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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선교 역사 30년 회고와 전망

CAS 디스커버리
Web Journal  26호 2021. 03

한국교회의 이주민선교가 30년이 되면서, 한 세대(世代)라는 경험을 보유하게 되었다.1) 인간의 탄생과 성장, 자녀를 출산하기까지의 평균적인 시간을 세대(世代, Generation)라고 하는데, 이는 가족의 구성과 이에 따른 역할과 책임, 인류의 존속을 위한 재생산에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30년이 된 현재 이주민 선교 역사 회고를 통해 한국교회와 이주민 선교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색하는 것은 대단히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지난 30년간의 한국교회 이주민선교를 통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 시작은 선교와 전도의 균형을 이루며 한국 사회에 귀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다문화주의가 확대되고 수용되면서, 도리어 한국교회는 이주민 · 다문화와 관련된 사역의 영역과 공간을 정부 지방자치단체나 NGO 기관들에 내어주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주민들이 유입되던 초창기에 주도적으로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이주민에 대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던 한국교회는 현재 250만 명이라는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 속에서 이들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방향을 상실 한 채 코로나라는 위기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 실추로 탈 기독교화 사태까지 겹쳐 삼중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기(危機)는 본래 위험(危險)과 기회(機會) 그리고 위험을 기회로 전화(轉化)시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이주민의 존재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전화회복(轉化回復)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은 더 이상 ‘이주민선교’라는 특수선교 영역으로 국한될 존재들이 아니다.2) 이들은 한국교회가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성장 발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목회의 대상인 동시에 범(凡)민족적, 범(凡)문화적, 우주적인 선교적 교회로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동역자이자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용산에서 잡화를 판매하는 무슬림 이주민

이주의 세계화와 급격하게 증가하는 한국 이주민 통계
UN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3)는 지난 2015년에 국제 이주자가 2억 4,40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5년 전 2000년의 1억 7천 32만 명에 비해 41%나 증가한 것이다. 또한 2019년 12월 말 통계에 의하면 한 해 동안 세계 78억 인구 가운데 2억 7천2백만 명이 국제적으로 이주를 했는데, 이는 인구 100명 당 3명, 7명 중 1명이 이주를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IOM의 가장 최근 통계에 의하면 2020년에는 2억 8천60만 명이 국제적인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21세기는 ‘전 지구적 이주’ 현상이 메가트렌드가 된 시대이다.

한국 역시 세계화로 인한 이주민들의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1990년 이주민 선교가 시작되던 초기 한국 내 체류 중인 외국인 수 통계 자료에 약 5만 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당시 전체 인구의 0.1% 수준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특별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이주민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2019년 현재 약 250만 명의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함께 살고 있으며, 이는 한국 전체 인구의 4.9%나 된다. 이후 2040년에는 국내 다문화이주민 수가 5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면서 이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비하자는 이주자선교포럼이 개최되기도 하였다.4) 서구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인종 · 다민족 · 다종교로 변화한 반면에 한국은 5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외국인 이주자들이 100배 이상 증가한 인구 구성의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면서, 지속적인 한국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하여 향후 더 많은 이주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사회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주민들의 유입과 정주화로 인한 다문화 사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우선 지난 과거 한국교회의 대응과 선교 사역을 통해 빛과 그림자 부분을 조명해보자.

90년대 한국 사회 이주민 상황과 이주민 정책
한국의 이주민 선교 30년 역사는 한국 사회에 80년대 후반 1987년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필리핀과 중국 이주민들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이들은 18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경제발전과 국가 이미지 상승으로 코리안 드림을 실현해보고자 자발적으로 단기여행 비자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과 그로 인한 임금상승, 노동자 부족 현상을 해결하려는 한국의 필요 때문에 이주 노동자 신분으로 체류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시에 급속한 경제 발전 이면에 내국인 노동자의 ‘3D 직종 취업 기피 현상’이 초래되어,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했던 ‘3D 업종’의 대다수 한국 중소기업들이 심각한 인력난을 겪게 되면서, 당시 생산직 인력난이 만성화된 국내 노동시장 상황은 외국인노동자들을 한국으로 유입되게 한 근본적인 동인이 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성급히 일본의 기술연수생제도를 참조하여 1991년에 해외투자를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산업기술연수제도를 도입했으며, 1993년부터는 중소기업의 인력부족 해결대책으로 종업원 10명에서 300명 미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산업연수생제도를 신설하여 다음 해인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5) 사실 처음에 한국은 이주노동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과 필리핀 동남아 노동자들이 먼저 단기 및 관광 비자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후 미등록, 불법 체류 상태로 노동해오다가 자진신고 기간에 체류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실태에 대해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대책으로 대응해왔다. 그러다가 일본을 벤치마킹하여 연수생제도를 마련한 것인데, 연수생 제도는 일명 ‘현대판 노예제도’6)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외국 노동자들에게 불합리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이주민에 관련된 제도와 법, 인식조차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에 따른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불법체류 이미지와 한국사회의 약자로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은 한국사회의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라는 노동 양극화의 희생물이 되어, 철저하게 ‘통제와 관리’에 초점이 맞춰진 ‘차별’, ‘배제’로 대변되는 이후 다문화 이주민 사회의 특징을 처음부터 배태할 수밖에 없었다.7)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의 아침 출근길 풍경

