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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한국 이주 역사와 사역 현황

이슈 인사이드
Web Journal  27호 2021. 06

들어가는 글
한국이 향후 20~30년 이내에 300만~500만 명의 다국적인으로 구성된 다문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실제적 인식이 중요하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동안 한국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던 선교만 아니라, 땅 끝 타문화권 선교로서의 국내 다문화이주민을 선교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 내 다문화이주민 가운데 특히 중국인들에게 초점을 두고 이들의 이주역사와 사역현황을 살펴보려 한다. 국내 체류 외국인 252만 명 중 43.6%인 110만1천782명(2019년 통계)이 중국인들로 가장 많은 규모의 다문화이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아래 최근 2015년~2019년 5년간 국내 체류 중국인 통계를 보면 현황을 더욱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위의 2019년 통계 자료를 보면 무려 63.3%가 이른바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한국계 중국인들과 그 인구가 701,098명에 달한다. 전 세계 250여 개 국가의 사람들이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44%~51%2)의 사람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한국 다문화 사회의 독특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중국과 한국 간의 관계 갈등이나 미-중 갈등이 변수이지만, 지리적인 근접성과 양국 간의 교류를 증진하면서 한국 내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더욱 친한(親韓)적 인사로 우정을 나누고 함께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고 복음적 통일을 위해 동행해야 할 존재로 대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 중국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인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균형 있는 복음적인 시각으로 중국선교와 선교 중국의 큰 흐름 가운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인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 중국인의 한국 이주역사
1) 구 화교(舊 華僑)와 신 화교(新 華僑)로 불리는 한국 내 중국인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한국인에게 일반적으로 화교(華僑) 아니면 조선족, 한족으로 인식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에도 한국 화교가 있는데 요리사 이연복(61세), 트로트 가수 주현미(59세), 영화배우 하희라(51세)씨 같은 경우 유명한 한국 화교 연예인이다. 이연복은 부모가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온 2세대 화교로 현재 대한민국 국적을 소지하고 있다. 한편 주현미(59세)와 하희라(51세)는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 3세대로 한국 화교의 후예이다. 화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국의 화교(華僑)를 구 화교(舊 華僑 혹은 老 華僑)와 신 화교(新 華僑)로 구별하는데, 위의 세 명은 구 화교(舊 華僑)에 속한다.

반면에 신 화교(新 華僑)는 197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한 이후에 이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출현한 새로운 해외 화교화인(華僑華人)3)들이다. 한국에서 신 화교(新華僑)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대한민국에 새로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들과 한족 혹은 기타 종족의 중국인을 말한다.4) 따라서 현재 한국교회가 관심이 있는 중국 이주민, 유학생, 다문화 가정은 7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특별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국내에 유입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유입된 신 화교들이다. 한중수교 당시 불과 516명에 불과했던 신 화교는 지난 2012년 한중수교 10주년 때에는 161,098명으로 당시 구 화교 보다 약 8배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5) 내년 2023년이면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데 신 화교 인구가 이미 110만 명을 돌파하여 10년 만에 무려 55배나 급증했다.

2) 한국의 근현대 역사와 한국 화교의 부침(浮沈)
(1)임오군란(1882)과 청일전쟁(1894) 시기
처음 중국인들은 언제 한국에 유입되었을까?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1502-1508)에 명나라에서 4만 8천 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며, 제 2차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했을 때에도 20만 명의 군인을 파견했다.6) 그러나 근대 민족개념과 국경의 확립을 고려하여 공식적으로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한국으로 온 40명의 화상(華商)을 한국 화교의 시초로 본다.7) 당시 임오군란8)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무산되면서, 양국 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함으로써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여행과 통상권을 인정받아, 조선의 상권을 독점하고자 청나라 군인들과 함께 국내에 유입했다.9)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대부분 저임금 하층 노동자로 불리던 쿨리10)로부터 화교 유입이 시작된 것에 비해 한국에서 화교의 정착이 가지는 한계는 이들이 외세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던 조선의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새로운 외세로서 청나라가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청나라 화상들의 국내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청나라와 군대를 뒷배로 하는 위력적인 것이었기에 처음부터 지배와 착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배태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인 188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 때문에 한국 화교의 상황이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또 중국 본토에서는 1889년에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여 내정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특히 조선과 인접해 있던 산둥(山東) 지역이 ‘의화단의 난’의 진원지라는 이유로 청나라 정부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면서, 조선으로 향하는 중국 탈출 이민이 급증하게 된다. 한국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山東) 출신인 것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11)

(2) 일본 강점기 완바오산(萬寶山) 사건과 한국 화교 살해
한편 이 시기 중국 본토를 지배하던 청나라는 1883년부터 동북 지방의 인구 축소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일본 침략의 완충작용으로 조선인들이 중국 국경을 넘어와 동북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99년~1900년에만 무려 40여 개의 한인 마을이 형성될 정도였다. 이에 1885년에 청나라는 월간국(越墾局)을 설치하여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을 관리하고, 도문강 연안 700리 정도의 간도 지역을 조선인의 개간지로 설정하고 조선인을 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에는 무간국(撫墾局)을 통해 많은 조선인들이 납세하고, 법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을 일본 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간도 지역에서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중국과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이때 공교롭게 완바오산(萬寶山) 사건12)이 일어나는데, 일제는 국내에 조선일보 언론보도를 통해 만주 지역에서 중국인들에 의해 재만 조선인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어,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는 내용의 왜곡 보도를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분노한 한국인 수백 명이 한국 화교 거주지를 습격하면서 화교 배척사건이 일어났고, 발발한 지 4~5일 만에 함경북도 지역을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약 400여 건의 폭행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내 142명의 화교가 살해되었으며, 546명이 부상당했고, 91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13)

