배가 위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난 후 그가 나보다 5살이나 적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방글라데시는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였고, 그의 나이는 평균 수명에 조금 못 미치는 나이였다. 어쨌든 나는 그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였고, 자주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하여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그렇게 결국 현재, Kain 목사와 나는 호형호제하는 영적인 형제가 되었다.

Kain 목사는 1948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여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었을 때 서파키스탄(현재 파키스탄) 라호르 출신이었는데 방글라데시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청년 시절에 미국 미네소타의 Willmar AOG 교회에서 1953년 방글라데시로 파송된 선교사 Calvin Olson 부부(2000년 소천,부인 마리아 올슨 – 2002년 소천)를 만나게 된다. Calvin Olson 부부는 방글라데시의 남부 지역인 Gopalgangz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하였는데(많은 방글라데시 기독교인이 Gopalgangz 출신이다.) Kain 목사는 Calvin Olson을 만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지금도 그는 Calvin Olson 부부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를 정도로 그들 부부는 Kain 목사의 영적 성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사 케인 목사 부부

1972년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할 때,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서파키스탄으로 돌아갈 때도 그는 복음을 위해 방글라데시에 남기를 자처했다. 그는 방글라데시 여인 Gwen Janice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슬하에는 아들 Matthew와 딸 Milena를 두었다. 아들 Matthew는 Wales대학에서 석사학위(IT 전공)를 받았고, Raimey와 결혼하여 수도인 다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딸 Milena는 Jon Holmen과 결혼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Kain 목사가 1981년부터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다카 AOG교회는 Calvin Olson이 세워준 교회이다. 이교회는 시내의 다른 위치에 세워진 열두 곳의 지교회와 함께 성장하고 있으며 예배가 드려지는 금요일에는 영어 예배와 무슬림을 위한 무슬림 예배, 힌두와 크리스천을 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이제 다카 AOG 교회는 많은 이웃나라에 선교사를 보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당시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던 나는 영어예배에 참석을 하였고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함께 이 사역을 도왔다. 2005년 크리스마스에는 나와 같은 지역에 사는 AOG 소속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각자의 집주인을 초청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개최하였는데 무슬림들인 집주인들이 이 일을 매우 좋아하였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는 무슬림 집주인들

잠시 방향을 돌려, Kain 목사와 내가 함께 하는 성령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가 방글라데시로 파송되기 전 방글라데시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여러 지방을 현지 정탐할 때, 토사곽란(吐瀉癨亂)을 겪었다. 구토와 심한 설사 그리고 고열은 나를 힘들게 하였고, 금식에 들어간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를 방글라데시에 성령의 불쏘시개가 되라고 불렀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방글라데시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2002년 방글라데시 현지에 도착하여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한국 선교사 여럿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교사들을 고발하고 쫓아 낸 사람들이 무슬림들이 아니라 현지 목회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현지 목회자들 중에서도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돌아온 이들이 앞장을 섰다.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 목회자들에게 사역을 빼앗기고, 한국으로 돌아간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의 선교는 파송한 단체나 교회가 너무나 급하게 교회를 세우는데 급급하였다. 이에 선교사들은 자신들을 파송한 단체나 교회에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사역이 위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언어가 능숙해질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성과로 보이는 사역을 해야 하기에 선교사들은 한국말을 잘 하는 크리스천을 찾게 된 것이다. 또 현지인 명의나 법인이 아니면 부동산을 취득할 수 없다보니 가장 쉽게 의지할 곳이 한국어를 아는 현지 목회자들이었다. 현지인들이 죄를 짓게 하는 빌미를 마음이 급한 한국 교회의 선교와 선교사가 제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 성도들의 선교 후원을 받아, 방글라데시 현지 교회를 짓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을 다니면서 내가 본 현실은 실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를 가르치지 않고 교회 건축과 모이는 사람의 숫자에 급급하다 보니 선교팀이 올 때만 교회를 청소해 놓고 선교팀이 방문하는 동안에만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이 교회는 전필립선교사가 예고 없이 방문했을 때, 목회자도 없었고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 이유를 살펴보니 한국에서 건축헌금하신 분이 방문 할 때만 교인들이 모인단다.