1990년대 한국교회의 이주민 선교사역
한편 국내에서 이주민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나그네에게 환대’8)라는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와 인권운동으로 전도와 선교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주민 선교는 초기 복음주의 진영의 전도적 측면에서 영어예배와 중국어예배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서는 1990년 11월 중국어문선교회가 처음으로 전도단을 구성해 인천항과 서울역, 남대문 등을 다니며 중국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주 월요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CCC 회관에서 ‘중국교포 초청 전도집회’를 정기적으로 가졌다. 이어 1991년에는 중국교포 선교협의회가 구성되어 노방전도를 통해 중국 이주민들의 사역이 본격화되었다.

또 성공회 성생원9)과 감리교 재한외국인선교교회에서 필리핀 영어예배를 이때부터 시작했으며, 1992년 7월 희년선교회가 구로공단의 필리핀인을 중심으로 영어예배를 드리면서 정기적인 인권상담과 의료지원 활동 및 쉼터사역을 전개하였다. 현재 경기도 안양에 본부를 두고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지역교회(안양, 일산, 인천, 곤지암 등)를 세워 각국 현지 목회자를 통한 네트워크 사역과 신학교를 통해서 외국인 근로자를 제자화해서 10/40창 지역으로 파송하고 있는 위디 선교회도 1992년에 설립되었다.10)

본격적인 에큐메니컬 진영에서의 선교활동은 갈릴리교회 사역으로 시작된다. 원래 갈릴리교회는 1986년에 구로공단이 위치한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설립되면서 처음부터 사회선교를 목표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왔다. 이러한 비전은 90년대 사회적 약자로서 외국인노동자를 주목하면서, 1992년부터 갈릴리공동체 계약갱신 예배를 통해 이주민을 대상으로 이들을 섬기는 예배와 상담을 시작했는데,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는 이주 노동자 무료진료를 최초로 시행한 단체이다. 그 해에 KNCC는 에큐메니컬 차원의 연합기구인 ‘한국교회 노동자 선교회’를 조직하여 사무실을 갈릴리교회에 두고 본격적인 이주노동자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93년 3월에는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한국교회 노동자 선교회의 주최로 “외국인노동자 선교정책협의회” 모임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94년부터 산업연수 제도가 확대 시행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졌기 때문에 그 결과 수도권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 상담소가 많이 신설되었다. 특히 1994년 4월에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이, 10월에는 유일하게 장로교단 노회가 설립한 기관인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현, 안산이주민센터)가 설립되면서 NGO 형태의 인권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11)

한편 단일국가의 이주민을 대상으로 1993년에 새문안교회에서 의료선교단이 창단되면서 이후 1995년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선교를 통해 베트남예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997년 일산에 몽골인을 대상으로 한 게르방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99년에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 조선족교회가 설립되면서 단일민족, 단일종족 대상의 교회가 한국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톨릭과 관련한 단일 민족 예배는 필리핀 미사에서 태동한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혜화동 성당 주변으로 형성된 필리핀시장, 필리핀마켓과 음식점은 한국의 수도 ‘서울 속 작은 필리핀’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는데 토요일과 미사가 드려지는 주일에는 필리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이색적인 다문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 중국인과 함께 가장 일찍 들어온 이주민인 필리핀 사람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몇몇 필리핀인들이 혜화동성당에서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드리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지자 1999년에 정식으로 필리핀 본국에서 초빙되어 온 필리핀 신부가 타갈로그어로 강론하면서 본격적으로 단일민족 미사가 현지인 신부에 의해 자립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타갈로그어 미사에 참여하는 필리핀 신자는 적게는 800명 많게는 1,100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현재 한국 내에서 최대 이주민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12)