이후 중국에서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과 마오쩌둥(毛泽东) 공산당의 내전(1947-1949년)이 격화되면서, 당시 많은 중국인이 이를 피해 한국으로 유입하여 다시 한국의 화교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국내 화교의 수는 1930년대에는 6만 명에 이르렀다가, 일제와 한국의 핍박을 피해 대거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이후 1948년에는 약 17,443명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3) 해방 이후 90년대 구화교(舊華僑)의 해외 이민과 인구 감소
일본에 의해 시작된 태평양전쟁(1941-1945)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마무리되면서 한반도 남쪽에 미군이 진주하게 되고, 미군정(1945-1948)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화교는 연합국 국민으로서 우대를 받아 중국, 홍콩과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큰 경제적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 후반에는 인천에 소재한 화교 무역상 13개소가 한국 전체 수출의 21%, 수입의 16%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에서 화교의 경제력이 강했던 시절도 있었다.14)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경제정책에 따라 외국인의 외환 사용이 제한되고, 외국인이 무역회사를 독자적으로 경영하거나 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금지되는 등 여러 가지 규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한국 화교 사회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더구나 1948년 제정된 국적법으로 인해 결혼을 통한 귀화 이외에는 법무부 장관의 승인사항으로 귀화를 제한하여 사실상 화교의 귀화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또한 당시 정부는 국내 경제기반 확립을 위하여 1950년에는 외국 상품의 불법 수입을 금지한다는 명분으로 창고봉쇄령을 발효하였는데, 당시 창고업을 중심으로 외국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화교 무역상들이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입게 되면서 화교의 경제력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후 1961년에 제정된 『외국인토지법』은 외국인의 토지소유권을 모두 박탈함으로써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화교들은 토지를 헐값에 매각해야 했다. 1970년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국 화교들에게는 1가구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주택 면적도 200평 이하, 점포도 50평 이하로 제한되면서,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이 불가능하게 되어 농업에 종사하던 화교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한국 화교들은 적은 자본의 요식업(자장면)15)으로 전환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 호주, 대만, 일본 등지로 이주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화교 인구는 1972년에 그 수가 32,989명으로 최고 정점의 수준을 보이다가 이후 점차 감소해서 1980년 29,623명으로 으로 떨어지게 되면서, 2007년에는 22,047명이 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한국 구화교의 숫자는 약 20,000 명으로 쇠락 혹은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16) 이 시기 한국 화교 인구의 감소로 인해 주요 대도시와 거점도시에 있던 화교 학교들이 폐교되기도 했는데 비교적 규모가 작은 부평, 동두천, 조치원, 진주, 영월, 남원, 진해, 밀양, 광주 등지의 화교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4) 90년대 이후-현재, 신(新) 구(舊) 화교의 조우
90년대에 누대에 걸쳐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구 화교(舊 華僑)들의 경우 대부분 작고했을 뿐 아니라,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80세 이상의 고령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 시대에 사회 경제적 배제와 차별 정책으로 한국 탈출 현상을 보였던 한국 화교들은 인구 규모뿐 아니라 2대, 3대, 4대로 세대교체를 거듭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도 많이 약화되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특별히 구 화교(舊 華僑) 3대, 4대들은 1990년대 이후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신 화교(新 華僑)와 상당 부분 연령적으로 겹치는 세대가 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서로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쇠락한 한국화교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이다. 한국 주류 사회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려 영역에서 상호 교류하면서 중국이 이 시대에 가지고 있는 경제력을 비롯해 한중관계를 발전시킬 경쟁자이자 협력자로 한국 화교 그룹이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 화교(新 華僑) 중에는 개혁개방 이후 활발해진 중국의 대규모 유학 붐에 힘입어 한국에 왔다가 그대로 정주한 경우도 있고, 돈벌이를 위해 주로 단신으로 건너온 중국 이주 노동자 유형도 있다. 전자는 주로 IT, 금융, 법률, 학술연구 등 최첨단 전문 분야의 직업에 종사하거나 한국의 대기업, 중소기업에서 한중교류에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편 후자는 방문취업이나 친척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주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하는 결혼 이민의 형태 역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난 2019년 통계로 총 1,101,782명의 신화교(新華僑) 가운데 노동자가 183,653명(16.6%), 유학생이 58,712명(5.3%), 결혼이민자가 70,855명(6.4%)인 것으로 나타났다.17) 위 세 유형을 비율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족들의 경우 노동자가 91.6%를 차지하며, 반면에 한족의 경우 8.4%에 불과했다. 반면 유학생은 한족이 97.9%로 거의 98%를 차지하며, 조선족은 단 2.07%에 불과하다. 마지막 결혼이민자 유형은 조선족이 53.6%, 한족이 46.4%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사역을 할 경우 이주 노동자 사역은 조선족이 절대 다수이며, 유학생은 한족, 다문화는 조선족, 한족 모두가 대상이기에 이들의 특성과 필요를 파악하여 적합한 사역이 전개되어야 한다.