나는 가끔 한국 선교와 Calvin Olson을 파송한 교회의 선교를 비교해 본다. Calvin Olson이 선교하던 Gopalgangz 지역에도 당시 미국에서 두 교단이 들어와 선교를 하였다. 한 교단은 많은 돈을 내어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건축했지만 현재는 모두 다른 종교가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Calvin Olson은 파나마 모자만 쓰고 종아리에 풀에 베인 자욱이 채찍으로 맞은 자리와 같이 될 정도로 논과 밭 사이를 다니면서 오직 구원만을 외쳤고, 자신의 집 거실의 벽을 헐고 오픈하여 두 부부가 신앙적으로 사는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 주며 삶으로 보여주는 선교를 하였다. 처음부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네 대나 굴리던 여느 한국인 선교사와 대조적이다.

필자가 학위 논문을 위해서 Calvin Olson을 리서치하려고 그의 발자취를 쫓아다녀 보았는데, 영적인 무형의 발자취 외에는 어느 것도 그 자신을 위해 남긴 것이 없었다. 만약 한국의 선교가 40년간의 사역을 통해 진정한 제자를 키운 Calvin Olson의 선교 방식,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길가로 향한 방을 터 거기서 두 부부가 예배를 시작한 모습을 본받았다면, 한국 교회는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교사로 파송했으니, 당장 교회를 개척하고, 몇 명이 모이는지, 숫자를 가지고 선교사를 독촉하는 한국 선교의 안타까운 단면. 그 중에는 파송교회 선교담당 장로가 와서 선교사를 파직하고 자신이 선교한다고 왔다가 몇 달 못 있다가 돌아간 일도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현지 사정을 무시한 한국 교회의 선교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내가 속했던 NGO 단체의 기술학교에서 사용할 컴퓨터가 필요하여 사역지를 떠난 선교사들의 컴퓨터를 구입하였는데 그 하드디스크 속에서 보지 못할 것들을 많이 보았다. 선교사들 자신이 하지 않는 사역들을 파송교회에 과장하여 보고한 허위성이 다분하였던 문서들, 그것은 선교사자신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성화가 그들을 그렇게 몰아낸 것이라고 본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 선교는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의 추종자들을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유입된 선교 헌금이 현지인 명의로 건물이며, 토지며, 각종 기기 및 물품 등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면 현지인들이 한국 선교사를 내쫓고 사유화하는 것이 대부분의 정해진 수순이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쫓겨났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본 나는 저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하고,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바뀔 것이라는 생각에 성령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Kain 목사이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한국에 다녀갈 때는 서점에 들러서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쓰신 책들 중에 영어로 번역된 설교집이라던가 기타 책들이 있으면 구입하여 선물로 주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던 바울성서선교회(P.B.W.M)에서 만든 영문책자를 전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성령운동을 같이 하기를 요청하였지만 쉽지 않은 시간들이 흘렀고 2007년 그와 P.B.W.M의 성령치유 세미나를 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알리기도 전에 P.B.W.M 교육도 받아 보지 않은 어느 선교사가 친지 목사를 통해 P.B.W.M 대표 목사님을 모시고 현지인 상대 부흥회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갖고 한국에 왔더니 다행히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를 아시는 목사님들이 대표님에게 현지 상황을 말씀드려 보류된 상태였다.

2009년 2월, 방글라데시 AOG 교단 총회가 열리던 쿨라(kula)에서 집회를 하기로 하였다.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 팀과 그곳을 가기로 하고 밤 12시에 도착했지만 안개가 심하여 강을 건너는 페리가 움직이지 않아 8시간가량 포트에서 기다려 강을 건너서 세미나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하루를 소비한지라 이틀동안만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당시 방글라데시 AOG 교단의 목회자 500여 명이 참석했지만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이 그들에게 전해진 것 같지 않아 2010년 1월 다카 AOG교회에서 다시 열기로 하고 150명만 모이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 준비를 하고 다카 교회에서 열린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

쿨라(Kula)의 세미나 현장

그중에도 Kain목사의 평가와 간증은 우리 사역을 빛나게 하였다. 우리나라도 한 교단의 총회장이고 직접 행사의 주관자가 아니면 뒷짐 지고 책상에서 보고받는 일이 일반적인데 카스트제도가 흐르는 방글라데시에서 총회장인 Kain 목사가 이틀간이나 세미나를 앉아서 듣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미나가 끝난 후 그는 오신 강사분들께 기념품을 전달하며 “한국에서 오셔서 강의하시는 강사님들에게 천군천사가 돕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을 하였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의 노고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다음해부터는 AOG 교단만이 아닌 초교파로 진행하자고 요청하여 우리는 예산으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난감함을 표현했지만 그는 한 번은 해보자고 하여 2011년 넓은 장소를 빌리고 대표 목사님까지 참석하여 300여 명에게 강의를 하였다.