안산시 외국인 이주민 센터

2000년대 이주민 선교단체와 교회 증가, 15개 국가에서 주로 이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2000년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주노동자 지원센터는 모두 90개이며, 이후 2003년 ‘외국인노동자 실태 및 지원서비스 수요조사’에 의하면 이주노동자 지원센터가 155개로 증가13)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의 통계는 시민운동단체나 개신교 이외의 타 종교단체를 포함한 숫자이다. 한편 개신교교단의 주요교단을 대상으로 이주민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를 조사한 정노화의 논문에서는 2003년 96개 교회가 이주민 사역에 동참14)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특별히 한국의 2000년대 이주 노동자 선교는 2004년에 정부에서 시행된 고용허가제15)로 인해 이후 4~5년 동안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2008년 김영애의 논문에는 당시 199개 교회가 이주민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16) 그 후 2012년 한국교회 희망봉사단이 전국적으로 조사한 이주민 선교대상 교회와 관련 기관수는 더 증가하여 270여 곳으로 집계되었다.17) 2020년 현재 한국의 이주민과 다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사역기관과 교회는 모두 1천여 개로 추정된다.18)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에 유입된 이주자 유형이 초창기 1990년대의 노동자 신분에서 점차 다문화 결혼 가정(대개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와 다음 세대 자녀), 유학생, 난민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는 동시에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는 비율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기관과 교회도 더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한국 이주민선교 교회와 단체가 증가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고용허가제의 영향이 가장 크다. 한국 정부가 15개 국가의 정부와 인력송출양해각서(MOU)를 체결하여 이들 국가에서 이주민들이 지속해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력송출양해각서(MOU) 체결한 15개 국가에는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중국, 방글라데시, 키르기스스탄, 네팔, 미얀마, 동티모르 등이 있다. 15개 국의 체류 현황은 이번 CAS 26호 이슈 인사이드의 2. 출신 국적별 현황 데이터 자료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의 변화와 혼돈, 갈등, 도전
위 15개 국가를 종교와 문화권별로 분석해 보면 현재 한국 사회의 기존 주요 종교 외에 이슬람교, 힌두교 권역의 사람들이 함께 더해지면서 이로 인한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보자면 중국, 인도차이나 불교권(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동남아 이슬람권(인도네시아), 중앙아 이슬람권(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서남아 이슬람권(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힌두권(네팔,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지역 사람들로서 기존의 한국문화와 종교 외에 새로운 테라바다(Theravada) 불교19), 이슬람교20), 힌두교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면서 혼돈과 갈등, 도전이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 UPMA팀이 현장 연구를 한 서울 이태원에 있는 힌두교 사원은 여자 사제인 카밀라 로이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카밀라는 지난 2008년 7월부터 다른 힌두교인들로부터 모금한 돈과 사업가인 남편의 돈을 모아 이태원 해방촌에 힌두교 사원을 설립했다. 그는 “문화가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문화가 없는 삶은 동물의 삶이나 다름없다.”라면서 한국에 19년 동안 살아오면서 맘몬숭배의 폐해를 비판하며 힌두교의 사명을 역설하기도 했다.21) 2021년 현재 한국에는 서울, 포천, 인천, 김해 등 4곳에 힌두교 사원이 세워져 있고, 약 1,000여 명의 힌두교 신도들이 활동하고 있다.22)

서울 이태원 힌두교사원 예배 모습

특이한 것은 경기도 포천 소흘읍 이동교리에 있는 힌두교 사원이었다. 이곳은 한국의 구역행정단위 중 작은 규모에 해당하는 읍(邑), 가장 작은 리(里) 단위 마을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인데, 2012년 10월 ‘드르가보자’ 힌두교 축제 당일에 전국 각지에서 1천여 명 이상의 힌두교 신자들이 모여 행사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23) 당시 이곳은 스리 스리 라다 크리슈나 사원으로 불렸는데 한국에 이주해서 정착해 사는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의 이주민을 중심으로 그들의 종교인 힌두교 크리슈나 신을 예배하던 사원이다.