중국인의 이주 역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중국 유학생 통계 자료를 통해 최근 10년 동안 중국 유학생의 증감 추세를 살펴보겠다. 이 글의 다음 주제가 국내 체류 중국인 사역 현황인데 유학생 사역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바로 위 단락에서 제시한 2019년 유학생 통계는 법무부 통계인데, 아래의 통계는 교육부에서 중국인 유학생 수를 통계한 자료로 법무부 통계보다 중국 유학생 숫자가 좀 더 많다. 6개월 혹은 1년 미만의 단기 유학생 수도 다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시점에서 역으로 과거 10년까지 추적을 해보았더니 중국 유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유학생에 비해 가장 큰 규모를 보이고 있음이, 전체 비율로 잘 드러난다. 중국 유학생은 2020년 현재 43.6%를 차지하고 있다. 10년 전인 2010년에 중국 유학생 규모는 전체 한국 유학생 숫자의 71.0%였다. 10년간 5만, 6만, 7만 명 사이에서 둔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양국 관계와 최근 코로나가 중국 유학생 수 둔화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2. 국내 체류 중국인 사역 현황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 사역 현황은 주로 참여관찰과 인터뷰 기법을 사용하여 사례를 가지고 살펴보자. 국내에서 중국인 사역을 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한국에 중국인교회가 200개 정도라고 한다. 인천 중국인교회를 하면서 국내 체류 중국인 사역 현황을 조사하고 있는 강대위 목사와 지난 20년간 한중사랑교회를 목회해 온 서영희 목사도 동일하게 확인된 사항이다. 이 글은 이러한 200개 중국 교회 가운데 첫째는 구 화교(舊 華僑)에 해당하는 여한중화기독교회(旅韓中華基督敎會) 한성교회(漢城敎會) 역사와 현황을 통해 100년이 넘는 중국인 사역 현황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자 했다. 둘째는 신 화교(新 華僑) 조선족 중국 교포 사역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델 케이스로 서영희 목사의 한중사랑교회 현황을 소개하여 그 안에 담긴 도전을 공유하려 했다. 셋째는 아시아를 주께로(AFCMI: Asia For Christ Mission International)라는 중국전문선교단체가 모태가 된 국내 15개의 한중선교교회의 사역 현황을 통해 중국선교의 영향과 통찰을 살펴보았으며, 넷째는 온누리교회 중국어 예배 사역 현황을 통해 국내의 중국인 사역이 지도자와 교회 특성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오고 있는지 독자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해보았다.

1) 여한중화기독교회(旅韓中華基督敎會) 한성교회(漢城敎會)
한국에 정착한 구 화교(舊 華僑)들의 신앙은 여한중화기독교회(旅韓中華基督敎會)를 대표하는 한성교회(漢城敎會)를 통해 살펴보자.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한성교회(漢城敎會)는 지난 2019년 설립 107년을 기념하여 역사 전시회를 거행했다. 서울시 정동역사재생지원센터가 주관한 100년19) 동안 한국의 근현대 역사 속에서의 화교교회의 성장과 발전 부침의 역사를 조명한 것이다.20) 리우추안밍(劉傳明) 한성교회(漢城敎會) 원로 목사는 1955년 한국에 들어와 한성교회(漢城敎會)에서 사역하던 북미 장로회 맥클린 선교사에게 복음을 접하고, 이후 한성교회(漢城敎會)의 담임목사가 되어 사역하다 은퇴했다면서 “서울 한복판에 화교들의 신앙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며 “새로운 100년 동안 나그네 교회로 중국과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후세대 화교들이 더 노력하겠다”라고 했다.

이 교회는 1912년 중국인 청년 처다오 신(車道心)과 미국인 CS 데밍 선교사가 경성YMCA에서 화교를 위한 집회를 열면서 시작이 되었다. 1912년 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화교는 약 17,000여 명. 그중 2,500명이 서울에, 1,500여 명이 인천 제물포에 거주했다. 당시 한의사였던 처장로와 화교 건축가 왕궁원(王公溫) 장로는 한성교회(漢城敎會)가 화교 사회에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왕 장로는 처 장로와 1920년 서울에 복음건축창이라는 건축회사를 세운 뒤 수익금을 교회에 헌금하여 교회 자립에 기여했다. 복음건축창은 당대에 경서성서신학원(1921), 이화여대 프라이홀(1923) · 음악당(1935), 조선기독교서회(1931) 등을 건축한 당대 최고의 건축회사였다. 여한중화기독교회(旅韓中華基督敎會)는 서울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 원산교회, 인천교회, 평양교회 등의 지역교회를 개척하는 등 초기 화교교회 개척에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1931년 완바오산(萬寶山) 사건과 1937년 중일전쟁 등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 교인과 목회자 상당수가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40년대에 중국 본토에서의 전쟁과 공산화로 다시 한국으로 중국인들이 유입되어 인천을 통해 지방으로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6·25전쟁 후에는 한국인 목회자들이 화교교회의 재건과 안정을 도와주었는데, 특히 중국 산둥성(山东省)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를 비롯해 정진경 목사 등이 중화기독교회의 재건에 많은 힘을 보탰다. 이후 1990년대에는 1992년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을 때 한국 화교와 이들로 구성된 화교교회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대다수 국적이 타이완(臺灣)이었을 뿐 아니라, 타이완 항공, 여행사, 무역 등 양국과 관련된 직업 종사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생존과 자녀 세대들의 미래를 위해 당시 많은 화교가 타이완이나 미국, 캐나다 등 국외로 이민을 갔다. 한편 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중국선교가 고조되던 변화의 시대에 중국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중국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해서 선교사를 키웠다.

리우추안밍(劉傳明) 목사의 한성교회(漢城敎會)와 중국선교에 헌신했던 한국인들은 1984년 띠지(地極: 땅끝)선교회, 중국복음선교회 및 중국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여 한국교회의 초창기 중국선교의 산실이자 중국인재 배양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21) 지난 2007년에는 유 목사와 여러 중국 선교단체의 대표들의 주도로 중국선교협의회가 조직이 되어 30여 개의 중국 선교기관들이 중국선교를 위해 협력해오고 있다. 현재 여한중화기독교회(旅韓中華基督敎會)에는 서울 정동과 영등포동, 인천, 수원, 군산, 대구, 부산 등지에 7개 교회가 소속돼있다. 이 가운데 서울 정동의 한성교회는 중국대륙 출신 전도사가 원로 목사 후임으로 담임 전도사로 사역 중이며, 인천화교교회는 한국인 선교사 출신의 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다.

