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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종교(3) 불교

CAS 디스커버리(1)
Web Journal  31호 2024.9

지난 CAS 저널 30호에서 베트남의 종교 가운데 먼저 기독교를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어 고찰해보았는데, 두 글의 제목은 베트남의 종교 1. 가톨릭, 베트남의 종교 2. 개신교 였다. 베트남 기독교의 슬픈 현실은 가톨릭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종교로, 개신교는 미국과 베트남 전쟁으로 각인되어 아직도 ‘외래종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면 이번 CAS 31호는 상대적으로 베트남 전통 종교, 문화로 각인되어있는 불교와 토착 민간싱앙이라는 포커스를 가지고 살펴보겠다. 먼저 이 글에서는 베트남의 종교 문화로서 베트남 불교의 역사와 특성을 중점적으로 알아가보자. 일반적으로 베트남 불교는 북방불교로 통하는 대승불교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베트남 남부의 메콩강 지역의 크메르 크롬(예전에 베트남 남부는 크메르제국으로 이들 후손들인 크메르인들을 일컫는 말)1들은 남방불교로 통하는 소승불교(공식적인 명칭은 상좌부불교)를 신봉한다.

베트남 종교 인구 통계

현재 공식적으로 베트남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라는 정체성에 따라 무신론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는 지난 2019년 4월에 실시된 베트남 인구 센서스 결과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베트남 전체 인구가 96,208,984명인데, 이중 종교 관련 인구가 무종교(86.32%), 천주교(6.1%), 불교(4.79%), 호아하오교(1.02%), 개신교(1%), 기타(0.77%) 이다2그러나 베트남 인구 센서스 통계 자료, 특히 종교와 관련된 조사 통계는 다른 나라 인구 전문가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남겼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산 지대 등 주거지 접근이 어려운 소수종족 데이터 미취합, 정부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 미응답, 공산주의 체제에서 신앙을 표방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무응답과 정부의 축소 의혹 등 이다.

따라서 인구 센서스 자료중 가장 최근의 자료인 2019년 조사에 의하면 현재 베트남 사람들은 86%가 종교를 신봉하지 않으며, 단 14%의 사람들이 종교를 신앙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는 현상적인 것으로 베트남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베트남의 오랜 역사에서 여러 나라들과의 외침으로 인해 ‘토착 종교와 외래 종교가 혼재하는 종교 문화의 혼종적 특성’을 지닌 종교성의 나라로 베트남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 퓨 리서치센터의 2010년 추산 자료에 의하면 베트남인의 거의 절반인 45.3%가 민간신앙을 믿고 있으며, 불교는 16. 4%의 베트남 사람들이 신앙하며, 기독교는 8.2%라고 한다. 나머지 약 30%의 베트남 사람들은 무종교라고 응답했다3. 한편 어떤 불교학자는 베트남의 불교신자를 베트남 사람의 2/3 정도까지 추정하는 이도 있다4광의적으로 유교, 도교외의 혼종 뿐 아니라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등 민간신앙에서 불교와 유사한 종교도들 까지 포함한 것이다.

베트남 불교사 개략

그럼 이제부터 베트남 불교의 세계로 진입하여 베트남 불교 역사를 불교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짧게 개괄해 본 후에, 베트남 국가 형성과정에서 베트남 불교가 어떤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베트남에서 불교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되어 2000년 이상 발전해왔으며, 불교 종파로는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밀종(密宗), 남방불교를 비롯해 탁발을 하는 걸승(乞僧)불교까지 다양한 종파가 혼재하고 있다. 초창기의 베트남 불교, 곧 2-5세기 까지는 주로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그 후 6-10세기까지는 중국의 지배로 인해 중국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으로부터 독립 후 15세기까지는 베트남 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로 승려들이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방면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들어 선 레(Lê)왕조(1400-1802년)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고, 유교가 국교인 응우웬(Nguyễn)왕조(1802-1945년)에 이르면서 불교는 상층부가 아닌 중하층의 민간계층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이후 베트남의 공식적인 종교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1858년부터 이후 약 100년 동안의 프랑스 식민 시기의 베트남 불교는 크게 아래와 같은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다. 첫째, 기존종교와 민간신앙을 결합한 신흥종교가 탄생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 등이 베트남 전통 민간신앙과 결합해 출현한 신흥불교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민족종교 내지는 신비주의적인 면이 많았는데, 까오다이(Cao Dai)교와 호아하오(Hòa Hảo)교가 대표적 예이다. 현재 학자들 중 까오다이교는 불교의 분파로 보지 않고 있어서, 필자는 베트남의 불교 편에서 까오다이교를 포함시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펴보겠다.