이주를 통해서 종교적 다양성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한국 사회에서 특히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무슬림 배경의 이주자들이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 내 이슬람교 현황은 한국이슬람중앙회 서울중앙성원에 따르면 전국에 모스크 20여 개, 무쌀라(기도실)가 130여 개가 있다고 발표했다.24) 국내에서 이슬람교와 이 종교를 믿는 무슬림들의 증가로 말미암아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은 지난 2월 13일 대구 경북대학교 서문 주택가에서 벌어진 모스크(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 시위였다. 주민들은 대현동과 시청, 구청 등 12곳에 ‘주거밀집지역 한복판에 이슬람 사원 건립 결사반대’, ‘이슬람 사원 건립은 주민의 생존권, 행복추구권을 박살낸다.’라는 항의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당시 인터뷰를 한 마을 주민들은 이슬람의 예배25)와 이슬람 사원과 무슬림들의 증가로 인한 이슬람화26)가 두렵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현재 대구에는 큰 규모의 이슬람 사원 1곳과 예배소 10곳 등 11곳의 관련 시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대구시는 예배 횟수 등을 근거로 지역의 무슬림이 대략 500명 안팎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27) 이슬람에 대한 한국사회의 두려움과 공포는 단지 대구 지역 주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그 시작은 지난 2007년 7월에 발생한 탈레반의 한국인 납치와 살해 사건28)에서부터 기인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 기독교의 단기선교 활동과 기독교의 이미지 하락에 위기를 경험한 한국교회는 그 다음 해인 2008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슬람대책위원회에서 ‘이슬람이 몰려온다’라는 영상을 배포하면서 이후 한국 사회에 ‘이슬람 쓰나미’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 공격적인 포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무슬림들의 이주 증가에 따른 위험성을 경고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각 기독교 교단을 중심으로 이슬람대책위원회와 인터콥 등 일부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각 지역교회들에게 확산되었다. 가장 최근의 2018년 제주도의 예멘 난민에 대한 반 난민시위29)와 청와대 청원 역시 한국 사회에 높아져 가고 있는 이슬람 혐오 및 공포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 이를 취재하던 BBC 뉴스팀은 한국인들이 예멘 난민으로 인해 한국에 발생할 수 있는 무슬림 테러의 위험과 난민들에게 소요될 제반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30)

이주민의 유입으로 한국사회가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가진 부정적 선입견이 가장 큰 문제이다.31)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는 사회현상으로서의 다원주의와 종교적 상대주의로서의 종교다원주의를 혼동하고 있어서, 우리와 다른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문화적 차이와 전통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맹목적 비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양상을 보인다.32) 이것이 한국사회가 다원주의사회로 변화하는데 선교적인 장벽과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울 이태원 보광초등학교 앞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 방해가 되는 한국 특성적 문화
사실 한국 사회가 이주민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주장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는데,33) 2000년대를 지나면서 다문화, 다종교 사회의 양상과 변화가 더욱더 빨라지고 있다.34) 문제는 한국 사회에 ‘다문화’ 관련 담론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히 부각되고 있지만, 다문화 사회나 다문화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 제기와 본격적인 논의는 이제 시작되는 단계라는 사실이다. ‘다문화’가 접두어로 등장하는 다문화사회, 다문화주의, 다문화가정, 다문화자녀, 다문화교육, 다문화정책 등등, 한국 사회에 다문화 담론이 성급하게 넘쳐나고 있어 이에 대한 점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이주민 선교 30년도 이러한 한국적 특성 가운데 한국인이 주도적으로 진행해왔기 때문에 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우선 한국의 이주민 다문화에 대한 점검은 지정학적으로 또한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우리의 편향과 문화적 특성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사회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35) 또한 세계선교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한국 선교학자들과 이주민 다문화 전문가들의 견해도 수렴해보았다.36) 객관성과 함께 실제 현장에서의 점검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때 타당성을 보다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회과학계와 선교현장에서 동일하게 지적된 것은 한국인의 인식과 태도에 관한 문제였다. 물론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이주민 다문화 선교사역에 있어서 관련된 제도, 법, 정책 등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부족과 무지하거나 교만한 태도라고 한다.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단일민족주의와 혈통주의 그리고 ‘문명론적 차별’, 중심과 가장자리라는 지역적 계급적 양극화 현상과 차별, 부계(父系)ᆞ 부권(夫權)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가족중심주의라는 세 가지 한국 특성적인 문화가 우리 내부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1) 단일민족주의와 혈통주의, 그리고 ‘문명론적 차별’
한국 사회는 다른 국가와 달리 사회적으로 어느 특정한 이(異)민족의 역사가 거의 없었는데 이것이 현재 이주민과 다문화 시대에 오히려 부정적 혹은 부족한 역사 경험으로 거론된다. 그 이유는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는 주변의 여러 민족이나 이질적인 종교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강제적이거나 자발적인 요인으로 이주를 해서 장기간 함께 살면서 갈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상호 간의 노력과 변화를 통해 국가의 통합과 안정적인 발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뿌리 깊은 단일민족주의와 혼혈인에 대한 일반적인 차별에 비해 성공한 한국계 혼혈인에 대한 열광37) 등 혈통주의 문화가 저변에 형성되어 있다.