현지 목회자 영성 세미나

이렇게 시작된 성령 운동은 방글라데시의 현지 목사들을 깨우는 일을 하였다. 이미 그렇게 훈련받은 현지 목사들중에서는 순교자도 나왔다. 2013년 2월에 현지 목회자 세미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팀에서 연락이 왔다. 방글라데시에 교회를 건축하고 싶다는 선교회가 있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방글라데시에 교회를 지어 놓고 창고로 쓰거나 그 건물을 다른 일에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교회를 지어 한국 성도들의 헌금이 어쩌면 그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는 데도 값없이 사용하라고요?” 그때, 주님은 “이제 때가 되었으니 지어도 된다.” 하셨다. Kain 목사를 만나 자초지정을 말하고, 함께 기도하며, 일은 진행하였다. 현지 건축의 모든 책임을 Kain 목사가 지고 건물도 교단 이름으로 짓도록 하여 현재까지 18곳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건축 상황 점검 차 각 교회들을 둘러보기 위해 다카를 떠나 지방으로 가려는데 한국에서 파송 받아 20여 년간 방글라데시에 교회 건축을 7곳이나 하시고 그곳을 돌보시는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이 같이 가주신다고 하였다. 수도 다카를 새벽에 떠나 현지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선교사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저 교회들을 어떻게 짓고 자금관리는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모든 것을 Asa M. Kain 목사에 맡기고 그들 총회 계좌로 돈을 보낸다.”라고 하였더니 “어떻게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믿느냐? 어떻게 관리를 하려고 그러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Kain 목사를 믿으며 그가 하나님 앞에 서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을 알기에 걱정이 없다.”라고 말씀드렸는데 돌아오는 것은 계속 되는 질책뿐이었다. 그러나 함께 세 곳의 교회를 돌아보시고 나서는 선교사님의 생각과 태도가 바뀌어 “저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방글라데시 현지 목사들이 저렇게 성실하게 교회를 잘 지었냐?”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그저 저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선교사님이 놀라워하셨다.

또 다른 케이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7년에 다카 근교에 있는 수출 공단인 사바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기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를 세운 것이다. 나는 섬유 기술학교를 운영하는 사역을 하며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어떤 때는 선교비가 오지 않아 식비가 없어 학생들과 함께 금식을 하며 기도를 하였다. 매일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이 빠르게 임하는 역사를 경험하였다. 매년 학생들은 일 년 간의 기술 교육 과정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 훈련을 한 다음 취업을 하였다.

그렇게 취업을 한 학생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먹고 살만해지자 그들의 가슴속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셨다. 많은 선교사들이 교회를 지어주고 목회자 생활비를 대주고 하여도 교회가 서지 않는데 방글라데시 현지인 평신도들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나에게 교회를 담당해줄 수 있는 목회자를 요청했고, 나는 Kain 목사에게 부탁하여 Micle 목사를 사례도 주지 못하면서 파송하였는데 지금은 2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자립하였다. 할렐루야!

기술학교 졸업생들이 스스로 세우고 섬기는 교회

이제 Kain 목사의 영성과 지도력, 한국의 영성 훈련 체제가 그 나라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목회자들은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언어 생활권인 인도의 콜카타로,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 한국의 기도훈련과 Kain 목사의 영성이 방글라데시 현지 목사들의 영성을 변화시켜 이제 방글라데시와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갈 것이다.

Kain 목사는 세계 오순절 펠로우십의 세계 선교위원회 부회장과 오순절 아시아선교회(PAM)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많은 저서를 썼으며 특히 ‘제한된 정부에서의 개척교회’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아시아의 선교와 영성 사역의 지도자로 자리를 차지해 나가고 있다.  글| 전 필립 선교사(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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