둘째, 스리랑카,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시작된 불교갱신운동으로, 불교를 학문으로 인식하며 연구하기 시작했고, 불교 현대화를 목표로 서구단체들을 모방한 각종 조직들이 생겨난 것과, 신문, 책과 같은 베트남어 전도 출판물이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1951년 ‘베트남불교총회’ 조직이 신설된 것이다. 세계 연대를 목적으로 ‘세계불교연맹’에 가입했다. 불교 사원은 민족해방운동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 당국으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5년 베트남을 공산화한 하노이 정부는 1981년 베트남 9개 불교종파들을 ‘베트남불교교회’로 통합했다. 1993년 호치민시에서 열린 제3회 ‘베트남불교회’는 전 국민의 85%가 불교신자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1년에 발행된 ‘2000년도 베트남불교연감’에 의하면 불교 신자는 1천만 명으로, 이는 전 인구의 약 13%에 불과하다. 불교계와 정부 당국의 불교 신자 통계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불교의 시작과 중국의 영향, 천년간 지배로 중국 종교 특성 지녀

중국이 베트남을 1000년 동안 지배했기 때문에, 베트남 불교는 중국 문화와 종교적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에 중국 한(漢) 나라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토벌되어 이때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 있을 때의 시기를 북속(北屬) 시기라고 하는데,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0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당(唐)의 멸망으로 중국의 내치(內治)가 혼란해지면서, 베트남은 비로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중국이 5대 10국 시기(960년-1279년)로 혼란스러웠던 때에 베트남에서는 최초로 승관제(僧官制)를 실행하여 불교계 승려들이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등의 방면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가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스님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이 승려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진화된 중국으로 가서 유학을 했기에, 학문이나 사상에서 베트남을 이끌 지도자급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초기 베트남 국가 건설에 불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수있게 하는 부분이다.

11~14세기, 베트남 불교의 황금시기 그후 민간화된 불교로 형성

베트남이 최초의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이(Ly, 李) 왕조를 개국한 1009년의 이공온(李公蘊) 때부터 이다. 국호를 대월(Đại Việt, 大越)로 칭한 이 왕조는 승룡(Thăng Long, 昇龍: 현재의 하노이)을 수도로 정하고, 1225년까지 베트남 최장기의 왕조를 유지했다. 이 왕조는 불교를 보호해 많은 절을 건립하고 승려들을 보호했는데, 특히 이태조(太祖: 李公蘊)는 개국 초기 10개의 사찰을 불사해 불교를 흥왕케하는 한편, 중국 송(宋)나라에 사절을 보내 대장경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 왕조 당시 가장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로는 1049년에 세워져 오늘날 수도 하노이(Hà Nội)에 남아있는 일주사(一柱寺, Chùa Một Cột)를 들 수 있다.

일주사(一柱寺, Chùa Một Cột)

이태조와 그의 후계자들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베트남의 국가 종교로 인정했는데, 이후 14세기 400년 동안 이(李)와 쩐(Trần, 陳) 왕조 시대에 베트남 불교는 큰 번영을 이룩했다. 이(李) 왕조의 뒤를 이은 쩐(陳) 왕조는 한층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베트남 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창조했다.