갈수록 세계화와 이민, 다문화 사회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사회 실현의 가장 큰 걸림돌로 단일민족주의와 혈통주의 문제가 계속 지적되고 있다. 이 문제는 예전에 타 문화권으로 가는 한국 선교사들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세계열방이 들어와 있는 21세기 한국과 한국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유럽계 백인에게는 대부분 호의적이고 유색인종은 차별하는 ‘문명론적 차별’ 현상도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인종 편향까지 한국 사회가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2) 중심과 가장자리라는 지역적 계급적 양극화 현상과 차별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결혼한 이주민 가정,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각각 그들이 사는 지역이 서울 혹은 지방 등 다 다르고,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과 역할이 다르다는 차이가 한국 내에서 계층, 계급적인 기반으로 작동하면서 차별화로 구체화되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사회 연구학자들은 크게 도시와 농촌이라는 일상생활에서의 생태적, 거주적 환경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농촌은 농사가 주요 생계유지 수단이며, 도시는 노동을 사고, 팔 수 있는 다양한 노동시장이 형성된 곳인데, 한국의 지역적 특수성에 기반한 특성을 한국의 서울과 수도권 중심주의 문화, 강남중심 문화, 화이트칼라 중심의 계급 문화적인 특성이 한국인들 사이에 ‘지역적 계급적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한국적인 지역적 계급성과 차별이 이주민 다문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거나 혹은 더욱 심화된 차별 현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과 배제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어느 한 지역의 특수성을 일반화하는 특정 모델이나 사례 적용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의 다양한 유형과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현장 중심적이고 각각에 맞는 정책과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3) 부계(父系)ᆞ 부권(夫權)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가족중심주의
유교와 부계, 부권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 가족중심주의가 다문화 시대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한국 사회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은 가족관계(혈연)와 학연인데, 일반적으로 학연은 가족(부모)의 지원에 따라 세습되고 강화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국의 남성 중심 가족중심주의는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이루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계, 부권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가족중심주의의 한국적인 오랜 전통과 특성이 한국 사회에서 구현되는 데 있어서 이주민 다문화 가정에서 대부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과 이들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을 더욱더 소외 배제시키며 차별하는 세계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 815 이주자선교 EXPO 전도부스, 사진제공 : 정노화 선교사

전망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이주민 선교 역사 30년을 회고해보았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에 이주민들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갈수록 이들의 정주화 경향이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 한국 사회와 이주민 하면 이주 노동자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들어와 시작된 결혼 이민 여성 다문화 가정 대상의 선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 자녀들이 생기고 그 숫자도 증가하면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이주민 선교의 새로운 분야로 대두시켰다. 아울러 한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유학생들을 위한 사역과 사역 단체가 형성되어 활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난민 대상의 선교 역시 이주민 선교의 새로운 분야가 되고 있다. 이주민 사역 30년 동안 초창기의 예언자적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던 한국교회는 다문화가 본격화된 2천 년 중반 이후에는 사역 대상과 필요한 사역에 따라 다양한 활동과 사역을 해오고 있었는데 헌신과 희생, 인내와 고난, 현지인 제자화와 교회 재생산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경쟁과 중복 투자, 열악한 사역 구조,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된 이주민 선교의 부작용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끝으로 지난 30년의 역사 회고를 통하여 몇 가지 미래 제언을 하면, 우선 현재 한국의 이주민 증가 추세는 한국교회의 목회와 세계선교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어서 이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더욱이 작년 2020년과 2021년 올해에 코로나로 한국의 경제, 사회, 정치 지형뿐 아니라 종교, 가족 등 인간의 기본적인 삶과 관계를 둘러싼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때 한국교회는 지속적이고 건강한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과거 특수선교의 영역으로 규정했던 이주민 다문화 선교를 목회와 전도라는 영역으로 전면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이는 한국에서 갈수록 젊은이들과 유아의 인구가 감소하는 한편 전형적인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가운데 한국교회의 노령화 현상에 현재 한국사회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이미지 하락이라는 상황까지 맞물려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생존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코로나는 한국교회의 순수혈통 주위에 입각한 전형적인 한국인들이 형성해왔던 종래의 한국교회가 아니라 다인종 · 다민족 · 다종교를 가지고 한국에 유입된 이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한국교회로의 변화와 정체성 형성, 그리고 그 필요를 위기 가운데 역설적으로 앞당기고 있다.

