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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 ‘장소’가 주는 선교적 메시지

성경이 말하는 CAS
Web Journal  26호 2021. 03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마 4:12~17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일반적으로 어떤 공직자가 취임 후 처음 찾는 곳은, 그 공직으로 부름 받은 자로서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대중에게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임명된 허준영 경찰청장은 취임식 날, 그 옆에 헬기를 대기시켜 두었다가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그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이분이 취임식 날 왜 독도를 방문했을까요? 그것은 독도는 엄연한 대한민국 영토이고, 자신은 대한민국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 총수로서, 독도 역시 자신의 직무 범위 안에 있음을 확실히 하는 책임의식을 공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디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1. 공생애 시작 : 가버나움
마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의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11절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유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험 후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절에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이를 두고 구약 이사야서 9장 1-2절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언급하면서 15-16절에서 그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 4:14-16
14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16 흑암에 앉은 백성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관련해서 이 말씀을 기억하는 분들은 아마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 더욱이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여러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이 워낙 유명해서 그 앞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이 북쪽 변방의 가버나움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하며 소외되었던 스불론과 납달리, 요단 강 저편 해변 길땅은 물론, “이방에 속한 갈릴리땅까지 아우르며, “흑암과 사망,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이 될 것이라는 구약 메시아 예언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갈릴리 북서 해안에 위치한 당시 가버나움은 어업이 번창하는 동서상업의 요충지로서 세관과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이방인들의 왕래와 거주가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버나움의 바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역사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 다들 예상할만한 유대 예루살렘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소외되고, 또 이방사람들이 많은 의외의 장소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공직자의 예처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이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공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 이사야를 통해 미리 이 일을 예언하게 하셨던 것이죠.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기슭에 있는 가버나움의 고대 회당 유적, 출처: wikipedia

자, 어떤 의미에서 의외의 장소, 이 곳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입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말하는 ‘이 때’는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 가서 사시면서 부터를 의미합니다. 바로 그 때,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이미 앞에서 이 가버나움 지역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그 말씀을 들은 이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 이방인들을 드러내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메시아 되신 예수님의 최초 복음 선포 현장에는 분명히 수많은 이방사람들이 함께 있었고, 그들도 차별 없이 함께 그 역사적인 복음을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의 의미도 그러하고,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그곳이 특별히 이방 사람들이 많이 공존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명시적으로 그곳의 이방 사람들을 복음증거의 대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복음서 다른 부분들에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드러나게 이방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시거나, 이방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선포하시는 것을 상당히 절제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것과 동일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라는 복음전파와 선교의 전략적 진행 과정을 전제로 생각할 때, 비록 본문에서도 이사야 예언이 예수님 사역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공생애와 구원 사역의 시작은 우선 먼저 말씀을 소유한 유대인들과 유대 땅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의 민족적, 종교적 정서가 고려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본심과 깊은 관심은 공생애 시작 때부터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과 온 세계로까지 이미 향해 계셨습니다. “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첫 행보와 첫 메시지 선포의 장소가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인을 위해 오신다고 믿었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공식 사역이 이루어진 장소가 유대의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었다는 것도 의외의 일이지만, 정작 그 장소가 이렇게 유대중심적 사고에서 볼 때 변방, 그것도 온갖 이방인들이 섞여 있는 그런 곳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언급 없이 스윽 지나치듯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전략상 그렇게 할 만 했고, 지금은 이 사실을 밝히 드러내서 그 의미와 목적을 우리가 알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듯,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도 이방인들과 열방을 향한 선교의 계획이 처음부터 다 있으셨던 것입니다.

2. 단지 두 사람을 위해 : 가다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 장소와 관련된 선교적 메시지는 공생애 시작 때뿐만 아니라, 이후 예수님의 사역 속에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이방 선교를 하셨다고 말씀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이방 선교에 대한 경험과 훈련을 시키셔야 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방 땅을 방문하고 이방인들과 접촉해서 구원하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장면들은 대부분 제자들을 위한 모범, 즉 훈련 목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복음전파와 대속사역은 물론,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아주 잘 짜여진 훈련 스케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인 등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는가 싶더니, 18절에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그 병을 고치고, 전도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기를 피해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는 또 다른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호수를 건너가는 길에 갑자기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풍랑 앞에 제자들은 그제야 25절에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예수님을 깨우며 간청하고, 깨어나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시면서 책망하시면서 사나운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그들이 가는 길이 어떤 길인데, 그깟 풍랑이 아무리 사나운들 그들이 정말 죽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사역과 훈련 시간표 안에 그 배를 타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주무시고 계신 주님을 보면서 그 상황의 실체에 대한 믿음의 안목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이것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거라사 지방, 출처: wikipedia

