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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 ‘대상’이 말하는 선교적 메시지

성경이 말하는 CAS
Web Journal  27호 2021. 06

이 글은 김병선 선교사님이 그동안 진행해 오신 “선교의 성경적 관점” 강의를 본인 허락 하에 주제별로 발췌하여 설교문으로 재정리한 글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선교 설교’를 돕기 위해 마련한 것이며, 설교문 작성을 위해 구성과 표현상의 각색은 다소 있으나, 최대한 원 강의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성구 인용 : 개역개정판)

 

마 4:23-25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협상론에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이 명확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하여 전략적 성과를 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께서도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과 유사한 방식을 활용하신 것 같습니다. 바로 복음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인데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대부분의 말씀들이나 이방인들을 대하신 태도를 보면, 예수님은 그저 유대인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신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방인들은 노골적으로 로 비하하시기도 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이방인에 대해 무심하시며, 그들의 구원에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으셨던 것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예수님의 복음전도 대상은 유대인이라는 인식을 부지중에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거부반응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방인들에 대해 보여주신 때로 극단적인 말씀이나 태도들이, 바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입장들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경멸과 천시, 구원이 결코 공유될 수 없다는 생각 등이 바로 구약을 잘못 이해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사상의 전형이었는데, 일견 예수님도 같은 편에 서 계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예수님이 여느 유대인들처럼 그런 잘못된 편견으로 이방인들을 생각하셨던 것일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자명하게 아니오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저와 여러분도 이 우주적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일이 다 입증할 필요 없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는 선교하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하신 것일까요? 바로 그 부분이 앞서 언급한 예수님이 취하신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당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열방을 복음화하실 선교전략의 큰 뼈대는 바로 대상 문화를 고려한 선교의 단계적 확장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주로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복음과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넘어, 그들이 꺼리던 사마리아”, 그리고 천대, 멸시의 대상 이방인들이 사는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복음이 결국 각각의 문화적 장벽들을 극복해 나가게 될 것이지만, 시기에 따라 먼저 집중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음을 전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공생애 기간에는,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처음 택하신 유대인들에게 증거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대중적인 복음전파 못지않게 그들 중에서 충성된 제자들을 양육하여, 세계 선교의 씨앗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님 사역의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의 관점에서 아직 구약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데리고, 천국 복음도 전하고, 그들의 고질적인 이방에 대한 편견도 한꺼번에 뜯어고치는 것은 전략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온전히 유대인들의 관점과 태도만을 취하셨는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유의 방식으로 원래 예수님이 지향하시는 바를 암묵적이지만 반복적, 지속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마치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은 알아채라.’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전략적 모호성속에서도 예수님이 일관적으로 취하신 진정성이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이방인들을 향하신 전략적 모호성이면에 숨은 진정성을 입증할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수리아 사람들
먼저, 마태복음 4장 23-25절입니다. 말씀을 한 번 읽어보시죠.

마 4:23-25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자, 예수님이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본격적으로 대중 전도와 치유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24절에 그 소문이 어디로 퍼졌습니까? “수리아에 퍼진지라”

예수님 당시 유대-수리아

여러분, 당시 지도를 보시면 수리아는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이 수리아는 최근 아사드 정권이 백성들을 죽여 반군이 일어나고, IS라는 이슬람 극렬분자(極烈分子)들이 스스로 나라를 선언한 곳, 바로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본문에 그 지역에서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점에서 분명한 이방 지역이고, 나아온 그들은 분명히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수리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인 갈릴리 지역에서 그 백성, 즉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사역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국경 구분이 지금처럼 명확하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웃 나라 수리아에까지 퍼졌던 것이죠. 또 병이 나도 마땅한 의료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수리아 사람들이 자기와 가족, 친지들의 병고침을 받기 위해 국경 넘어 예수님께 나아온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이방인이므로 나아오는 그들에게 나는 유대인인데, 너희 같은 이방인들을 고칠 수 있겠느냐? 어디 감히 이방인들 따위가 워이~ 물렀거라.’ 이렇게 거절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예수님이 그들을 고치시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이방 수리아 사람들은 모든 앓는 자들을 데려옵니다. 그들은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들이었고,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었습니다. 본문 표현대로 그들은 스스로 올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들을 데려와야만 그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이고, 소문 하나 듣고 다른 나라까지 올 만큼 절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복음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셨고, 그들은 병 고침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아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잘 쓰는 표현, “from the very beginning”, 애시당초, 처음부터 예수님은 사실상 이방사람들을 포함한 대중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을 고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음을 이 마태복음의 기록 속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데가볼리, 거리사 사람들
수리아 사람들뿐만 아니었습니다. 25절에는 예수님의 첫 대중 사역 이후 다른 지역들 –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 에서도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이스라엘 전역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한 가지 눈의 띄는 지명이 “데가볼리”입니다.