새로운 한국교회 형성과 세계선교의 지속을 위해서는 지난 30년 동안 이주민 다문화 사역을 해오고 있는 선교 단체와 앞서 개척자의 길을 간 사역자들이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이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네트워킹을 통해 사역의 시너지를 제고하고, 다양한 협력을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우선 구체적으로 다문화 이주민들에 대한 구성원 멤버케어와 상담, 위기관리, 이주민 다문화에 대한 연합적인 교육 및 훈련, 주요한 과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연구와 사역 개발, 사역 대상별 전략 수립, 성공적인 모델과 사례 발굴이 협력 네트워킹을 통한 정기, 비정기적인 만남과 선교 포럼 등을 통해 한국교회에 더 많이 공유되고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역교회와 함께하는 이주민 다문화 선교에 대한 미래 전망이 희망적이다. 개교회, 개교단, 개별 선교 단체의 이주민 다문화 사역을 넘어 다시 한국교회의 건강한 재생산을 통해 세계선교를 함께 이루어나가는 파트너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2천년 기독교 선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이슬람교의 메카 중심성과 달리 언제나 주변을 향하여 문화적 경계선을 넘어가면서 다원적인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타문화 사역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과연 어떻게 민족과 국가, 인종과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낯선 문화를 취하여 그 지역과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새로운 기독교 형태를 취할 것인지 심각한 도전과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교회의 외형적 확장과 그로 인한 종교 권력화 현상은 낯선 이방인 이주민 다문화 사람들에게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방식과 우리 문화로 이들을 대상화하여 개종의 대상, 온정의 대상으로 시혜적인 선교를 할 위험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방에서 온 한 사람, 한 가족, 한 종족의 변화이기에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제라도 일상의 삶에서 이주민 다문화 사람들을 만나고 이웃으로 관계를 형성하면서 복음의 능력이 상호 모두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그 은혜와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해가기를 바란다.  글| 정보애 선교사

[각주]
1) 작년 2020년 6월 개최된 국제이주자선교포럼(IFMM)에서 이해동은 한국에서 이주민 사역이 1992년 외국인 노동자 사역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했으며, 한편 김영애는 『이주, 다문화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책에서 이주자 선교는 1990년 11월부터 시작된 중국어문선교회의 인천항, 서울역, 남대문에서의 노방전도와 중국 정동 CCC 회관에서 가진 매주 중국교포 초청 전도 집회‘로 보고 있다. 이해동, “포스트 코로나와 이주자 사역: 포스트 코로나와 이주자 선교”, 『포스트 코로나와 이주자 선교』, p. 57 ; 김영애, 『이주 다문화 그리고 다양성』, 서울: CLC(기독교문서선교회), 2021, p. 110