쩐(陳) 왕조는 한자를 이용해 쯔놈(Chữ Nôm, 字湳)이라는 문자를 창안했으며, 이로 인해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때가 베트남 불교의 황금시기였는데, 당시 베트남에서는 불교 문학, 건축, 예술이 발달했는데, 역사적으로 이때를 베트남 불교의 황금시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쩐(陳) 왕조가 멸망하고, 후레(後黎) 왕조(1400-1802년)가 성립하자, 불교는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후레(後黎) 왕조는 중국 명(明) 나라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숭상했으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교는 쇠퇴하게 되는데, 특히 후레(後黎)의 성종은 전국에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절에서 소유하는 영지(領地)를 엄격히 제한하여 불교 발전을 방해하였다. 이 당시 베트남 왕조가 불교를 외면하는 정책을 취하자 이때부터 불교는 상층부가 아닌 베트남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갔다. 침묵과 수련, 참선을 강조하는 선종(禪宗)보다는 ‘나무아미타불’ 등 염불과 실천 중심의 대중적인 정토종(淨土宗)적 색채를 강하게 보였으며, 중국 송(宋) 나라 때에 일어난 백련교(白蓮敎)가 베트남에 도입돼 염불과 밀교(密敎)적 색채를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과 결합시켰다. 이때부터 베트남불교는 민간으로 들어가 정토종이 신앙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기의 베트남 불교, 반식민 저항 운동의 한 축을 담당

19세기 베트남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병합되면서 베트남은 이제 중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전면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때는 응우옌(Nguyễn) 왕조 시기였는데, 실질적으론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국가 프랑스는 베트남의 불교를 우상숭배, 고등 종교가 아닌 민간신앙으로 여겨 많이 박해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던 시기에 베트남은 행정적으로 프랑스 보호령이던 안남(베트남의 중북부)과 통킹(베트남 북부 홍강 유역, 중심 도시 하노이) 그리고 프랑스의 직할 통치를 받던 식민지 남부 곧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메콩강 삼각주 지역, 중심도시 호치민)로 지역적으로 세 개로 구분되어 있었다. 과거 베트남 남부는 크메르제국에 속해있었지만 ,이 시기부터 베트남 남부는 프랑스 인도차이나의 본부 전진 기지 역할을 하면서 베트남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더욱 더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을 중국에서는 과거부터 월남(越南, Việt Nam)으로 칭했는데, 당 나라 때 변경지역 수비 강화를 위해 하노이에 안남(安南)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이때부터 공식 문서에 안남이라는 표기도 함께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과거부터 익숙하게 사용해오던 안남과 통킹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베트남 남부 지역은 코친 차이나로 명명하면서 직할통치를 통해 차별 화 한 것이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기였던 1848년에 정토종 종파의 한 계열로 보산기향파(寶山奇香波)가 생겼는데, 지역적으로 베트남 남부의 메콩강 삼각주에서 시작되어 삼각주 주변에 살고 있던 농민들 사이에 그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창시자인 단명의(段明誼)는 4가지 은혜 곧 부모의 은혜, 나라(국왕과 조상)의 은혜, 삼보(三寶 곧 佛, 法, 僧)의 은혜, 인류 동포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부적을 사용해서 병자를 치료하면서 불교 신앙을 확대해나갔다. 이 종파는 유교(중국 고대 성스러운 황제인 요순시대를 이상향화), 불교(아미타불의 극락정토 강조), 도교(신선들의 중심지 봉래산의 경계, 蓬萊境)를 융합한 혼합종교로, 특히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면서, 프랑스가 메콩 삼각주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프랑스에 저항하는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프랑스에서 포교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보산기향파의 제4대 교주인 황부수가 호아하오교(和好敎)파 불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종파의 이름은 교주의 고향인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호아하오촌(和好村)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승려의 도움으로 지병에서 치유된 후, 1939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호아하오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다. 호아하오교에는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이 뒤섞여 있다. 사성제(四聖諦), 12인연, 팔정도 등의 불교의 기본 이념과 아미타불 신앙, 미륵(미래불) 신앙, 도교, 조상 숭배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보산기향파의 4가지 은혜를 강조한다. 호아하오교의 특징은 사찰을 짓지 않고 제단에서 여러 신앙의 대상, 곧 석가모니, 여러 부처, 조상, 하늘(天) 등에 제사를 드린다는 점이다. 또한 호아하오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베트남의 군사 집단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에 반대하는 반식민 주쟁을 강력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현째까지도 메콩 삼각주에 살고 있는 베트남 농민들중에 호아하오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많다.