우리는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선교지에 왔고, 그 뜻대로 가는 길이고, 그 길에 예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이 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제자들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의 뜻대로 온 것이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기도로 매달리면 우리 앞의 문제들이 해결이 되고, 믿음으로 나가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4장에서 성령께 사로잡힌 스룹바벨에게 하나님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6b-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성령께 사로잡힌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 앞에 있는 태산이라도 다 평지로 변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당할 때, 우리는 배 위에 계신 명령권자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 바람을 향해 ‘잠잠하라’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선을 넘는 것 같은 격한 훈련을 통과하며 도달한 곳은 가다라 지방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거라사로 표기된 이 가다라지방이 오늘 설교 맥락 속에서 중요합니다. 이곳은 ‘10개의 도시라는 의미의 데가볼리 지역 중 한 지방으로 무역이 성행하여 이방인들이 많은 국제도시였습니다. 성경에 이곳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금기된 돼지 목축을 크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사납게 소리 지르는 귀신 들린 사람 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들린 귀신을 그 옆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두 사람에게서 나온 군대귀신은 돼지 떼를 몰아 모두 물에 빠져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때 돼지 목축하던 그 지방 사람들이 자기네 돼지 떼가 다 몰살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능력 앞에 두려워 손해배상 청구서를 내밀 수는 없고, 하는 수 없이 마을을 빨리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말 않으시고, 다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돌아오십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신데, 호수 이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는데, 그들을 구원할 기회를 물리치시고 다른 곳으로 건너 가셨다면, 거기서 그 못지않은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서는 고작 귀신 들린 두 사람 구원하시고, 그 과정에서 쫓겨난 귀신 때문에 애꿎은 돼지 떼나 몰살되고, 거기 사람들이라도 어떻게 하실 줄 알았는데, 떠나 달라 하니 그냥 돌아와 버리시다니요. 이건 뭔가 안 맞고, 이해도 잘 안되고 그렇습니다.

경영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지금 수지타산이 하나도 안 맞는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자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건너편에 가면 두 명밖에 못 구할 줄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을 다 데리고 거기 가신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주된 사역 대상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온 세계와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훗날 제자들로 하여금 세계 열방으로 나아가 천국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서 타문화권 사람들을 제자로 훈련시킬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출신의 이 제자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이라고 믿던 이들에게 자신들의 사명은 유대 뿐 아니라, 이방인들과 세계 열방임을 계속 주지시키시고, 또 실제로 체험적으로 훈련시키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방의 땅, 타문화 환경에 노출시키시면서, 이러한 장벽과 어려움을 극복해가면서 그 땅에도 너희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내 백성들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타문화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 두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귀신 들린 이방인 두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땅에 가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그 날 그 시간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두 사람을 귀신들림에서 자유케 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따로 구별하신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해 오시지 않으셨고, 유대인만을 위해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들의 땅에도 가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선택하신 곳이 바로 가다라 지방’,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3. 수로보니게 여인 : 두로와 시돈
한 군데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타문화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데리고 가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시니 22절에 가나안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마가복음 7장에서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 족속”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서 이 여인이 수리아와 페니키아 혼혈의 이방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인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그렇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에서 다윗에게 맹세까지 하시며 주셨던 그 언약의 후손, 영원히 왕 노릇하실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들을 평화로 통치하실 평화의 왕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 아니니 혈통적인 의미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과연 이 여인이 모든 족속을 구원하시는 ‘다윗의 자손’의 영적인 의미를 알았던 것일까요?