2) 박찬식 국제이주자선교포럼 상임이사, 한국산업사회연구소 소장과의 인터뷰
3) UN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를 이후 글에서는 IOM이라고 간략하게 표기하겠다. IOM은 1951년 설립된 정부 간 기구이다. 현재 172개국이 IOM의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IOM은 회원국 정부와 이주민에게 다양한 서비스와 정책 제안을 제공, 이주 증진, 이주관리에 관한 국제협력, 이주문제에 대한 실무적인 해결책 제시 등의 일을 한다. 서비스 대상은 이주 노동자들은 물론 이재민, 난민, 트래피킹 피해자 등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주자들이다(IOM 홈페이지에서 정리 재인용).
4) 국제이주자선교포럼(IFMM), 포스트코로나와 이주자선교, 『제13회 국제이주자선교포럼』, pp. 54-66, 2020.
5) 이 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한국 정부는 1992년 6월 10일부터 7월 31일까지 미등록노동자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불법 체류 자진 신고’를 받았다. 1992년에 외국인 노동자 수는 73,868명이었는데, 그중 88.7%인 65,528명이 미등록노동자들이었다. 이에 정부는 ‘1992년 불법 체류 자진신고자’ 전원을 산업연수생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부는 1994년 1월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를 산업연수제도 주관단체로 선정하고, 1994년 5월부터 산업연수생제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박천응, “한국교회의 이주민 선교 역사와 향후 과제”, 『WCC 부산총회 학술자료집』, 2013.11.1
6) 여권이나 통장 압류, 폭행, 저임금, 산업재해 미적용, 임금 미지급, 퇴직금 미지급, 브로커 횡포, 송출비리 등 이주민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이 유린당하였기에 노예제도라고 한다. 정영섭, “한국 사회 이주 노동자 현황과 운동 과제” 중 한국 사회 이주 노동자의 역사와 현실, 『인문과학연구』, 제39집, 2012.8, p. 25-28.
7) 박천응, 『혼종적 담론비판분석으로 본 한국의 다문화 담론 비판』, 인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8) 이종록, “너희도 전에는 게르였다―외국인 노동자 선교를 위한 구약 성경적 이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전도부 외국인근로자선교회후원회 엮음, 『외국인 노동자 선교와 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0, p.136.
9) 성생원(지금의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은 1962년에 성공회가 132,200㎡의 부지를 구입해서 한센병 환자들이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나누어준 곳인데, 지난 2005년부터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로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과 인권침해 등의 노사문제를 비롯해 어학교실, 컴퓨터 교실 등의 귀환 프로그램,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취미 문화 교실 등을 운영해오고 있다.
10) 문창선, “국내 이주민 선교의 흐름과 사역 진행”, 『미션인사이트』, 2016. pp 66-74.
11) 박천응, “외국인 노동자 실태와 제언”, 『월간 교회 성장』, 121호, 2003. 7. 1 p. 147.
12) 양태삼, “서울 혜화동성당의 필리핀인 신부”, 『연합뉴스』, 2010. 12. 10.
13) 임수경, 『외국인 노동자 현황과 목회 사역의 방향』,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석사 학위 논문, 1996, p. 302.
14) 정노화, 『이주 노동자 선교의 신학적 고찰 및 활성화 방안』, 고신대학교 선교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4, p. 21.
15) 고용허가제는 한국에서 내국인 노동자를 구하지 못한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서 정부로부터 고용허가서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비전문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2003년 8월「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2004년 8월부터 시행되었는데, 보통 고용허가제라고 한다.
16) 김영애, 『이주 노동자 선교의 신학적 고찰 및 활성화 방안』, 리폼드신대원 다문화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 2008, p. 87.
17) 황홍렬 외 4인, 『이주민 선교 기초조사 보고서』, 서울: 꿈꾸는 터, 2013, pp. 105-127.
18) 김영애, 『이주 다문화 그리고 다양성』, 서울: CLC(기독교문서선교회), 2021, p. 113.
19) 테라바다(Theravada)라는 뜻은 “장로 (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한문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한다. 원(原)불교, 정통 불교라는 의미로 개인의 해탈을 강조한다. 후기 대승(大乘)불교에 비교하여 소승(小乘)불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20) 연합뉴스 특별기획 시리즈 2020년 10월 제작된 다음 내용은 이슬람교와 이를 믿는 무슬림을 이해하고 이들과 함께 사는 한국 사회에 소통과 공감을 위해 ‘한국의 이슬람교’라는 큰 주제로 4개의 기획 기사를 마련했다. 간략하게 한국 무슬림 역사와 현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 ①’토종 무슬림’ 6만 시대 맞았다. ②”무슬림은 테러리스트” vs “평화 추구하는 종교” 한국의 이슬람史 ③무슬림, 신라 시대부터 한반도에 살았다. ④이태원에 서울중앙성원 설립.
21) “한국은 물질을 중시하는 나라다. 많은 한국인이 돈이 없으면 불행하고,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으며 돈을 위해 살아간다. 돈이 없어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이 사원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힌두 문화를 전파하고, 어떻게 평화롭고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알리고 싶다.”백철 기자, 소수 종교인들 – ‘하레 크리슈나!’ 힌두교를 아시나요?, 『주간경향』 964호, 2012. 02. 28