호아호아교 사원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의 베트남불교, 틱광득 스님의 소신공양으로 독재 정권에 항거5

현대 베트남 불교를 살펴보기 전 간략하게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트남 상황을 먼저 살펴보면, 1945년 8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 남부는 영국이 제국주의 청산을 맡았고, 베트남 북부는 중국이 제국주의 청산을 맡았지만, 1946년 11월 프랑스가 관세를 문제 삼아 프랑스-베트남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마지막 국면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베트민(북부의 베트남독립연맹)이 프랑스 군대에 승리하면서,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 제네바 협정에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의 남과 북을 임시로 분단하고, 호찌민(Ho Chi Minh)의 정부군은 북위 17도선의 이북으로 옮겨가고, 프랑스군은 베트남 남부로 이동하였다.

제네바 협상이 진행되던 때인 1954년 6월에 바오다이(Bảo Đại)는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을 수상으로 임명하여 베트남 남부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바오다이를 퇴위시키고,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사이공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응오딘지엠은 본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정권을 장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불교탄압에 나섰다. 그는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사찰에서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를 여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에 베트남 불교계가 반발을 하자, 응오엔디엠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스님들에게 무력 폭행을 해서 수십 명의 스님들이 숨지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수많은 스님들이 연행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임제종의 종장(宗長)이던 73세의 틱꽝득(釋廣德, Thích Quảng Đức) 스님은 1963년 6월 11일 판딘퐁(Phan Đình Phùng) 거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분신하였다. 틱광득 스님은 소신공양을 하기 전날 불교계 상좌 스님들을 모아 놓고 “내가 만약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그 때는 모두들 희망을 버려라. 그러나 뒤로 쓰러진다면 결국 우리가 승리해 평화를 맞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1963년 6월 11일, 말콤 브라운이 촬영한 사이공에서 소신공양하는 틱꽝득, 출처:wikipedia

틱광득 스님의 소신공양를 지켜보던 스님들과 베트남 민중들은 절을 하거나 큰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울음을 터뜨렸는데, 베트남 민중들의 동요를 의식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타다 남은 스님의 법구를 수습하여 소각로에서 디젤연료를 이용해 6시간 동안 불태웠다. 그러나 스님의 심장은 다시 연료를 보충해 두 시간을 더 태워도 여전히 그대로여서, 다시 황산을 그 위에 뿌렸지만, 스님의 심장은 녹지 않았다. 틱광득 스님의 심장은 지금도 하노이 국립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틱광득 스님의 소신공양으로 반정부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또한 틱광득 스님의 뒤를 이어 일주일 사이에 9명의 스님들이 소신공양을 했으며, 시민과 학생, 공무원들도 반정부 시위에 가세해 응오엔디엠 독재 정권을 압박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은 베트남 남부 정권의 위기를 간파하고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하여 지지를 철회했는데, 응오엔디엠 정권은 5개월 후인 1963년 11월에 군부 쿠데타의 발발로 인해, 대통령 응오엔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뉴(Ngô Đình Nhu)가 반군에 의해 사망하면서 결국 한 해 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북 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10년 격량속으로 빠지게 된다.

1975년 4월에 베트남을 공산화 통일한 하노이 정부는 1981년 11월, 베트남의 9개 불교종파들을 ‘베트남불교교회'(Giáo hội Phật giáo Việt Na)로 통합했다6.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불교도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일방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1993년 호치민시에서 열린 제 3회 ‘베트남불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전 국민의 85%가 불교신자이며, 그 중 비구 및 비구니는 20,000명이었다. 그리고 1991년을 기준으로 4,374개의 사원이 있는데 그 중 150개는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커메블교’ 사원이다7오늘 날 베트남의 불교는 1천만 신도에 26,268명의 승려 그리고 14,353개의 사원을 갖고 있다. 이 중 ‘커메불교’는 1백만의 신도에 1만의 승려 그리고 440개의 사원이 있다8.

