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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한국어’의 은혜, 김광준 선교사

업마가 만난 사람
Web Journal   30호 2024.5

본 선교회가 김광준 선교사를 인터뷰한 것은 2023년 7-8월, 베트남 선교현장 리서치 사역 출국을 보름 정도 앞둔 6월 28일이었다. 김광준 선교사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고 2009년부터 약 12년간 베트남 한 도시에서 한국어 교육을 통한 선교사역을 하다가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은 세종시에서 선교적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인터뷰는 ZOOM 서비스를 통해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편의상 인터뷰어는 UPMA로, 인터뷰이는 김광준M으로 표기)


UPMA :
 선교사님 본인과 사역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광준M : 안녕하세요. 김광준 선교사입니다. 저는 2009년에 베트남으로 파송을 받고 나갔다가 2020년 안식년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원래는 안식년으로 들어온 것인데, 때마침 코로나 상황이 발생해서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가 그 기간이 길어지고, 또 필요가 생기면서 세종시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으로 처음에 나갈 때는 한국어 교육은 전혀 생각을 안했고, 원래 캠퍼스 사역을 하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한국어 교육을 통해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10여 년간 있으면서 대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쳤고, 나중에 베트남 현지인 하노이 대학 교수들이 세운 학원 운영 원장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주로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 학원이 제가 있던 지역의 시장이 이 지역을 관광으로 성장시키려고 보니까 먼저 언어가 되는 인력들을 양성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하노이 대학교 교수들에게 그 지역에 영어 학원과 한국어 학원을 세워달라고 부탁한 거에요. 그래서 학원을 세웠는데, 가르칠 교사들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시장 남편이 경찰이었는데, 이 사람이 선교사들에게 부탁해서 한국외대 베트남어 전공 대학원생을 초빙해 와서 원장으로 세운거에요. 그런데 한국어 문법이 한국 사람한테도 어려운데, 말도 안 통하는 베트남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어렵겠어요. 이 언어전공자인 원장이 자기가 배운대로 그렇게 문법 위주로 가르친 거에요. 그래서 초기에 학원이 잘 안되었던 거죠. 그래서 새 원장을 뽑게 되는데, 제가 어찌해서 그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거죠. 선교사인데 괜찮겠냐 했는데,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학원에 갔을 때는 학생이 8명 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아주 적은 인원에서 시작했지만, 제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쳐서 제가 나오기 전 2019년도에는 학생 수가 750명 정도가 되었어요. 교사는 6명이었지만, 보조 교사같은 스텝이 16명 있어서 함께 운영했습니다.

제 사역에 있어서 한국어 학원은 단지 학생들 전도를 위한 접촉점 정도가 아니라, 선교센터 역할도 했고, 교회 역할도 했고, 어떻게 보면 선교사 훈련 과정이기도 했고, 또 비즈니스 선교를 위한 비즈니스 플랫폼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2020년 안식년으로 들어온 것이 코로나 때문에 오래 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정착하게 됐는데, 저희 세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지금 당장 다시 나가는 것보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다른 어느 지역에서 다시 이 사역을 하는 것보다, 이런 좋은 모델을 여러 지역에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어떻게 하기보다 이미 선교지에 계시거나, 앞으로 나가게 될 선교사님들을 도와서 그런 일을 하기를 바라는 비전이 생겼습니다.

UPMA : 앞서 소개해 주시면서, 선교사님 선교사역이 한국어 학원을 중심으로 전도 접촉점 뿐 아니라, 교회, 선교사 훈련, 비즈니스 플랫폼 등 네 가지 역할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네 가지 사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한국어 교육부터 해주시죠.

