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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종교(4)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

CAS 디스커버리(2)
Web Journal  31호 2024.9

베트남에서 자생(自生)한 종교 까오다이교는 캄보디아 접경지역에 있는 베트남 남동부 떠이닌성(Tỉnh Tây Ninh)1에 본부, 본당을 두고 있다2.“까오다이”라는 말의 뜻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상도고대(上禱高臺)” 즉 높은 곳(천국, 천상)에 기도한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2015년 유엔 자료에 의하면 베트남에 약 250만 명의 까오다이 신자들이 있다고 하며3, 베트남을 연구한 학자는 까오다이교 신자를 400만-600만 명으로 추정한다4.

까오다이교 시작과 발전의 역사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 道高台)는 20세기에 등장했다. 곧 1926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대에 프랑스 식민정청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고 탄생한 신흥종교인데, 허가 받기전인 1921년부터 프랑스 식민정청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응오반찌에우(Ngô Văn Chiêu)가 계시를 받았다며 까오다이교를 존숭하고 있었다. 까오다이교의 창립 초기의 신자 수는 12명으로, 주로 사이공의 프랑스인 농장과 프랑스 식민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직원들이었다. 점차 교세가 급성장해가면서 두려움을 느낀 응오반찌에우는 식민정청의 복무규율을 빌미로 까오따이교 교단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인도차이나 연방총독부 평의원이면서 신망이 두터웠던 레반쭝(Lê Văn Trung)이 등록할 때에 공식적인 까오다이교 교단 수립의 지도자가 되었다. 까오다이교는 교단 설립 후 신도가 나날이 더 증가하였는데, 특히 서민층으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레반쭝, Lê Văn Trung(좌), 응오반찌에우Ngô Văn Chiêu(우) 출처: https://redsvn.net/hinh-anh-hiem-co-ve-dao-cao-dai-o-tay-ninh-nam-1930-2/(좌), 출처: wikipedia(우)

이는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프랑스 식민 지배국의 착취로 의지할 곳 없는 베트남 서민들의 지친 삶이 정신적인 피난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1926년 10월 7일, 28명이 까오다이교 신자로 공동 서명하여 남부 베트남 당시 코친차이나 지역 식민장관 앞으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공식적으로 교단설립을 인가받았다. 이후 까오다이교 교단은 설립 후 단 2개월 만에 신도 수가 2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성공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신봉하고 있는 기존의 종교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민간신앙을 핵심으로 한 것이 큰 몫을 하였다. 그 뒤 1926년 11월 18-20일, 3일 동안 떠이닌(Tây Ninh)에 있는 자림사(玆林寺)에서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그 자리에는 인도차이나 총독, 코친차이나 식민장관, 기타 프랑스인 및 토착민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후 현재의 본당이 된 떠이닌성, 롱호아(Long Hoa)에 100헥타르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1927년 3월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당시 까오다이교 신자의 수는 급증하여 1930년에 이미 약 50만 명에 달하였다.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카오다이교도들. 사제들은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옷을 입고, 신도들은 흰색 옷을 입는다.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까오다이교 핍박과 굴곡의 역사

까오다이교의 공식 명칭은 ‘제3의 구원의 대도(Đại Đạo Tam Kỳ Phổ Độ, 대도: 한자의 大道)’로, 설립 후 수십 년 동안 백만명 이상의 회원을 모집할 정도로 급성장하는 가운데, 1940년까지 코친차이나 인구의 5/1~1/4의 인구를 개종시켰다5. 까오다이교가 이렇게 급성장한 이유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 시대 말기,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된 체제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던 베트남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통해 베트남 남부의 많은 농민들이 까오다이교를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까오다이교는 태동 이후 20년 동안 급속도로 떠이닌을 본거지로 하여 주변으로 급성장 발전하게 된다. 한편 까오다이교 지도자들은 주로 프랑스 식민정부에서 이들과 접촉을 하던 공무원 혹은 지주들이었다.