종합: 베트남 불교의 특징, 불교 각 종파와 전통 신앙과의 융합 · 북방불교 남방불교의 조화 · 모계 영향 여성종교특징9

지금까지 베트남 불교를 역사와 특성 위주로 살펴보았는데, 베트남 불교 편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종합적으로 베트남 불교학자들이 말하는 베트남 불교를 특징 중심으로 요약해보겠다. 첫째, 베트남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신앙과의 융합 이다. 원래 불교는 사찰에서 부처님을 신봉하는 종교이고, 반면에 베트남 전통신앙은 암자에서 자연계의 사법(四法)에 해당되는 구름, 비, 천둥, 번개 신을 숭상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찰은 이러한 전통민간의 사신(四神)들을 부처님 불상의 모습으로 조각해 법운(法雲), 법우(法雨), 법뇌(法雷), 법전(法電)으로 칭하고 숭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 사찰들은 앞에는 부처, 더 들어가면 전통민간신앙의 신(神)을 배치해놓은 ‘전불후신(前佛後神)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인물, 영토 호국신 등도 불교 사찰에서 함께 숭배하고 있는데, 이들을 모시는 공간이 별도로 형성되어 있다.

둘째, 한편 전통신앙과의 융합 이외에도, 베트남 불교는 각 종파들이 상호 뒤섞여 있다는 특징이 있다. 초기 선종에 속하는 비니다류지(毘尼多流支 Vinītaruci)는 밀교와 섞여 있으며, 또한 선종은 정토종과 혼합되어 명상을 하면서도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을 같이 병행하고 있다. 19세기 초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Nguyễn) 왕조는 이러한 불교의 민중 종교적 특성을 강화했으며, 베트남 불교의 절충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셋째, 끝으로 베트남 불교는 유교 및 도교와 융합되어 있다. 가장 먼저 베트남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북방불교는 도교를 융합한 다음 유교까지 용합하며 ‘삼교동원’ 및 ‘삼교동귀’를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불교, 도교, 유교는 서로 상호 보완하며 강화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유교는 사회의 조직과 관리에 기여했고, 도교는 물리적 육체에 관심을 가졌다. 불교는 정신적 문제부터 내생까지 안내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베트남 불교는 강한 모계(母系) 영향의 특성이 있다. 인도와 비교해보면 인도에서 불교의 불상들은 남성 출신의 남자 부처인데, 베트남에서는 여성 부처님으로 변화하여 베트남 불교를 ‘여성적’ 종교로 만들었다. 베트남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은 ‘관세음 어머님’으로 부르고 있으며, 해안 지방에서는 남해관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베트남 불교의 여성성도 베트남 불교의 큰 특징에 해당된다.  글| 정보애(SIReNer)

베트남의 사찰들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1. 하천에 의해 퇴적물이 쌓여서 생긴 굳지 않은 퇴적층으로, 주로 모래, 진흙, 점토, 자갈 등으로 구성되며 유기물질을 포함하기도 한다.
  2. 크메를 크롬 용어는 위키백과 베트남의 종교 중 불교 부분에서 인용
  3. 퓨 리서치센터, 2010.
  4. 이병욱, “베트남불교의 역사와 현황”, 『불교평론』, 2017. 3. 22.
  5. 참고자료: 박현서, “세계사에서 가장 놀라운 소신공양 ‘틱꽝득 스님’”, 『뉴스다임』, 2021.. 05. 20.:나무위키, 틱꽝득 편: 김성우, “화염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이 스님은 누구인가?, 『현대불교』, 2010.01.08.
  6. 송정남, 『베트남 탐구』,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5). p. 402.
  7. 송정남, 앞의 책. p. 403..
  8. 송정남, 앞의 책, p. 404..
  9. 각려효 스님, “베트남 불교의 특징”, 『불교신문』, 3422호, 2018년 9월 8일. 베트남 불교의 특징은 주로 이 글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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