김광준M : 네, 먼저 한국어 교육에 대해 말씀드리면, 제가 나중에 한국어 문법 교재를 만들어 출판하기도 했지만, 제가 가르치는 방법이 굉장히 독특한 것입니다. 원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은 한국어로 가르치는 게 원칙이에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그렇게 가르쳐 보니 언어상의 문제로 정확한 설명이 어렵고, 진행이 너무 느리게 되다 보니 진도가 안 나가는 거죠. 그리고 가르쳐도 도대체 학생들이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답답해서 생각하다가 우리 제자 중 한 명을 통역으로 세웠던 거죠. 통역을 세워서 해보니까, 일단 제 설명이 정확하게 전달이 되고, 학생들이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 수가 있고, 그러니까 진도가 빨리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제 한국어 교육 방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론 가르치는 선생님도 한국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지만, 이 선생님이 하는 모든 말들을 현지어로 전달할 수 있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어 사역에서 사실상 정말 중요한 것은 이 통역을 키우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통역만 제대로 키워놓으면 그 다음부터 한국어 교육은 굉장히 진도가 빨리 나갈 수 있어요. 그래서 선교지에서 한국어 교육 사역이라는 것이, 내가 한국인이고, 한국어 교육 자격증 갖고 있거, 돈도 있어서 시작부터 호치민같이 큰 도시에 학원을 세운다고 성공할 수 있는가? 그게 어렵다는 거죠. 경험도 없고, 통역도 없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역을 먼저 길러야 하는데, 작은 지방에서 한국어 가르치면서 내 제자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통역할 제자가 한 명만 있어서는 이 친구가 다른 데로 가면 안되는 거니까, 몇 명을 길러내서 그런 통역할 제자들 데리고 어느 지역에 가서 시작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학원 설립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베트남에서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한국어 학원 그냥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외국인은 설립이 굉장히 까다로워요. 그래서 방법이 반드시 현지인 명의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지인이라고 아무나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학원을 설립하기 위한 학위가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언어 관련 전공에 그러니까 영어나 프랑스어나 한국어 석사학위 이상이 있어야 정식 학원 설립이 가능해요. 그러면 우리가 처음 할 것이 그런 친구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죠.

이 외에도 기존의 소위 ‘어학당’ 방식과는 다른 제가 터득한 방식을 체계화해서 가르쳤는데, 제가 만든 “놀라운 한국어” 교재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실 언어학이나 공식적인 한국어 교육 학에 기초한 방법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문법 위주의 한국어 교육이 어려운 것이 사실 저는 한국어를 어렵게 가르쳐서 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것이라고 봤어요. 이 한국어 문법책은 제가 봐도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제가 우리말 문법 규칙을 연구해 보니까 실용적으로 단순히 한국말을 잘 하도록 가르치려고 하니 한국어 문장 구조가 굉장히 간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저는 한국어 문장 구조를 설명하려면 10분이면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베트남 학생들을 한국어학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지금의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놀라운 한국어” 교재로 빠르게 기초를 학습하고, 이후에 학생들의 필요에 따라 진행하는데, 일단 대부분 TOPIK 준비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통역이나 한국기업 취업, 한국어 교사 등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결국 학원이라는 것이 현지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결과가 중요한데, TOPIK(한국어 능력시험)으로 보자면, TOPIK이 1급부터 최상위 6급까지 등급이 있는데, 베트남 대학들에 한국어학당들이 많이 있는데, 유수의 대학 한국어학당에서 보통 800시간 공부해서 6급도 아니고, 중간 레벨 3급에 도달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가르치는데, 저희 방식으로 교육하면 그 절반 400시간 만에 5-6급 정도 최상위 레벨에 도달하게 합니다. 효율면에서 완전히 차이가 나는 거죠. 이런 실제적인 성과가 알려지니까 길지 않은 시간에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모이게 된 거죠.

UPMA : 그렇군요. 그럼 이제 교회로서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실까요?

김광준M : 네, 한국어 학원이 그렇게 자리를 잡아갔고요. 거기서부터 이제 교회로 나가는 과정을 설명드리면, 원래 사실 처음에는 저희가 학생들을 전도하고 제자로 키워서, 베트남에도 교회가 있으니까요. 베트남 현지 교회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베트남에 가서 현지 교회를 약 1년 정도 다녔었거든요. 다니면서 느낀 것이 그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기독교가 많은 탄압을 받았거든요. 그때 목사님들은 다 잡혀가고 북한으로 말하면 ‘노동교화소’ 같은 데에서 고초도 당하시고 많은 분들이 순교 당하시고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교회가 이제 지하 교회로 숨어 들어가게 되었고, 그런 분들은 거의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킨 분들이죠. 그러다가 이제 시대가 바뀌고, 베트남이 경제개방을 하면서 WTO 가입을 하자니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자유가 아니고, 사실상은 거의 국가가 관리하는 반쪽짜리 종교의 자유라고 할까요? 결정적인 것은 전도가 불법이에요. 그러니까 믿을 자유도 있지만 믿지 않을 자유도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교회가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식이에요.

이런 상황 속에서 살다 보니까, 베트남에 교회가 있지만, 교회들이 굉장히 세상에 대해 담을 쌓고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베트남 지역에서 모 교단장님이 목회하는 교회를 다녔었는데 그때 그 교회 성도 수가 한 200명 정도 되었어요. 이 정도면 베트남에서는 큰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1년이 다 지나도 새신자가 거의 안 오더라구요.