처음에 까오다이교를 창시했던 응우옌반짜우처럼 프랑스 정부와 정치적인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유지해온 까오다이교 지도자도 있었지만 점점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과 저항운동으로 까오다이교 세력이 성장해가자 프랑스 식민당국은 1940년 8월 23일 까오다이교 각지의 포교소를 일제히 수색하고 모든 인쇄물을 압수하였다. 이는 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인 캄보디아에서 국경분쟁이 발발하고, 세계 제2차 대전으로 프랑스의 위치가 흔들리자 독립단체들이 반(反) 프랑스 운동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 까오다이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압수수색을 당하고 박해를 받자, 1940년 11월 22일 밤부터 사이공에 있는 까오다이교 신도들이 총검으로 무장하고 프랑스 경비병 주둔지를 습격하였다. 소요사태는 점차 사이공 인근지방으로 확산되어, 프랑스 사람, 식민정청 관리, 경찰들을 납치하고, 명망가 저택과 공공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결국 남부 베트남에서의 반(反) 프랑스 운동이 떠이닌성에 있는 까오다이교도 약 40만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이 된 것이다. 이에 프랑스 식민정청은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간주하고, 보도를 통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12월 27일, 28일까지 이어진 진압작전으로 폭동의 중심지구인 떠이닌성과 사이공, 미토(Mỹ Tho), 껀터(Cần Thơ) 인근의 촌락들이 프랑스 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기관총을 발사하여 민간인 약 6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6.

이후 베트남이 처해 있던 대내외 적인 전쟁, 곧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1954년)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5년-1975년,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더 굴곡지고 급변하는 베트남 역사 상황으로 프랑스 식민지 군대와 남베트남 응오딘딘뎀(Ngô Đình Diệm)정권, 그리고 호치민을 지지하는 남부 베트민 공산주의에도 대항하여 정치적, 군사적 투쟁을 전개했다. 종합적으로 까오다이교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 태동했던 20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nationalism)기치 아래 반식민(反植民), 반(反)프랑스, 반외세(反外勢), 반(反)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하여 프랑스, 남베트남 정부, 후에는 공산주의 정부로부터도 거의 50년 간 큰 박해를 당하게 된 것이다. 고난과 박해를 받던 까오다이교는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 건립 22년 후인 1997년이 되어서야 정부에 의해 6대 공식 종교로 승인을 받게 된다.

다음으로 까오다이교 역사가운데 잠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까오다이교를 태동,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다. 까오다이교의 태동에 중요한 세 인물은 1925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교주 팜꽁딱(Phạm Công Tắc)과 조수 역할을 하며 추종했던 까오추엔꾸(Cao Quỳnh Cư), 까오호아쌍(Cao Hoài Sang) 이다. 이들은 ‘히엡 티엔다이(Hiệp Thiên Đài)’ 곧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다리 또는 지성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종교가 까오다이교 라고 주장하면서 초기 기본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팜꽁딱, Phạm Công Tắc(우), 까오호아쌍, Cao Hoài Sang(중앙), 까오추엔꾸, Cao Quỳnh Cư(좌) 출처:https://redsvn.net/hinh-anh-hiem-co-ve-dao-cao-dai-o-tay-ninh-nam-1930-2/, http://www.nhipcaugiaoly.com/post?id=67, https://alchetron.com/Cao-Ho%C3%A0i-Sang

까오다이교 태동과 설립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로는 응오 반 찌에우(Ngô Văn Chiêu)라는 본래 이름 외에 까오다이교에서 후에 총대주교로 추앙받는 응오민찌에우(Ngo Minh Chieu)가 있다. 그는 당시 도교를 비롯한 동 서양의 영지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까오다이교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응오반찌에우는 프랑스와의 저항, 독립운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곧 까오다이교 주류에서 떨어져나가고 다른 까오다이교 분파를 창립하게 된다.

특별히 1950년대에 활동했던 까오다이교의 주요 지도자들중 박해를 당한 인물은 팜꽁딱(Phạm Công Tắc), 찐민테(Trình Minh Thế), 니랑(Nhị Lang)인데, 먼저 까오다이교 교주였던 팜꽁딱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다 마다가스카르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는 종전 이후에 다시 베트남으로 귀국했으나 후에 베트남 남부 정권을 장악한 응오딘디엠 대통령의 까오다이교 탄압으로 캄보디아로 망명했다가 거기서 사망한다. 한편 베트남의 군인,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로 평가되는 찐민테는 프랑스와 베트민(베트공) 양쪽을 상대하며 맞써 싸웠던 인물인데, 만 35세 때인 1955년에 사이공(현재 호치민)에서 저격수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찐민테의 부관 중 하나였던 니랑은 베트남 공화국 패망 이후 미국에 거주하면서 찐민테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한 인물인데 혼란스러운 남베트남의 상황 때문에 신변의 위협으로 캄보디아로 망명해서 살다가 캄보디아에서도 까오다이교가 핍박을 받자 결국 미국에 가서 까오다이교 역사와 주요 인물 회고록을 쓰면서 까오다이교를 서양에 알리는데 힘썼다.