2) 한중사랑교회
한중사랑교회는 중국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서영희 목사(63세)는 중국 조선족들의 대모로 불리며, 중국에서 입국하는 동포들이 바로 이 교회로 찾아올 정도이다. 한중사랑교회는 2001년 2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한 가정집에서 4명의 중국 교포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등록한 누적 교인 숫자가 20,000명에 이르고 있다. 원래 서영희 목사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아들의 병을 계기로 43세 늦은 나이에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가사도우미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중사랑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가사도우미는 중국 연변에서 17년 동안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 한국으로 나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하면서 하루하루 불안해서 약을 먹을 정도였는데, 서영희 목사님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서 목사님의 전도와 양육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친척 두 명을 전도하여 그 집안 식구들 4명과 함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서영희 목사의 설교와 성경 공부는 유독 쉬운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상호작용이 많은데, 그 이유는 당시 이 4명의 동포를 가르치고 훈련하면서 시행착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중사랑교회는 2002년 7월에 한 오피스텔 안에 교회 본당으로 사용할 룸과 3칸의 게스트룸을 ‘사랑의 집’으로 오픈하면서 정식으로 교인 50명과 함께 교회 설립 예배를 드리게 된다. 90년대 말, 2천 년 대 초반은 한국 노동시장의 성장과 인력 부족으로 다른 외국인들보다 가까운 나라 중국에서 온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중국 교포들을 선호하여 이들이 점점 증가하는 시기였다. 당시 중국 동포들은 거의 단기 여행비자로 우선 한국에 들어왔다가, 단기 비자 만료로 불법체류자가 되어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동포들에게 한중사랑교회가 숙식을 제공하면서 안정적인 정착을 돕고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기 시작하자 갈수록 중국 교포들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같은 오피스텔에 다시 10개의 게스트룸을 더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급속한 양적 성장세를 보이던 한중사랑교회는 질적으로도 처음부터 한 영혼, 제자의 삶의 훈련에 기반을 두어 제자반 2년 과정을 마치면 사역자반 과정을 통해 복음과 삶의 과정을 살아내도록 양육과 훈련에 계속 주력해왔다. 그리하여 설립된 지 10년이 되던 지난 2011년에는 제자훈련을 마친 178명의 성도가 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어, 이들이 36개 교구의 교구장을 맡고 있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실 서영희 목사의 활동은 2008년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부터 내성적이고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다, 후원 동역 요청도 할 줄 몰라 남편 이상부 장로(대광교회)의 절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동포들이 수적으로 증가하고, 또 의식주 외에 질병 등 다양한 필요 때문에 늘 재정이 적자인 상태로 동포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2008년에 한중 사랑교회 교구장이 불법체류자로 잡혀가고, 경찰이 사랑의 집에 와서 다른 불법체류자를 체포해가는 일이 발생하면서, 이 계기로 한국 법무부가 한중사랑교회에 감동하여 한중사랑교회를 법무부 지정 동포체류지원센터로 지정하고, 모범적인 사례로 언론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하여 MBC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결국 서영희 목사는 2008년에 제1회 세계인의 날에 법무부장관상을 받았고, 다음 해 2009년 제2회 세계인의 날에는 한중사랑교회가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국가적인 지원과 기독 의사들의 의료진료, 이·미용 봉사 등으로 더 많은 중국 동포들이 교회에 오게 되면서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300명 좌석이 가득 차게 되었을 뿐 아니라 10개의 게스트룸에도 각 방마다 TV를 연결하여 동시에 예배를 드려도 장소가 부족한 지경이 되기도 했다. 교회가 한창 부흥하던 지난 2012년~2015년에는 교인들이 전도를 열심히 하여 매년 1,500명씩 새신자들이 등록을 하는 급성장의 시간도 있었다. 또 매년 2,500명 이상 되는 중국 동포들이 콘도나 큰 숙박시설을 빌려 1박 2일 수련회를 열고 교제하는 한중사랑동포잔치도 이 교회가 성장하는 좋은 접촉점이 되었는데 이때 지방에서도 많은 동포가 오게 되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20년이라는 시간 속에 한중사랑교회는 표어인 ‘한 사람의 새 신자가 한 사람의 선교사로 양육되고 파송되는 교회’라는 목표에 집중하면서 사역해 오고 있다. 서영희 목사에게 보람과 어려운 점을 물어보니, 그동안 복음을 믿고 중국에 돌아가서 지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동포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와 이들 중에 직접 교회를 개척한 2개 사례가 있어 교회가 선교사를 역 파송한 은혜에 감사한다고 했다. 반대로 어려움은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을 기조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으로 돈과 물질 중심,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 가치관으로 바꾸는데 긴 인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공식적인 56개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 조선족 신분으로 경쟁하며 살아야 했기에, 생존하기 위하여 정보에 민감하고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성도의 양적 증가와 감소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한 사람’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제자와 사역자, 선교사로 양육하는 초점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수년간 한중사랑교회 성도는 코로나 이전에는 많으면 2,000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200명~300명 정도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현재 한중사랑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교회 성도가 60대 이상의 중국 동포 이주근로자들이었는데, 이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자녀 세대들을 가족 비자로 초청해서 이제 세대로는 30~40대 장년층과 이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어린 자녀들까지 3세대가 다 함께 모이는 지역교회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양적인 규모는 많이 줄었지만 한국에 정착한 성도들과 그 가족, 이들의 전도를 통한 새신자등으로 교회도 제자훈련, 사역자훈련이라는 기조 위에 풍성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누리도록 건강한 부부, 가족 생활 및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육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사역이 되면서 교회 내에 유치원도 설립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3) 한중선교교회
부천 한중선교교회는 1호선 지하철 부천역 주변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조선족 동포교회이다. 이 교회는 아시아를 주께로(AFCMI: Asia For Christ Mission International)선교회가 모태가 되어 지난 2018년 6월에 부천에 설립되었다. 한중선교교회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 모두 15개의 형제 교회 곧 동일한 한중선교교회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봉천동(전OO목사), 영등포(양OO목사), 광명(김OO 목사), 일산(박OO 목사), 안산(김OO 목사), 수원(최OO 목사), 남구로(이OO 목사), 성남(김OO 목사), 부평(박OO 목사), 금정(금O 목사), 동암(장OO 목사), 평택(박OO 목사), 제주(현OO 목사) 이다. 이 15개 교회 가운데 봉천동은 한국계 미국 국적이고 부천, 영등포, 동암, 제주교회의 경우 담임 목사가 한국 국적이며 나머지는 재중 동포이다. 15개 교회의 모교회이자 본부 역할은 봉천동 한중선교교회가 하고 있다. 봉천 한중선교교회는 아시아를 주께로 선교단체를 설립한 대표가 90년대 초반에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국내에 첫 번째로 설립한 교회였다. 선교회 대표이면서 15개 교회의 노회 회장인 전OO목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1986년부터 홍콩을 통하여 동북 삼성 중심으로 중국선교 사역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 방문 중 서울역에서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한약재를 판매하다가 경찰들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봉천동에 센터를 마련하여 무료로 조선족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새벽예배, 오전과 오후 성경 공부를 통해 육체적 영적으로 돌보았고, 이들이 봉천 한중선교교회 설립회원이 된다.