어쩌다가 새신자가 오더라도, 교회가 되려 약간 의심을 하게 되죠. 저 사람이 또 꽁안(베트남 경찰)이 보낸 끄나풀(앞잡이)이 아닌가 하는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다녔던 교회는 성도들이 교회 주변에 다 모여 살아요. 그러니까 의심 안받고 교회 가려면 먼저 그 마을에 들어가는 것부터 해야 되는 거죠. 이것이 공동체 내부적으로 결속해서 신앙을 지키는 면에서는 좋았지만, 교회나 성도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복음을 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교회에 선교나 전도 설교는 거의 없었고요. 물론 이제 제가 있던 지역이 좀 그랬고 남부 쪽 호치민 같은데 가면 그런 면에서는 약간 열려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상황이니 제 생각에는 이제 길러지는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아무래도 선교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서 제가 교회를 개척했고, 저는 어쨌든 결국 베트남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를 만들고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개척하면서 학원에서 문 다 닫고 모이기 시작했고요. 규칙적으로 모이면 또 문제가 되니까 어떤 주는 오전에 모이고 어떤 주는 밤에 모이고 또 어떤 주는 토요일에 모이기도 하고 일부러 아주 불규칙적으로 모였어요. 왜냐하면 저희 학원이 주택가에 있었는데, 공산주의 베트남 상황이라는 것이, 제가 외국인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동네 대부분 사람들이 저희를 다 주시해요. 외국인이 어디 드나들고 하면 늘 감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변칙적인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고 이제 그러면서 하나의 교회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UPMA : 네, 그러면 이제 다음으로 비즈니스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설명해 주시죠.

김광준M : 비즈니스 플랫폼이란 것이 저는 일종의 선교센터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희 학원에서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들이 배출되기 시작하고, 지역에서 소문이 나서 한국 회사 사장님들이 저희에게 사람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을 많이 했죠. 그래서 사실 그 당시에 한국 분들이 초기에 정착하면서 저희 도움 안 받은 분들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통역자원을 키우려면 약 2년 이상 걸리는데, 저희가 열심히 키워서 다 보내주고 했지만, 물론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나중에 그분들 중에 저한테 고맙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구요. 그리고 제 생각에 한국 사장님들 중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아서 제가 키운 제자들이 너무 아까웠던 거죠.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직접 비즈니스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우리 제자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하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믿는 제자들을 중심으로도 했지만, 안 믿는 친구들도 동원해서 일단은 카페를 시작했고요. 거기서 커피도 팔고, 한국 분식 같은 것도 팔았기 때문에 좀 복합적으로 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본죽’도 했어요. 본죽 미션 매장이죠. 본죽 본사의 본 월드에서 선교사들한테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저희 자본도 들어갔지만, 본 월드에서도 많이 지원해 주어서 본죽 매장을 오픈했습니다. 믿는 제자들이 주로 매장 매니저, 리더 역할을 했었고, 학원 출신 제자들이 요리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점점 한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여행사를 시작했죠. 기존 여행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행사를 운영했어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오신 분 중에 믿지 않는 분이 연결이 됐는데, 그분을 저희가 전도해서 나중에 그분이 하시는 식당도 하나의 예배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학원에서만 모인 게 아니라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해서 시작한 본죽 같은 사업들과 아까 그 한국분 식당처럼 연결된 사업장들이 다 비즈니스와 예배 장소가 되었던 것이죠.

UPMA : 그렇게 한국어 학원 사역을 통해서 교회 개척과 비즈니스 플랫폼이 구축이 되면서, 선교센터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결국 선교가 이러한 여러 사역을 통해서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까 모두의 말씀에서 선교사 훈련 역할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김광준M : 네 맞습니다. 이 선교센터 역할이 선교사역의 중심도 되지만, 여기서 선교사를 키워내는 부분도 있거든요. 저희 한국어 학원 사역이란 것이 결국 선생님들이 상당히 중요하잖아요. 저 말고 한 5명 정도 한국 선생님들이 있었는데, 저희가 베트남 학생들 학원비가 워낙 싸기 때문에 건물 운영비나 여러 가지 하면은 월급을 많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도록 숙소랑 식사도 제공하면서, 한국 돈으로 한 50만 원 정도 사례를 했었어요. 그 정도면 교회에서도 후원받으니까 베트남에서는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함께 사역했는데, 이 선생님들이 대부분 청년으로 나왔다가 이제 때가 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신학을 해서 다시 선교사로 나오게 되었으니 저희 사역을 통해서 선교사로 길러진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가 한국으로 나오기 전에 저희 학원을 좀 배우고 싶다는 분들이 있어서 방글라데시 등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들 몇 분이 오셔서 한국어 가르치면서, 이것이 저희로서는 사역을 재생산하는 하나의 훈련 과정으로 진행했었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훈련받은 선교사님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셔서 사역 열심히 하고 계시죠. 그런 선교사 훈련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UPMA : 한국어 학원 사역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잘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선교사 양성의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셨고, 이 학원과 선교사님 사역을 통해서 길러진 현지인 제자들 이야기도 좀 해주시죠.