해외 까오다이교 디아스포라 관련해서는 1975년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 건립 후 주로 호주, 미국 등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는 특히 9개의 까오다이(Cao Đài) 사원이 있는 캘리포니아에만 전국 카오다이교도의 90%가 살고 있다7. 2010년 통계로 당시에 1,350명의 베트남 까오다이교 신자가 있는데 대부분은 까오다이교 종파와 관련된 5개의 사원, 즉 체스트넛, 캘리포니아, 산호세, 샌디에이고, 새크라멘토에 출석하고 있다. 처음에 이들을 불교나 유교를 신앙하는 자들로 착각했으나 엄격한 계율에 따른 채식주의 등 점점 베트남 본토에서와 비슷한 까오다이교 신앙과 생활로 종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카오다이교 사원

까오다이교는 유교, 불교, 도교 아시아 3개 종교와 기독교, 민간정령신앙의 5(五合) 종교

까오다이교에서는 “과거에 신이 석가, 그리스도, 공자 등과 같은 인간을 보내어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인류를 구하였으나, 지금은 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시대의 대도(大道)인 5분파를 창립하였다”고 주장한다. 까오다이교가 말하는 5분파의 첫째 도(道)는 인도(仁道)로 즉, 유교를 의미한다. 유교의 인간관계 특히 충(忠)과 효(孝)를 중시한다. 둘째 도(道)는, 신도(神道) 즉, 강태공의 가르침으로 정령 신앙이다. 셋째 도(道)는, 성도(聖道) 즉, 기독교이다. 넷째 도(道)는, 선도(仙道) 즉, 도교(道敎)이다. 다섯째 도(道)는, 불교이다. 까오다이교는 이와 같이 당대에 자기들이 알고 있던 다섯 종류의 종교 신앙을 통합해 인류 전체의 조화와 공존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까오다이교에서는 기존의 모든 종교의 존재 그 자체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했으나 인간의 한계와 부패로 말미암아 오히려 분열시켰고, 종교를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 타락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못했기 때문에, 결국 까오다이가 친히 나타나 대도(大道)를 지도할 결의를 공고히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까오다이교는 기존 종교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결국 총합(總合)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널리 펴져 있는 민간정령 신앙의 바탕 위에다 기본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라는 3교와 함께 당시 기독교 특히 식민 지배 세력인 프랑스 사람들이 신봉하는 천주교의 교리와 의식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5합(五合)의 종교로써 동 서양의 종교를 융합해서 가장 베트남적인 종교로 탄생하게 되었다. 더 첨가하자면 까오다이교의 교리는 옛 부터 동양에서 행해진 종교의 가르침을 택한 것으로, 기존 종교의 가르침 중에서 진리로 인정되는 근본 가르침을 추출하여 통합한 것이다. 까오다이교에서 인간과 구원을 연결하는 사다리, 장소이자 본질로서 까오다이(高臺) 곧 까오다이교의 본질의 첫째는,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이다. 둘째는, 지고지성의 신으로 본존인 까오다이 혹은 옥황상제이다. 셋째는, 지상신의 상징인 천안(天眼)이다. 대도삼기보도는 제3의 중생제도를 의미한다. 이전의 까오다이는 인류사회에 대하여 이미 두 번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서양에서 모세요, 동양에서는 석가모니였다. 두 번째는 서양에서 그리스도요, 동양에서는 노자의 모습을 빌려 세상에 출현하였다. 이제는 제3의 제도로서 까오다이가 친히 새로운 종교의 창립자로 출현하여, 스스로 까오다이라 이름을 밝히고 새로운 대도(大道)를 “까오다이교”라면서 자신들의 독창성을 차별화 하여 신생종교의 필요를 설파하면서 민간으로 더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까오다이교의 기본 계율(戒律), 삼강오륜과 악습타파의 계율(戒律)