필자가 방문 인터뷰한 부천 한중선교교회는 전정권선교사(57세, 고신 KPM 다문화 이주민 사역팀 소속)가 담임 목회자인데, 그는 1992년 신대원 1학년 재학시절 같이 공부하던 조선족 전도사에게 AFCMI(AFCMI: Asia For Christ Mission International)선교단체를 소개받고, 신대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봉천동 한중선교교회에서 매주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다 현재까지도 이 선교회와 계속 동역해오고 있었다. 전선교사는 이후 졸업하고 바로 1998년~2000년까지 2년 동안 동북 삼성 조선족 가정교회에서 순회 사역을 하다, 목회 프로세스에 대한 중국 교회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다시 3년간 한국에 나와 노량진 은혜교회에서 부교역자 사역을 하면서 청년부 · 교구 등 목회를 배우고 중국으로 다시 파송되어 2005년~2016년까지 중국 동북 삼성 지역에서 사역한 이력이 있다.

전정권선교사는 두 번째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 우후죽순처럼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도시 가정교회들을 보면서, 그때까지 주로 중국 농촌에 기반을 둔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변화를 준비하도록 도전했다. 또 거주하고 있는 도시 주변에서 대학생 사역과 중고등학생 사역을 실제로 하면서, 동시에 연계된 동북 삼성의 중국 동포 교회들을 위주로 청년 대학부, 중고등부 등 다음 세대 지도자로 잠재력이 있는 이들을 선발해서 양육, 훈련하는 사역을 집중적으로 했다. 당시 전선교사에게 훈련받은 사람들이 지금 15개의 한중선교교회 지도자로, 혹은 부천 한중선교교회 성도로 한국에 이주하여 함께 동역하고 있다.

부천한중선교교회는 2018년에 세워졌는데, 다음 해인 2019년 하반기에 출석 성도 50명이 되는 교회로 급성장하였다. 성도들은 연령상으로 30~40대와 50대 이상 된 두 그룹으로 나뉘는데, 현재 코로나 때문에 협소한 교회장소와 인원 제한으로 나이별로 30~40대 성도들은 자녀를 데리고 오후 예배에, 50~60대 성도는 오전 예배에 나오고 있다. 올해 2021년에 재정적으로 교회가 자립이 되면서 현재 코로나 상황임에도 이로 인한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이 교회 규모에 맞게 교역자 사역비로 매월 250만 원을 본인이 책정했으며, 그 외 교회 측에서 차량비로 50만 원, 차량 유지비로 20만 원을 더 지원해주고 있다. 그 외 교회 임대료는 매월 3층 본당 및 사무실 임대료가 99만 원이고 2층은 본래 인력사무소인데, 주일에만 장소가 부족해서 15만 원을 지불하고 사용하면서 매월 총 114만 원을 교회 건물비로 지출하고 있는데 성도들의 헌금으로 다 감당이 된다고 한다.

한편 15개 교회의 성도 수와 자립 정도는 코로나 이전을 기준으로 모 교회 봉천동이 200명 성도, 영등포교회가 80명 성도, 안산교회가 50명 이상, 그리고 전선교사가 사역하는 부천한중선교교회가 50명 출석이어서 이 4개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11개 교회는 평균 20명~30명 내외로 작은 규모여서 재정적 자립이 어려워 목회자 사모도 일하거나 목회자가 통 번역을 해서 비용을 충당하는 등 목회적, 재정적 이중고의 고충을 겪고 있다. 현재 15개 교회는 목회자연합회를 조직하여, 서로 정기적으로 만나서 기도와 회의를 하면서 연합행사도 같이 주관하고 있는데, 회장은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맡는다.