두로, 출처: unsplash.com

어쨌든 신기하게도 이 여인이 정확한 표현으로 그런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여인의 진심이 무엇인지 모르실 리가 없으셨겠지만,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그저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부르듯, 절박한 마음에 잘 보이려고 그런다고 여기며 이 여인이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주변의 분위기를 의식하신듯 예수님은 이 여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듯 24절에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느니라”라고 하시면서 그냥 지나가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지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진정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맞습니까? 이 얼마나 이상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거기 있던 아직 유대 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은 ‘맞아, 맞아.’ 하면서 ‘우리 메시야는 우리 이스라엘 사람만 구원하러 오셨는데, 저 이방여자는 괜히 헛물켜고 있네.’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아마도 제자들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치도 없는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와서 절까지 하며, “주여 도우소서.” 간절하게 사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다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 여인과 같은 이방인은 개라는 말이고, 그러니 개가 자녀와 어떻게 똑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느냐?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은 정말 너무나도 잔인한 말씀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인종차별로 바로 고소해도 할 말이 없을 말이지요. 우리 같았으면 자존심 상해서 ‘관두시오.’ 하고 그냥 가버렸을 텐데 이 가나안 여인은 정말 자존심도 없는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시돈 구시 가지의 골목길, 출처: wikipedia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그 진심을 알 길이 없었던 이 가나안 여인의 진정성이 점점 확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 유대인들의 냉소적이고 반대하는 분위기를 무릎 쓰고,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시와 비하가 더 노골화 될수록 그 진정성이 입증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태도를 바꾸시면서, “여인아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시면 앞서 하신 말씀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지금 일부러 장난이라도 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그 여인의 간절한 중심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의 진정성을, 그 여인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유대인들과 특히 제자들에게 극단적인 ‘충격요법’을 써서 가르치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잠시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마음을 그대로 말씀으로 대변하시는 듯 했다가, 결코 굽히지 않는 이 여인의 믿음 앞에 그 잘못된 유대인들의 생각을 극적으로 깨시는 것입니다.

마 15:24-28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 그것은 매우 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깨져야 할 것은 병고침과 구원을 갈구하는 이 이방 여인의 고집이 아니라, 자기네만 선택받고 구원받았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고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방법이 얼마나 탁월하신지 모릅니다. 이방 땅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처음에는 그들의 편에선 듯 그 마음들을 고스란히 드러내시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생각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두로와 시돈’, 이방 땅이었습니다
.

4. 우물가의 여인 : 사마리아 수가성
마지막으로 짧게 살펴볼 것은 요한복음 4장입니다. 여기 나오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가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 구원하셨던 사건 역시 의미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세한 내용과 구절을 다 살펴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때도 마치 예정된 시간표라도 있으신 것처럼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 수가성으로 향하셨습니다. 당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통상적인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이방의 땅이나 다름없는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혼혈족 사마리아인들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사마리아, 그 중에서도 소외된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시간을 택해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마리아 마을, 출처: wikipedia

전혀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먹을 양식을 구하러 그 자리를 비운 탓에 안타깝게도 예수님과 그 여인이 나누는 그 대화와 전도의 과정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천하게 여김 받던 사마리아 땅, 구원에서조차 소외된 듯 해 보였던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수많은 수가성의 이방인들이 주께 나아오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435절의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씀으로 유대인의 땅, 유대인들 앞에서가 아니라, 그 이방인의 땅, 그 이방인들을 바라보시며 영적 구원 추수의 긴급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사마리아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범을 보이셨고, 직접 그 사마리아 땅에서, 그 이방의 장소에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만나 그 마음을 만지시고, 고치시며,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숨어만 다니던 그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달려가 예수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장소, 특히 복음이 선포되는 장소로서 이방 땅이 갖는 의미입니다. 이방 땅에 가야 이방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 공생애 사역에서 이방 땅을 찾으셨고, 그곳에서 이방 가운데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셨으며, 그들에게도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초청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동일한 부르심 가운데 있는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보이신 이 장소의 의미를 묵상하며, 내가 찾아가야 할 장소, 그리고 내가 머물러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을 만날 기대를 주님의 마음으로 품어보시면 어떨까요? 꼭 우리의 전 생애를 그 장소, 그 사람들에 다 헌신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 한번, 짧은 시간일지라도 우리가 가고, 머물러야 할 그 장소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순종의 자리에 거하시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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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각주]
(1) (영)incarnation, (라)incarnatio;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시어 신성(神性)을 지닌 채 인성(人性)을 취하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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