다음으로 까오다이교의 기본적인 계율들을 통해 5합의 종교중 특히 유교, 불교, 도교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통합했는지 살펴봄으로 까오다이교를 좀 더 이해해보도록 하자. 까오다이교 신자들의 실천적인 기본 계율은 “오계금(五戒禁)”, “오상(五常)”, “사대조규(四大調規)” 및 “삼강(三綱)”을 계율로 삼고 있다. 여성 교도들은 그 위에 “삼종(三從)”의 도를 지켜야 한다. “삼강”은 군신・부자・부부에 대한 규율이다. 유교의 근본 도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오상(五常) 또한 인륜의 상도로, 부자의 친(親), 군신의 의(義), 부부의 별(別), 장유의 서(序), 붕우의 신(信)의 도를 가르치고 있다. 삼종은 부녀가 갖추어야 할 도리이다. 즉, 가정에서는 아버지에 순종하고, 출가해서는 지아비에 순종하고, 지아비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계금(五戒禁)은 불교의 오계에 해당한다. ①살생을 계하는 것으로 모든 생물은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생성력을 저지하는 것은 신의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②투도계(偸盜戒)는 강탈, 약취, 기망, 반환의 의지가 없이 빚을 얻는 것, 장물의 고의적인 매매, 유실물의 은닉, 타인의 착오를 이용하여 재물을 취득하는 것, 도박에 열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극은 이러한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가정을 어렵게 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경계하라는 것이다. ③사음계(邪婬戒)는 타인의 처나 미모의 부녀에 혹하여 음란패설하고 음행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④음식계(飮食戒)는 음식의 호사를 경계하고, 음주는 개인의 이성뿐 아니라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과도함을 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음주계와 동일하며, 이슬람교 또는 기독교에서와 같이 술을 금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어지러울 정도로 마시는 것은 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⑤망어계(妄語戒)는 기망(欺妄), 위만(僞瞞), 과부(誇負), 중상(中傷) 등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대조규(四大調規)는 4개의 도덕률로 덕을 쌓고 행하는 것으로써, 유순(柔順), 굉량(宏量), 예절, 청렴, 멸사(滅私) 등의 사회도덕의 규준을 강조하고 있다. 이외에 신자의 혼인에 관한 규정, 세례(洗禮), 취학의 의무, 상부상조와 공동묘지의 설치, 장송에 관한 규율, 공물의 선정, 복장규정, 교구민 중에 이재민이 발생한 경우의 부조에 대한 규정, 신앙 및 신율에 배반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과 반종교적인 인쇄물의 출판 금지, 비단 옷 착용을 자제할 것, 교단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자는 지도자들의 논의에 의해 파문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기본 계율 가운데 특히, 상호부조를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박애, 평등의 정신을 실천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까오다이교 총본산 떠이닌의 까오다이교 대성전

한편 까오다이교의 기본 계율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떠이닌(Tay Ninh) 성지는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의 총본산으로 떠이닌(Tây Ninh)시에서 약 4km 떨어진 호아탄(Hòa Thành) 지역에 있다. 매년 수백만 명의 여행객들과 순례자들이 이 곳을 방문하는 데 약 3백만㎡ 규모의 대지에 까오다이 중앙 사원, 탑, 교단 운영에 필요한 부대 시설 등 대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단지 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중앙 대사원(대성당으로 호칭)은 천주교 성당의 양식을 동양화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1939년부터 까오다이교 신자들의 헌금과 노력봉사로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자재가 부족하였고, 프랑스 당국의 방해로 사원의 절반이 건설되었을 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면서 결국은 재건하여 오늘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중앙 대사원 기둥마다 보이는 용(龍) 조각은 궁궐식 건축 양식을 보이고, 지붕 여기저기에 작은 불상들은 불교 사찰 건축 양식으로 외양만으로도 종교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떠이닌성 까오다이교 총본산 건물

까오다이교 성지에는 모두 12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각 출입문에는 신성한 4가지 영(靈)(청룡, 백호, 주작, 현무)과 연(蓮)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정문이 가장 큰 문으로서 두 용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장식되어 있다. 까오다이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방문객들도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밖에 두어야 한다. 한편 방문자들은 대성당의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양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남자는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여자는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 대사원 사방의 벽면과 천정에는 “까오다이”, 즉 까오다이교의 대표적 표상인 “천안(天眼, 까오다이교 최고신을 상징하는 삼각형의 눈)”이 그려져 있다. “천안”은 구름 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을 형상화한 것으로 “천안”이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내려다보고 있으니 신율(神律)을 어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까오다이교 표상인 “천안”이 제단의 정면, 본당 유리창마다 그려져 있다. “천안”은 사람의 깊은 내면을 투시하고, 영혼을 선도한다고 믿는다.

까오다이교의 상징인 신의 왼쪽 눈(좌), 세 성인과 신성한 언약(우), 출처: wikipedia

또 본당의 태극등 앞에는 4층의 단이 있는데, 최상단에는 불교의 석가모니, 제2단 전면에는 신의 측근자 중의 제1인자로 숭배하는 이태백, 그 우측에는 노자, 그 좌측에는 공자가 모셔져 있다. 제3단의 정면에는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그 우측에는 관음보살, 좌측에는 중국의 무신(武神)인 관성제군(關聖帝君) 곧 관우가 있다. 제4단에는 도교의 신으로 추앙받는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자 천하를 통일한 왕으로 모시는 강태공(姜太公)이 있다.