당면한 15개 한중선교교회들의 고충은 재정적 자립 외에 국내의 동포사회가 이전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현재 급속하게 30~40대 세대로 구성원들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이들과 그 자녀 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교육 중심 목회로 어떻게 잘 전환할 것인가이다. 전정권선교사는 이런 국내 동포사회의 변화를 주목하여 예전의 선포적 사역, 특히 중국에서 익숙했던 대중집회 동원사역이 아니라 이제는 설명적 사역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믿음,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를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지 잘 가르치고, 목회할 수 있는 사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학생 사역과 관련된 질문에는 잘 조직되어있는 국내의 경우 중대형 교회 혹은 선교단체는 다양한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지만, 작은 동포교회는 인적, 재정적 부담으로 유학생 사역에 전념하는 것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또한 중국 유학생들의 체류 기간이 짧게는 6개월, 혹은 1~2년인 경우가 많아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지속성과 연계 사역을 제공할 수 없어서 현재는 중단한 상태이지만, 부천 한중선교교회가 지역적으로 부천 대학가 주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후 교회가 어느 정도 더 발전하면 유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이들에게 사역할 계획이라고 한다. 끝으로 전선교사는 국내 동포교회들의 인적 구성 변화로 부모 세대와 자기 세대는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경우 중국문화와 중국어에 대한 경쟁력과 비교 우위를 갖춘 교회를 원하기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동포이면서 중국인이라는 이중 정체성과 그 위상에 부합하는 역할을 자기 세대와 다음 세대 자녀들이 할 수 있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4)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다음 해인 1993년~1994년 즈음에 중국 동포들이 교회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소모임으로 시작되어오다가 1996년에 공식적으로 중국어예배부서로 설립되었다. 현재 중국어예배부를 담당하는 책임자는 중국 동포 출신의 장순천(46세) 목사이다. 장목사는 2005년 합신 신대원을 졸업하고 전임 사역자로 현재까지 17년 동안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를 섬기고 있다. 신대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파트타임 사역까지 포함하면 19년 동안 온누리교회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장순천 목사는 연변과기대에서 컴퓨터학과(전자공학과)를 전공으로 공부하던 중 대학 1학년 때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기독교인 교수를 통해 주님을 믿게 된 후, 신앙이 성장해가면서 주님에 대한 갈망과 신학에의 부르심으로 대학 3학년 때부터 신학을 하고 싶어 했다. 당시 부모님의 반대로 이후 2003년에 한국의 광운대학교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한국에서는 온누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중국어예배를 알게 되고 온누리교회의 양육 훈련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던 중, 신학으로의 부르심을 재확인하면서 광운대 석박사 과정을 6개월 만에 중단하고 합신 신대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자의 여정을 가게 된다.

장 목사가 처음 온누리교회에 왔을 때 중국어예배에는 30~40명의 중국인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주 노동자들이 90%이고, 유학생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2년 후 2005년에는 전체 성도가 70~80명으로 증가한 가운데 절반 이상이 유학생들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이후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의 방향은 유학생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유는 이주 노동자 사역은 환경적으로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공단이나 농장, 가내 공업 공장 주변의 지역교회들이 훨씬 더 접근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들은 숙식을 공장 기숙사나 일터 근처의 임대료가 싼 집을 얻어 주변 음식점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온누리교회처럼 먼 곳까지 오기도 힘들고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문화도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주 노동자 사역은 이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차량을 운행하고, 공장과 기숙사로 찾아가는 선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에는 250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주로 유학생들과 젊은 층, 고학력 전문인이 많다.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 조직은 담당 목회자, 대표 장로, 담당 집사, 총무 집사, 전임간사(1명), 교회 T.O파트 전도사(2명), 기타 사역자(1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사역은 주로 담당 목사인 장순천목사, 2명의 전도사, 간사가 주로 하며 운영위원회가 있어서 정기적으로 사역 보고, 재정은 함께 공동으로 의논하여 실행한다. 사역 실무는 목회자, 전임 사역자 중심으로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다. 국내 중국인예배 목회자들 중 해외선교부 안에 특수선교팀으로 조직되어 단독으로 세례식을 거행하거나 결혼, 장례 등을 주관하는 목회자로서의 영적 신분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으면서 교회 장로나 혹은 한국인 선교목사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온누리교회는 굉장히 자율적이다. 중국어예배부를 섬기는 분들도 다른 일반적인 한국교회처럼 2년 만에 담당 장로가 다른 사역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중장기적으로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 일례로 이전에 중국어예배부 담당 장로님은 은퇴하시기까지 8년을 계속하셨다. 또한 담당 집사는 현재 한양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분이어서 기본적으로 중국어예배부를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잘 이해하며, 중국어예배부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많은 분들과 사역하는 것이 강점이다.