22) 오상헌,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문제, 힌두교에서 해답을 찾다”, 『월간 인터뷰』, 2020. 01.
23) 미디어 드림 취재 기사팀, “소흘읍에 이동교리에 있는 힌두사원에서 무슨 일이”, 미디어 드림 블로그, 2012. 10. 27.
24) 김지선 기자, “교회 · 절이라도 이랬을까…이슬람 사원을 향한 불편한 시선들”, 연합뉴스, 2021. 03. 03
25) 주민 김모(67) 씨는 “종교를 탄압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좁은 마당에 많을 땐 80명씩 하루 다섯번 담벼락에 대고 절을 한다. 상의도 없이 규모를 더 키운다니….”라고 울먹이기까지 했다. 김선형 기자, “경북대 서문 주택가에 이슬람 사원 건축…주민 반발”, 연합뉴스, 2021. 02. 12. 기사 중 주민 인터뷰 재인용
26) 산격4동 주민 B 씨는 “대현1동 원주민이 빠져나가고 일대가 이슬람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크다”라며 “이집 저집 매각 의사를 묻는 걸 보니 일대를 완전히 다 사들이려는 의도도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위의 글, 재인용
27) 백경열 기자, “무섭다 주민들 편견에 막힌 이슬람 사원”, 『경향신문』, 2021. 02. 23.
28) 탈레반 한국인 납치사건은 2007년 7월 19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23명(남자 7명, 여자 16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던 사건이다. 당시 탈레반은 피랍된 23명 중 심성민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 결과 다른 한국인 국민 인질 21명은 8월 31일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 피랍사태는 발생 42일 만에 종료되었으며, 9월 2일 생존한 피랍자 19명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피랍자들과 해외 위험지역에 선교하러 다니는 개신교도들이 비판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탈레반 한국인 납치사건 부분
29) 당시 개최되었던 난민 집회는 일시별로 아래와 같다. 2018년 6월 30일 오후 8시 ‘불법난민신청 외국인대책국민연대’가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 난민법·무사증(무비자) 폐지 촉구 집회에는 1,000명 정도가 참여했으며, 같은 날 6월 30일 오후 6시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반난민 집회에는 100여 명이 참여했다. 이후 2018년 7월 14일 토요일 오후 7시에 서울 동화면세점 앞, 광주 금남로 공원 앞, 전북 익산시 익산역 앞, 제주 노형 로터리 월랑마을 표지석 앞에서 두 번째 반난민 집회가 열렸다. 위키피디아, 제주난민사태 시위 부분.
30) 한 시위 참가는 제주로 입국한 예멘 출신 난민 신청자들에 대해 “그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이가 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테러의 위험성”이 염려된다며,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선 재사회화 교육이 필요한데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BBC 뉴스 코리아, “제주 예멘: 난민 둘러싼 찬·반 여론 갈등으로 확대 우려”, 2018. 07. 01.
31) 한국일, “이주민 선교를 위한 종교와 문화 이해”, 『선교와 신학』, 제27호, 2011. 05.
32) 위의 글.
33) 설동훈,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사회』,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 설동훈, “이민과 다문화 사회의 도래”, 『한국사회론』, 2005.
34) 엄한진, “전 지구적 맥락에서 본 한국의 다문화주의 이민 논의”, 『동북아 다문화 시대 한국사회의 변화와 통합』, 서울: 한국사회학회 동북아시대위원회 용역보고서, 2007 ; 윤인진, “한국적 다문화주의의 전개와 특성”, 『한국사회학』, 제42집, 2008 ; 김우선, “다문화 사회의 한국교회의 역할” 『신학전망』, 2009 ; 박성호, “한국의 다문화 형성과 종교의 역할”, 『종교와 문화』, 2012.
35)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김혜순, “한국적 다문화주의의 이론화”, 『한국사회학회 국책연구보고서』, 2007. 08 ; 한경구, “다문화 사회 개념과 한국 사회 다문화 담론에 대한 성찰”,『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07.06.20. ; 한경구, 한건수, “한국적 다문화 사회의 이상과 현실”, 『한국사회학회 국책연구보고서』, 2007.08. 김영애, 위의 글 ; 장남혁, “국내 이주자 선교의 과제와 방향”, 『선교와 신학』, 2017. 06.
36) 참고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황홍렬, “고용허가제 이후의 이주 노동자 선교의 과제와 전망”, 『선교와 신학』, 제21호, 2008.02 : 한국일, “이주민 선교를 위한 종교와 문화 이해”, 『선교와 신학』, 제27호, 2011. 05. ; 문창선, “국내 이주민 선교의 흐름과 사역 진행”, 『미션인사이트』, 제 7호, 2016. 02 ; 송인선, 『현장에서의 실제 경험과 상담사례로 본 한국의 이주민사회』, 서울: 야스 미디어, 2018 ; 김영애, 『이주 다문화 그리고 다양성』, 서울: CLC(기독교문서선교회), 2021.
37) 지난 2006년 하인스 워드 열풍도 이에 속한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의 슈퍼볼(NFL 결승전) 최우수선수(MVP)에까지 오른 워드는 혼혈 연예인 다니엘 헤니와 데니스 오의 성공에 이어 새로운 혼혈인 열풍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부에서는 워드 가족에게 훈장이나 명예 시민증 수여 등 국가적 예우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을 정도다” 당시 기사 재인용. 여한구, “하인스 워드 열풍과 한국 혼혈인”, 『중앙일보』, 20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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