까오다이교 예배당 내부는 남녀의 자리가 좌우로 철저히 분리돼 있을 뿐더러 출입문조차 다르다. 제단이 자리한 곳이 높고 입구 쪽으로 갈수록 점차 계단식으로 낮아지는데, 지도자와 평신도를 구분 짓기 위해서다. 까오다이교 예배에서 남녀의 구분이 뚜렷하고 위계가 엄격한 것은 유교적인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신자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남자들은 따로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채 앉아서 예배를 본다. 맨 앞에 독특한 모자와 함께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옷을 입고 순서대로 앉아있는 이들이 지도자들인데, 이들은 교황과 추기경, 주교 등으로 불린다. 가톨릭을 차용한 흔적이다.

까오다이교는 베트남의 역사를 품은 가장 베트남적인 종교

이제 베트남 역사를 잠시 일갈하면서 까오다이교 종교 이해를 마무리해보겠다. 베트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은 중국 지배와 독립 투쟁 시기(B. C 111년-A.D 939년), 베트남 독립 왕조 시대(939년-1858년), 프랑스 식민지 시대와 독립 투쟁 시기(1858년-1954년), 일본의 점령시기(1940년-1945년), 베트남 남북 분단과 미국과의 투쟁시기(1955년-1975년)를 거쳐 현재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역사상 최대의 영토, 프랑스 미국과 전쟁에서 이긴 승리의 독립국가로 인도차이나지역에서 패권국가로 우뚝 서있다.

이런 베트남. 그 토양과 역사에서 형성되어 온 까오다이교. 까오다이교는 베트남의 내면 속, 마치 베트남인의 속살을 보는 듯했다. 상처투성이 이지만 그 상처를 잘 봉합하여 투쟁을 통해 승리한 베트남인의 자긍심을 볼 수 있었다. 과거와 당대 동서양의 종교 문화를 일반 베트남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토착 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가톨릭 까지 채용하여 베트남적인 자부심으로 외세 저항의 민족주의와 독립을 지향했던 까오다이교는 베트남 현대사의 굴곡과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외양만으로 조잡하다고 느꼈던 편견을 버리고, 비빔밥처럼 온갖 종교를 섞어놓았다는 단순한 평가도 내려놓으면서 이제부터 베트남 까오다이교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의 종교 문화를 가슴으로 이해하는 베트남 선교사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까오다이교는 베트남의 종교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종교이면서 동시에 가장 베트남스러운 베트남다운 종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까오다이교는 ‘모든 것을 융합해서 모든 것이 되고자 했었던 까오다이교’ 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모든 것을 총합한다고 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의 실재가 드러내는 것은 아니기에, 까오다이교를 통해서 본 베트남과 베트남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와 전도, 복음적인 삶이 얼마나 요원하며 더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베트남의 암영(暗影, 어두운 그림자) 이기도 하다.특징에 해당된다..   글| 정보애(SIReNer)

위 자료의 저작권은 UPMA에 있으므로, 인용하여 사용하실 경우 반드시 출처를 남겨 주십시오. 

  1. 떠이닌 성은 베트남 최대 도시인 호찌민(Ho Chi Minh)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있으며 철도로 남부 지역을 포함한 베트남 각지의 주요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다. 성도(省都)는 떠이닌(Tây Ninh)이고, 떠이닌성(Tỉnh Tây Ninh)의 인구는 989,800명에 면적은 4,028 km2이다. 이곳은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면서 까오다이교 지도자였던 찐민테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과거 크메르제국 때는 라웅 담레이(Raung Damrey)라고 불리웠는데, 1770년에 베트남이 점령한 후 떠이닌으로 개명하였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2. 베트남 국내와 해외 관광객들이 떠이닌 관광을 할 때 대표적 관광 명소 투어에 반드시 포함되는 곳이 바로 까오다이교 본부 본당 투어이다. 베트남어로 “토아 탄 타이 닌((Tòa Thánh Tây Ninh)” 위대한 신성한 성전을 방문 참관한다. 영어로 “Tay Ninh Holy See”라고도 하는데 베트남 남동부 타이닌(Tây Ninh)성에 있는 까오다이 본 성전(Cao Dai Holy See) 단지를 뜻하는 말이다. 베트남 까오다이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원이다.출처: 영어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Divine_Temple
  3. 영어 위키피디아, 베트남의 종교 까오다이교 자료
  4. 안경환, “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19 베트남 독립운동의 선봉, 5합이 까오다이교, 『아주뉴스』, 2020.08.18.
  5. Janet Alison Hoskins, What Are Vietnam’s Indigenous Religions?, pp. 3-6, CSEAS NEWSLETTER(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 Kyoto University), No. 64, Autumn. 2011.
  6. 안경환. 앞의 글.
  7. 영어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Cao_Dai_diasp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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