또한 장순천목사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차이스타 한국 대표를 겸하고 있는데, 차이스타는 중국으로 돌아갈 학생들의 보안과 안전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고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 대신에 자기와 같은 동료 혹은 선후배 중국인들의 경험한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부분은 상호 동역을 위하여 이 글에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인터뷰는 꽤 긴 시간 이에 관한 내용으로 진행되었는데, 장목사의 요지는 “한국교회가 중국 목회자들을 너무 모른다.”라는 거였다. 보통 한국교회가 중국 사역자들과 중국어예배부를 신설하면서 동역하는 경우는 첫째, 아는 중국선교사들이 소개하여 추천한 경우 둘째, 교회가 중국선교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에 근거해 중국인 사역자를 교역자로 채용한 경우 셋째, 중국 신학생이나 유학생들을 장학금으로 돕다가 교회의 동역 교역자가 되는 경우 등 세 유형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부분 교회와 중국 사역자들은 장학금, 생활비를 받으며, 교회가 제공한 사택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관례 절차인데, 이 진도는 나가면서 진짜 심각한 문제는 중국 사역자(장목사의 용어 중 아직 정식 목사 안수를 안 받고 사역하는 중국인 전도사를 중국 사역자로 계속 지칭해서 사용함), 중국 목회자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온 대부분의 중국사역자, 목회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과 공산주의 사회 구조로 만 18세 미만인 경우 종교신앙을 가질 수 없으므로,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절대다수가 대학 시절에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

장순천 목사 역시 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그전까지 교회에 대한 경험, 선 이해가 전혀 없었다. 교회 문화, 성도의 교제, 양육, 훈련, 교회의 행정과 제도, 시스템, 구조 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 한국교회의 중국인예배부의 사역자, 중국인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아예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서, 사역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통과 이해 부족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장순천목사 역시 처음에 온누리교회 중국어예배부를 하면서 파트타임, 풀타임 등 5년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교회가 이런 곳이구나.’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4~5년이 지나고 나서야 해당 문화에 비로소 적응하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중국 목회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교회를 알고 경험해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도제식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단지 한국에서 목회하는 중국사역자뿐 아니라 이슬람권, 힌두권 등 교회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다문화 이주민 출신 목회자들에게도 공통적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감히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도록 충고를 한다면 보이는 열매 중심적으로 신학생을 양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지 말고, 목회를 할 수 있는 건강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에 초점을 두라고 하고 싶다. 솔직히 한국에서 그동안 신학을 한 중국인들이 500명 이상인데, 중국으로 돌아가서 이들 중 과연 몇 명이 현재 교회개척에 성공했는지 그 추이와 열매가 궁금하다. 특별히 지난 30년 동안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많이 섬기고, 한국선교사들도 중국에 가장 많이 파송했다. 그러다 2010년, 2011년을 지나면서 한국선교사들의 비자발적 철수가 시작되었으며, 2018년을 전후하여 거의 모든 선교사가 추방을 당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패러다임이 바뀐 것으로 지난 2010년까지 중국선교적인 측면에서 전도, 신학훈련, 신학교 운영, 선교사 훈련 등에 주력했던 것에서, 그러나 이제 중국은 전국 곳곳에서 ‘급속한 교회성장 현상’ 특별히 ‘도시 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보인다. 중국선교사들이 말하는 중국이 선교 대국이 되기 위해선 그 전제로 ‘건강한 교회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이 해외로 중국인들을 보내는 것에만 주력하지 말고, 중국이 건강한 교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중국 교회의 인재 양성과 모판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한국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선교중국이 아니라 진정으로 중국인들과 중국교회를 동역자로 여기고 중국인과 중국교회를 어린 사람대우하듯이 하면 안 된다. 마치 바둑을 둘 때 상수(上手)와 하수(下手)처럼 말이다. 이는 비단 중국인 사역자뿐 아니라, 다문화 이주민 사역자들에게도, 그리고 북한 출신 사역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다. 단일문화권의 한국 문화와 상명하복의 위계 구조가 익숙한 한국교회가 이후 다양한 선교의 연합군들이 함께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윈-윈하며 사역하길 기대하며 꿈꾼다.

끝으로 한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중국 사역자, 목회자들의 모임을 소개하겠다. 지난 2017년에 구성된 MCD(Mission China Dispora)인데, 차이스타, 중국신학생, 노동자사역단체 등의 사역자들 연합모임으로 공동대표가 10명이다. 또 하나는 지난 2010년부터 차이스타 안에 선교부가 신설되면서 첫째, 1년에 2회 미국 남침례교 선교적 교회개척 8단계 훈련 둘째, 1년 2회 카이로스 훈련 셋째, 1년 2회 포럼 개최 중국 2030 비전 관련 포럼 1회, 중국선교협의회(중선협)과 협력하여 개최하는 포럼 1회 등을 같이 연합으로 해오고 있다. 더 긴밀한 동역과 연합을 통해 국내에서 중국 사역자,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와 함께 건강하게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분 중 중국인 다문화 이주민 사역을 할 분들에게 온누리교회에서 신학을 하면서 경험했던 목회 훈련 경험으로 다음 세 가지 훈련을 중요시하여 각자 상황에 따라 적용할 것을 권한다. 첫째, 온누리교회 체질화(다른 말로 해당 교회의 목회 비전, 철학과 영성 공유 체질화) 둘째, 목회적 소양 훈련(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 성품, 인간관계) 셋째, 목회 기능 강화(역량, 능력 강화, 예를 들어 새신자반, 순장 운영, 관리, 위기처리, 설교, 양육 등). 이런 훈련 콘텐츠가 반영되어 이론과 실제가 구비되어가는 다문화 이주민, 중국목회자가 양성되길 바란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중국인의 한국 이주 역사와 사역 현황이라는 주제로 중국 다문화 이주민을 살펴보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필자는 Part 1. 중국인의 한국 이주 역사는 문헌조사 기법으로 객관적인 조망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Part 2. 국내 체류 중국인 사역 현황은 직접적인 참여관찰과 인터뷰 기법을 사용하여 사역 사례를 통한 구체적 이해를 사역자의 주관이 포함된 구술방식으로 서술했다. 보안과 안전 문제라는 중국 사역 특성상 Part 2. 국내 체류 중국인 사역 현황 중 유학생 사역은 거의 다루지 못했는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이어서 이들에게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문서화하기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Part 1과 Part 2가 서술 형식이 서로 다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데, 시간적인 제한까지 더해져 흐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다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이제 국내 다문화 이주민 사역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블루오션’이자, 당면해야 할 ‘필수 사역’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주변을 잘 돌아보면서 지역교회 근처에 사는 다문화 이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 복음을 전하고 필요를 도우면서 황금어장과 같은 국내에서 사람 낚는 어부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인, 가장 오래된 다문화 이주민으로 분류되는 중국인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필자는 이 글에서 구화교(舊華僑), 신화교(新華僑)라는 용어를 사용해 중국 이주민의 이주 역사와 새로운 변화가 가져오는 도전을 함께 통찰해 볼 수 있게 했다. 국적으로는 타이완, 중국, 한국 세 국가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국내 중국인들. 그 속내를 살펴보니 조선족, 한족 등으로 또 다른 하위문화와 구분이 되고 있는데 이에 따라 각각 유형별, 세대별로 사역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빛도 없이 음지에서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는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중국선교사 동료로서 감사드리면서, 계속해서 다양한 목회적 돌봄과 건강한 교회성장에 집중하는 형태로 지속 발전하길 바란다. 그러나 자칫 목회적 돌봄에만 치중하다 보면 다문화 이주민 사역자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고 한국교회를 의존하는 악순환의 결과를 낳기에,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적 리더십으로 현지인 한 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성육신의 첫걸음으로 중국문화를 이해하고 중국어를 배우는 과정을 거쳐 서로를 구원하고 회복시켜 열방선교에 힘쓰는 중국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무엇보다 서로 만나서 사역의 시행착오와 노하우를 나누고 배우는 건강한 네트워크의 장(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글| 정보애(SIReNer)