김광준M : 네, 일단 한국으로 유학 간 친구들은 굉장히 많고요. 초창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 믿고 유학 간 애들을 중심으로만 얘기하자면, 한 명이 저희 학원에 와서 처음 신앙을 접하고, 믿음이 자라서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갔어요. 목사 안수는 안 받았고, 신학 하면서, 한국어를 잘하니까 한국 교회 주일학교 전도사 생활을 했어요. 한국 아이들 대상으로. 이 친구가 신학하고 돌아와서 지금 코로나 후에 새롭게 개척된 우리 사역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 친구보다 먼저 한국에 유학한 학생들이 2명 있었는데, 공주대학교에서 공부했어요. 이 친구들은 전부 다 우리나라 국비 유학생들로 국가장학금을 받았는데, 왕복 항공권, 4년 학비에 기숙사비, 식비까지 월 한 7-80만원 정도가 지원해주는 거였어요. 한 명은 경영학과, 한 명은 사회복지학과 졸업해서 지금은 단양에서 회사다니고 있죠. 그리고 그 외에도 서울, 대구 등 여러 지역으로 유학 와서 공부했습니다.

UPMA : 코로나가 없었다면, 그런 제자들 열매가 더 풍성해졌을 것 같은데, 코로나를 기점으로 선교사님도 그곳을 오래 떠나 있으시게 되고, 사역들도 많이 위축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김광준M : 네, 그렇죠. 제가 한국으로 나오고, 코로나 때문에 하던 사역들이 다 멈추게 되었어요. 학원도 2년 정도 문을 닫아야 했고요. 본죽도 2년 정도 문 닫고 있으니, 그 전에 1년 치 월세 벌어 둔 거 다 까먹게 되어서, 결국 폐쇄했고, 여행사도 여행이 불가능하니 폐업 처리했고요. 학원도 거의 그랬죠. 그랬다가 학원 오픈한 지가 몇 달 안 돼요. 지금은 한국 선생님은 한 명밖에 없고, 그분이 이제 청년 때 학원에 와서 저와 같이 한국어 가르치다가 한국 가서 선교사로 돌아온 거죠. 그리고 아까 말한 웨스트민스터 나온 전도사 제자가 함께 선생님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두 명인 거죠. 그래도 결과적으로 저는 잘 됐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 만들어 놓은 걸 그대로 물려 주었다면 지금 후임 선교사가 안정적일 수는 있겠지만, 본인이 손수 한 것이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완전히 사실상 망했던 것을 이 선교사와 현지인 전도사 제자가 처음부터 다시 개척하는 셈이죠.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다시 오픈한 지 얼마 안되었지만, 지금도 학생이 한 200명 됩니다. 대단한 거죠.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 제자들이 고향으로, 호치민으로 다 흩어졌어요. 생존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주일날 드리는 예배 인원이 옛날에 비해 줄어서 8-10명 정도 모이고 있습니다.

UPMA : 저희가 현장 리서치를 준비하면서, 현지 선교사님들을 계속 접촉하고 현지 스케쥴을 조율하고 있는데, 대체로 선교사님들이 주일은 좀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특히 북쪽은 전반적으로 다들 좀 몸을 사리시는 것 같습니다.

김광준M : 예 맞아요. 베트남은 경제나 이런 것은 이제 다 열어놨어요. 그런데 이 종교만큼은 자기들이 컨트롤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거예요. 더구나 외국 선교사가 들어와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다보니 현지 목사님들도 별로 안 좋아해요. 베트남 교회가 공인 교회가 있고 지하 교회가 있잖아요. 지하 교회 목사님들은 아무래도 필요가 있으니 한국 선교사들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공인교회 목사님들은 선교사들을 그렇게 반기는 분들이 많지않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제가 하노이에 있을 때, 베트남 여러 교단 대표들과 미팅을 가진 적이 있어요. 거기에는 지하교회 어떤 교단 대표도 오고요. 그때 한 선교사님이, “우리는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다. 우리가 베트남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했죠. 물론 이것이 한 2~3년 전 얘기이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목사님들이 하는 얘기가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서 해 줄 게 없다. 당신들이 베트남어를 할 줄 아냐 뭘 할 줄 아냐 그냥 기도만 해라.” 이러는 겁니다. 핵심이 우리 한국 선교사님들이 언어가 설교나 무엇을 가르칠 만큼 탁월하지 못한 거에요.