데가볼리(Deapolis)는 갈릴리 남동쪽 현재 요르단 지역으로 Deca와 polis로 된 단어로 Deca는 ‘decade, 10’이고, polis는 ‘도시’로, 즉 ‘10개의 도시, 10개의 도시로 구성된 지역’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식민지화된 10개 도시로 헬라적 성격이 강한 곳인데, 이후 로마제국에 협력하면서 자치권을 부여받은 지역입니다. 이러한 이방적인 성격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 4:25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막 5:1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막 5:20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가 이 데가볼리 10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대목이 데가볼리의 이방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이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는데, 그곳에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가에서 나와서 꽥꽥 소리 지르고 있고, 그 옆에서는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기르고 있지 않았습니까? 돼지 떼를 길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고 이방인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돼지는 이스라엘 사람이 먹으면 안되는 부정한 짐승의 대표적인 것으로 나오지요. 이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기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옆에 돼지가 서너 마리 있었다면 산돼지인가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2천 마리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돼지사육을 산업으로 하는 양돈업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곳은 너무나 분명한 이방 사람들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한 데가볼리로부터도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께 왔다는 마태복음 4장 25절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많은 따르는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3.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
마태복음 5장으로 넘어가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면서 시작하신 그 유명한 산상수훈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4장과 5장이 구분되어 있어서 단절되는 느낌이지만, 원래 마태가 쓸 때는 장 구분 없이 쭉 연결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5장 1절에서 산상수훈에 앞서 “무리를 보시고”라고 할 때 그 무리들은 누구입니까? 문맥상, 그들은 앞에 나오는 수리아에서 온 사람들이고, 더러는 25절처럼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방인들아~ 잘 들어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말씀을 가르치신 대상 속에는 확실히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핵심인 산상수훈, ‘천국이 너희 것이라’하시는 그 파격적인 말씀을 유대인은 물론 수 천년동안 천국에 대한 이방인이요, 복음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방인에게도 구분 없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4. 두로와 시돈 사람들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마가복음 3장 8절과 누가복음 6장 17절을 보면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 3:8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7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현재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이곳은 옛날 솔로몬이 성전 건축할 때 백향목을 보내왔던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바로 그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수리아와 데가볼리에서 많이 왔다고 하고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지만, 갈릴리를 둘러싼 북서쪽, 북쪽, 동남쪽, 나중에는 남쪽인 사마리아 지역으로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5. 그 밖의 암묵적 증거들
이러한 이방인에 대한 예수님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암묵적 증거들은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5-2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 중 18-21절 말씀은 이사야 42장 1-12절의 장차 오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언의 일부인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기준으로 보면, 18절에는 심판(justice)을 이방에 알게 하실 분이라 하였고, 21절에는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 12:15b-18, 21
12:15b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사 42:1-4)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공의)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특별히 아주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태복음 12장 15절 이하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예수님이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다고만 기록되어 있지,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15절부터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이사야서의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사야 예언이 무엇입니까? 핵심만 꼽으면 18절, (예수님)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21절,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이것입니다. 18절의 “심판”은 영어 성경에는 “justice, 공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proclaim justice to the nations”, 나라들, 즉 이방에 공의를 선언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정리해보면 예수님이 모인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고, 복음이 전해졌는데 이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 그러니까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가 선포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이방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유대인들인데 굳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이사야서의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9-31절에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또 나오는데, 사람들이 고침 받고 놀라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다른 때와 조금 다릅니다.

 마15:29-31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시고 거기서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로 옮기신 후의 이야기입니다. 큰 무리가 장애인과 병자들을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놀라면서,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모인 자리였다면 그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해야 될 것 같은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의 입장에서 놀란 반응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큰 무리의 상당수는 이방인들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나오는 말씀의 배경적 이해가 새로워집니다. 32절 이하에는 유명한 ‘칠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32절에 보니,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들이 다 근처 마을에 사는 유대인들이라면, 잠깐씩 집에 가서 식사를 해결하고 올 수도 있었겠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사람들이 대다수 멀리서 온 이방인들이라 한다면, 나올 때 준비해 온 음식도 사흘 동안 남은 것이 없을 것이고, 이제 말씀이 끝나고 돌아간다고 해도 또 먼 길을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이렇게 말씀하실 만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별개로 이방인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 진정성을 견지해 오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상황들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로 하여금 선교하도록 동기부여 하는데 너무 중요한 장면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을 그려 놓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동안 병 고치시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다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본 성경 기록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물론 유대인도 있었겠지만 그곳에는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섞여있었고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도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처음부터 차별하지 않고,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아올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기를,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만 사역한 것처럼 우리 기억에 잘못 주입되어 있으니 이제 이 이미지를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자, 한번 오른손을 들어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사역 장면 파일을 생각에 띄워놓고 유대인들만 가득 자리잡은 잘못된 그림을 지우고, 거기에 이방사람들을 그려 넣어 보십시오. 그리고 수정된 대로 저장해 보십시오. 네, 지금 저장하신 이미지가 성경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문화를 고려한 전략적 차원에서 명시적으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처음부터 유대인들과 함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을 베푸시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한 제자들에게 이방인들도 동일한 구원의 대상자들이며, 천국의 소중한 존재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마침내 마지막 제자들에게 하신 지상명령에서 분명하게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 가운데서 제자를 삼고, 그들을 통해 천국의 재생산이 일어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 되고, 제자가 된 이방 사람들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그러하셨듯이,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이러한 차별 없는 선교의 초점을 가지고 열방 가운데 기도와 순종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 저| 김병선 선교사, 설교편집 | 강호세아(SIReNer)

※ 본문 중 이탤릭체 부분은 편집자의 이음글; 설교문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원본 취지를 유지하면서 편집자가 첨언한 부분입니다.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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