[각주]
1) 법무부 출입국 관리 통계, 더 구체적인 통계 자료는 본회가 발행한 CAS 26호 자료 중 출신 국적별 통계 현황과 체류 유형별 통계 현황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홈페이지 www.upma21.com

2) 지난 2015년 통계로는 중국 국적 체류자가 전체의 51.1%인 913,506명이었다.
3) 화교나, 화인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교라는 단어에는 본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었다. 곧 해외에 거주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자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 시절과 이후 자유중국, 대만으로 불리는 다른 국가의 존재와 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외국의 중국인들을 화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화인은 문화적, 민족적 개념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중국은 화교를 ‘중국 국적의 소지자’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창호, “신화교의 국내 이주와 정체성의 정치”, pp. 7-8.
4) 이를테면 “한국 속 중국인들 ‘신화교’ 시대 열다”라는 시사저널 글에서는 한중교류 10여 년 이후 한국에 유학하러 왔던 중국 유학생들이 삼성 등 한국 기업에서 한중간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며 고학력 고급 인력의 한국 정착이 늘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박성준, “한국 속 중국인들 ‘신화교’ 시대 열다”, 『시사저널』, 제730호.

5) 이창호, 위의 글, p. 14.
6) 이용재, “한국 화교의 정착 과정과 실패 요인”, 『민족 연구』, 62호. p. 35에서 재인용.
7) 위의 글, 이용재, p. 35.
8)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체납된 임금을 정부가 불량 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다.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 씨 제거 및 비리 척결, 그리고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했고, 성공하는 듯했던 난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9) 1883년 서울, 인천, 부산 등에 2,010명의 청나라 상인과 111명의 관리가 주재했고, 1884년에는 인천에 235명의 화교가 거주하는 등 급증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84년에 인천, 1887년에 부산, 1898년에 원산에 화상조계지(華商租界地)를 설치하였다. 이용재, 위의 글, p. 36
10) 쿨리(古力, Cooli)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중국, 인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외국인, 이민자들을 일컫는 말로 정규적인 일자리가 없는 단순 노동자였다.
11) 임채완·박동훈, “한국 화교의 역할과 발전방안”, 『한국 동북아논총』, 41호, 2001, p.12.
12) 일제의 만주 침략 과정에서 수로 공사 문제로 발생한 완바오산 사태는 일제의 무력 사용으로 중국 농민 1명이 부상당하고, 15명이 체포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3) 민두기, “완바오산 사건과 한국언론의 대응 – 상이한 민족주의적 시각”, 『동양사연구』, 65호, pp. 143-174.
14) 박은경, 『화교의 정착과 이동: 한국의 경우』,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1.
15) 한국화교문제연구소 국백령 대표는 1991년 ‘우리는 왜 자장면 장사밖에 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중국집 쌀밥 판매 금지령을 비롯해 한국의 과도한 외국인 규제조치를 비판한 바 있다.

16) 김태완, “한국인 대만인 중국인 사이에서 길을 잃다”, 『월간 조선』, 2013년 2월호
17) 보다 구체적인 통계는 본 회의 CAS 26호 국내 이주민 현황 중 출신 국적별 현황, 체류 유형별 현황을 참고하면 된다.

18) 2020 출신 국가별 외국인 유학생 수(출처:교육부) 자료 중 중국 유학생 부분만 발췌
19)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8월 11일에 ‘화교교회 일세기 회고와 전망’ 세미나를 개최했다.

20) 장창일, “화교 예배 공동체 ‘한성교회’, 107년 역사 기록으로 전시”, 『국민일보』, 2019. 12.10.
21) 필자도 1985년부터 한성교회와 띠지선교회를 알게 되어, 이곳을 통해 국내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경험하고 한 국 화교, 한국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중국선교 비전을 품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 와선교연구소 연구 간사로 10년 동안 사역하면서, 한성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자, 설교 통역으로 섬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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