그래서 베트남 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들한테 이벤트성으로는 할지 모르지만, 정기적인 설교를 한국 선교사들한테 잘 안 시켜요. 그래서 호치민에는 한국 선교사들이랑 현지 교회랑 연합해서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 통해서 많이 도와주니까요. 그런데 주일 본 예배 설교는 절대로 안 시키고, 한다 해도 거의 주일학교 대상으로 하지 성인들 대상으로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죠. 그런 면에서 베트남 공인교회 목사님들이 선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말씀을 하시니까 이제 이해가 되는 부분인데, 다른 인근 태국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상황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쪽 현지인들이 생각하고 대하는 선교사의 지위와 베트남에서 느껴지는 선교사의 지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오히려 다른 데는 선교사님들이 이제 약간 부교역자 대하듯이 현지 사역자들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베트남은 그렇지 않고 선교사님들이 되게 조심한다고 할까요? 여차하면 추방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현지 목회자들한테도 되게 조심하고요.

제가 처음에 베트남 중부에 들어갔을 때가 이제 2010년도인데요. 그때 저 말고 선교사가 한 4-5가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어떤 NGO 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 외에는 다 추방당했어요. 다 추방당하고 나머지 한 가정은 자기 스스로 나갔고요. 추방을 어떻게 시키냐면 한국에 갔다가 들어올 때 공항에서 못 들어오게 막는 거죠. 선교사님 사모님이 한국에 갔다가 들어오면서 입국거절을 당해서 그냥 왔던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가고 남편 선교사님한테는 일주일 안에 철수해라. 나가라. 그래서 일주일 안에 차고 뭐고 다 헐값으로 팔고 나가야 되는 거에요. 그분이 지금은 캄보디아에 계신데 우리가 연락해도 연락을 안 받아요. 하도 그때 베트남에 상처를 받아서 그런 거죠.

그래서 베트남은 관광과 비즈니스 쪽은 모를까 종교적으로는 굉장히 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큰 도시들이나 관광지는 그래도 외국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래도 좀 넘어가는데, 이게 북부에서 남부로, 도시에서 지방으로 갈수록 더 심해요. 남부 호치민보다는 하노이가, 또 하노이보다는 지방이 더 어렵습니다. 가끔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정말 불태워지고 폭력을 가하는 이런 일들이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UPMA : 마지막으로 앞으로 선교사님의 사역이나 베트남 선교를 준비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제안을 하신다면?

김광준M : 저는 여러 사정으로 바로 다시 나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요. 개척한 교회도 어느 정도 돌봐야 할 것 같고,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독립이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할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은 저희가 어쨌든 한국어 교육으로 사역을 이룬 경험들이 있으니까 한국어를 베이스로 사역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도움을 드리려고 하고, 지금도 요청이 있을 때마다 관심이 있는 분들 모이시면 2시간 혹은 4시간 세미나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는 방법은 기존의 한국어 교육 자격증이 있더라도 다시 배우셔야 해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보니 그렇습니다. 저희는 어떤 문법적인 것이나 정식 언어학적인 접근보다는 말 그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노하우를 알려 줍니다.

그래도 현지에서는 어느 정도 학위나 공인된 자격을 원하기 때문에, 사이버 대학에서 과정을 거치시면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세종 사이버대학을 추천합니다. 이 대학이 기독교 대학이고, 학과장님이 신앙이 좋은 분이셔서 선교사님들이 수강하면 잘 해주십니다. 그리고 건양사이버대학도 있는데, 여기는 공부하는 것이 좀 느슨한 편이라 선교사님들이 쉽게 공부하기에 장점이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육으로 사역을 시작하신다면, 종족별로 어느 정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물론 선교사가 현지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선교사가 조기에 현지인만큼 완벽하게 현지어를 구사하는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통역을 두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한국의 대 베트남 무역 흑자가 두 번째로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베트남과 한국이 굉장히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들의 베트남 선교의 기회가 더 늘어날 것도 같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냥은 안되고, 정말 베트남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미리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우선 준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UPMA : 끝으로 선교사님 기도제목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광준M : 네, 우선 저희 애들이 베트남에 있으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검정고시로 학업을 다 이수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한국에서 뒷바라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요.

제가 지금 개척해서 하고 있는 교회가 ‘아름다운 허브 교회’입니다. 독립교단이고요. 이 교회를 시작한 이유가 선교적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하게 된 것이라 아름다운 선교적 공동체로 세우는 사역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의 이후 선교사로서의 사역 인도를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리 | 강호세아(SIR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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